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가볍게 읽는 도스토옙스키의 5대 걸작선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종민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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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읽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수십만 권의 책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또 밀물처럼 쓸려나간다. 매일 매일 새로운 책들이 출판 시장에 쏟아지지만 시대와 장소가 바뀌어도 닳아버리지 않고 살아남을 책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궁금증이 든다.

고전으로 분류되는 책들은 시공을 초월해 인간 본성에 관한 보편적 감성을 건드리거나,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으로 충격과 반향을 일으키거나, 깊은 감동과 생각거리를 남겨주기 때문에 살아남았을 것이다. 고전으로 남은 책은 합당한 이유가 있는 법.

어릴적부터 그렇게 제목이 착착 귀에 붙었으나, 손에 닿지 않았던 책을 드디어 읽어보았다.

'죄와 벌'은 어떤 이유로 오랜 기간 동안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으며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을까.

출판사는 뿌쉬낀하우스. 벌써 이름만 들어도 러시아문학을 전문적으로 다룬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듯하다. 어쩐지 읽기도 전에 매끄럽게 번역되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이 든다.



책 표지 디자인 예쁘다. 흰색 표지에 심플한 글자체. 아마도 한글 제목 밑의 글자는 러시아어일듯 한데, 서체와 디자인이 심플하고 감각적이다.


'죄와 벌'은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걸작 중 하나로 나머지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기반이 되는 작품이자 작가 스스로 '범죄에 대한 심리학적 보고서'라고 칭한 작품이다.

소설은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니코프가 전당포를 방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라스콜니코프는 어머니, 누이와 떨어져 살면서 하숙비를 내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등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은시계를 맡기고자 했으나 자신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물건이지만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것에서 분노와 염증을 느낀다. 라스콜니코프는 돈은 많지만 인색한 전당포 주인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살해하는 망상을 키워나가다가 주인 노파와 그녀의 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한다.

살인은 소설 초반에 이루어지고, 소설의 중반부 이후는 라스콜니코프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와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 과정, 라스콜니코프의 자백과 시베리아 유형생활로 전개가 된다.

두둥. 대놓고 줄거리와 결말을 스포해버리다니 대체 어쩌란 말인가 이 글을 읽으며 가슴을 탕탕 치며 몹쓸 글을 읽었노라 야속해하실 분들을 위해 작은 변명을 해보자면, 저.. 저도 결말이 궁금해서 미리 알고.. 아니 찾아보고 읽었습니다...

좀 더 적극적인 해명을 해보자면 실은 이 소설은 대단한 반전을 갖고 승부수를 노리는 책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요....). 결말에 이르는 과정,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면서 작가가 라스콜니코프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싶은 것들에 대해 물음표를 가져보고 스스로 답해보는 것이 의미있는 책이다. 결말이야 널리 알려진 고전이니까.

가난에서 비롯된 영양 실조, 심약한 정신세계와 망상에 빠져 있는 라스콜니코프는 노파를 살인하고서도 그다지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라스콜니코프를 용의자로 주목하는 판사 포리피리가 그런 라스콜니코프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그 논문에서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들은 폭력과 범죄를 저지를 권리가 있고, 그 사람들은 어떤 법에도 저촉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암시를 하고 있던데요?

.... 중략 ....

이 분의 논문에서 모든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 같거든. 평범한 사람들은 복종하며 살아야 하고, 법을 어길 권리가 없다는 거야. 평범하니까 말이야. 그런데 비범한 사람들은 온갖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권리와 법을 위반하는 권리까지 갖고 있다는 거지. 이유는 그들이 비범하기 때문이라는 거고,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논문에서 그렇게 주장한 게 맞는 거지요?" 155쪽

판사 포리피리가 대놓고 라스콜니코프에게 떠보기 질문을 던진다. 라스콜니코프. 당신이 이런 쓰레기 논문을 쓰지 않았는가, 당신은 전당포 살인 사건의 강력한 용의자요 라고 암시하며 질문을 던지자 라스콜니코프를 아래와 같이 답한다. 그 답변이 기가 막힌다. 읽어 보시라.

