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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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생존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바이러스를 피해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미의 생존이 아닌, 삶에 있어 필수 조건이 무엇인지 고찰하게 했다. 생존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지 않는 것은 미루면서, 다양한 선택지 중 몇 가지를 지워가면서 우리는 지금의 시간을 감내하고 있다.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야기 없는 삶은 가능한가? 이야기 없이 과연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 이야기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그런 삶은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란 단순 유희의 차원을 넘어선 우리 존재 자체와 관련 있는 무엇이다. 이야기는 가능할 것 같지 않던 미래까지 실현한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셰에라자드는 이야기하는 행위로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이야기 모음집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소설집이다. 읽는 동안 이야기의 재미에 흠뻑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재미가 곧 삶에 대한 새로운 고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소설집 제목이 말해주듯 키로가는 열여덟 편의 작품에서 사랑, 광기, 죽음을 그린다. 좋은 이야기가 그러하듯 키로가의 작품들은 독자를 삶의 장막 너머로 안내한다.

먼저 만날 수 있는 건 광기의 분위기다. 목 잘린 닭의 백치 아이들이 동생을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깃털 베개에서 아내가 죽는 이유는 무엇인지,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에서 삶과 죽음이 어떤 경계를 사이에 두고 있는지를 따져 보면 어김없이 광기와 마주치게 된다.

키로가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의 비극적 경험을 했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강박관념은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한다. 때로는 불가해한 죽음의 비밀을 자연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일사병에서는 개들에게만 인지되는 죽음의 사자를 그리며, 가시철조망야구아이에서는 말과 소, 폭스테리어의 시선으로 삶과 죽음을 바라본다.

키로가의 작품들에서 죽음은 광기 어린, 환상의 영역에 속한 무엇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태어남과 죽음이 인간 존재의 숙명인 것을 상기하면 키로가가 이야기하는 죽음은 실재하는 공포로 다가오며 끊임없이 현실을 환기한다. 광견병에 걸린 개에서 광견에 물린 (광견병으로 인한 의 착각이라 볼 수 있지만) 어머니와 아내의 의심과 멸시 속에서 삶의 활기를 잃어간다. 코로나19가 창궐한 직후 우리 사회 곳곳에 드러났던 혐오의 시선과 어쩐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의 살인 행각은 좀 더 무겁고 끔찍한 사건으로 다가온다.

작품 속의 광기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작품이 쓰인 시기와는 무관하게 현재의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한다. 목 잘린 닭의 마지막 장면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고, 멘수들이 상기하는 노동과 죽음의 굴레는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다. 삶의 끝이 반드시 죽음이며,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른다는 공포는 책장을 넘길수록 선명해진다. 소설집 속 광기와 죽음의 공포를 횡단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곳곳에 수록돼 있다.

사랑의 계절, 엘 솔리타리오, 이졸데의 죽음에서 보건대 키로가는 사랑 자체를 불가능한 것, 비관적인 전망으로 바라본다. 수록 작품 중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만 등장인물들의 사랑이 이루어진다. 부록을 제외하면 이 작품이 소설집 중 마지막에 실려 있다는 것은 뜻밖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죽음과 광기, 폐허의 상황 속에서 단 한 번의 반짝이는 순간을 만들 수 있다면, 삶은 그래도 살 만한 게 아닐까, 하는.

반짝이는 순간을 다시 삶, 현실로 가져오면 그것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아무리 어둡고 막막한, 광기와 공포의 상황일지라도 한 편의 이야기가 있다면 삶은 조금 더 생기롭고 풍요로울 것이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반짝이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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