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3
서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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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의 초기작은 현실세계에 대한 환멸과 냉소가 주조를 이룬다. 그 중에서 <강>은 서정인 초기 소설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상적 삶의 질곡과 냉소, 상처와 연민이 진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강은 흘러가는 것이므로, 여행을 상기하시키지 않습니까. 우리의 살림살이도 그렇게 흘러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강'이란 제목은 그런 우의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강'을 쓸 때 저 자신도 젊은 세대였던지라 급하고 과격했어요. 자연히 당시의 사회 현실을 답답해했지요. '강'을 지배하는 우울한 분위기는 그렇게 좌절했던 세대의 심경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요.(작가의 인터뷰 중에서)

소설 속에서 강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이라는 제목에서 쉽게 연상 할 수 있는 것은 단절감이다. 타인과 소통하는 길을 잃어버리고, 진실은 가려져 있고, 현실과 꿈은 괴리되어 있고... 사회 속에서 고립되고 단절되어 파편화 되어버린 개인의 삶과 진실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어디로 흘러가는 지도 모르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는 시작부분과, 대학생 김씨가 잠들어 있는 여인숙으로 걸어갈 때 술집작부가 함박눈을 맞는 마지막 부분은 소설 전체를 원형적인 구조로 만들고 있다. 이는 끊임없이 흐르지만 결국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강의 이미지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으며, 쳇바퀴 돌 듯 하루 하루의 삶에 안주하는 소시민적 태도와도 연관된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은 그 속에 신비한 것을 숨기고 있을지 모를 환상을 심어주게 마련이지만, 작중 상황 속의 눈은 소설적 낭만에 반발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부서져 버린 꿈과 더러운 현실의 간극에서 고뇌하지만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늙은 대학생 김씨, 현실에 안주하는 소시민적 삶의 태도에 깊이 물들어버린 전직교사 박씨, 현실에 적당히 순응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세무서 직원 이씨, 그리고 술집작부는 모두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강은 결국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 자신 안에, 우리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일상적 삶의 환멸과 냉소,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줄 존재로 술집작부를 내세운다. 때로는 포근한 어머니의 품안이 되고, 따뜻한 누나의 손길이 되어버린 그녀는 작가의 분신이다.

서정인은 경제 개발의 이데올로기가 광폭하게 사회를 훑고 지나간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별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나 반전의 효과를 노리기보다는 일상적 삶의 흐름 속에서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이것 또한 강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시대의 상처와 아픔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상흔 투성이다. 아직도 서정인의 <강>이 명작선에 포함되어 끊임없이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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