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일본 개화기 즈음의 지식인들 중에 유난히 자살한 작가들이 많은 것 같다.

다자이 오사무,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등등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지가 잘나면 얼마나 잘나서 못 살겠다고 죽고 야단이야? '세상이 너를 이해 못해? 그래 나도 너 이해 안해!'하는 삐딱한 마음이 많았는데 이 책을 읽는 순간 일단 자살 사건은 이미 잊혔졌고 '대단하심, 나 지금까지 누구보고 밉상이라고 한거임?'이라며 투떰즈업 상태.



물론 새로이 번역을 한 덕이기는 하겠지만 8~90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시대에 뒤쳐지거나 낡은 느낌이 나지 않는데다 표현력이 장난이 아니다.

번역된 글로도 이렇게 재미있으면 원문은 어떨까... 이건 일어로 읽어야해!

길고 구비구비 유려하게 수사를 구사하는 것도 아닌데 어떤 것을 얘기하려고 했는지 참신하게 확 와닿는 수사. <칼의 노래> 김훈님의 글에서 느꼈던 것 같은, 간결하고 뻔하지 않되, 그것으로 충분한 문장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자기 자신과 실제 속마음 간의 괴리로 괴로워하고, 자칫 자신의 실체가 들통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는 캐릭터는 이 단편 모음집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자전적 소설이라는 <인간 실격>에서 아마도 작가를 평생 괴롭히던 이 감정이 가장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고 이 소설을 쓰겠다고 공언했던 다자이 오사무는 총 세 번에 걸쳐 연재되었던 이 작품의 연재 중에(두 번째 연재를 일주일쯤 앞두고) 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그 전에도 자살 미수 경력이 있던 다자이 오사무는 어느 순간 자신의 평생을 따라다니는 이런 괴로움을 적어보는 건 어떨까,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예술가, 기록가로서 살자고 결심하고 작품활동을 하던 끝에 그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삶을 스스로 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거기서 자칫 존경받을 처지가 된 것입니다 존경받는다는 관념 또한 나를 몹시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울 만큼 사람들을 속이고,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의 전지전능한 자가 그 사기 짓을 간파하는 통에 그만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나고 죽는 것보다 더한 창피를 당한다, 그것이 ‘존경받는다’는 것에 대해 내가 내린 정의였습니다 사람들을 속이고 존경을 받아봤자 누군가 한 사람은 반드시 알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윽고 그의 말을 듣고 속은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 내게 들이닥칠 분노와 복수는 아아, 과연 어떤 것일까.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습니다.23<인간 실격>



그가 말하는 ‘세상’이란 게 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형일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을까요. 아무튼 막강하고 살벌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래도 호리키의 그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그 세상이라는 건 바로 너지?’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오려고 했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 는 게 싫어서 내뱉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세상이 허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허용하지 않는 거겠지

‘그런 짓을 하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져

‘세상사람들이 아니야. 너겠지

당장 세상에서 매장당할거야’

‘세상이 아니야. 나를 매장하는 건 바로 너겠지’

‘너야말로 너 자신의 끔찍함, 괴기함 악랄함 늙은 너구리 같은 성품, 요괴 할망구 같은 성정을깨달으란 말이야!’<인간 실격>94



또 <로마네스크> 같은 단편에서는 성석제 작가처럼 자기는 전혀 웃음기 없이 실실거리며 남을 웃기는 느낌도 있고.




그는 자신의 선술을 이용하여 잘생긴 남자가 되어라, 되어라, 하고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 열흘째 되는 날에 그 염원을 이룰 수 있었다…. 다로는 낙담했다. 선술 서적이 너무 옛날 것이었다.

중략

휘적휘적 걸으면서 다로는 미남이라는 것도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옛날에는 잘 생긴 남자로 통하던 얼굴이 왜 이제는 얼간이로 보이는가.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 얼굴은 이 얼굴 나름대로 괜찮은 것 아닌가.

중략

참고로 다로의 선술 비법은 건들건들 팔짱을 끼고 기둥이나 벽에 멍하니 기대 선 채로 재미었다, 재미없다, 재미없다, 재미없다, 재미없다는 주문을 몇 십번이고 몇 백번이고 낮은 소리로 외워서 마침내 무아지경에 들어가는데 있었다고 한다. 165, <로마네스크>



싸움의 달인, 지로베

이봐, 그건 말이 안 되지. 농담하지 말라고. 당신 그 콧등이 벌겋게 부은 게 아주 웃기는군. 그거 나으려면 석달 열흘은 걸리겠어. 당신 뭔가 마음에 안 들어.

이 말을 언제라도 술술 입 밖에 낼 수 있게 매일 밤마다 잠자리에서 서른 번씩 나지막하게 외웠다. 이 말을 하는 동안 입을 삐뚜름하게 틀거나 필요 이상으로 눈으로 번뜩이지 않고 오히려 피식 웃는 걸로 해주고 싶어서 그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170, <로마네스크>



거짓말의 달인, 사부로

나중에는 아버지의 장서가 못보다 열 배나 큰돈이 된다는 말을 고물상에서 듣고 한 권 두 권 들고 나가다가 여섯 권째에 아버지에게 들켰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도벽이 있는 자식을 엄하게 꾸짖었다. 주먹으로 연달아 세 번쯤 사부로의 얼굴을 때려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이상의 꾸짖음은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쓸데없이 배만 고파지는 일이다. 그러니 꾸짖는 것은 이 정도만 하겠다. 거기 앉아라. 사부로는 울며 불며 크게 뉘우치고 다시는 훔치지 않겠다고 억지 맹세를 해야 했다. 이것이 사부로의 거짓말의 시작이었다.178, <로마네스크>



나는 개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물릴 것이라는 자신이다. 나는 틀림없이 개에게 물릴 것이다. 자신있다. 용케도 오늘까지 물리지 않고 무사히 지내왔구나, 하고 신기한 마음까지 든다. 여러분, 개는 맹수다. 말을 쓰러뜨리고 드물게는 사자와도 싸워 이긴다지 않는가. 정말 그렇기도 할 거라고 나는 혼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205, <개 이야기>



이 작품에 대해 한마디로 평한 여러 멘트 중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그것이다. 정치적으로 정반대 노선에 서 있었고 마찬가지로 전후 일본의 유망 작가중 한 사람이었으며 역시 자살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자이 오사무란 인간은 너무 싫지만 그의 소설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세계 문학의 숲 시리즈를 1권부터 차근차근 따라가며 읽고 있는데 앞으로 나올 예정인 책들도 헨리 제임스(나사의 회전, 미국), 카렐 차펙(도롱뇽 전쟁, 체코,어쩜 좋아 이때까지 홍차 브랜드로만 알았어. 그 브랜드가 이 작가의 이름을 따왔다는군...), 아서왕 궁전의 어쩌구저쩌구(마크 트웨인, 미국),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오스카 와일드, 아일랜드) 등등 고루고루 세계 문학의 숲을 거닐면서 가끔 마음에 드는 작가를 만나면 한동안 그 주위에서 머물기도 하면서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이때까지 나온 표지 중에서 <차가운 밤>의 표지가 최고였어, 했는데 나 역시 일본 취향인가봐, 지금은 인간 실격의 표지가 더 맘에 드네...



건진 책 제목

도스토옙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다자이 오사무 <만년>, <쓰가루>, <오토기소지>

그리고 일본 개화기 문인들의 작품, 일본 근대 지식인들의 삶에 대한 책들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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