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가을 하늘의 포근하고 나른한 오후에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분주하게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직 정리를 마치지 못한 남학생들이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배드민턴채를 대충 휙 던지고 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스탠드로 뛰어갔다.

“야! 제대로 정리하고 와!”

양쪽 허리에 손을 얹고 불호령을 내리는 선생님의 잔소리에 근처까지 온 학생들은 풀이 죽어 다시 캐비닛으로 향했다.

이들 때문에 수업이 길어지자 스탠드에서 야유의 소리가 들렸다.

깔끔하게 정리를 마치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애들을 보고 선생님은 이제 됐다는 듯이 빨리 뛰어와! 라고 소리치고 자신의 앞에 모인 학생들에게 마침의 말을 했다.

“다음시간에도 체육복 잘 챙겨 입고 오고! 실장은 인사하고 마치자”

단정하게 생긴 여학생이 벌떡 일어났다. 주섬주섬 자신의 자리를 찾아들어가는 남학생들이 제대로 앉을 때 까지 기다렸더니 선생님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한 소리를 더했다.

“아! 그리고 혜민이는 좀 남았다 가라”

푸르스름하게 흐르는 하늘을 멍 하니 바라보며 다리를 떠는 여학생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예에-?”

당사자는 놀란 채로 선생님을 야속하게 바라봤다.

“아- 늦게 가면 급식실 자리 없어요.”

선생님은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투덜거리는 혜민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실장에게 인사하라는 눈짓을 보낸다.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학생들은 흐물흐물하게 감사합니다를 합창한 후 전속력으로 급식실로 향했다.

“혜민아 선생님이 왜 남으라는 거야?”

줄곧 옆에 앉아 있던 아이가 일어서 엉덩이를 털면서 여전히 앉아 있는 혜민이에게 물었다.

“뭐 태권도시합 때문에 그렇겠지. 니들 먼저 가서 밥 먹고 있을래?”

“아니 기다릴게. 후딱 갔다 와”

소녀는 귀엽게 웃어 보이며 체육실로 가는 혜민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자신의 보다 한 계단 밑에 앉아서 핸드폰게임에 열중해있는 친구의 옆에 앉았다.

혜민이는 다섯 발 정도 앞에 걸어가는 선생님의 등을 응시하다가 힘차게 부는 바람 때문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아 매만지고 기지개를 시원하게 키면서 하늘을 바라봤다.

“아-이런 날 마루에 누워서 만화책 보면 딱 인데”

딩-동-댕-

점심을 알리는 종소리가 학교 내에 퍼졌다. 무익한 지식의 방대한 흡수로 녹초가 된 학생들이 왁자지껄한 유일한 시간.

“야 밥 먹으러 가자-”

“니들 왜 이렇게 늦었어. 늦으면 자리 없다고”

“사회가 종 치고도 수업해가지고”

“빨리 가자 줄 얼청 길겠네.”

“야 쟤는 왜 남아있냐?”

“이선주? 쟤 친구 없어서 늦게 밥 먹으러가”

“뭐? 야 그런 말을 대놓고 하냐. 당사자 민망하게”

“뭐 어때 우리 쟤 싫어. 반 애들도 다 쟤 싫어해”

“싸가지 없는 년. 말 엄청 못됐게 하네. 이 나쁜 년아 킥킥”

“그럼 네가 같이 먹어주던가”

“나 참 왜 말이 그 길로 빠지냐? 어이없어”

본인들이 들으면 피멍이 들고도 남은 소리를 신랄하게 즐거운 듯이 쿡쿡 웃으면서 말하는 마지막 무리들 까지 빠져나갔다.

교실을 나가도 여전히 선주를 까대는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적막한 복도에 메아리 쳤다.

흑백만화 같은 교실들 사이에 동화된 듯 미동 없이 앉아있는 선주는 마치 소녀상처럼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동공도 움직이지 않은 채 책을 응시했다.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바람이 선주의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바람 때문에 책장이 막무가내로 넘어가도 선주를 여전히 가만히 그렇게 넘어가는 책을 바라봤다.

가슴까지 찰랑거리는 흑발에 달덩어리처럼 환한 얼굴에 오목조목 눈, 코, 입이 들어있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반짝거리는 동공은 삶의 의욕을 잃은 듯 초점이 없었다.

