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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평점 :
<불펜의 시간>, 김유원
현실적이고도 찝찝하고 희망적인 실패담에 대하여.
4.5
'불펜'은 야구 시합 중 구원투수가 경기에 나가기 전 준비운동을 하는 공간을 말한다. 선발투수가 지쳤거나 부상을 입어 더이상 공을 던지기 어려울 때 구원투수가 시합에 투입되어 공을 던지는 것을 '계투'라고 한다. <불펜의 시간>은 10년 동안 계투만 도맡아온 야구선수 '권혁오'의 중학교 동창, '이준삼'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중학생 때까지 야구 선수로 훈련하며 프로 입단을 꿈꿨지만, 완벽한 투수인 혁오의 벽 앞에서 특출하지 않은 자신을 깨달아버린 준삼. 이후 그는 평범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평범'이란 '뻔한 것', '예측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준삼은 '평범한'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예측할 수 없는 기쁨보다 예정된 모욕'을 스스로 선택한다.
누가 나에게 예측할 수 없는 기쁨과 예정된 모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예정된 모욕을 선택할 것이다. 눈물을 흘린다 해도 예측 가능한 편이 좋다. 휴가가 끝나면 갈 곳이 정해져 있는 삶이 좋다. 혁오가 볼넷을 주고도 만족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 p.175
제1노조원들이 겪는 부당함을 모른 척하고, 부장의 다리 사이를 지나며 왈왈 짖고, '비열해질 기회'까지 잡아내는 삶. 준삼은 스스로에게서 나는 악취와 역겨움에 지쳐간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아름답다'라고 느끼는 한 사람이 바로 '혁오'다.
혁오는 한 경기에서 기껏해야 2이닝을 겨우 던지는 계투수다. 9회에 등판하면 어김없이 볼넷을 던져버리는 '쿠크다스'같은 정신력을 가진 혁오의 투수 자세는 중학생 때와 다름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준삼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혁오가 9회에서 볼넷을 던지는 건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권혁오'의 비극은 프로 데뷔 이전 마지막 고등학교 시합이었다. 프로에 입단하지 못하고 혁오의 투구에 3진 아웃을 당해 마지막 경기마저 패배한 뒤 자살한 친구의 환영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제 앞에 나타난 친구에게 차마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한다. 상담을 받고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보지만 그는 오히려 승자와 패자뿐인 야구에 회의감과 의문만 가지게 된다.
왜 소수의 선수만 프로가 되는 거야? 왜 1군과 2군을 나누는 거야? 왜 굳이 연장 게임을 해서까지 승패를 가리려는 거야? 연봉과 성적은 왜 다 공개하는 거야? 왜 모두 승자가 될 수 없는 거야? - p.157
그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야구와 스포츠에게 끝없이 질문한다. 왜 소수의 선수만이 프로가 될 수있는 건지, 왜 1군과 2군을 나누는 건지, 왜 모두가 승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인지. 결국 그는 자신만의 답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승리 투수가 되지 않기로, 패자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장장 10년 동안 말이다.
결국 혁오의 볼넷 기록에 의문을 가진 이가 생긴다. 그녀는 스포츠기자, '이기현'. 그녀는 초등학생일 때는 야구에 재능이 있어 프로 입단을 꿈꿨지만, 여자 프로 리그가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스포츠 기자가 되었다. 특종에 목말라 승부조작 야구선수들을 추적하던 그녀는 혁오가 승부조작 카르텔에 가담했다는 확신을 갖고 혁오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도리어 혁오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린다. 그녀 또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기사가 중요할까? 특종이 중요할까? 얼마나 중요할까? 내가 하는 일이 이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 - p.192
<불펜의 시간> 속 세 인물, 준삼, 혁오, 기현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의문에 맞선다. 외면하기도 하고 반기를 들기도 하고 동화되어 있던 자신을 깨닫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값진 승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처절하게 실패하고 마운드에서 내쳐진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정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은 시합이 아니다. 사회의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삶은 시합이라고 소리치고 승자와 패자를 가른다. 하지만 삶이 정말 시합이라면, 왜 시합이 끝나고 승패가 갈린 후에도 삶은 끝나지 않는가? 사람의 인생은 승패가 갈리고도 계속 이어진다. 삶이 시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 세 사람은 패배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증명해낸다. 회사에서 짤렸다고, 직장을 잃었다고,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삶이 끝난 것은 아니란 것을.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한 후에도 삶은 이어지고, 우린 다시 불펜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그 불펜에서 다시 경기를 준비하며 몸을 풀기도 하고, 때로 어떤 사람은 불펜에서의 시간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며 진짜 승리의 미소를 짓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만큼 현실적이면서 찝찝하고 희망적인 실패담이 있을까.
※ 한겨례문학상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