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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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2020년에 읽은 책 중 최고라며 선물해 준 책.

소중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서 마음에 물기가 차올라서 한 번에 길게 읽는 것이 힘들었다.

커다란 사건이 있는 것도, 놀라운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읽다 보면 빠져들고 슬퍼졌다.

모든 내용이 재밌었지만 그중 가장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건 <흑설탕 캔디>였다.

할머니의 일기장을 통해 들여다본 그녀의 삶은 그 당시엔 알지 못했지만, 고독에 숨이 막혔고 외로움에 갇혔다.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겠지. 그렇지만, 나는 가까스로 생긴 친구들 눈에

지나치게 심각하고 유머 감각이 없는 전형적인 아시아 여자애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감힘을 쓰느라,

할머니가 막 생리를 시작한 나에게 생리대를 사주기 위해 슈퍼에 갔지만

탐폰들만 잔뜩 늘어진 진열장 앞에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라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긴긴 하루를 견디다 지루해지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일본 식품점에 가지만

일본인 주인과 유창하게 의사소통할 때마다 자긍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는 사실 역시 미처 알지 못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버티다,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시선을 빼앗긴다.

피아노를 치던 감각과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그녀는 용기 내 피아노를 치게 해줄 수 있냐는 부탁을 한다.

그렇게 브뤼니에 씨와의 만남이 시작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그리고 할머니는 일어나서 브뤼니에 씨와 함께 탑 위에 각설탕 하나를 더 쌓았다. 하나를 더. 또 하나를 더.

그러다 탑이 무너져내릴 때까지. 각설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할머니와 브뤼니에 씨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말이 통하지 않아 한불사전으로만 대화할 수 있는 두 사람은 그럼에도 음악을 통해 시간을 함께하고 기억을 나눈다.

또다시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스스로를 바보같이 여기며 상념에 빠진 그녀는 브뤼니에 씨가 천진하게 쌓아올린 각설탕 탑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리고 그녀도 각설탕을 하나 더 쌓는다. 부질없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찾아오는 기쁨의 순간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즐긴다.

그리고 나의 꿈에 나타난 그녀는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다.

손녀인 내가 아무리 떼를 써도 주지 않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내 것이란다."


그녀가 손에 꼭 쥐고 있던 것은 난생처음 먹어본 황홀하리만큼 달콤한 흑설탕 캔디일 것이고, 자기 몫의 행복이다.

<흑설탕 캔디> 속 할머니는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희생의 아이콘이 아니다.

몸은 퇴화했을지라도 마음만은 여전히 뜨겁고 갈망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통해 강요받는 평범함 대신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당신이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유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나는 이 여름, 그런 당신의 분투에 나의 소설들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이야기의 한 부분 같던 작가의 말까지 읽고 나서야 정말 완성된 「여름의 빌라」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애쓰는 사람이 되길,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랑의 세계가 만들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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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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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는 내용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과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까?라는 궁금증과 정세랑 작가에 대한 기대감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들이 다시 시선을 향해 모이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 시선의 10주기를 맞아 시선이 젊은 시절을 보낸 하와이로 떠난 시선의 가족들은 뻔한 제사상이 아니라 조금 특별한 제사상을 준비한다. 하와이에서 시간을 보내며 가장 의미 있는 음식, 물건, 혹은 경험을 올리기로 한다. 제사를 마치 게임처럼 경쟁하는 모습은 우리의 평소 인식과 전혀 다르지만 거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방법이기 때문에.


가족 모두 각자 시선과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에 맞는 시선의 글과 인물의 사연을 함께 풀어나가 지루함도 덜고 둘만의 추억을 공유 받는 기분이 든다.

시선으로부터,라는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눈과 눈이 마주치는 그 시선을 말하는 줄 알았다. 심시선이라 인물에게서부터 시작된 이야기임을 깨달은 건 조금 부끄럽게도 한참 읽고 나서였다. 시선으로부터, 이보다 더 책의 모든 것을 표현할 말이 있을까?


T에서의 학살을 피해 하와이로 도망치듯 떠난 시선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잠깐의 휴식을 보내던 도중 마티아스를 만난다. 예술가라고 소개한 마티아스는 시선을 뮤즈라는 이름의 도구로 사용했다. 시선은 마티아스와 함께 독일로 떠나고 그곳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도구로 이용하는 마티아스의 곁에서 살아나간다. 그리고 요제프 리의 도움을 받아 마티아스를 떠나기 직전, 마티아스는 자살한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 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이 죽음을 통해 그동안 시선을 착취한 마티아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을 견디지 못한 비운의 예술가가 된다. 그리고 시선을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말들을 피해 시선은 한국으로 돌아와 그리는 것을 그만둔다. 그 대신 글로써 마음을 표현한다. 절망의 바닥까지 쫓겨났던 시선은 다시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용기와 단단한 의지가 책 너머로 읽고 있는 나에게도 느껴졌다.



"심시선 여사 닮았으면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곁에서는 난정이 비행 시간이 다른 우윤을 안고 놓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정도 명혜의 말에 어느 정도 위안을 얻었다. 우윤이는 약해 보이지만 시선으로부터 뻗어나왔지. 지지 않고 꺾이지 않을 거야. 그걸로 충분할 거야.

*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우윤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 지수는 기름유출 사건을 도우기 위해 따로 떠난다. 명혜가 지수에게 하는 말과 난정이 우윤을 보며 하는 생각을 보며 '시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꺾이지 않고 나아갈 것이란 믿음이 얼마나 단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 믿음과 용기가 전해졌다. 책을 읽는 내내 실패하고 바닥으로 내쳐졌지만, 끝끝내 다시 일어나 계속해냈던 사람의 힘이 내 안에도 생겨나는 것 같았다. 그 용기를 잊지 않고, 잃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서 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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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라디오
남효민 지음 / 인디고(글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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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라디오는 찾아 듣기 보다 자연스럽게 내 주위에 있는 것에 가까웠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이어폰을 통해 듣는 노래보다 라디오 속 사연에 집중한 적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면 라이브를 듣는 재미도 쏠쏠했다.

