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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많은 일본 신들의 요구에 일일이 부응하려다 심히 성마르고 소심한 사람이 되었다가 하나의 신만 인정하는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유일신 신앙은 여러 신들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에 기독교는 하나의 진리가 가져다 주는 구원의 자유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그런 기독교라도 권력과 결탁하면 부패를 면치 못한다. 오히려 절대자 유일신을 등에 업고 배타적 독선으로 더 큰 폭압과 폭력을 행사하기 쉽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기독교의 배타성을 옹호하고 해명하는 논거로 언급되는 제 1 계명이다. 그러나 시내산 율법이 주어진 출애굽 이야기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계명에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이 계명을 기독교의 배타성을 재가하는 근거로 삼는 순간,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2 계명과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3계명을 범하는 위험을 초래한다.

 

모세 자신이 출생과 동시에 죽음의 위협 앞에 놓였고, 남자 아기들을 강물에 빠뜨려 죽였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피지배민의 고통이 얼마큼이었던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억압받는 피지배자 이스라엘 민족의 구출은 이집트의 압제자 및 그들 지배 이념에 봉사한 신들에 대한 처벌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집트와 파라오에게 내려진 10가지 재앙이 이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10가지 재앙은 폭압과 학정을 재가한 당시의 지역신들, 부족신들을 향한 야훼 의 처벌이었다.

 

1계명에 나타난 ‘나’, ‘야훼’는 고통받는 약자의 하나님이지, 지배자와 결탁한 부족신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사회적으로 해방된 소수 약자 이스라엘이 국가를 이룬 후, 그 안에 귀속된 선지자들은 야훼의 본래 이상을 구현하기를 번번히 실패한다. 미가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국가 내에서 왕과 결탁한 거짓 선지자들이 왕의 학정을 야훼의 이름으로 재가하던 일이나(왕하 22:6)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고 자유케 했던 남녀 노비를 마음이 바뀌어 다시 노예를 삼은 유다를 향해 당시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침묵하였다.(렘 34:19) 그런 행위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말씀하신다.(렘 34: 16)

  

 

 

구약의 왕의 정책을 선지자들이 재가해 주었듯, 국가를 교회가 승인한 것이 콘스탄틴 주의다.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결합으로 출발한 콘스탄틴 주의가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대체했을 때 게르만족의 이익에 신적 사명의 의미를 부여하였다.(91쪽) 이러한 태도는 이후에 제국주의를 축복했던 것과 일관된 방식으로 국가주의를 축복하였다.(91쪽) 특정 집단의 이기주의가 역사의 의미의 담지자라 인정되면, 그 국가나 집단의 목적은 신에 의해 뒷받침된다.(91쪽) 공존의 불가능을 전제로 무조건적인 항복을 목표로 삼는 십자군 전쟁이나 주도권과 이권을 위한 유럽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30년 전쟁, 또 오늘날까지 기독교를 표방한 특정 이데올로기적 전쟁들은 신의 재가를 받은 콘스탄틴적 전쟁들이다.(96쪽) 전쟁의 승자가 상대편을 지배할 것이다.

 

 

애초에 압제받는 자들의 하나님이 이번에는 폭력을 행사하는 압제하는 자, 압제하려는 자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이는 성서의 하나님을 특정 소수인의 지배 이념과 이기주의에 봉사하는 지역신, 부족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출애굽 당시의 지배자들과 결탁한 이데올로기적 신들을 벌하신 하나님을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신으로 변질시켰다. 이는 명백히 3계명이 금지시킨,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짓이다.

 

그런 이데올로기적 신들은 지금껏 민족주의나 안보의 이름으로, 혹은 번영을 약속하며 여전히 우리 옆에 가까이 우리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자기에게 절하기만 하면 세상 만국의 영화와 권력을 부여하겠다고, 그리스도에 한 바로 그 속삭임으로. 하나님이 주신 윤리적 계명을 다소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신들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고 성공을 보장해 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고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

 

