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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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유작 장편소설. 지난해 서점에서 <가수는 입을 다무네>라는 책이 나온 것을 보고 오랜 시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이제 더는 문학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게 됐지만, 좋아하는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언제고 돌아왔을 때 다시 읽을 그녀의 소설이 이것으로 끝이라니.

그러던 어느 날, 선물처럼, <당신의 아주 먼 섬>이 발간됐다는 걸 알았다. 책의 띠지에는 작가 정미경의 마지막 장편소설이란 말이 붙어 있었다. 남편인 김병종 화가가 그녀의 작업실에서 원고를 발견했다고 했다. 나는 한 문장 한 문장, 그녀가 글을 써 내려갔을 시간을 느끼며 느리게 <당신의 아주 먼 섬>을 읽었다.

 

 

,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

정미경 작가의 소설에는 유난히 슬픔을 간직한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처음 그녀의 소설을 접했을 때는 그런 인물들의 슬픔을 고스란히 공감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조금은 멀리 떨어진 이야기라 느꼈다. 그때로부터 고작 열세 해 정도를 보냈을 뿐이지만, 여러 일을 겪으며 나는,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우연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우연들이 슬픔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야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삶에서 조금도 빗겨 서 있지 않았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의 배경은 남도의 한 섬마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모인다. 정모는 시야가 좁아지다가 결국 시력을 잃고 마는 병에 걸린 이후 고향인 섬으로 돌아왔다. 사랑하는 친구 태이를 잃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우는 엄마 연수의 이끌림으로 정모의 집에서 지내게 됐다. 서커스단에서 지냈던 판도는 이삐 할머니를 따라 섬으로 왔다. 아무 소리도 못 듣고 어떠한 말도 못하는 사람처럼.

세 사람이 만나는 건, 이우가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 정신을 잃으면서부터다. 근처 모래톱에 버려진 배에서 줄곧 지내는 판도는 이우가 물에 빠진 것을 알아채고 이우는 목숨을 건진다. 판도는 이우를 업고 정모에게로 향한다.

이들의 만남은 섬에서 이루어진다. 섬은 바다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것 같지만, 문학에서 은 종종 단절을 극복하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정현종 시인의 시 에서처럼 말이다.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이 섬에서 만난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은 이 한 문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상처가 덧난 자리, 사람이 오다

정모는 바닷가 소금 창고를 도서관으로 꾸릴 계획을 세운다. 소금 창고는 친구 태원의 아버지 영도의 소유였다. 정모는 태원에게 소금 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들고 싶다며 창고를 내어줄 것을 청했고 어렵지 않게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과거 이 섬에서, 연수는 태원과 사귀었고 정모는 연수를 사랑했다. 정모의 아버지는 영도 밑에서 일했는데, 정모 아버지가 소금 창고에서 소금을 챙기는 모습을 본 영도는 들고 있던 대파로 아버지를 내리쳤다. 그 모습을 정모가 지켜보고 있었고 그걸 아버지도 알았다.

정모는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고 소금 창고에 도서관을 짓는다. 그런 그를 판도, 이우가 돕는다. 그러면서 세 사람은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의 상처를 꺼내 놓는다.

 

슬픔이라는 그릇에 담긴 따뜻함이라면 그 힘으로 당분간은 팔을 돌리며 달려갈 수 있지 않겠나. 어쩔 수 없어 얘길 하게 됐지만, 하고 보니 이 얘기를 누군가 한 사람에게는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135p

 

“(중략)태이가 없었다면 더 못 견뎠을 거야. 너한테만 얘기하는데, 염색은, 태이에 대한 오마주 같은 거야. 걔는 나한테 무지개였거든.” -138p

 

정모는 이우에게 자신이 앓는 병에 대해 털어놓으며 마음이 한결 후련해짐을 느낀다. 이우는 판도에게 사랑했던 태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점차 마음을 여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판도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줄 알지만, 실은 판도 스스로가 귀를 막고 입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그랬던 판도가 이우와 만나며 말을 한다는 상상을 해 보기도 한다.