여전히 바람에 머리칼이 휘청거렸지만 선주는 가만히 두었다. 군살 없는 턱 선에 머리칼이 정신없이 부딪쳤다.

그렇게 몇 분을 더 있다가 천천히 칠판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다음엔 창문 밖.

산 에 둘러싸인 학교인데도 선주는 마치 광활한 황무지를 바라보는 것처럼 넋을 잃었다.

황무지는 주는 것 없이 선주의 생기를 빼앗아 가고 목소리, 웃음을 집어갔다.

드르륵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인위적인 소리를 토해냈다. 선주는 잔잔하게 그러나 꼿꼿하게 교실을 나섰다.

주위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던 선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외모비하라든지 만년2등이라는 둥 돈지랄을 한다는 둥 전부 그들이 이룰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본인을 내세워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짓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은 이유를 알 수 없이 온몸이 시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에서 한 모금의 공기를 찾으려고 발버둥 치곤 했다.

선주는 그것을 외면했다. 그렇지만 외면하지 않아도 해결책을 없었다.

그저 꿋꿋이 버티자. 어른이 되면 지금 상황보다 분명 나아지겠지. 지금 내 주위에 있는 것들은 어차피 하찮은 것들일 뿐.

그렇게 눈물이 말라 꾸덕꾸덕해진 가슴을 달래고 또 달래고 달래며 아무렇지 않을 척 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선주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저 사뿐사뿐 급식실로 향할 뿐.

아까의 피멍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막 아문 상처위에 또 다시 스크래치가 나도 선주는 참아냈다. 두렵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면서.

급식실에는 2학년과 몇몇의 3학년만 남아있었다.

민폐인줄도 모르고 한 무리의 3학년 여학생들은 지네들이 선배랍시고 큰소리로 시끄럽게 떠들면서 밥을 먹고 있었다.

선주는 그들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고 식판을 집고 묵묵히 배식을 받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구석자리를 찾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최소한의 식탁 외에는 청소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선주는 하는 수 없이 그 여학생들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눈살이 자동으로 찌푸려질 정도로 여학생들은 시끄럽게 쳐 웃어댔다.

선주는 동요하는 가슴을 가다듬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 네 뒤에 쟤 이선주 아냐?”

“어? 진짜?”

상대방의 배려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들은 대놓고 선주를 씹기 시작했다.

“쟤 수학한테 졸라 개겼다며? 소문 다 났어! 킥킥”

“나도 들었어. 큭큭 아 그리고 쟤네 반 중간고사 때 꼴찌해서 벌 받았는데 자기는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담임한테 따졌대. 미친 거 아냐?”

“헐- 정신이 이상한가봐. 큭큭큭 쟤 몇 반이지?”

“1반”

“1반? 그럼 담임 국어 아냐? 국어 완전 다혈질인데 빡치면 의자 막 던지잖아!”

“그때 장난 아니었다니까. 우리 반 쌤이 말리고 진짜 대박 이였어.”

“와 간 진짜 크네. 근데 성격도 개 쓰레기라던데. 아! 그리고 지 예쁜 줄 알고 막 나댄대”

“나도 그거 들었어. 예쁘긴 개뿔. 킥킥 네가 더 예쁘다 야!”

“아- 내가 좀 예쁘지”

여드름 자국, 주근깨를 화장으로 가리고 눈 주위를 검게 칠한 그 학생들에게서는 도저히 중학생의 풋풋한 향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알지도 모르면서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는 말이 진실인양 계속 떠들어댔다.

사실 확인도 해 보지 않았으면서 고등학생 선배와의 스캔들을 엮거나 선정적인 말로 선주를 괴롭게 했다.

“야-”

착 가라앉은 무거운 목소리가 정도를 넘은 그 조소에 마침표를 찍었다.

바로 옆 식탁에서 꾸역꾸역 밥을 입에 넣고 있던 혜민은 결국 폭발해 눈을 부릅뜨면서 수틀리면 한 대 칠 표정으로 상대편 동기들을 깔아봤다.

“이 씨 니들은 입이 두 개냐? 밥 먹는 입, 떠드는 입. 응?”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여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당황함을 숨겼다.

