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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아파트 만들기 - 재건축 열풍에서 아파트 민주주의까지, 인류학자의 아파트 탐사기
정헌목 지음 / 반비 / 2017년 11월
평점 :
가치있는 아파트 만들기
일명 닭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아파트, 사실 아파트...하면 선입견이 좋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런 선입견을 사그리 날려버린지 오래되었다. 너무나 편안하고 깔끔하고 그런 생활에 이미 젖어버린 탓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집, 내 아파트에 정이 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사실 나는 시멘트 건물의 차가운 냉기가 싫었다. 보일러를 넣지 않은 겨울에, 뼈가 시리도록 파고드는 그 차가움이 아파트에 정이 들지 않게 하였다. 푸른 생명이라곤 발견할 수 없는 죽어있는 건물이란 선입견을 영영 버리지 못하며 10여년을 살다보니, 이젠 그런 아파트 문화에 푹 젖어서 타성적으로 살아가던 작년 어느 날, 아파트 화단에서 바람에 하늘거리는 벌개미취 꽃을 발견했다. 도로에서나 가끔 볼 수 있던 꽃이고, 어느 야산 아래서나 봄직한 꽃인데 우리 아파트 화단에서 보랏빛 꽃으로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때 무엇인가 보물을 발견한 듯 내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파트 후문 경비아저씨가 벌개미취를 봄에 몇 폭 갖다 심으셨는데, 그 꽃들이 씨앗을 퍼트려
올해 화단 가득 퍼졌다. 아저씨는 틈만 나면 풀도 뽑아주고, 거름과 물을 주면서 알뜰살뜰 가꾸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화단에 무언가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화원을 오며가며 살폈다. 가져다 심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찾아 헤매다가, 주고, 솎아도 주면서 화단을 곱게 가꾸어 놓으신 거였다. 그 꽃들을 보는 순간, 아저씨의 정성이 가득 느껴지면서, 나의 아파트에 대한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얼마 전 층간 소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일어난 사건이 있었다. 그 뉴스를 듣는 순간, 사람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사하고 얼마 있다가 위층에서 이사 떡을 돌렸다. “O층에 이사 왔어요. 우리 아이들이 남자아이들이라서 좀 시끄러울 거여요. 시끄럽더라도 조금 양해해주세요. 미안해요.”라 인사를 했다. 사실 이사하던 첫날부터 꿍꽝거리고, 날마다 피아노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들려서 좀 신경이 쓰였던 터였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더니, 아침저녁으로 시끌버적지근한 위층 덕분에 우리들은 음악을 틀리 시작했다. 시끄러운 것도 만성이 돼서 나중에는 신경이 무뎌졌다. 시간만 나면 뭔가 만들어오는 그 안주인 덕분에 그 시끄러움도 나중에는 사람 사는 냄새다 생각할 만큼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경험상 그 댁 사람들이 예쁘니 소음도 음악처럼 들렸던 것이리라.
우리 아파트 단지 옆에는 현대아파트가 있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애나 어른이나 목에 힘을 준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사람을 봐도 인사도 안 하는 그 이웃을 보면서, 아파트 브랜드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야기를 해보면 뭔가 한 계단 위의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아파트도 더 좋아보였고, 아파트 주변 조경조차도 왜 그리 고급져 보이는지, 위축되는 느낌이었는데... 어느 날 우리 화단에 야생화가 하늘거리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 아파트도 괜찮네...라는 생각을 했다. 가치부여가 우리 아파트도 나름 생기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현대아파트라고 어깨에 힘을 주던 내 친구, 그리고 그녀의 이웃들이 문득 떠오른다. 왜 사람들은 아파트가 브랜드가 뭐기에, 자신들도 모르는 무의식속에 자의식들이 꽉 들어차는 것일까? 그들에게 느낀 것은 현대아파트와 내 아파트를 놓고 브랜드 서열을 만들면서, 그 서열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투영시킨다는 느낌을 상대방이 눈치 채게 하는 걸까? 곰곰이 집단 무의식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더랬다.
얼마 전 무지개떡건축이란 말을 듣고 감탄했던 적이 있다. 농가, 전원주택, 도시에 있는 주택, 다세대주택, 아파트, 주상복합아파트, ...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이 얼마나 사람들의 의식을 좌지우지하는지, 또 그 집단 공동체의 생활형태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지, 또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는지, 살아가면서,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다. 가치 있는 아파트를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관심, 즉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서로 위하는 마음들이 있을 때 아파트 공동체의 삶도 각박함에서, 삭막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 경비아저씨들을 잘라 버리고 용역업체에 맡기는, 단순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십시일반 밥 한술 떠내려 한 사람 밥그릇을 만드는 일에, 더 가치를 두는 아파트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넓고 높고 그런 공간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가치를 가진 아파트 공동체 집단 지성이 환하게 빛을 발하는 2018년 한 해가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맴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