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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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 이상으로 슬펐다. 마지막은 그가 선택한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 지 걱정하게 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의 그림을 본 느낌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색칠해 나가면서 형형색색 빛나다가 점점 색을 잃어가는 모습을 본다고 해야 할까. 누구나 색깔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존재할 텐데, 그의 경우에는 아예 옆에서 무채색을 끼얹었다고 생각했다. 작가님의 다음 책을 그럼에도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이와 더불어서 나의 일과 노동에 대해 꾸준하게 고민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이토록 담담한데 마음이 시리다.

믿음은 하루가 가고, 계절이 쌓이고, 서로의 표정과 목소리에 익숙해지고, 버릇과 습관 같은 것들에 길들여지고. 그런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다음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어렵게 생겨난 것들이 이처럼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 P34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일상, 완벽한 하루. 그런 것들을 욕심내어본 적은 없었다. 만족과 행복, 완벽함과 충만함 같은 것들은 언제나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짧은 순간 속에만 머무는 것이었고,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불과했다. 삶의 대부분은 만족과 행복 같은 단어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쌓여 비로소 삶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 P113

종규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으며 친구였고 동료였다. 그러나 종규의 삶에도 타인이 결코 짐작할 수 없는 성취와 감동, 만족과 기쁨, 즐거움과 고마움의 순간들이 있을 거였다. - P122

생각해보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른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들이, 삶을 다른 방향으로 놓아둘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스스로에게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자신을 막아서기만 했다. 어떻게 해도 달라지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럼에도 아주 작은 것 하나쯤은 바꿀 수 있다는 생각. 두 가지 마음이 들끊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려가도록 내버려둔 걸지도 몰랐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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