“아까부터 계속 짜증났는데 말이야. 손 올라가는 거 참느라고 애썼어. 내가”

혜민은 이제 아예 몸을 이쪽으로 틀고는 험악하게 위화감의 오로라를 풍겼다.

“밥 먹는 곳에서 밥은 안 먹고 나불대는 건 너네 사정이라서 관심 껐는데 계-속 내 신경 거슬리는 말을 하네. 야 니들이 하는 헛소리가 무슨 소린 줄 알고나 하는 거냐?

제대로 알고서 하는 소리냐고- 진짜 어이가 없네. ‘어디서 들었다, 누가 그러더라’ 라고 말하면 다 돼는 줄 알아!”

똑바로 쳐다보는 혜민의 시선이 무서워서 여학생들은 짐짓 움찔했지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겁을 잃는 듯이 한 학생이 뱃심 있게 나섰지만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네가 뭔데 상관 하냐.”

그 말에 험상궂었던 혜민의 표정이 풀리고 턱을 쳐들고 입 꼬리 한쪽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꼭 할 말 없는 것들이 그 소리 하더라 쫄린 거 티 안 내려고”

그 말에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한 애들은 갑자기 쌍욕을 두서없이 해 댔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눈치 챈 나머지 학생들이 눈치껏 급식실을 급히 나갔고 혜민은 그들이 하는 더러운 욕설을 가만히 비웃으면서 듣고 있었다.

“다 했냐? 이야 너희들 입. 다른 의미로 대단하구나. 태워도 안 없어질 1급 쓰레기야.”

알고 있는 욕을 다 소진하자 씩씩거리기만 하고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숨 참고 수고했는데 이를 어쩌나? 나는 하-나도 기분이 안 나쁜데.

할 말 끝났으니 내 할 말 할게.

니들에 대에서 세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나도 어디서 들은 게 있거든?

니들 가짜 민증으로 술집 들어갔다가 행패 부려서 중딩인거 뽀록나고 쫓겨났다는 소문이 돌더라? 이거 진짜냐? 하! 설마! 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수준인데 이건. 어? 좀 지껄여봐 아까 패기 있게 잘 떠들던 입은 어디 사는 누구 입이냐? 아,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할게. 자꾸 나댄다 나댄다 하는데 정작 쥐뿔도 없는 게 무리지어 있는 빽 믿고 나대는 게 누구인지 잘 생각 해봐라 알았냐? 그리고 앞으로 사람 앞에서 까지 마.

깔려면 나 없는 데서 까던지. 한 번 더 보이면 너희 아구창 날라 간다.”

얼굴이 있는 데로 시뻘게진 애들은 입만 벙긋벙긋 거리고 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혜민은 마무리로 애들을 골고루 째려봐주고는 식판을 들고 선주가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상황을 가슴 졸이면서 지켜본 선주는 자신 앞에 앉은 혜민을 보고 정신을 못 차리고 이 엉뚱하고 무대책의 영웅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혜민의 일행도 말없이 일어나서 한명은 선주 옆에, 한명은 혜민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제대로 완패한 여학생들은 자신들의 뒤에 등지고 앉아있는 혜민을 있는 데로 째려봤지만 혜민은 시원시원 호탕한 웃음으로 해맑게 남은 식사를 했다.

여학생들은 불이 난 듯 벌건 얼굴에 왁-하면서 놀래 키면 눈에 고인 물이 주르륵 쏟아질 정도로 눈물이 맺혔지만 참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고 뒤늦게 온 남학생들이 이 장면을 재미있게 보고 서로 키득거리며 웃는 것을 발견하자 재빨리 식판을 정리하고 급식실을 탈출했다.

“쟤네들이 하는 말 신경 쓰지 마. 사실이 아니라는 것 쯤 웬만한 사람들 다 아니까. 난 박은주! 얘는 홍지영 그리고 얘는 김혜민이야. 우리 세 명은 5반. 너는?”

보드라운 목소리로 통성명을 하는 은주는 강아지처럼 귀엽게 웃으면서 선주를 바라봤다.

“난 1반 이선주.”

잠깐 사이에 평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탓에 상황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지체가 됐지만 선주는 꽤 침착하게 낭랑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응 선주. 반가워 헤헤”

은주는 빈틈없는 앞머리를 찰랑거리며 넘치는 호의를 미소로 선물했다.

“선주야 넌 저런 소리, 기분 안 나빠?”

