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를 위한 안내서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까지 인류가 상상한 온갖 저세상 이야기
켄 제닝스 지음, 고현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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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세계를 여행하는 모험가를 위한 안내서>


처음 딱 책 표지를 봤을 때 몇년 전에 봤던 애니메이션 뮤지컬 영화 <코코>가 떠올랐다. 그때 멕시코의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을 처음 접하면서 우리나라와 다른 세계의 사후 세계는 어떨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이 책도 참 흥미롭게 읽었다.


일단 신화와 종교부터 책, 영화, 텔레비전, 음악과 연극까지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묘사한 사후세계를 다루고 있어서 정말 방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책 안을 보면, 정말 여행서적처럼 재미있는 부분부분을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 사진처럼 현지 정보란이 따로 마련 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런 작은 네모 안엔 현지 정보, 현지 식사 정보, 현지 의상 정보 등 재미있는 작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는데, 읽으면서 정말 책의 컨셉 대로 내가 이 사후세계에 간다면? 하고 상상하며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줬다.


이렇게 당일 여행법이나 머물곳, 교통편을 소개해주는 부분도 즐겁고 재밌는 부분!


개인적으로는 참 재미있던 챕터가 대중매체에서 묘사한 사후세계였는데, 내가 언급했던 <코코>나 재밌게 봤던 드라마인 <굿플레이스>에서 묘사한 사후세계를 다시 보는 것도 참 즐거웠고, 경험해보지 못한 작품의 경우에는 한 번 읽어보고 시청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레퍼런스로 삼아 읽어보기도 좋지만, 그냥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재밌게 읽을 수도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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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덴마크 선생님 - 불안과 우울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는 법 배우기
정혜선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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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덴마크의 대안학교에서 생활하고 배웠던 것을 풀어놓는 에세이다. 무광에 거친 느낌의 표지, 검은 바탕과 붉은 글씨가 어쩐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제목인 <나의 덴마크 선생님> 아래 - 불안과 우울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는 법 배우기 - 라는 부제가 써 있었다. 지금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만큼 적절한 주제가 있을까 싶다.

저자가 다녔다는 이 덴마크 대안학교는 정말 꿈같은 학교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고 받는 수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토론하고 서로의 경험을 들려주며 이어가는 수업은 꼭 씨실과 날실로 짜인 따뜻한 뜨개 목도리 같은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부러웠던 것은 사실, 덴마크 대안학교 그 자체라기 보단 저자의 결심과 행동력이었다. 느린 학생으로 돌아가 다시 무언가를 배울 결심을 하고,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행동력이 너무도 부럽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계속 나도 다시 배우고 싶고,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열실히 들었다. 그리고 그 배움과 성장이 절대 단순히 머릿속에 지식을 구겨 넣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배움과 교육, 성장에 대한 책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잘 읽힌다. 아주 짧은 이야기들이 분류없이 시간 순서대로 줄줄 이어지는 것 같지만 천천히 하나의 주제로 집합되어 간다. 저자와 함께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기분.

(코로나 때문에 바다 건너 여행이 쉽지 않은 지금, 여행을 온 기분도 맞볼 수 있다!)

p.50
좋은 교사란 언어적인 이유로든 심리적인 이유로든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학생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구나. 지금 이 학생의 상태가 어떤지,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p.135
거트루드 선생님은 우리가 심은 작물의 열매를 다음 학기에 오는 다른 사람들이 먹게 될 것이라고, 인생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p.304
길을 잃는 것을 싫어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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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첫독자 도서협찬으로 받아 읽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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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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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북클럽문학동네 가제본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출간 전에 읽게 된 소설 <버터>.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 음식 소설이다. 판이하게 다른 두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
남자들을 유혹해 돈을 갈취한 후 살해한 혐의로 2심 재판을 앞둔 ‘가지이 미나코’. 그녀의 꽃뱀 행각보다 더 주목을 받는 것은 가지이의 외모다. 남자들을 ‘유혹’했다고 하기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뚱뚱하고 보잘 것 없는 외모때문. 가지이를 독점 인터뷰하고 싶은 기자, ‘마치다 리카’는 가지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녀의 요리 블로그를 탐독한다.

