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켄 스토리콜렉터 1
아리카와 히로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얼마전 NHK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세계 게임 시장의 미래에 대한 것이었는데 프로그래밍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서 게임을 제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게임 엔진이라는 패키지 소프트웨어를 사다가 척척 게임을 만들고, 다국적 QA에 시험판을 돌려서 나라별로 피 튀기는 정도를 추가하고 제거하는 등의 로컬라이징을 거쳐 게임을 공장처럼 제작하는 서양의 방식 vs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이 나는 RPG 게임을 만들겠다며 캐릭터가 달리는 모양도 지쳐서 절뚝거리는 모양, 기세좋게 전력질주하는 모양 등을 한씬한씬 앵글별로 일일이 작업하고, 1000개가 넘는 잡다한 아이템, 캐릭터 들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이름과 특성을 부여하면서 작업하는 스스로도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라고 말하는 게임 디럭터 한명을 중심으로 밤샘 회의를 거듭해 가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3년~4년에 걸쳐 하나의 게임을 만들어내는 일본식 게임 제작법을 대조시켜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한 쪽이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 하나에 천착하여 스스로도 미쳤지 싶을만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이런 방식은 참으로 일본적이다. 

숙련된 기술, 모두를 무릎꿇게 만드는 카리스마를 가진 개인의 영향력 하에서 팀을 이뤄 움직이는 방식이, 개인의 내공으로는 쨉도 안되지만 우수한 툴을 가지고 게임을 뚝딱 만들어내는 산업적 방식과 벌이는 다툼은 오랫 동안 갈고 닥은 검술을 몸에 지닌 사무라이가 제식훈련만 받고 전쟁에 참가한 평민들의 총에 스러지는 모습과도 겹쳐 보였다.

모든 것이 가치가 아닌 수치로 환산되는 시대를 맞아, 잃어버린 10년을 겪고도 아직 이 새로운 시대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현재 모습과 놀 때도 진지한 이 괴짜 동아리 멤버들의 모습은 그 뿌리가 같은 곳에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다만 이 녀석들은 내 젊은 날이 그러했듯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처음엔 '위험'하다는 키켄(한자 '위험'을 일어로 읽은 음과 같음)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기계제어연구소'라는 동아리 이름의 '기'와 '연'을 떼와서 줄여읽은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궁금한 건 해보고야 마는 성격이라 화약실험을 하다 집천장을 뚫어놓고(무려 초등학생 때), 그 후론 본채에서 쫓겨나 임시구조물 같은 곳에서 기거하는 부장 우에노.
존재 자체의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라, 신입생 설명회에서는 무서워 보일까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해야했던 총무 오오가미.

오오가미: 넌 언제 어둠의 세계에 끌려도 이상할 게 없는 언동을 하는 놈이니까
우에노: 웃기지 마! 내가 어둠의 세계에 빠진다면 이깟 돈으로 만족할 것같아?
화를 내는 포인트가 결정적으로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다. 우에노를 쳐다보는 후배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만 간다p108

우에노가 '진지하게' 내린 지시에는 반드시 따르지 않으면 목숨 내지는 사회적 생명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 그걸 이미 학습한 바 있기 때문에 정신력으로 움직이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거나 다름없다.p193

늘 어쩌다보니 상황에 태클을 거는 역할이랄까 , 제동을 거는 역할을 맡기 일쑤여서 우에노가 마구 내달릴 때도 모토야마는 주로 말리는 쪽이었다. 어차피 말해봤자 소용없다며 주위에서는 이미 방치하는 낌새지만 그래도 일단 형식적으로나마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어디까지 내달릴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우에노다. 정말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면 어쩔 수 없이 오오가미가 나서겠지만, 오오가미는 좋든 나쁘든 동요하는 일이 많지 않아 '위험하다'는 기준이 세상의 일반적인 그것보다는 꽤나 대범한 편이다.p261

이 두명의 집행부가 꾸려가는 '키켄'에 타고난 붙임성에다 어지간해선 동요하지 않는 두둑한 배짱의 이케타니와 커피집을 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가겟집 아들'로 불리는 온건파 모토야마가 신입으로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만화로 연재했던 것을 다시 소설로 바꿔놓은 책이라 챕터마다 한페이지짜리 만화 일러스트가 반겨준다. 표지마저 만화라 처음엔 만화책인줄 알았다.

키켄의 멤버들, 독특한 캐릭터들이라고 하지만 소설 속에 독특한 존재들이야 얼마나 많은가, 대학 동아리로서는 대단한 집요함이라고 하지만 연습과 실수가 않용되지 않는 실제 세상에서 한자리씩 하고 있는 성인들에게 그정도는 대단한 성취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탈한 이야기가 차근차근 쌓아가는 캐릭터와 키켄 동아리 특유의 개성은 대학시절 학과 공부 못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던 나의 동아리 생활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스스로 소중한 이야기로 탈바꿈하고야 말았다. 평소 내가 읽어서 재미있었다고 다른 사람에게 책을 권하지 않는 나지만 신랑에게도, 동아리 선후배에게도 권할 참이다.

대학 축제 기간에 '기적의 맛'을 내는 라면을 판매하겠다며 정한 매출 목표액이 무려 100만엔, 우리 돈으로 1000만원이 넘는 액수다. 남들이 웃자고 하는 일에 죽자고 덤빈 결과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젊음만 믿고 무지막지하게 무리를 강행하며 '진지하게 놀면' 어떻게 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축제기간 동안 쏘야니 부침개 같은 걸 만들어 팔기도 하고, 자선호프집을 열 때 티켓을 갖다 팔지 못하고 고대로 자폭했던 내 과거와는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잊고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면서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가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게 해준다.