 

말을 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 일단 이렇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110p

  

 

우리의 가까운 섬

소금 창고 도서관은 영도의 방해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다. 태원은 영도의 뜻을 전하려 정모를 만난다. 태원은 과학과 효율에 대해 이야기하고 정모는 느릿한 시간을 이야기한다.

 

“(중략)어릴 땐 몰랐는데, 이 섬이 도서관이야. 시간의 도서관. 백 년 전이 바로 내 발아래 있고 천 년 전이 산자락에 남아 있어.(중략)” -126p

 

정모는 소금 창고 도서관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고 차질 없이 오픈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에게 여러 변화가 일어난다. 이우는 태이의 아이를 가졌고 이를 알게 된 연수와 실랑이를 벌이지만, 나름대로의 화해를 했다. 영도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해 세상을 떠났고 이우는 이삐 할미의 도움으로 태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의식을 치른다.

소금 창고 도서관이 문을 여는 날, 동네 어르신들은 한곳에 모여 음식을 나누며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고 정모의 음악가 친구들은 도서관에 멋진 음악을 불어넣으며 오픈을 축하했다.

 

어떤 시간은, 그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임을 예견하게 한다. 어떤 하루는,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물이 날 것이라는 걸 미리 알게 한다. -194p

  

오픈식 날은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물이 날 것같은 하루로 묘사된다. 문장의 시점은 현재에 머물지만, 이는 미래로부터 바라본 현재다.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 어쩌면 그 누군가는 생을 마감하며 도서관 문을 열고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 나눴던 때를 가장 빛났던 순간으로 기억할 것이었다.

이우, 정모, 판도 세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임으로써 치유하고, 도서관이라는 하나의 시간을 쌓아 올렸다. 도서관이 이들에게는 이었다. 타인에게 가닿기를 꿈꿔보는 공간. 나를 돌아보며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현재에 집중하는 공간.

이 섬은 당신의 아주 먼 섬이 아니라 우리의 가까운 섬이다. 아주 가깝지는 않더라도 서로에게 필요한 거리를 지켜주면서 최대한 다가갈 수 있는 지점. ‘우리의 가까운 섬이다.

 

  

잊어버린 것 아닌, 잃어버린 것

한때는 정미경 작가의 소설을 오해했었다. 그녀가 소설로, 죽음과 삶의 가냘픈 경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그녀의 소설을 차갑고 슬픈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당신의 아주 먼 섬>을 읽고 정미경 작가가 누구보다 따뜻한 말들로 생의 의지를 꾸려나간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소설은 죽음과 삶의 가냘픈 경계에 서 있다기보다, 삶의 가장 한복판에서 사랑하는 것들에 말을 걸고 있었다.

소설을 읽고 한동안 정미경 작가와 그녀의 소설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의 세계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서, 뒤늦은 아쉬움과 후회, 슬픔 같은 감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기도 했다. 한때 그녀의 소설로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위로를 얻었다는 게 떠올라서.

소설 속에서 판도는 이우에게 고둥을 내밀며 손바닥에 쥐여 준다. 왜 주느냐고 묻는 이우에게 판도는 , , , , , , , , , , , , .”라고 손가락 글씨로 답한다. 이우는 잃어버린 게 아니라 , .”버린 거라고 하지만, 판도는 다시 , .”라고 답한다.

나는 정미경이라는 한 작가를 잃어버렸지만, 그것이 그녀의 문학을 잊어버리는 계기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녀의 문학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머물며 하나의 도서관처럼 자리할 거라 믿는다.

독자로서 그녀에게 받았던 위로를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쓰고 보니 깊은 슬픔이 밀려온다.

남겨진 시간 속에서 나는 그녀의 소설을 몇 번이고 읽어 볼 것 같다. 위로받고 싶을 때, 울고 싶을 때, 내 옆에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 책장 속 그녀의 소설이 손을 뻗어 줄 것만 같다.

소설 속, 우는 이우에게 이삐 할미는 우는 게 웃는 거라 말한다. 이삐 할미의 말대로 나는 그녀의 소설이라는 넓은 품에서 울면서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정미경 작가는 커다랗고 따뜻한, 무엇보다 긴 슬픔을 남겼다.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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