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찌무라 간조 선생이 많은 일본 신들의 요구에 일일이 부응하려다 심히 성마르고 소심한 사람이 되었다가 하나의 신만 인정하는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유일신 신앙은 여러 신들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에 기독교는 하나의 진리가 가져다 주는 구원의 자유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그런 기독교라도 권력과 결탁하면 부패를 면치 못한다. 오히려 절대자 유일신을 등에 업고 배타적 독선으로 더 큰 폭압과 폭력을 행사하기 쉽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기독교의 배타성을 옹호하고 해명하는 논거로 언급되는 제 1 계명이다. 그러나 시내산 율법이 주어진 출애굽 이야기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계명에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지하는 근거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이 계명을 기독교의 배타성을 재가하는 근거로 삼는 순간,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2 계명과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3계명을 범하는 위험을 초래한다.
모세 자신이 출생과 동시에 죽음의 위협 앞에 놓였고, 남자 아기들을 강물에 빠뜨려 죽였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피지배민의 고통이 얼마큼이었던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억압받는 피지배자 이스라엘 민족의 구출은 이집트의 압제자 및 그들 지배 이념에 봉사한 신들에 대한 처벌과 동시에 일어났다. 이집트와 파라오에게 내려진 10가지 재앙이 이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10가지 재앙은 폭압과 학정을 재가한 당시의 지역신들, 부족신들을 향한 야훼 의 처벌이었다.
1계명에 나타난 ‘나’, ‘야훼’는 고통받는 약자의 하나님이지, 지배자와 결탁한 부족신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사회적으로 해방된 소수 약자 이스라엘이 국가를 이룬 후, 그 안에 귀속된 선지자들은 야훼의 본래 이상을 구현하기를 번번히 실패한다. 미가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국가 내에서 왕과 결탁한 거짓 선지자들이 왕의 학정을 야훼의 이름으로 재가하던 일이나(왕하 22:6)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고 자유케 했던 남녀 노비를 마음이 바뀌어 다시 노예를 삼은 유다를 향해 당시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침묵하였다.(렘 34:19) 그런 행위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말씀하신다.(렘 34: 16)
구약의 왕의 정책을 선지자들이 재가해 주었듯, 국가를 교회가 승인한 것이 콘스탄틴 주의다.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결합으로 출발한 콘스탄틴 주의가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대체했을 때 게르만족의 이익에 신적 사명의 의미를 부여하였다.(91쪽) 이러한 태도는 이후에 제국주의를 축복했던 것과 일관된 방식으로 국가주의를 축복하였다.(91쪽) 특정 집단의 이기주의가 역사의 의미의 담지자라 인정되면, 그 국가나 집단의 목적은 신에 의해 뒷받침된다.(91쪽) 공존의 불가능을 전제로 무조건적인 항복을 목표로 삼는 십자군 전쟁이나 주도권과 이권을 위한 유럽의 가톨릭과 개신교의 30년 전쟁, 또 오늘날까지 기독교를 표방한 특정 이데올로기적 전쟁들은 신의 재가를 받은 콘스탄틴적 전쟁들이다.(96쪽) 전쟁의 승자가 상대편을 지배할 것이다.
애초에 압제받는 자들의 하나님이 이번에는 폭력을 행사하는 압제하는 자, 압제하려는 자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이는 성서의 하나님을 특정 소수인의 지배 이념과 이기주의에 봉사하는 지역신, 부족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출애굽 당시의 지배자들과 결탁한 이데올로기적 신들을 벌하신 하나님을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신으로 변질시켰다. 이는 명백히 3계명이 금지시킨,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짓이다.
그런 이데올로기적 신들은 지금껏 민족주의나 안보의 이름으로, 혹은 번영을 약속하며 여전히 우리 옆에 가까이 우리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친다. 자기에게 절하기만 하면 세상 만국의 영화와 권력을 부여하겠다고, 그리스도에 한 바로 그 속삭임으로. 하나님이 주신 윤리적 계명을 다소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신들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고 성공을 보장해 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고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
광야에 세운 금송아지를 보고 “이것이 너희를 이집트의 압제에서 구해낸 야훼다” 라는 그 옛날 외침이 특정 집단의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신, 혹은 이데올기적 신들을 향하여 “이것이 믿기만 하면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는 하나님이다” 라는 외침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그런 완전히 이교도적인 관점으로의 복귀를 요더는 ‘콘스탄틴적 이단’ 이라 명명한다(94쪽). 콘스탄틴 이후 국가의 후광을 받은 교회는 절대와 배타의 모습을 띠며 인간의 이기심에 침식당했다. 콘스탄틴적 이단은 현재의 절망에 도전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아직 보이지 않는 목표에 따라 현재의 위치를 정의하는, 이른바 ‘종말론’을 포기한 교회와 국가의 결탁이다(77쪽). 십자가의 방식으로 부활을 사랑하는 대신 민족주의, 실용주의라는 국가의 계획을 지지하였고 그 대가로 국가의 후원을 받으면서 세상에 종주권을 행사하려 하였다.
야훼의 이름을 보존하느냐 마느냐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기독교의 배타성은 간조 선생의 개인적 구원이나 출애굽적 상황의 사회적 해방의 능력은 커녕 천박한 이교요, 그리스도를 구주라 부르는 소수 집단만의 수호신과 지역신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야말로 이단이요 이교가 아닐 수 없다.
요더는 명백한 종말론적 관점만이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효과적인 행동의 선택을 허용한다고 주장한다.(94쪽) 그 종말론의 윤리는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산상수훈에 농밀하게 제시되었다. 인류애의 보편적 윤리를 능가하는 윤리,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그 나라 백성의 제자됨의 윤리, 그러므로써 산 위의 동네임을 증언하는 윤리다. 그 안에 십자가가 녹아 있다. 국가에 대해서는, 평화에 이바지하고 사회의 결속력을 유지하여 복음의 누룩이 교회를 세울 수 있고 옛 시대를 보다 관용있는 사회로 만드는 것이 국가의 의무임을 고취시켜야 한다.
힘을 추구하는 기독교는 십자가와 대척점에 있다. 그런 교회는 종말론을 포기한 교회요 현실 논리에 굴복한 집단이다. 야훼 하나님을 소수 무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삼으면서 굳이 제 1의 배타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기득권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호와를 부족신으로 전락시킨 행위요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위다. 그것은 아무리 정통 기독교의 외양을 띈다해도 권력의 우상 앞에 굴복한 요더의 표현대로 콘스탄틴적 이교요 이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