시끄러워! 너희를 물에 넣어봤자 때 밖에 나오지 않지만 계륵은 육수의 핵심이 되는 국물을 내준다고. 어느 쪽이 더 쓸모 있냐! 그런 고마운 계륵님은 경의를 가지고 맨손으로 만져야만 해! 계륵을 만지기 전, 그리고 만지고 난 뒤에 각하라고 해라! 집게를 써도 되는 건 끓는 물에서 건질 때 뿐이다!p148
우리를 물에 넣어 봤자 때 밖에 안 나오는 건 안 우러나오는 온도의 물이기 때문이지. 닭육수처럼 우러내봐라, 안나오나,라고 구시렁대는 건 나혼자만은 아닐거야...(식인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전쟁터처럼 바쁜 와중에도 결코 깨서는 안되는 철칙이 있다. 일행이 있는 손님에게는 주문한 라면을 동시에 내가는 것이 그것이다."...카운터에서는 손님의 순서가 바뀌지 않도록 할 것! 순서가 뒤바뀌는 데에 손님은 가장 민감하다!p170
이건 중요한 포인트야, 일본 사람들은 특히나 이런 포인트를 잘 캐치하고 그걸 배려하는 서비스를 함으로써 감동을 주는 경우가 많다.

아내: 라면키켄은 아직도 하는 거에요?
모토야마: 그런 모양이야.
아내: 기적의 맛 레시피가 여전히 남아 있을까요?
모토야마: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는 물려줬으니까... 그 후에도 물려주고 있다면 똑같은 맛을 내고 있을 텐데...
아내: 그래도 대학 축제 모의점에서 총매상이 130만엔이라는 건 예삿일이 아니죠.
모토야마: '진지하게 노는' 게 키켄의 모토였거든.
p203

그 시절의 추억을 아내에게 이야기해주는 형식을 띄고 있는 소설의 말미에 화자는 아내와 함께 더이상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축제에 손님으로 찾아간다. 한때 내 세상이었던 캠퍼스를 다시 찾아갔을 때 더 이상 내가 그곳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감정, 다시 찾아 가고 싶어도 마음 한구석 망설임이 이는 마음을 글로 풀어 놓았다.

그러다보니 이제와서 약속해서 모인다는 것도 멋쩍고, 그렇다고 해서 약속도 하지 않고 불쑥 찾아가서 동창들을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헛걸음했을 때의 허탈함,... 아니 대충 넘어가려 해도 소용없다. 요컨대 아무도 만나지 못했을 때의 쓸쓸함을 생각하니 점점 더 발길이 뜸해졌다.
그렇다고 '올해 축제에서 모이자'는 연락을 돌릴 수 있을만큼 순수한 녀석은 누구 하나 없어서....
전화나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것도 아닌데, 가끔씩 몇 명이서 모여서 술을 마시지 않은 것도 아닌데, '올해 축제 가보지 않을래?'라는 그 한마디는 누구도 꺼내지 못했다...말했다가 만약 상대가 억지로 시간을 짜내 약속을 잡아야 할 정도로 '그 시절'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지 않다면?
각자 가정이 있기도 하고, 일도 바쁜데, 모처럼의 연휴를 모교의 축제 따위로 보내는 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미안, 축제 가는 건 좀 귀찮네.
그런 대답을 들을까 두려워서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p285
 
요즘 다른 동기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동아리에 자주 가는 편이다보니 느끼게 되는 점이 있는데 우리가 시작해 놓은 동아리의 모습이 10여년이 지나도록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운동 참가를 엄격하게 챙기고(지각하면 빠른머리 200회, 무단 결석하면 400회라는 둥), 공부 못하는 놈은 동아리에서 탈퇴시킨다며 으름짱을 놓고(평점 3.5 이하는 안된다며...), 호랑이 자식이 고양이일 수는 없다고 선배들이 높이 빛낸 동아리를 계속 빛나게 유지하라며 후배들을 다잡는 점 등등

키켄도 마찬가지다. 다시 찾은 그곳은 지키고 선 사람들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키켄다웠다.

사무실 배달 다녀오겠습니다.
넘어지지 마라
넘어지면 가만두지 않는다
살인적으로 분주한 가운데 그들은 어쩌면 이리도 분즐거워 보일까.
이봐, 너희들, 지금은 정신없어서 즐겁다는 생각 같은 걸 할 여유도 없겠지만, 이렇게 가게를 꾸리는 게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마음이 마구 전해진다고. 지금은 가게를 성공리에 꾸린 성취감과 끝났을 때의 해방감이 더 즐거울 것 같겠지. 그렇지만 즐거웠던 건, 바로 그 주방 안에서, 그야말로 교대 근무가 끝나기가 무섭게 수풀에 머리를 처박고 잠들어버릴 만큼 극한 상황까지 일하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그걸 깨닫게 되는 건 이미 주방 점원도 배달 사령탑도 될 수 없게 되고부터야. 더 이상 부원이 아닌 그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힘껏 해둬라. 축제의 주역으로 머물 수 있는 동안에.p295

지금 대학생이라면 힘껏 해라, 그게 뻘짓이라면 더 아름다울 것이다는 메시지를.
이미 사회인이라면 아름다웠던 그 때를 추억할 수 있는 단서를 줄 책이다.
더하여 아이 엄마인 나는 생각한다. 대학은 동아리는 지금이라도 돌아가려면 형태는 남아있겠지만 우리 아이가 다섯살, 세살인 지금 이 시절은 돌아가려야 돌아가볼 어떤 하드웨어도 남아있지 않을 소중한 시기다. 최선을 다해 이 시간을 누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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