광야에 세운 금송아지를 보고 “이것이 너희를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해낸 야훼다” 라는 그 옛날 외침이 특정 집단의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신, 혹은 이데올기적 신들을 향하여 “이것이 믿기만 하면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는 하나님이다” 라는 외침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그런 완전히 이교도적인 관점으로의 복귀를 요더는 ‘콘스탄틴적 이단’ 이라 명명한다(94쪽). 콘스탄틴 이후 국가의 후광을 받은 교회는 절대와 배타의 모습을 띠며 인간의 이기심에 침식당했다. 콘스탄틴적 이단은 현재의 절망에 도전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아직 보이지 않는 목표에 따라 현재의 위치를 정의하는, 이른바 ‘종말론’을 포기한 교회와 국가의 결탁이다(77쪽). 십자가의 방식으로 부활을 사랑하는 대신 민족주의, 실용주의라는 국가의 계획을 지지하였고 그 대가로 국가의 후원을 받으면서 세상에 종주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야훼의 이름을 보존하느냐 마느냐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기독교의 배타성은 간조 선생의 개인적 구원이나 출애굽적 상황의 사회적 해방의 능력은 커녕 천박한 이교요, 그리스도를 구주라 부르는 소수 집단만의 수호신과 지역신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야말로 이단이요 이교가 아닐 수 없다.

 

요더는 명백한 종말론적 관점만이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효과적인 행동의 선택을 허용한다고 주장한다.(94쪽) 그 종말론의 윤리는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산상수훈에 농밀하게 제시되었다. 인류애의 보편적 윤리를 능가하는 윤리,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그 나라 백성의 제자됨의 윤리, 그러므로써 산 위의 동네임을 증언하는 윤리다. 그 안에 십자가가 녹아 있다. 국가에 대해서는, 평화에 이바지하고 사회의 결속력을 유지하여 복음의 누룩이 교회를 세울 수 있고 옛 시대를 보다 관용있는 사회로 만드는 것이 국가의 의무임을 고취시켜야 한다.

 

힘을 추구하는 기독교는 십자가와 대척점에 있다. 그런 교회는 종말론을 포기한 교회요 현실 논리에 굴복한 집단이다. 야훼 하나님을 소수 무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삼으면서 굳이 제 1의 배타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기득권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호와를 부족신으로 전락시킨 행위요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다. 그것은 아무리 정통 기독교의 외양을 띈다해도 권력의 우상 앞에 굴복한 요더의 표현대로 콘스탄틴적 이교요 이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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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많은 일본 신들의 요구에 일일이 부응하려다 심히 성마르고 소심한 사람이 되었다가 하나의 신만 인정하는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유일신 신앙은 여러 신들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에 기독교는 하나의 진리가 가져다 주는 구원의 자유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그런 기독교라도 권력과 결탁하면 부패를 면치 못한다. 오히려 절대자 유일신을 등에 업고 배타적 독선으로 더 큰 폭압과 폭력을 행사하기 쉽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기독교의 배타성을 옹호하고 해명하는 논거로 언급되는 제 1 계명이다. 그러나 시내산 율법이 주어진 출애굽 이야기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계명에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이 계명을 기독교의 배타성을 재가하는 근거로 삼는 순간,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2 계명과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3계명을 범하는 위험을 초래한다.

 

모세 자신이 출생과 동시에 죽음의 위협 앞에 놓였고, 남자 아기들을 강물에 빠뜨려 죽였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피지배민의 고통이 얼마큼이었던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억압받는 피지배자 이스라엘 민족의 구출은 이집트의 압제자 및 그들 지배 이념에 봉사한 신들에 대한 처벌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집트와 파라오에게 내려진 10가지 재앙이 이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10가지 재앙은 폭압과 학정을 재가한 당시의 지역신들, 부족신들을 향한 야훼 의 처벌이었다.

