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와 모라
김선재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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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떤 소설은 뜨겁게 읽히고, 어떤 소설은 단숨에 시원하게 읽힌다. 그리고 어떤 소설은 가만히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나눠 뱉어야 읽힌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읽다보면 조용 조용 인물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소설, '노라와 모라'가 바로 그렇다. 노라와 모라 소설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쓸쓸하고 외롭다. 인물들과 함께 현실이라는 살얼음판을 딛으며 마음으로 읽어나간 소설이다.

주인공 노라와 모라는 누구인가.

노씨 성에다가 곤륜산에서만 자란다는 돌배나무의 라를 붙여 노라.

모씨 성에다가 가지런한 그물이라는 라를 붙여 모라.

노라의 아빠는 사별했었고 모라의 엄마는 어느날 느닷없이 집을 나갔었다. 노라는 아빠 없이, 모라는 엄마 없이 살았다. 그들의 엄마와 아빠가 재혼을 하면서 노라와 모라는 자매가 되어 7년간 함께 살았다. 모라 아버지의 부도로 인해 가정은 해체되고, 노라와 모라는 7년 전 서로를 몰랐을 때처럼 살아가게 된다. 연락없이 살던 노라와 모라는 모라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만나게 된다.

어느날 집을 떠난 엄마와 아버지. 더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에서 울지 않기 위해 모라는 살기 위해 버텼다. 무책임하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부고를 들으며 모라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모르는 채 노라를 화장장에 데려간다.소설의 전반부는 노라의 관점에서, 후반부는 모라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김선재의 문장은 담담하고 섬세하다. 그런데 읽다보면 마음이 아리다. 노라와 모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결핍과 아픔이 있다. 그들의 마음 속을 가만 가만 들춰보려니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 두 눈 질끈 감고 보려 하지 않는 현실, 상처입은 인물들의 속내가 수면으로 올라온다.

이 소설에서는 생물학적 부모는 모두 자녀에게 당연히 정서적, 물질적으로 지지해줄 것이라는 부모 역할에 대한 환상을 철저히 파괴한다. 모성애. 부성애에 대한 환상을 깨버리고, 현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노라의 엄마는 어떤가. 요리라고는 고구마를 찌고 삶고 으깨고 부칠 뿐이다. 평생 하는 고구마 다이어트를 하는 엄마 덕에 따뜻한 집 밥 한끼 먹어 보질 못했던 노라에게 직장에서 아주머니들끼리 흥얼거리며 점심을 함께 준비하는 풍경은 낯설다.

다섯 명의 여자들이 두 개의 버너에 번갈아 가며 삶고 굽고 끓이며 서로의 입속에 무친 나물을 넣어주거나 갓 지은 밥을 푸고 들고 온 가방 속에서 반찬통들을 하나씩 꺼내 놓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살기 위해 먹는 것이나 먹기 위해 사는 것을 구별하는 게 별 의미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거기에는 슬픔도, 기쁨도 없다. 평생 고구마를 찌고 삶고 으깨고 부치는 게 식사 준비의 거의 전부인 엄마에게서는 찾아볼수 없었던 무섭도록 집중하는 삶이 있을 뿐이다. (p33)

모라의 친부모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린 모라에게 TV를 틀어준 뒤 집을 떠나버린 엄마, 모라를 방치하며 키우다가 인쇄소 사업 실패 후 엄마가 그러했듯 영영 떠나버렸다가 십수년 만에서야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온 아빠가 모라에게는 가족이라고 이름 붙일 사람의 전부이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그녀들의 현재 삶은 고독하고 인간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그 쓸쓸함이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건 말이다, 우리들 누구나 쓸쓸해하고 외로워하던 그 어떤 순간의 내 모습이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 있기 때문일거다.

억이란 언제나 왜곡되는 것.

소설을 읽다 보면 어- 어ㅡ하고 탁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둘이 가족으로서 함께 살았던 7년의 과거와 지금 현재 시점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어라, 읽으면 읽을수록 노라의 관점과 모라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실과 서로가 기억하는 서로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 강퍅한 현실에서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냈던 노라와 모라는 서로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 생활했을 뿐.

