대한민국의 수명을 대략 500년 정도로 예상해보면 한국 사회는 시기적으로 중학교 1학년인 만 12세에 해당한다. 딱 사춘기가 시작할 때다.
✔ 프롤로그
한국 사회에서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 합리성은 오히려 지루하고 유도리가 없는 고지식함으로 여겨졌다.
행복한 지옥과 지루한 천국의 대비를 생각해봤을 때, 그럼 느려져서 지루해지기만 하면 천국은 가까워지는 것일까? 그건 아니다. 느린 사회가 천국이 되려면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도 같이 느려져야 한다. 그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단기간 안에 인생역전을 꿈꾸지 않으며, 물질적 성공에 매달리지 않고, 성공이나 성장 이외의 개인적 가치를 추구하고, 원칙이나 규범에 의해서 자신이 손해 보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소위 이미 선진국이라고 하는 사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 `주체성` : `내가 한턱 쏜다`에 숨겨진 본심
- 근래에 와서 한국인들은 스스로 만족되지 않는 주체성을 채울 방법을 찾은 것 같다. 바로 떼로 몰려다니는 것이다. 마치 리니지의 내복단 혁명과 같은 힘없고 약한 20만의 사람들이 모여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이 꼭 인터넷 세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런 행위가 한국인들의 무엇을 만족시켜주느냐를 보면 바로 나온다. 그것은 내가 뭔가 바꾸고 있다는, 나의 영향력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주체성이 만족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나 혼자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수만 명이 모여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느낌은 한국인에게 유달리 중요하다. 바꿔 말하면 한국 사회가 이런 한국인의 주체성을 현실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만족시켜줄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떼로 몰려다니는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 현재 한국 사회가 인식해야 하는 갑을관계의 본질은 갑을관계 자체가 아니라 `갑질`의 문제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갑질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한국사회와 특히 언론은 마치 갑을관계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담론을 이끌어가고, 갑을관계를 없애야 하는 악의 축인 것처럼 논의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갑을관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서비스 산업의 중요도가 높은 현재와 같은 산업구조에서는 맞지도 않는 얘기다. 서비스업은 갑과 을이 바로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 한국은 집단의 목표를 우선시하는 경향성을 지닌 집단주의에 해당한다. 여기에 사회적 관계에서 평등한 관계보다는 위계적 관계를 더 우선시하고 선호한다고 밝혀졌다. 즉, 자신이 속한 내집단에 단지 더 애정을 갖는 게 아니라, 내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서 더 우월해야 한다는 심리인 것이다. 내집단 내에서도 같은 구성원들끼리 평등한 것보다는 위계적으로 구성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 한국의 많은 기성세대들의 존재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자식, 누구의 상사, 누구의 친구 등과 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런 관계적 존재감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동시에 좌절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갑질은 바로 그런 존재감의 상실에서 비롯된 분노가 원인이었다. 결국 존재감이 약한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위협받을 때, 대개 갑질을 통해 그 관계를 갑을관계로 규정하고,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매우 불쌍한 방어적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과의 관계가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서 찾을 수 있게 될 때, 한국 사회의 갑질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 법률체계나 법규정들은 그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합의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법률내용은 일반인의 상식과 일치할 수밖에 없다. 일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일반의 상식에 근거하고 있고, 사회적 합의에 부합해야 한다. 하지만 사법판단의 본질은 그 결과, 즉 판결이 얼마나 진실과 상식에 부합하느냐에 있지 않고, 그 판단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법판단은 상식과 다를 수도 있다.
✔ ‘가족확장성‘ : 한국형 국가모델, 큰아버지와 조카?
- 특히 한국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못한 사람들과 다른 여러 가지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한 가지 공통점도 있다. 바로 무지하게 독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는 뭐든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 남들보다 앞서가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독해야 한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다른 수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유혹을 이겨내며, 다른 중요한 가치있는 것들을 희생시키며 살아야만 흔히 성공했다고 간주되는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다.
- 이미 수십년 전부터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이 완전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순진한 과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원하는 만큼만 정보를 처리하는 편향된 전략가에 더 가깝다고 밝혀왔다. 하지만 현실 속의 우리의 모습은 불완전함으로 넘쳐난다.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데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선하고 바른 선택을 하지도 않는다. 일부 주어진 정보에 너무나도 쉽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정보가 주어지기도 전에 이미 우리 마음속에는 믿고 싶어하는 것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사고과정은 우리의 기대만큼 그리 합리적이지도 객관적이지 않다고 얘기한다.