리카는 가지이와는 정반대의 외모, 성격을 가졌다. 큰 키에 마른 체형인 리카는 직업도 없이 남자의 돈으로 살았던 가지이와 반대로 자신의 직업에 열정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이다. 요리를 해먹지도 않고, 남자에게 모든 것을 쏟기보다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만난다. 그러나 가지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가 알려주는 요리법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리카는 어느새 가지이에게 동화되고 잠식된다. 급기야 가지이가 남자들을 죽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
처음 소설을 읽을 때는 잘 안 읽혔다. 하지만 리카가 가지이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버터간장밥을 만들어 먹을 때부터 쑤욱 빠져들었다. 유즈키 아사코의 소설은 처음이지만 음식 소설의 대가라고 불린다는데 정말 음식, 미각에 대한 묘사가 엄청나다.

리카의 목 안으로 신기한 바람이 새어나왔다. 차가운 버터가 먼저 입천장에 서늘하게 부딪혔다. 갓 지은 밥과의 콘트라스트는 질감, 온도와 함께 선명해졌다. 차가운 버터가 이에 닿았다. 부드럽게, 잇몸에까지 스며들 것 같은 그런 식감이다. 이윽고 그녀의 말대로 녹은 버터가 밥알 사이로 흘러넘쳤다. 정말로 황금빛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구수하고 향기로운 큰 파도가 밥에 엉키며, 리카의 몸을 저 너머로 흘러가게 했다.
- P.43

이외에도 정말 가지이가 남자들을 모두 죽인 것이 맞는지를 추측해나가는 과정도 미스터리 추리극 같이 전개가 되어 다채로운 감상을 만들어낸다. 리카를 따라 가지이라는 사람을 탐색해나가며 의심하기도 하고 동화되기도 하면서 책에 푹 빠져볼 수 있었다. 가지이와 리카 외에도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는데, 인물들이 입체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어 더 읽을 맛이 난다.

또다른 좋았던 점은 이 소설을 통해 현재 일본 사회의 여성혐오적 시각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남성의 비만과 다르게 여성의 비만은 노력의 부족으로 여겨지는 점, 결혼을 원하는 여성이 보여야 하는 가정적인 면모, 여성에게 챙김받지 못하면 제 한 몸 간수조차 못하는 남성들의 분노와 원망, 그 분노와 원망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죄책감을 느끼는 여성들… 그런 와중에도 착실히 자신의 욕망을 찾아가는 여성 캐릭터들이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
P.66
신기해요. 어째서 세상 남자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으면 생활이 한없이 엉망이 되는 걸까요. 그리고 그게 자기 관리가 부족한 게 아니라, 불쌍하고 안타까운 일로 세상에 관대하게 용서받는 걸까요…….

🔖
P.154
일본 여성은 강한 인내와 노력과 고지식함과 금욕과 동시에 여자다움과 부드러움, 남성을 돌보는 것까지 당연한 듯이 요구받고 있어요. 그 양립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다들 괴로워하는데도 노력을 강요받고 있죠. 그러나 당신을 보고 있으면 확실히 알겠어요. 그런 것, 양립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걸. 양립한들 우리는 아무것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걸. 아무리 지나도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걸.

🔖
P.407
단 한번의 요리가 사람의 마음을 구하다니, 그런 건 환상이다. 만약에 가능하다 해도 그건 훨씬 훌륭한 맛일 경우다. 여자들이 그 환상에 얼마만큼 괴로워하고, 속박되고 있는지.

