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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의 편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자연사랑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우연한 기회로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단번에 읽어본 바에 의하면, 처음엔 죽은 아이 놔두고 웬 철없던 시절의 넋두리를 이리도 한가하게 늘어놓고 있는가 하는 짜증섞인 생각과 함께, 비정상아의 편집증적 애착이 결국 서른 살 성인이 되도록 극복되지 못한 채 기이한 결말로 이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는데, 이야기의 중반을 지나면서 점차 뭔가 있겠다 싶은 또다른 느낌이 들더군요.
특히, 편지쓰는 여인이 미혼모로서 그의 '카사노바'의 아이를 낳아야 했던 시립병원에서의 경험에 대한 묘사는 결정적으로 이 소설이 부르주아의 속물근성에 대한 신랄한 풍자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편지받는 주인공 남자나 편지쓰는 여주인공 주변의 남자들이 당대 지식인 또는 중산계층의 속물성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만큼이나, 순수한 사랑에 집착하고 있는 듯한 그 여인의 속물성도 가난과 노동에 대한 그녀의 매우 냉소적인 태도에서 또렷이 보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처음엔 웬 감상주의 넘쳐나는 철없는 이야이기인가(이런 소설 읽고 싶지 않다!) 하는 부정적 감정이 지배적이었다가, 점차 당대사회의 부조리를 리얼하게 묘파한 걸작이라는 긍정적 평가로 일단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읽어볼 만하다!). 단, 남녀 주인공을 통해 드러나는 부르주아 속물근성이 얼마나 비열하고 천박한 것인지를 매우 잘 표현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므로, '사랑과 자유정신의 분출'이라는 평가는 적어도 이 작품에 적용하기는 어렵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