-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은 단지 행정부의 수반이 아니다. 가족확장적 한국인들에게 대통령은 곧 어버이와 같은 존재처럼 여겨진다. 군사부일체의 의미가 아직까지 한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건 국민이 대통령을 대할 때만 그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도 국민을 대할 때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 ‘관계주의‘ : 나쁜 놈만 잡으면 끝인 사람들
- 과거 사건에 대한 분노는 결국 미래를 대비한 준비도 된다. 그래서 인간에게 분노는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을 지키고 또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다만 이 분노가 적절한 대상을 찾아 적절히 표출되고 그로 인해 다시는 분노를 경험하지 않게끔 기여한다면, 우리는 분노를 통해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관계주의적 심리특성은 분노를 사람에게 풀어버리고 너무 쉽게 해소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분노는 나쁜 놈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그놈이 충분히 처벌받는 것을 보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생각한다.
- 일본인은 수직적, 집단주의적이다. 이런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정체감이 극대화되는 순간이 오면 자신의 개인적 정체감이 쉽게 약화될 수 있다. 즉, 거대한 집단 속에서 자신의 존재는 의미 없는 작은 부속이 된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기준보다는 조직의 논리와 상부의 명령만을 충실하게 따르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이 긍정적으로 발휘되면 대를 잇는 장인정신, 집단에 대한 충성심 발현으로 이어지지만, 자칫하면 군국주의 시절 맹목적으로 저질렀던 만행처럼 그르칠 수 있다.
✔ ‘심정중심주의‘ : 한국인의 진심 확인법
- 산 경험에서 나오는 진실된 믿음과 충고는 오히려 귀납법의 오류에 취약하다. 지금의 노력도 과거의 노력만큼이나 효과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상황에서, ˝너희가 고생을 해봤어야지.˝ 또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은 무의미에 가깝다. 과연 오늘날 성공과 실패에서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거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도 똑같이 남에게 노력을 강요할 아무 근거가 없다. 명심하자.
✔ ‘복합유연성‘ : 한국인이 유독 포기를 싫어하는 이유
- 현실에서는 포기하는 것이 훨씬 더 크고 많다. 그래서 원래 선택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택의 과정에서 가지는 것에만 목숨을 건다. 그러니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원래 포기를 본질로 하는 선택은 한국인들의 심리적 특성인 복합유연성에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항상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완전히 패하는 결과보다는, ‘이겨도 너무 이기지 마라.‘ 는 식의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 공부라는 춤을 추고 싶어하는 청소년에게는 그에 맞는 공부하는 음악을 주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칭찬할 일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청소년을 채찍이나 심지어 칭찬으로라도 억지로 공부춤을 추게 하지 말자. 그들은 공부를 포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대신 다른 춤을 출 권리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현재의 우리 교육은 학생이 원하는, 바로 그 다양한 음악을 제공해줄 의무가 있다.
✔ ‘불확실성 회피‘ : 안 보일까 봐 불안한 사람들
- 건강을 잃지 않기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은 ˝예방적 동기˝에 기반한다. 반면, 식스팩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은 ˝향상적 동기˝를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동기의 차이를 ˝조절적 초점˝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향상적 초점을 가진 사람들은 더 나은 상황, 즉 더 긍정적인 뭔가가 있는 상황을 추구하는 보니 보상에 더 민감해진다. 그래서 보통 공격적이고 위험감수형 결정을 하며, 확장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뭔가를 더 해보려고 하는 적극성이 뛰어나며,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과제에 잘 어울린다.
반대로 예방적 초점을 가진 사람들은 더 나쁜 상황,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다 보니 소극적이고 위험회피형 결정이 하고, 축소적이고 회피적 사고를 하며, 단기적이고 즉각적이면서 완결적인 과제에 잘 어울린다.
이런 예방적 동기가 강한 사회에서는 당연히 처벌에 더 민감하고, 그게 또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잘 먹힌다. 그러니 보상보다는 처벌을 이용한 사회적 제도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만연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