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 사랑의 여러 빛깔, 개정판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바실리 악쇼노프 외 지음, 이문열 엮음, 장경렬 외 옮김 / 무블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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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문열이 세계명작단편들을 묶은 '사랑의 여러 빛깔'을 들고 나왔다. 사랑의 여러 빛깔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의 엮음집이다.

 

세상에. 택배박스를 풀고 보니 표지 디자인이 고퀄리티다. 종이도 아닌 것이 실리콘인듯 아닌듯 도무지 재질을 알 수 없는 선명한 붉은 빛깔의 맨들맨들한 표지에 거꾸로 서 있는 남자와 바로 서 있는 여자 무늬가 있다. 작가들의 이름과 소설 글자를 남자와 여자 모양으로 배열해 음각으로 새겨놓았다!

 

 

오우 마이 갓. 부들부들한 표지에 음각으로 디자인된 글씨를 자꾸 손으로 더듬어보게 된다. 표지가 너무 예뻐 숨넘어갈뻔했다. 점자를 읽듯이 한 자 한 자 만지게 되는 촉감 중독성이 가득한 표지 디자인을 제작한 디자인과 편집부에 무한 찬사를 보낸다. 그야말로 소장각.

 

 

독보적인 소설가 이문열이 빛깔도 모양도 형태도 다른 사랑에 대한 명작 단편들을 진주 한 알 한 알 모으듯 골라내어 한 권으로 엮었다니 일단 기획의도 무조건 합격이다.

 

 


카메라 색감이 표지를 홍시색깔로 잡아놓았다. 아냐. 이건 실물이 아니다. 실물은 더 더 더 예쁜! 붉은 선홍색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봤다. 너도 나도 여기 저기에서 사랑을 외친다.

 

 

사랑이 뭐지?

한 겨울의 아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같은 것

코끝이 쨍하게 시큰한 추위에 아아를 한 모금 머금으면

아 시리다

입안 가득 찬 기운에

눈도 머리도 마음도 형광등 불빛처럼 탁 켜지는데

그 달큰한 향과 쌉쌀한 끝맛에 끊을 수 없는 것

 

 

 

또 사랑이란

 

한 여름의 떡볶이 같은 것

또르륵 구슬땀이 떨어지는 뜨거운 열기에 지쳐 몸이 녹진녹진하게 늘어질 때

떡과 오뎅 겹쳐 포크에 꾸욱 찍어

떡볶이 국물 잔뜩 적셔 호로록.

입안 가득 화르륵 매운 맛이 혀를 때리는데

눈물, 콧물 흘려가며 얼얼해진 혀를 시원한 물로 달래가며 고생하면서도

또 먹게 되는 그 맛.

 

 

세상에 흔한게 사랑 

그렇지만 너와 나의 사랑만큼 흔하지 않은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다양한 단편들에서 작가들이 건네는 사랑의 빛깔은 어떤 다양한 색감일까.

 


이 단편집은 이문열이 대학에서 소설을 가르칠 때 소설 창작에서 전범이 될만한 좋은 단편 선집을 선정하기 위하여 수업 과정에서 발굴해낸 주옥같은 글들을 모아놓았다. 이문열은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속에 다양하면서도 잘 정리된 전범典範이 있어야 한다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책에 수록된 단편들의 저자는 바실리 악쇼노프, 다니자키 준이치로, 프랑수아 샤토브리앙, 테오도르 슈토름, 안톤 체호프, 윌리엄 포트너, 토머스 하디, 알퐁스 도데, 아르투어 슈니츨러, 스탕달, 오헨리이다. 낯익은 이름도, 낯선 이름도 같이 보인다.

 

 

작품과 함께 이문열이 작품 해설을 하고 있어, 단편을 하나 하나 읽어내려갈 때마다 그 느낌과 감정을 엮은이와 나누고 해설을 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여러 단편 중에서 어릴적 교과서에서 만났던 작품은 알퐁스 도데의 '별'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내게는 닿을 수 없는 고귀한 별, 스테파네트 아가씨에 대해 목동인 나는 사랑의 불길에 혈관이 타오르는 듯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나의 사랑의 감정은 몇억 광년이나 떨어진 별을 바라보며 동경하는 마음처럼 순수한 그것이다.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가에 나란히 앉아 별들이 양 떼처럼 말없이 조용히 운행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별들 가운데서 가장 곱고 가장 빛나는 별이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 위에서 잠들어 있노라 생각하면서 벅찬 감정에 빠진다. 이문열은 1966년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시절에 별을 처음 읽었을 때를 떠올리며, 조금전까지의 미열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신열을 느끼며 골방 창문을 굳게 닫았다고 고백한다. 바깥의 쨍쨍한 햇볕이 방금 작품을 읽고 받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해칠까 두려워서였다고!

 

나 또한 순수함이 세상의 풍파를 압도하는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묻는 이가 있다면 감히 알퐁스 도데의 별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 오헨리와 안톤 체호프의 작품 '잊힌 결혼식', '사랑스러운 여인'이 수록되어 있어 반가웠다. '잊힌 결혼식'은 증권 중개인 하비 맥스웰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 시대에 직업이 개인의 삶을 야곰야곰 잠식해버린 일중독자의 사랑을 위트있게 그려낸다. '사랑스러운 여인'은 말해 무엇할꼬.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비로소 사람답게 사는 여인 올렌카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닥친 행복과 불행에 독자가 함께 숨죽이게 된다. 이문열은 올렌카의 사랑이 변천하는 과정이 여자의 사랑이 지니는 보편성을 시사한다고 해설한다. 올렌카의 사랑이 아버지에서 숙모로, 불어 선생님에서 두 명의 남편, 애인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옛 애인의 아들 사샤에게 변해가는 과정은 여자의 삶에서 관찰되는 보편적 성질이라는 그의 해석에 일견 수긍하게 된다.