 

1계명에 나타난 ‘나’, ‘야훼’는 고통받는 약자의 하나님이지, 지배자와 결탁한 부족신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사회적으로 해방된 소수 약자 이스라엘이 국가를 이룬 후, 그 안에 귀속된 선지자들은 야훼의 본래 이상을 구현하기를 번번히 실패한다. 미가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국가 내에서 왕과 결탁한 거짓 선지자들이 왕의 학정을 야훼의 이름으로 재가하던 일이나(왕하 22:6)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고 자유케 했던 남녀 노비를 마음이 바뀌어 다시 노예를 삼은 유다를 향해 당시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침묵하였다.(렘 34:19) 그런 행위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말씀하신다.(렘 34: 16)

  

 

 

구약의 왕의 정책을 선지자들이 재가해 주었듯, 국가를 교회가 승인한 것이 콘스탄틴 주의다.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결합으로 출발한 콘스탄틴 주의가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대체했을 때 게르만족의 이익에 신적 사명의 의미를 부여하였다.(91쪽) 이러한 태도는 이후에 제국주의를 축복했던 것과 일관된 방식으로 국가주의를 축복하였다.(91쪽) 특정 집단의 이기주의가 역사의 의미의 담지자라 인정되면, 그 국가나 집단의 목적은 신에 의해 뒷받침된다.(91쪽) 공존의 불가능을 전제로 무조건적인 항복을 목표로 삼는 십자군 전쟁이나 주도권과 이권을 위한 유럽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30년 전쟁, 또 오늘날까지 기독교를 표방한 특정 이데올로기적 전쟁들은 신의 재가를 받은 콘스탄틴적 전쟁들이다.(96쪽) 전쟁의 승자가 상대편을 지배할 것이다.

 

 

애초에 압제받는 자들의 하나님이 이번에는 폭력을 행사하는 압제하는 자, 압제하려는 자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이는 성서의 하나님을 특정 소수인의 지배 이념과 이기주의에 봉사하는 지역신, 부족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출애굽 당시의 지배자들과 결탁한 이데올로기적 신들을 벌하신 하나님을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신으로 변질시켰다. 이는 명백히 3계명이 금지시킨,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짓이다.

 

그런 이데올로기적 신들은 지금껏 민족주의나 안보의 이름으로, 혹은 번영을 약속하며 여전히 우리 옆에 가까이 우리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자기에게 절하기만 하면 세상 만국의 영화와 권력을 부여하겠다고, 그리스도에 한 바로 그 속삭임으로. 하나님이 주신 윤리적 계명을 다소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신들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고 성공을 보장해 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고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

 

광야에 세운 금송아지를 보고 “이것이 너희를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해낸 야훼다” 라는 그 옛날 외침이 특정 집단의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신, 혹은 이데올기적 신들을 향하여 “이것이 믿기만 하면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는 하나님이다” 라는 외침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그런 완전히 이교도적인 관점으로의 복귀를 요더는 ‘콘스탄틴적 이단’ 이라 명명한다(94쪽). 콘스탄틴 이후 국가의 후광을 받은 교회는 절대와 배타의 모습을 띠며 인간의 이기심에 침식당했다. 콘스탄틴적 이단은 현재의 절망에 도전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아직 보이지 않는 목표에 따라 현재의 위치를 정의하는, 이른바 ‘종말론’을 포기한 교회와 국가의 결탁이다(77쪽). 십자가의 방식으로 부활을 사랑하는 대신 민족주의, 실용주의라는 국가의 계획을 지지하였고 그 대가로 국가의 후원을 받으면서 세상에 종주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야훼의 이름을 보존하느냐 마느냐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기독교의 배타성은 간조 선생의 개인적 구원이나 출애굽적 상황의 사회적 해방의 능력은 커녕 천박한 이교요, 그리스도를 구주라 부르는 소수 집단만의 수호신과 지역신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야말로 이단이요 이교가 아닐 수 없다.

 

요더는 명백한 종말론적 관점만이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효과적인 행동의 선택을 허용한다고 주장한다.(94쪽) 그 종말론의 윤리는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산상수훈에 농밀하게 제시되었다. 인류애의 보편적 윤리를 능가하는 윤리,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그 나라 백성의 제자됨의 윤리, 그러므로써 산 위의 동네임을 증언하는 윤리다. 그 안에 십자가가 녹아 있다. 국가에 대해서는, 평화에 이바지하고 사회의 결속력을 유지하여 복음의 누룩이 교회를 세울 수 있고 옛 시대를 보다 관용있는 사회로 만드는 것이 국가의 의무임을 고취시켜야 한다.