내 기억 속 나의 첫 팝송은 태연과 티파니가 라디오에서 부른 because of you였다.



아니, 사람들이 라디오에 원하는 게 바로 그거라고 해야 할까? 익숙하고 편안할 것, 따뜻할 것, 그래도 있어줄 것.

그러고 보니 세상에 라디오 같은 사람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큰 욕심일까?

*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다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어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때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 따뜻한 시간들은 여전히 우리 기억 속 어딘가 머물며, 다른 곳에서 디제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만나더라도 우리에게는 따뜻하게 얘기를 건네던 디제이로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소리와 영상을 통해 순식간에 주위를 사로잡는 티비와 달리 라디오는 오직 목소리를 통해서만(보이는 라디오도 있긴 하지만) 이야기를 전하고 마음을 전한다. 그래서 담백하지만 진솔한 매력을 가진 독특한 매체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디제이와 청취자 간에, 비록 얼굴을 모르지만, 함께하는 시간들이 그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 사실도 참 낭만적인 것 같다. 무한한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타인을 만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로 함께 하는 라디오가 사랑받는 이유는 익숙하면서도 편안해서,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함께 있어줄 것 같아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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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13
위더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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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용기를 내! 지금까지 내가 안트베르펜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건 나약한 마음이나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단다."

 

벌써 세 번째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만화로 먼저 접했던 《플랜더스의 개》가 새롭게 나왔다.

파트라슈와 네로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우정을 쌓아왔는지 다시 한번 읽으며 그들의 우정이 정말 단단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네로를 외면할 때 유일하게 곁에 있어준 파트라슈.

네로와 파트라슈는 처음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함께 마지막을 맞았다.

어린 네로에게 유독 가혹했던 추위와 더욱 매서웠던 주변 사람들이 네로가 떠난 뒤 뒤늦게 후회하는 모습이 참.. 왜 그랬을까 하는 원망도 들었다.

파트라슈와 네로가 더 이상 추위에 떨지 않고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뛰어놀 수 있는 곳에서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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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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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이렇게 파격적인 내용을 따뜻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판타지스러운 가정이지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드는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보노보의 몸에 들어간 사람의 정신. 말도 안 되는 문장이지만 책을 읽고 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영장류 사육사인 이진이는 자신이 아기 때부터 키운 침팬지 팬의 출산을 앞두고 구조대의 요청을 받아 스승과 함께 불이 난 인동호로 간다. 나무 위에 위태롭게 있는 침팬지는 가까이서 보니 인간과 가장 가까운 존재, 보노보였다. 진이는 자신이 사육사를 그만두게 된 사건을 애써 머릿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구조에만 힘쓴다. 무사히 구조하고 영장류센터로 가며 자신이 구조한 보노보에게 JINNY, 지니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러다 갑자기 튀어나온 고라니 때문에 사고를 당한다. 그때부터 진이의 이야기는 지니의 몸에서 진행된다.


한편 삶의 의욕을 모두 잃고 자판기 아저씨의 말을 따라 무곡 영장류센터에 온 민주는 마땅히 잘 곳을 구하지 못해 출입 금지 지역인 골짜기 속 정자로 간다. 소리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민주는 자던 도중 사고 소리를 듣는다. 간장 종지라는 비아냥을 듣던 민주는 자신의 과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사고 현장으로 간다. 스승과 진이, 지니가 타고 있던 밴에는 스승만 남아있지만, 민주는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119신고 후 빠르게 도망친다. 그리고 도망가던 중 진이의 사원증을 발견한다.


그 다음날 진이, 지니와 민주는 만난다. 그렇게 둘의 계약이자 우정은 시작된다. 진이가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민주의 도움을 받고 민주는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씌어있던 간장 종지의 틀을 벗어낸다. 진이는 지니의 램프 속으로 불려 들어가는데 그때마다 지니에게 동화된다. 지니의 과거 경험을 함께하면서 지니의 시선에서, 지니의 감정을 읽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킨샤사에서 만난 보노보가 지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제야 자신이 애써 감춰둔 그날의 기억과 죄책감이 진이를 덮친다. 자신이 용기 내지 않았던 그 순간 때문에 지니는 인간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지금껏 지니는 램프를 통해 침입자에게 호소해온 것이었다. 삶의 타당성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자신의 삶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 나는 내게 돌아가야 했다. 다음 교차가 오기 전에, 내 몸이 엔진을 완전히 멈추기 전에, 지니에게 지니의 삶을 돌려줘야 했다. 그것이 타당한 선택이었다. 나아가 지니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지니가 떠나온 곳. 나고 자란 자신의 세계, 밀림 속으로. 이는 내가 수행해야 할 삶의 마지막 의무였다.



지니에게 지니의 삶을 돌려주기 위해, 진이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몸으로 돌아간다. 진이의 삶은 끝이 나지만 덕분에 지니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민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진이와 민주는 구하지 못한 순간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철장 속 보노보를 구하지 못하고 도망친 진이와 해병대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리를 그냥 지나친 민주, 두 사람은 진이를 진이의 몸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힘을 모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를 이겨낸다. 지니의 삶을 지니에게 돌려주기 위해 도망치지 않는 진이와 진이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민주. 두 사람이 자신을 얽매고 있던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더 큰 사람이 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지니에게도 자신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빼앗긴 지니의 삶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상처받고 자신의 삶을 잃었을까.


다소 황당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를 이겨낼 용기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을 많은 이가 읽기를 바란다.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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