노라가 바라보았을 때 늘 곰살맞고 해맑게 웃던 아이 모라는 사실 웃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아픔을 가진 아이였다. 아버지와 말없는 신뢰로 소통한다고 보여졌던 모라는 아버지와 정서적 교감이 없었다.

모라가 바라보았을 때 타인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없이 새침하고 뚱해보였던 아이 노라는 노라의 생각처럼 엄마의 편애를 받는 아이가 아니라 엄마의 무관심과 핀잔, 방관 속에서 한없이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어버린 아이였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어도 서로를 알지 못했고, 각자의 기억은 달랐다. 사랑받고 자라지 못한 노라와 모라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각자 자신의 방법대로 몸부림을 치며 그 시기를 견디며 살아냈을 뿐, 근원적으로 소통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엇갈리는 기억들 속에서 딱 맞아 떨어지는 접점이 있다. 체온을 나누고 마주댔던 그 순간, 등과 팔이 맞닿았던 그 밤의 감각이다.

노라의 기억에서 그 밤은 새가 우는 밤이었다. 희미한 빛 속에서 새가 우는 밤. 코롱코롱 우는건지, 찌이찌이 우는건지 이제 막 깨어난 새들이 고요함 속에서 우는 밤. 세상이 조금씩 환해지는 것 같았던 그 밤에 차고 낯선 감각이 팔뚝과 등허리에 닿았던 밤. 고소하고 달큼한 향을 풍기는 모라가 노라의 이불 속으로 들어와 꿈처럼 이불 속이 따뜻해졌던 그 밤에 새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이 들었었다.

모라의 기억은 다르다. 그 밤은 태풍이 지나가던 어느 밤이었다. 비바람이 쉴 새 없이 홑겹의 창문을 때리고 천둥과 번개가 교대로 어둠을 무너뜨리던 와중에 노라의 숨소리는 골랐고 모라는 개처럼 떨며 깨어있던, 따뜻하고 안전한 곳이 간절했던 밤이었다. 숨을 곳이 없었던 그 방에서 엉금엉금 기어서 노라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 모라가 느낀 감정은 상대적인 온도, 절대적인 고요였다. 혼자가 아니라는 고요하고 따뜻한 실감. 살을 맞댄 실감의 기억 때문에 20년이 지났어도 노라는 모라의 기억 속에 실재하는 인물이었다. 모라는 살을 맞대고 잠이 들었었던 그 따뜻한 체온의 감각 덕에 20년만에 노라에게 용기를 내어 연락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녀들은 서로 고독했고 자신이 견디고 겪어야 하는 현실이 버거워 서로를 포용하고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밤에 이불 속에서 함께 나누었던 온기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돌아 돌아 20여년만에 만났지만 노라와 모라는 거의 유일하게 꼭 같은 감정으로 공유했던 그 따뜻했던 온기만은 정확하게 떠올렸다. 소설의 끝맺음에서 암시한 문장을 보면 아마도 이제 노라와 모라 그녀들은 서로를 조금씩 이해해나가며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프리허그 캠페인이 사회에서 들쭉날쭉 일어났었던 적이 있었다. 꼭 안아주는 것. 나의 체온으로 너를, 또 너의 체온으로 나를 . 그것은 얼어붙은 심장을 때로 마음을 치유하는 보약일런지도 모른다. 사람의 기억은 왜곡되고, 진실은 늘 어긋나고, 진심은 엇갈리지만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것은 따뜻한 포옹이라는 점. 공감한다.

나에게도 또한 유독 불쑥 뒤에서 튀어나와 포옥 안아주고 또 나에게 안겼던 청소년들이 있었다.

아니 애들이 어떻게 그래? 샘, 불쾌하지 않아요? 라는 질문을 가끔 받기도 했었지.

허나 그 포옹과 온기 속에서 위로받고 치유받고 싶어했던 그들의 마음을 읽었기에 나를 선택해주었던 그녀들의 포옹이 한편 고맙고도 뭉클했다. 스스럼없진 않았지만 기꺼이 안아주었었다.

그 때 그 아이들, 성마른 가지에 들이닥친 겨울바람처럼 시린 마음을 갖고 살던 그 아이들은 멀리서 달려나와 꼭 나를 안아주었던 그 때의 그 느낌, 그 따뜻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지에 이렇게 써 있다.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은 이의 창가에, 이 소설을 놓아두고 싶다." 김숨(소설가)

- 마음 둘 곳 없는 일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소설.