🔖
P.563
가족의 형태가 이렇게 다양화된 현대에서 그런 건 이제 아무 실태도 없는 거잖아요. 형태 없는 이미지에 휘둘려서 남자도 여자도 압박을 느끼고 괴로워해요. 사실 이 사건의 본질은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 출간전 가제본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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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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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 맥스 글래드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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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미래적인 배경에서 일어나는 가장 고전적인 사랑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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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goldenbough_books )에서 받은 세 번째 소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를 완독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시간 여행’과 ‘시간 전쟁’을 소재로 하는 소설이다.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상상했던 내용은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 같은 것이었다. 미래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과거를 바꾸려 투입된 요원들의 두뇌 싸움, 현란한 액션…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오히려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아주 먼 미래, 인류는 ‘에이전시’와 ‘가든’ 두 세력으로 나뉘어 시간 전쟁을 일으킨다. 두 조직은 실가닥 같은 시간 타래를 위아래로 넘나드는 요원들을 파견해 모든 시간대의 지배권을 두고 끝없이 싸운다. 에이전시의 ‘레드’와 가든의 ‘블루’는 각각 조직의 최고 요원이다.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개량된 존재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임무를 수행하며 편지를 주고 받는다.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진 편지는 아니다. 때로는 물 분자의 이동에, 때로는 나무의 나이테에, 때로는 독초의 열매 속에, 때로는 꿀벌의 춤에 숨겨진 편지들이다. 처음엔 상대를 도발하는 장난같던 편지는 점차 상대를 갈망하는 러브레터로 변모한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추적자가 그들의 뒤를 쫓으며 편지의 잔해를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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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엔 집중하기가 꽤 어려운 소설이다. 일단 초반 배경 설명이 없어도 너무 없다. ‘에이전시’와 ‘가든’이라는 세력이 어째서 시간선의 패권을 두고 싸우게 되었는지, 어떤 이유와 원리로 인간을 개량해 초월적인 존재인 요원들로 만들기 시작했는지, ‘블루’는 어째서 ‘레드’에게 처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는지, 그 어떤 것도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오직 두 사람이 주고 받는 편지를 통해 더듬거리며 알아가는 것 뿐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방식의 전개는 레드와 블루의 감정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서로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편지로만 소통을 하며 상대를 알아나가고 이해하기 되고 결국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두 사람의 외로움과 허기, 갈망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독자도 모르는 사이 동화되어 읽힌다.

아마도 사건의 진행에 집중하는 책을 선호하는 이들에겐 조금 인내가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분량이 300쪽이 되지 않고 대화체인 편지글이 많으니, 날잡고 읽으면 하루만에 다 읽은 후 소설이 주는 잔감상에 푹 빠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시간 여행 소재와 로맨스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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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이해야. 대화야. 승리야. 그리고…… 게임이야. -p.69

🔖
네가 준 먹이를 받아서 스스로를 연마한 허기, 너무나 예리하고 눈부시게 벼려져서 네 몸을 가르고 새로운 것을 분출시킬지도 모르는 허기를, 너는 가져 본 적이 있어? -p.79

🔖
그러니까 이 편지 속에서 나는 너의 것이야. 가든의 표적도, 네 임무의 일부도 아닌, 오로지, 너의 것. -p.118

🔖
너는 너야. 앞으로도 그렇게 남아줘. 나도 그럴 테니까. -p.136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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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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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김유원



현실적이고도 찝찝하고 희망적인 실패담에 대하여.

4.5




'불펜'은 야구 시합 중 구원투수가 경기에 나가기 전 준비운동을 하는 공간을 말한다. 선발투수가 지쳤거나 부상을 입어 더이상 공을 던지기 어려울 때 구원투수가 시합에 투입되어 공을 던지는 것을 '계투'라고 한다. <불펜의 시간>은 10년 동안 계투만 도맡아온 야구선수 '권혁오'의 중학교 동창, '이준삼'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중학생 때까지 야구 선수로 훈련하며 프로 입단을 꿈꿨지만, 완벽한 투수인 혁오의 벽 앞에서 특출하지 않은 자신을 깨달아버린 준삼. 이후 그는 평범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평범'이란 '뻔한 것', '예측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준삼은 '평범한'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예측할 수 없는 기쁨보다 예정된 모욕'을 스스로 선택한다.