 

힘을 추구하는 기독교는 십자가와 대척점에 있다. 그런 교회는 종말론을 포기한 교회요 현실 논리에 굴복한 집단이다. 야훼 하나님을 소수 무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삼으면서 굳이 제 1의 배타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기득권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호와를 부족신으로 전락시킨 행위요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다. 그것은 아무리 정통 기독교의 외양을 띈다해도 권력의 우상 앞에 굴복한 요더의 표현대로 콘스탄틴적 이교요 이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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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김수정 지음 / 달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한 30대 남자 환자가 진료실에 방문하였다. 타병원에서 수술한 뒤에도 여전히 통증이 가시지 않는 상태였다. 그가 가지고 온 척추 사진을 판독해보니, 수술받은 부위 이외의 다른 곳에 진짜 병변이 확인되었다. 환자에게 설명한 후 재수술에 들어갔고 환자는 쾌차하여 퇴원하였다. 앞 병원에서 병변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사진이 너무 희미하였던 까닭이었다. 그렇더라도 그런 환자들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미리 의심했더라면 놓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병원은 전에 내가 한번 지원 의사를 밝혔던 곳이다. 후에 내게 연락이 오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시골에 있었던 탓일 것이다. 시골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가 도시의 병원에서 과연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느냐, 는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시골에 근무하는 의사들 중에 수술적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분들도 있겠지만, 직접 만나서 어떤 경로로 시골에 갔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들어보았다면 나에 대해 달리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내가 그 병원에 취직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편견과 색안경을 벗겨내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오죽했으면 편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그토록 죽기살기로 애쓸까.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아주 잠깐 감동하고, 교화될 수는 있지만, 깊게 뿌리내린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책이되는  Living library가 주는 메시지는 ‘서로의 입장이 되어 서로를 이해하는것’. ‘서로를 향한 색안경을 벗고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와 소통을 통해 잘 알지 못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고정관념을 줄이자는 의도이다. 

 

세상에는 생김새 만큼이나 생각도 다양하다. 자란온 환경도 다르고 삶의 방식이나 추구하는 바가 제각기 다르다. 한 사람을 이루는 요소는 국가나 인종, 종교와 같은 일반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잣대보다 훨씬 더 많은 중요한 특징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런 그들에게 내 잣대,  내 방식만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나 진배없다.

 

편견을 버려야 한다. 편견을 버리려면 나의 세상을 넓히는 방법밖에는 없다. 다른 사람을 나에 맞추어 바꾸기는 어렵다. 차라리 내가 바뀌면 된다. 그냥 무턱대고 바꾸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절박했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그의 깊은 속 마음을 알아낸 후에 바뀔 필요가 있고 바뀌어야 한다면 그러자는 뜻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 수 있다. 비로서 모두가 천편 일률적으로 추구하는 힘에 대한 숭배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우리는 힘으로 표상되는 소유나 지위나 학벌의 더 높은 순위를 얻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바치고 있다. 그것에 몰두한 만큼 우리의 생각이 그 쪽으로 경도된다. 바로 편견과 선입관이 만들어지는 메카니즘이다. 그러는 사이, 정작 중요한 것을 잃고 말았다. 함께 살아가며 행복의 단초를 이루는 이해와 배려와 신뢰다.

 