입 속에 우물우물 밥을 씹으며 천진난만하게 방금 전 대담하고 당찬 소녀는 사라지고 평범하고 흔한 여중생으로 돌아온 혜민이는 선주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선주는 동급생에게 오랜만에 느껴본 상냥함에 적응이 안 됐다.

따스한 꽃향기가 그동안 철저히 숨기고 외면해왔던 가슴 곳곳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기분 좋은 흔적을 남긴 후 떠나지도 않고 여전히 남아 자신을 보듬어 주는 듯했다.

선주가 자신만의 생각에 정신이 팔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혜민은 아픈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거라고 생각하고 씁쓸하게 하지만 이해하고 싶은 얼굴로 짧게 미소를 보였다.

“앞으로 우리랑 같이 밥 먹자”

국그릇까지 싹싹 비운 혜민은 햇빛을 잔뜩 머금은 해바라기처럼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온 몸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그때 삭막한 황무지의 허공에 뜬 문이 보였다.

문틈으로 눈부신 광채가 넘치고 자신을 유혹하지만 차마 그 문을 열 수 없었다.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달콤한 것은 금세 중독되고 괴로움과 슬픔을 잊게 해주지만 사라지면 괴로움과 슬픔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뜻 그 문을 열 수 없었다. 누구보다 원하고 바라지만 앞에 있다고 덥석 잡기에 선주는 알고 느끼고 배운 것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이런 돌파구는 손에 꼽을 정도로 가끔 생겨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흔들리지 말자. 곧 없어질 인연이다. 선주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괜찮아. 방금은 도와줘서 고마워”

또 다시 사라질 문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선주는 약해진 심신 때문에 자신이 이성을 잃고 그 문이 희미해져가는 도중 벌컥 열어 젖이지 않을까 가슴 졸였다.

잠깐 동안이지만 포근하고 따스한 감촉을 느낀 것으로 충분히 만족해야했다.

그러나 선주는 기대했다. 자신이 문을 열 수 없는 이유를 알아채고 감히 저 문이 저절로 열려주기를.

고개를 박고 묵묵히 밥을 입에 넣는 선주를 혜민은 아무 표정 없이 바라봤다.

턱을 괴고 지그시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에 국 묻겠다.”

예상 못한 접촉에 선주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신의 머리를 잡아주는 혜민의 손을 탁 뿌리쳤다.

본인의 행동에도 적잖이 놀란 선주는 상대방의 기분이 나빠졌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게 표정에 역력히 드러났다.

하지만 부당하다고 할 만한 대우에도 혜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민망하게 떠 있는 손을 접어두고 그냥 피식 웃기만 했다.

그녀의 보조개가 귀엽게 잡혔다. 가까스로 진정한 선주의 마음은 그 보조개 때문에 휘청했다.

‘아 어쩌다 나는 이렇게 됐나.’

선주는 표정을 가까스로 추스르고 야속하게 옅어지는 형형한 빛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더 이상 보고 있었다간 분명 꼴사납게 눈물이 흐를게 뻔했다.

그러기 전에 고개를 잽싸게 돌렸다.

“미안. 기분 나빴구나. 하긴 뭐 오는 처음 봤는데! 이해해.”

이해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선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분명 복도에서 몇 번 스쳐지나갔던 적이 있었겠지만 존재도 제대로 알 지 못했던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다는 것에 불쾌해졌다.

그냥 남 일처럼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면 될 것들을 괜히 붙잡아서 일을 크게 만들고 자신을 지탱해 주는 어떤 것까지도 흔들었다는 것에 짜증이 치솟았다.

“너! 날 언제 봤다고 이러는 거야? 내가 만만하게 보여?”

가시가 빼곡히 박힌 말은 말 하는 사람까지도 상처를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자신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소리라는 것을 마음속에서 인정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역시 티내는 것도 싫은 선주는 그만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해 버렸다.

혜민은 심각하게 정색을 하고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빤히 쳐다보는 선주를 보고 뭔가를 실수 했다고 생각하고 당혹스러워 했다.

그래서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지만 도통 뭐가 잘 못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난 선주를 보고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아 정신이 아득해지던 찰나 직격포를 맞아버렸다.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이니? 아무렇게나 동정해주기만 하면 다 돼는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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