 

 

단편들 중 가장 기괴하게 다가온 소설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슌킨 이야기'였다. 이문열은 '슌킨 이야기'에 '애달프고 처절한 아가雅歌'라는 부제를 달았다. 예인으로서 가학적인 성향과 자기애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슌킨과 그녀만을 사랑하고 복종하고 맹목적으로 섬기는 사스케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기괴한 느낌에 한기가 오솔오솔 돋아났다.

 

강도는 다소 다르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볼 때 느꼈던 생경한 감정이랄까.(물론 영화만큼 충격적인 생소함과 기괴함은 아니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의 이미지, 스스로 눈이 멀어버린 사스케의 행각 등을 보며 다른 일본 문학을 읽으며 느꼈던 기괴한 긴장감이 재현되는 듯 했다. 충분히 압도적이었다.

 

 

사랑의 여러 빛깔이라고 단편을 모아놓았으니 작가와 출판사의 기획의도에 맞게 적극적 독해를 해보는 것이 인지상정. 각각의 단편 소설 속에서 그려진 사랑은 어떤 빛깔들일까.

 

 

작품을 하나씩 음미하며 생각해보았다.

 

 

* 별(알퐁스 도데)

 : 순수한 사랑의 서정시가 소설로 태어난듯한 작품 별에서 사랑이란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의 하얀 빛깔.

 

 

* 슌킨 이야기(다니자키 준이치로)

 : 예술로 맺어진 사제관계이자 주종, 연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오만함과 자기애, 충직함과 가학성을 보여준 슌킨이야기에서 사랑이란 어둑하지만 고혹적으로 붉은 팥죽색 빛깔.

 

 

* 환상을 좇는 여인(토머스 하디)

 : 생기있고 경쾌하며 영혼을 고양시켜야 삶에서 충만한 행복감을 얻는 '시신詩神의 숭배자' 엘라. 우연히 로버트 트리위의 방에 머물게 되면서 환상 속의 사랑에서 삶의 열정과 원동력을 찾고자 했던 여인 엘라의 사랑은 이루지 못한 고독한 열정 보랏빛.

 

 

* 에밀리를 위한 장미(윌리엄 포크너)

 : 아. 정말 재미있는 작품.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그냥 에밀리라는 인물 그 자체의 감정을 따라가게 되었던 작품이다. 소재만 보면 슌킨 이야기 못지 않게 기괴할 수 있으나 포크너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래 그럴 수 있어 라고 감정선을 같이 따르게 된다. 우리 또한 변화무쌍한 시대에 뒤쳐지고 낙오되며 움츠러드는 작은 나의 모습이 가슴 속 언저리에 모두 숨겨놓고 있으니 말이다. 처연하지만 꼿꼿했던, 몰락해버린 가문의 여인 에밀리의 사랑은?

 음. 이건 아묻따 색상이 있다. '활동적인 남자의 머리색이 그러하듯 여전히 힘에 넘치는 청회색'.

 작품을 읽으면 알게 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청회색이다.

 

 

* 르네(프랑수아 사토브리앙)

 : 사랑이 검은 색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어떤 사랑은 암흑과 같이 우리를 덮어 버린다. 빛 한줄기 없이 끝없는 심연 속으로 나를 가두게 만드는 완전한 검은 색의 사랑. 르네를 읽으며 르네의 사랑은 어떤 색깔일까 떠올려보니 검은색이 생각이 났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사랑. 덮어야 사는 사랑. 덮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랑. 고독함과 혼란스러움을 동반하는 그 검은 색의 사랑 앞에 나도 르네와 함께 구름에 달빛이 가린 적막한 밤길, 앞이 보이지 않는 그 혼돈의 길을 함께 걸었다.

 

 

* 임멘 호수(테오도어 슈토름)

 : 지금은 흘러가버린 청춘의 사랑의 애잔함을 노래한 임멘 호수.

 사랑은 조건과 때가 맞아야 비로소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의지의 힘으로 조건과 때를 극복해 스스로 인연을 맺어나가는 것일까? 조건과 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건,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나가는 것이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아프고, 흘러갔기에 아름답고, 낙인처럼 나의 영혼에 자국을 남긴다.

 임멘 호수에서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트의 사랑은 젊음의 여운을 남긴 깊은 청록색.

 

 

이외에 '달로 가는 마중에',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 '바니나 바니니'의 단편들을 읽으며 사랑의 빛깔들을 그려보았다.

 

 

단편모음집을 읽고 느낀점.

 

그래. 어떤 사랑은 이렇게 처연하고, 어떤 사랑은 이렇게 숭고하지. 어떤 사랑은 또 처절한 슬픔을 안고 있고, 어떤 사랑은 삶 그 자체이기도 하지. 단편집에 실린 각양 각색의 사랑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다보면 사랑은 그 자체로 쉽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인생을 황홀하게 하지만 격랑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기도 하는 사랑. 허나 피한다고 피해지는가? 내 마음 속 불꽃 회로를 조절하는 것은 때때로 내 이성의 영역으로 도저히 불가한 것이니까.

 

그 쉽지 않은 사랑의 회로를 지나가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고합니다.

 

 

사랑. 당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반증입니다.

 

 

 

낯익은 단편과 처음 보는 작가의 단편까지 사랑에 대해 망라한 단편 소설집.

사랑을 해본 사람,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자라면 누구나. 모두에게 기꺼이 추천합니다.

물론 단편을 좋아라하는 제 취향과 소설가 이문열의 선택과 출판사의 기획이 의견 합일이 된 결과라는 점. ^^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자유롭게 읽고 제 마음대로 서평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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