마음 둘 곳 없는 일상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라고...음.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들이 자칫 오해할 수 있겠다. 내가 읽은 '노라와 모라'는 강렬하거나 혹은 은은한 온기를 주변에 건네면서 그 둘레를 따뜻하고 해사하게 만드는 그런 햇살 같은 소설이 아니다.

마음 둘 곳 없는 쓸쓸함과 절대적 고독 속에서 작고 여린 싹 하나가 움트기를 간절히 바라고 다독거리며 응원하게 되는 그런 소설이었다.

노라와 모라. 마음을 나누기에 익숙치 않은 누군가가 일상의 온기를 찾아서 소통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 이제 시작이다. 자기 주관적인 해석과 엇갈린 기억들로 인해 관계가 분절되어 갈 때, 미치도록 외롭고 쓸쓸할 때 그 고독함을 치유받고자 할 때 이 책을 읽으며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랬노라, 사실 너도 그랬구나. 홀로 서 있는 이들의 마음을 훑어내는 섬세하고 정돈된 문장들, 좋았다.

소설 속의 문장들

#1

나는 손차양을 했던 손을 내리며 그 이름을 재차 읽는다. 양판수. 내 기억 속 계부의 이름은 양판규였다. 눈앞에서 점멸하는 양판수라는 이름을 보며 양판규를 생각한다.

...중략...

물론 이름 같은 건 잘못 알고 지냈을 수도 있다. 그런 오해를 교정할 기회도 몇 번쯤은 있었을 거다. 그러나 엄마와 나는 그 시절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다. 우리는 어떤 겨울 이후로 이름을 지우고 기억을 지우고 공간, 혹은 시간까지 지우는 걸 암묵적으로 합의한 거였다. 침묵하면 대부분의 일상이 순조롭고 평온했으니까.

그런데 그건,

나는 고개를 들어 해가 드는 환한 입구에서 어두운 실내로 걸어 들어가는 모라를 보며 생각한다.

누구의 잘못일까.(p96~97)

#2

언제부턴가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싫었다.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관심을 보이며 이해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고 난 뒤로는 더욱 그랬다. 정말이지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나를 너무 쉽게 이해한 나머지 다소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건 이해가 아니라고 어느 순간붜 나는 자주 생각한다. 이해와 동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쪽이 훨씬 대하기 편하다. 노라와 7년을 그나마 별일 없이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거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순간마다 나는 가끔 노라와 나 사이에 떠돌던 느슨한 적막과 외로움이 그리웠다.(p100~101)

#3

기억은 종종 시간의 순서를 바꾸고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게 만들기도 한다. 오래된 기억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 있다. 조금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그게 진짜일 리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았을텐데..... 이 아이는 예나 지금이나 뭘 의심하거나 따질 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노라가 편했고 또 그런 이유로 불편했다.(p145)

#4

종종 걸으며 종종 걷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자주 숨이 찼고 소나기를 맞은 사람처럼 땀을 흘렸다. 그런 내 꼴이 우스워 울고 싶을 때도 있었다. 나는 종종 걸으며 호흡을 편하게 하는 연습했다. 크게 들이마쉬고 깊이 내쉬는 연습. 연습을 하는 동안은 마음과 생각이 사라져서 자꾸 연습을 하게 됐다.

....중략....

오래 달리다 보면 마음과 생각이 사라져서

당신들은,

잘살고 있냐고 묻게 된다. (p164~166)

#5

이제 없는 세계는 아예 없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그것들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앞으로도 내내 그럴 것 같다. 다만 나는 한때 하나였던 어떤 시간을 되풀이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 누군가 다녀갔다고 여기면 마음이 한결 좋아진다. 너무 애쓰지는 말자고, 모라는 내 손바닥에 메일 주소를 적으며 말했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더 애쓰게 되는 마음이 있다.

있거나 없는 것.

그건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니까.

손가락에 감기는 바람이 천천히 말라간다.

한낮의 햇빛.

아직은, 눈이 부시다.(p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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