우리 나라가 단일 민족 국가임을 내세워 국난 때마다 일치 단결하여 어려움을 극복했던 과거를 자랑하지만,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와 비교할 때 단점이 있다. 바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점이다. 흔히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강조해야할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인정하려들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우리 주위에는 드러내 놓고 자랑할 만한 성공의 표상은 없어도, 자기만의 꿈을 꾸고 그 안에서 여유와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모두가 그런 빼앗을 수 없는 자기만의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 꿈의 종류는 사람 수와 맞먹는다. ‘그 꿈이란 꼭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작은 깡통에 담긴 씨앗들처럼 언제나 자그마한 위로가 되는 법이다’.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는 모두들 안에 아름답게 가꾸어진 그들의 도전과 행복을 읽고서 내 안의 세계가 넓어지는 가슴 뭉클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예순 살에 가출하여 자신의 삶을 가꾸는 인생 도전기나 자신의 병마와의 투쟁이라는 처절한 고통을 겪으며 삶의 정수리에 올라 앉아있는 비밀을 알아버린 정신분열증 환자 이야기, 보수적인 우리 사회 뿐 아니라 개방적인 서구 사회조차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레즈비언'이나 '트렌스젠더'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연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가까이 바로 그 이웃들의 이야기다. 그들 모두를 향하여 무턱대고 박수칠 필요는 없으나, 여기까지 온 자체가 최선을 다한 인생의 징표이자, 처절한 투쟁을 통해 한 도달한 결론임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열거된 사람책 중에 종교를 거부하는 휴머니스트들에게는 특별히 기독교인으로서  변명 한마디 하고 싶다. 교회 역시 '편견'이란 단어를 매우 싫어하고, 각자에게 부여된 독특한 삶을 존경과 경의를 가지고 대하고자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남자건 여자건, 부유한 자건 가난한 자건, 장애가 있건 없건, 많이 배웠건 그렇지 않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삶의 정황에서 찾아낸 독특한 자신들의 얼굴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비춰져 있게 마련이다.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찾아낸 자신들의 얼굴은 고통을 통해 빚어진 얼굴이며 그 고통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의 재에서 피어난 자그마한 행복이 하나님의 통치로 빚어진 하늘나라와 그리 멀지 않다고 믿기에 다음번 사람 책에서는 진솔한 그리스도인 한 명쯤 갖다 놓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 아무런 편견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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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김수정 지음 / 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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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0대 남자 환자가 진료실에 방문하였다. 타병원에서 수술한 뒤에도 여전히 통증이 가시지 않는 상태였다. 그가 가지고 온 척추 사진을 판독해보니, 수술받은 부위 이외의 다른 곳에 진짜 병변이 확인되었다. 환자에게 설명한 후 재수술에 들어갔고 환자는 쾌차하여 퇴원하였다. 앞 병원에서 병변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사진이 너무 희미하였던 까닭이었다. 그렇더라도 그런 환자들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미리 의심했더라면 놓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병원은 전에 내가 한번 지원 의사를 밝혔던 곳이다. 후에 내게 연락이 오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시골에 있었던 탓일 것이다. 시골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가 도시의 병원에서 과연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느냐, 는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시골에 근무하는 의사들 중에 수술적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분들도 있겠지만, 직접 만나서 어떤 경로로 시골에 갔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들어보았다면 나에 대해 달리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내가 그 병원에 취직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편견과 색안경을 벗겨내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오죽했으면 편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그토록 죽기살기로 애쓸까.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아주 잠깐 감동하고, 교화될 수는 있지만, 깊게 뿌리내린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책이되는  Living library가 주는 메시지는 ‘서로의 입장이 되어 서로를 이해하는것’. ‘서로를 향한 색안경을 벗고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와 소통을 통해 잘 알지 못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고정관념을 줄이자는 의도이다. 

 

세상에는 생김새 만큼이나 생각도 다양하다. 자란온 환경도 다르고 삶의 방식이나 추구하는 바가 제각기 다르다. 한 사람을 이루는 요소는 국가나 인종, 종교와 같은 일반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잣대보다 훨씬 더 많은 중요한 특징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런 그들에게 내 잣대,  내 방식만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나 진배없다.

 

편견을 버려야 한다. 편견을 버리려면 나의 세상을 넓히는 방법밖에는 없다. 다른 사람을 나에 맞추어 바꾸기는 어렵다. 차라리 내가 바뀌면 된다. 그냥 무턱대고 바꾸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절박했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그의 깊은 속 마음을 알아낸 후에 바뀔 필요가 있고 바뀌어야 한다면 그러자는 뜻이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 수 있다. 비로서 모두가 천편 일률적으로 추구하는 힘에 대한 숭배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우리는 힘으로 표상되는 소유나 지위나 학벌의 더 높은 순위를 얻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바치고 있다. 그것에 몰두한 만큼 우리의 생각이 그 쪽으로 경도된다. 바로 편견과 선입관이 만들어지는 메카니즘이다. 그러는 사이, 정작 중요한 것을 잃고 말았다. 함께 살아가며 행복의 단초를 이루는 이해와 배려와 신뢰다.