"저는 뉴턴이 자신의 법칙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수십명, 또는 수백 명이 방해가 되고, 그들의 희생 없이 법칙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들을 제거해야만 하고,... 그럴 권리가 있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역사에서도 솔로몬이나 무함마드, 나폴레옹 같은 입법자와 통치자들은 낡은 법을 폐기했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피를 흘리는 것을 감수했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위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피를 흘린 살인자들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입니다. 즉,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첫 번째 부류는 평범한 사람들로서 복종하고 순종적인 사람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법을 파괴하거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피 흘리는 것을 감수하는 걸 허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양쪽 모두 각자 존재할 권리는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둘 사이에 전쟁은 영원한 거지요. 새로운 예루살렘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156쪽

툭하면 기절하고 자빠지길 잘하는 심약한 청년 라스콜니코프가 막연히 가난 때문에 희생자로 전당포 노파를 택해 생계형 살인 사건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을 비범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이런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사회에 대해 모욕감을 느꼈었던 것이다.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예루살램의 도래를 위해서라면 법을 파괴하거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피흘리는 것(하필 자신의 피가 아니라 타인의 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라스콜니코프는 술집에서 대학생들의 대화를 듣고 자신의 망상을 키워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라스콜니코프와 판사 포르피리가 살인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가, 은폐하는가에 대해 벌이는 쫓고 쫓기는 자의 심리 싸움, 두뇌 굴리기에서 한 발 더 들어가보자.

대의를 위해서라면 몇명이 피를 흘리고 사람이 죽게 되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주장하는 라스콜니코프의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대답은 쉽게 나온다. No. 정당화되기 어렵다. 라스콜니코프는 망상증을 키워나간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인물이었고, 결과론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노파의 돈을 훔친 그의 행동은 그 누구도 구원하지 못했다. 홍길동처럼 범죄의 결과물을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찔끔 쓰기는 했지만(마르멜라도프의 아내와 딸 소냐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범죄 후의 복잡한 심경과 번민에 의한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의 주장은 앞으로 보고, 뒤로 보고, 거꾸로 봐도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치자.

그렇다면 왜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콜니코프의 입을 통해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의 이름을 줄줄 읊었는가?

라스콜니코프가 포르피리에게 항변하며 언급했던 위대한 인물들 솔로몬, 무함마드, 나폴레옹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혹은 이념 다툼의 과정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일으킨 수많은 전쟁, 통치자가 정당성을 얻고자 벌인 피비린내나는 사건들은 정당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예컨대 우리가 전쟁에서 지고 있다. 우리 진영이 주장하고 부르짖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대국가 국민들을 죽여야 한다. 악을 벌하기 위해 우리는 핵개발을 하고 마침내 적들을 무력화시켰다. 적들의 진영에 핏빛 잔해 폭탄과 수십년, 수백년에 걸친 치명적인 후유증을 남긴채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은 정당한가?

우리 사회의 공리주의적 행복과 발전을 위해서라면 소수 혹은 쓸모없는 사회악들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관점은 단순히 미쳐버린 망상가 라스콜니코프의 헛소리라고 보기 어려울만큼 역사상 많았다. 라스콜니코프와 위대한 인물의 차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그들을 동원했고 성공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그들을 동원하지 못한 채 실패했다.

비약해보자면 라스콜니코프와 위대한 인물은 똑같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저질렀지만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므로 라스콜니코프 자신은 패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필립퍼 풋이 제기한 유명한 전차의 딜레마 사고실험을 생각해보자.

철도에서 전차가 맹렬한 속도로 폭주하고 있는데,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길 앞에는 다섯 명의 사람이 있고 그대로 전차가 달려가면 다섯명은 모두 죽는다. 그 옆 선로에는 단 한 명의 사람만이 있다. 선로를 틀면 5명을 살릴 수 있지만 1명은 희생된다. 반면 바로 그냥 전차가 직진한다면 5명의 목숨이 모두 희생되게 된다.

보통 이 질문에 사람들은 쉽게 답하지 못한다.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죽여야 하는 딜레마 상황에서 선뜻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총량의 행복을 고수하는 공리주의자들은 다섯 명을 살리고 한 명을 죽여야 한다고 답할 것이고, 사회정의 실현을 외치는 혁명가는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쪽을 살리고 그 반대편 쪽을 죽여야 한다고 답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실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겪는 피비린내라고 주장하며 말이다.

라스콜니코프의 항변은 미치광이의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무거운 경종을 울린다.

역사의 승자들이 걸었던 길에서 보이지 않은 점을 도스토예프스키가 신랄하게 꼬집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어떤 목적에도 불구하고 피의 희생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피의 잔해 더미에서 우리는 이렇게 외치게 되지 않을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왜. 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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