누가 나에게 예측할 수 없는 기쁨과 예정된 모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예정된 모욕을 선택할 것이다. 눈물을 흘린다 해도 예측 가능한 편이 좋다. 휴가가 끝나면 갈 곳이 정해져 있는 삶이 좋다. 혁오가 볼넷을 주고도 만족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 p.175



제1노조원들이 겪는 부당함을 모른 척하고, 부장의 다리 사이를 지나며 왈왈 짖고, '비열해질 기회'까지 잡아내는 삶. 준삼은 스스로에게서 나는 악취와 역겨움에 지쳐간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한 사람이 바로 '혁오'다. 


혁오는 한 경기에서 기껏해야 2이닝을 겨우 던지는 계투수다. 9회에 등판하면 어김없이 볼넷을 던져버리는 '쿠크다스'같은 정신력을 가진 혁오의 투수 자세는 중학생 때와 다름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준삼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혁오가 9회에서 볼넷을 던지는 건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혁오'의 비극은 프로 데뷔 이전 마지막 고등학교 시합이었다. 프로에 입단하지 못하고 혁오의 투구에 3진 아웃을 당해 마지막 경기마저 패배한 뒤 자살한 친구의 환영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제 앞에 나타난 친구에게 차마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한다. 상담을 받고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보지만 그는 오히려 승자와 패자뿐인 야구에 회의감과 의문만 가지게 된다.



왜 소수의 선수만 프로가 되는 거야? 왜 1군과 2군을 나누는 거야? 왜 굳이 연장 게임을 해서까지 승패를 가리려는 거야? 연봉과 성적은 왜 다 공개하는 거야? 왜 모두 승자가 될 수 없는 거야? - p.157



그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야구와 스포츠에게 끝없이 질문한다. 왜 소수의 선수만이 프로가 될 수있는 건지, 왜 1군과 2군을 나누는 건지, 왜 모두가 승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인지. 결국 그는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승리 투수가 되지 않기로, 패자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장장 10년 동안 말이다.


결국 혁오의 볼넷 기록에 의문을 가진 이가 생긴다. 그녀는 스포츠기자, '이기현'. 그녀는 초등학생일 때는 야구에 재능이 있어 프로 입단을 꿈꿨지만, 여자 프로 리그가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스포츠 기자가 되었다. 특종에 목말라 승부조작 야구선수들을 추적하던 그녀는 혁오가 승부조작 카르텔에 가담했다는 확신을 갖고 혁오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도리어 혁오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린다. 그녀 또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기사가 중요할까? 특종이 중요할까? 얼마나 중요할까? 내가 하는 일이 이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 p.192



<불펜의 시간> 속 세 인물, 준삼, 혁오, 기현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의문에 맞선다. 외면하기도 하고 반기를 들기도 하고 동화되어 있던 자신을 깨닫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값진 승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처절하게 실패하고 마운드에서 내쳐진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정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은 시합이 아니다. 사회의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삶은 시합이라고 소리치고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하지만 삶이 정말 시합이라면, 왜 시합이 끝나고 승패가 갈린 후에도 삶은 끝나지 않는가? 사람의 인생은 승패가 갈리고도 계속 이어진다. 삶이 시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 세 사람은 패배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증명해낸다. 회사에서 짤렸다고, 직장을 잃었다고,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삶이 끝난 것은 아니란 것을.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한 후에도 삶은 이어지고, 우린 다시 불펜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그 불펜에서 다시 경기를 준비하며 몸을 풀기도 하고, 때로 어떤 사람은 불펜에서의 시간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며 진짜 승리의 미소를 짓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만큼 현실적이면서 찝찝하고 희망적인 실패담이 있을까.





※ 한겨례문학상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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