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철학 - 자유주의를 넘어 동서양이분법을 넘어
장은주 지음 / 새물결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에 배웠던 동도서기(東道西器)’에는 엄청난 오류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년기 시절부터 자리잡아왔던 가치관이 흔들렸다. 그 가치관이라 함은 서구에서 유입된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문화의 한계를 우리 전통의 공동체주의적 지향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 정도로 일축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러한 가치관, 즉 탈식민적 시도(문화 상대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식민화는 식민화된 대상의 문화적 언어 그 자체를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책 속의 예시를 빌려보면, 자본주의로 식민화된 문화는 자기 주장을 펼치고자 할 때, 자본주의의 전제라 할 수 있는 경쟁논리와 능력이데올로기로 자신들 전통의 우월성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헤게모니 싸움에서 져, 3세계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빠져나갈 수 없는 원형감옥 파놉티콘에 입성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책을 읽는 중간중간 몸서리가 쳐졌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하버마스라는 학자의 절차적 보편주의마이클 월처해석학적 맥락주의를 도구로 이용하였다. 하버마스는 전통들마다 겹쳐지는 보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일정한 형식의 보편적인 잣대를 제시하였고, 월처는 구체적인 문화와 맥락 속에서 지배적인 이해방식과는 다른 차원의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 전통의 근본적인 자기비판을 제안했다.

 

두 이론은 공통적으로 구체적인 문화와 맥락에서 비판이 이루어져야 함을 명시하며, 전통 스스로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절차적 보편주의와 해석학적 맥락주의를 참고해 저자는, 전통은 과거의 실천과 행위를 응축한 용어이기도 하지만, 현재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이라고 설명한다. 앞의 두 이론가들처럼 저자 또한 전통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통 스스로 철저한 비판과 반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식민지 경험에 따른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자아도취적으로 전통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비판과 반성을 통해 실천적·도덕적 보편성을 실현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보다 훨씬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의 생각에 무모하게도 회의감이 들었다. 문화적 상대주의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 했던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은 충격적이었지만, 사실 신선했다. 문화상대주의 (무의식적 세뇌를 통한)옹호론자에서 (학습과 이성을 통한)비판자로 순식간에 옷을 갈아 입은 나는 문득 하버마스와 월처, 그리고 이 책의 저자까지 비판하고 싶어졌다.

 

우선, 하버마스가 제시한 보편적인 잣대가 가장 먼저 눈에 거슬렸다. 보편성을 가장한 합리성과 이성은 서양의 가치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문화)에게 좋고 정의로운 것은 아닐 수 있으며, 월처가 주장한 해석이라는 행위 또한 헤게모니적 문화의 입장에서 해석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전통의 비판과 반성을 통해 도덕적 보편성을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보편성이라는 단어 자체에 특정 색이 입혀진 상황에서의 주장인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얼마 전에, 민족주의의 허구에 대한 책을 읽고 놀란 가슴을 다독였던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오늘이 두 번째였던 것 같다. 문화적 상대주의를 너무 믿고 있었던 것 같아 도리어 배신감까지 들 정도이다. 리뷰를 마쳐갈 즈음이 되니, 개인적인 배신감에. 당대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학자들의 의견들 모두를 회의적으로 보고 싶어서 너무 심하게 오독(誤讀)을 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당연하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이 뒤집어 질 때, 노곤했던 내 심장이 쫄깃해지는 것 같은 짜릿함은 잊을 수 없을만큼 좋다. 이 맛에 이렇게 어려운 인문·철학서를, 몇날 밤을 새는 고생을 해가며 읽는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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