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사피엔스를 위한 뇌과학 - 인간은 어떻게 미지의 세상을 탐색하고 방랑하는가
마이클 본드 지음, 홍경탁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길치다. 심지어 고등학생 때는 이사 간 지 얼마 안 돼서 아파트 단지 내에서 길을 잃었다. (총 11동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아파트 단지였음에도) 심각한 길치에 지도도 제대로 보지 못해서 데이트를 할 때면 항상 남자친구가 네이버 지도 어플로 길을 찾아준다. 그런 면에서 길 찾기와 뇌과학을 접목한 이 책이 정말 흥미로웠다.

여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자들보다 공간 능력과 기술적인 측면이 부족하다고 믿는 부모와 교사에 의해 문제가 더해져, 대개 여자아이들은 다양한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장난감과 놀이(트럭 레고 블록, 비디오 게임, 지도 읽기 등등)에서 멀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과학이나 수학 같은 과목에서 처음에 남자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던(그리고 길 찾기에서도 충분히 실력이 있었던) 여자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상당수가 뒤쳐지거나 흥미를 잃기 시작해서 대학에 갈 나이가 되면 이과 과목에 관심이 없어지게 된다. / 184p

이 부분을 읽고 손뼉을 딱 쳤다. 공교롭게도 내가 수학을 포기하기 시작했던 것도 딱 중학교 2학년 때 도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 책에서도 178p에 머릿속으로 회전하기 테스트가 나왔는데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내 눈엔 a, b, c, d가 모두 정답 같았다) 이래서 내가 길을 못 찾나 봐, 하며 합리화를 하다가 나중에 자녀를 키우게 되면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핀란드와 스웨덴처럼 여성이 동등하게 자원과 기회에 접근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길 찾기 능력의 차이가 가장 작았다. 연구에 따르면 생물학적 현상보다는 문화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교육을 하느냐에 따라 자녀의 공간 능력이 좌우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지금부터라도 성차별적인 인식을 조금씩 깨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음 여행에서는 딱 하루만이라도 GPS를 끄고 주변을 느끼며, 하나하나 관찰하면서 돌아다녀야겠다. GPS에 끌려다니는 여행이 아닌, 내가 있는 곳을 알고 내가 가야 할 곳을 아는 그런 여행을 해야겠다. 세상에는 지도에 담기지 않은 매력적인 것들이 수없이 많으니까. 거리에 핀 꽃들, 파란 하늘, 고양이 같은 것들은 지도에 담을 수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문장 하나 인용하면서 마무리해야지.

“우리는 길을 잃고 나서야, 바꿔 말하면, 우리는 세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과 우리 관계의 무한 확장을 깨닫는다.” / 322p

#이니의한줄

첫 번째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찌 보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치 사는 것과 떠나는 것이 모두 동일한 여행의 일부였던 것처럼 말이다. 길은 인생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실제 여행이나 비유적인 여행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길 위의 인생에는 어린 시절의 깨달음이 깃들어 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 또한 발전했다. / 32p

우리는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제대로 알지 못해도 세계 어느 곳에나 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정착해서 산다. 맹수의 공포에 두려워 떨거나 식량과 물을 찾아 끊임없이 길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선조가 사용한 방법과 똑 같은 식으로 지명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길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우리의 주변 세상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인지 장비를 갖추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인 환경은 우리의 행동과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 36p

GPS를 이용해 길을 찾아가는 것은 맹목적으로 남에게 이끌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해마를 훈련하는 데 효과적이지는 않다(사실 뇌의 완전히 다른 부분을 사용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형을 연구하고, 내가 가려고 하는 곳과 내가 있는 곳의 상대적인 위치를 그려서 (다시 말해, 인지 지도를 구축하여) 길을 찾는 것이 인지 능력이 풍부해지는 길이다. 이것은 특히 우울증이나 PTSD 등의 장애로 해마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좋을 수 있다. / 140p

하지만 아델은 늘 자신이 있었다. “저는 깨끗이 포기할 겁니다. 그리고 다시 무엇이든 해볼 겁니다.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시간이 있고, 하고자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대부분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 193p

하지만 GPS에 의존하면 잃는 것이 많다. GPS는 세상을 디지털 기기에 내장된 추상적인 개체로 바꿔버린다. 공간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대가로 우리는 위치 감각을 희생한다. GPS를 이용해서 길을 찾으면 주변의 윤곽과 빛깔이 어떤지 알아보거나, 우리가 지나온 교차로의 수가 몇 개인지 기억하거나, 풍경과 특징에 주목하거나, 얼마나 지나왔는지 기록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주변 환경에 무관심해질 수 있고, 주변 환경에 무관심해지면 무지해진다. 여행을 다녀와서 할 이야기가 없어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길잡이가 될 수 없다. / 31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