 

우리 나라가 단일 민족 국가임을 내세워 국난 때마다 일치 단결하여 어려움을 극복했던 과거를 자랑하지만,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와 비교할 때 단점이 있다. 바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점이다. 흔히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강조해야할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인정하려들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우리 주위에는 드러내 놓고 자랑할 만한 성공의 표상은 없어도, 자기만의 꿈을 꾸고 그 안에서 여유와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모두가 그런 빼앗을 수 없는 자기만의 행복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 꿈의 종류는 사람 수와 맞먹는다. ‘그 꿈이란 꼭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작은 깡통에 담긴 씨앗들처럼 언제나 자그마한 위로가 되는 법이다’.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는 모두들 안에 아름답게 가꾸어진 그들의 도전과 행복을 읽고서 내 안의 세계가 넓어지는 가슴 뭉클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예순 살에 가출하여 자신의 삶을 가꾸는 인생 도전기나 자신의 병마와의 투쟁이라는 처절한 고통을 겪으며 삶의 정수리에 올라 앉아있는 비밀을 알아버린 정신분열증 환자 이야기, 보수적인 우리 사회 뿐 아니라 개방적인 서구 사회조차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레즈비언'이나 '트렌스젠더'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연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 가까이 바로 그 이웃들의 이야기다. 그들 모두를 향하여 무턱대고 박수칠 필요는 없으나, 여기까지 온 자체가 최선을 다한 인생의 징표이자, 처절한 투쟁을 통해 한 도달한 결론임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열거된 사람책 중에 종교를 거부하는 휴머니스트들에게는 특별히 기독교인으로서  변명 한마디 하고 싶다. 교회 역시 '편견'이란 단어를 매우 싫어하고, 각자에게 부여된 독특한 삶을 존경과 경의를 가지고 대하고자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남자건 여자건, 부유한 자건 가난한 자건, 장애가 있건 없건, 많이 배웠건 그렇지 않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삶의 정황에서 찾아낸 독특한 자신들의 얼굴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비춰져 있게 마련이다.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찾아낸 자신들의 얼굴은 고통을 통해 빚어진 얼굴이며 그 고통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의 재에서 피어난 자그마한 행복이 하나님의 통치로 빚어진 하늘나라와 그리 멀지 않다고 믿기에 다음번 사람 책에서는 진솔한 그리스도인 한 명쯤 갖다 놓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 아무런 편견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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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 책읽기의 저자가 이미지 개선을 시도하였다. 공격에서 공감으로. 책 제목도 공격적 책읽기에서 공감적 책읽기다. 허나 이름은 바꾸었지만 공격 본능이 도처에 깔려있다. 본능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가보다. 그러나 공격은 공감하기 위해서다. 저자의 말대로 공격하다 보면 공감하게 된다. 괴물과 싸우다보니 어느새 자신도 괴물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책과 싸우려, 책 구석구석 삼키다 어느새 책의 사람이 되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경험을 타인에게 전염시키고자 하였다. 해서 공감적 책 읽기 책의 부제는 책 권하는 책이며 책과 싸움 붙이는 책이다. 자기가 싸운 경험을 토대로 타인에게 책과 싸움을 붙인다. 그 경험이 옳다면 독자도 이리 저리 공격한 후에 곧 공감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목표는 성경과 싸우기 위해서다. 싸우기 위함은 당연 닮기 위함이다. 성경을 닮기 위해 먼저 성경을 안내하는 좋은 책과 싸울 필요가 있다. 그런 책들과 싸우려면 먼저 책의 아킬레스건을 알아야 한다. 저자가 짚어준 아킬레스건을 따라가다 보면 싸움이 한참 무르익고 어느새 책에 공감하게된다. 소개된 책은 모두 53권이다. 부지런한 독서광이라도 다 읽으려면 1년은 족히 걸린다. 미리 읽었던 책이 있으면 반가운 마음이 듦과 동시에 시간을 조금 단축할 수 있다. 다 읽은 후에 책에 공감되버린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공감은 곧 변화이다. 훌쩍 변해버린 자신을 상상해본다면 훨씬 구미가 당길 것이다. 만들어지고 키워진 사람, 바로 성서에 의해 만들어지고 독서에 의해 키워진 사람으로의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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