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ㅣ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십자수로 만든 비단 장미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색깔로 장미를 수놓을 수 있었고,
나는 나의 장미를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으로 수놓았다. (72쪽)
영화 <제인 에어>를 보고 난 뒤 원작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러다 진 리스의 이 책을 알게 됐고,
<제인 에어>가 간과한 비극적 운명의 아름다운 여인 앙투아네트를 다시 이해하겠다 됐다.
소설은 제3부로 구성돼 있다.
'태양'을 품은 소녀 앙투아네트의 유년기와 어머니 아네트의 비극적 삶을 통해
앙투아네트의 슬픈 운명을 짐작게 하는 복선이 짙게 깔려 있는 1부 쿨리브리.
쿨리브리는 온통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일색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런 빛깔들은 불안한 삶 속에서도 건강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에너지를 채워준다.
그러나 앙투아네트의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한 로체스터의 독백으로 듣게 되는 2부 그랑부아는
1부의 빛깔이 더 짙어지면서 위협적인 공포를 불러 일으키며
앞으로 전개될 비극적 결말을 더욱 분명하게 예감케 한다.
영국인 로체스터가 짙은 푸른색, 청록색 속에 둘러싸여 위험을 느끼듯
로체스터 곁에서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정체성을 말살당하며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제국주의, 가부장제의 상징으로 등장하지만 그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는 로체스터는
자연과 여성성의 상징인 앙투아네트에게 저당 콤플렉스를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앙투아네트는 장모인 아네트와 같은 운명으로 가둬버린다.
3부의 제목이기도 한 손필드는 '광녀'로 낙인찍힌 앙투아네트가 갇혀 지낸 영국의 집이다.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앙투아네트의 눈에 비친 영국은 '뻣뻣하고 누런 마분지로 만든 세상이다.'
'갈색이거나 짙은 빨강, 그렇지 않으면 노란색' 천지다.
앙투아네트를 구제해줄 힘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그녀 안의 태양에만 기댈 뿐이다.
그리고 앙투아네트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 마지막 시도를 하는데...
소설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연작 그림을 감상하는 듯했다.
태양 아래 원색으로 충만한 초록, 파란 빛깔의 쿨리브리와 그랑부아의 자연은 생명력이 넘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예기치 않은 위험이 도사린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극복이 가능한 여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밝은 태양을 찾아볼 수 없는 누런색의 손필드는 앙투아네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앙투아네트의 운명과 나란히 하는 이 빛깔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서 어지럽게 뒤섞이다
끝내 '광녀'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고 만다.
<제인 에어>와 또 다른 완성도를 갖춘 이 소설이 내내 제기하는 문제는
여성의 광기는 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졌는가이다.
마녀사냥의 굴레 아래 희생되어간 수많은 된 여인들의 슬픈 사연 중 하나지만,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즉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 관점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진 제도, 관습, 체제 하에 비주류로 낙인찍혀 희생을 강요받는 수많은 이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의심 없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앙투아네트가 로체스터가 모두 내 안에 존재함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빛났던 태양이 빛을 완전히 잃기 전에 낙인을 지워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