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들이 이긴다
모기룡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당신은 '착함'은 무엇인지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다. 우리는 '착함'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라고 한다면 수 많은 책을 들춰내지 않아도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안다. 왜 그럴까?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착함을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배워왔다.

근데 무엇이 착함을 결정한다고 보는가? 서양의 칸트, 벤담, 밀이 주장하고 이제것 이성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워왔던 학자나 사람들조차도 무엇이 착함을 결정한다고 보지 않는다.

"착한 사람들이 이긴다"에서는 바로 이 착함에 대해서 논한다. 사실 착함에 대해서 논의하기보다 덕에 대해 논의한다.

그래서 나는 착함에 대해서만 불만가득한 모양새를 비쳐볼까 한다.

당신은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혹시 착한 사람으로 평가받지 않는가? 혹시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자발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세상의 편견에 물들여진 사람이고, 나는 타인에 의해 착한 사람으로 불리워진다면 세상보다 먼저 세상에 등을 진 사람이다.

책의 추천사에서는 책을 다 읽고나서야 이해 가득한 문구만 가득 실어놓았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나서야 추천사를 이해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책이 주장하는 덕윤리는 보다 넓은 범위의 생활양식으로 해석해볼 수 있겠다. 덕윤리에 앞서서 사회적으로 배워왔던 착함이 불러온 결과를 볼 필요가 있겠다.

이 책의 31p ~ 34p에 나오는 착한남자 K씨 이야기는 일상에서도 어렵지 않게 들어볼 수 있는 심리학에서 소개된 성격 장애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이 떠오르는가? 내 경우 이 얘기에서 동정을 느끼기보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풀어내기 전에 내 사례부터 꺼내어 읽어볼까...
나는 어려서부터 내성적이었고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칭찬받고 싶어서 이것저것 했지만 번번이 혼나기만 했다. 초등학교 때 전원에 연결되어 있는 tv를 보다가 울컥하는 마음에 뺀지라고 하는 도구로 전기 공급선을 잘라내었다가 뺀지의 날이 녹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주변 어른들로부터 혹은 친구들로부터 착하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착하다는 평가가 듣기 좋았던 것인지 학교 앞에서 어린이 교통봉사대를 했었다. 초등학교 졸업 마지막때 내 이름이 단상에서 불려졌어도 내성적인 성격탓에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해서 1학년의 가을이 시작되던 어느 날부터 같은 아파츠 윗층에 사는 같은학교 선배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그 다음해엔 타반에 있는 동급생으로부터 왕따를 받기도 했다.

솔직히 이쯤 되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왜 나는 혼자일까 마음속 깊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 생각을 하던 때에 있었던 물이 가까운 곳에 몸을 내던지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는 목을 매달까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일까...

고등학교 때엔 겨우 내성적인 모습을 떨쳐낸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졸업을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았던 때에 몇몇 친구들과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선생님들 사이엔 참 착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렇게 새겨진 착한 이미지로 알고 지내는 아이에게 고백도 해봤었지만 번번히 그 결과는 참혹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첫 mt를 가던 날,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또 다시 거절 당할까봐  고백도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왜 이럴까.. 왜 무서워하는 걸까...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얼마 안되는 등록금 문제로 부모님께 옳지 못한 소리를 했다. 엄마 아빠가 나한테 언제 용돈을 주셨냐며 그 얼마 안되는 등록금도 못해주냐..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참 아픈 소리였다. 감사하게 생각해도 모자를 판인데..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평가받았지만 속으론 이런 사람이었던 거였다.

그렇게 대학교와 직장을 병행하던 때에도 나는 여전히 주변인들에게 있어서 그저 착한 사람으로만 기억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바쁘게 지나가던 때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착한 사람으로 살아왔었다. 그러다 최근에 몇 달을 만나던 친구와의 일도 다시 곱씹어보기 힘든 일로 끝냈다.

이 얘기를 종래에 알던 사회적 착함으로 바라본다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우리가 배워왔던 사회적 착함이란 것이 바로 이런것이다.

덕윤리를 주목하다.
그래서 저자는 덕윤리를 주목한다. 덕윤리는 선을 행하고 선의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 아닌 선을 행동하게 하는 원인인 감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종래의 착함의 정의를 선을 행하고 나오는 결과로 본다. 어떻게 보면 착함의 정의가 보다 넓게 정의된 것이라고 본다.

한동안 국내에서 회자되었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도 덕윤리를 지지하는 학자라고 하니 덕윤리가 종래의 윤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차차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덕(오리를 의미하는 영어 Duck이 아니다. 첨언하자면 디즈니사의 도널드 덕도 아니다)윤리는 감성으로 행동을 결정한다. 이런 해석은 사실 덕윤리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보다 정확히는 덕윤리는 덕성을 기반으로 한다. 덕성이란 저자가 언급했듯이 사람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마음이다.

사랑의 결과로 나오는 동정, 자비심, 애처로움, 사회를 생각하는 정의로움 등은 덕성의 가장 일례로 나오는 것이 아닐런지 모르겠다.

저자는 덕을 서양학자의 관점에서 중심으로 바라보는데에 익숙하다. 아마 저자가 전공한 인지과학에서 이런 특성들이 덕윤리와 너무 유사해서는 아닐런지?

동양에서 성악설, 성선설은 무척 오래된 이야기다. 서양에서는 성악설과 성선설은 근대 시대에 와서 성악설로 그 뿌리를 중심으로 해서 현대의 윤리학이 발전해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윤리학에서도 배워온 이야기이지만 무엇이 악이고 선인지는 그 진의를 알기가 무척 어렵다.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좋은 의도에서 선을 행하려 했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다면 악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가령 이런 사례로 산에서 조난당한 환자를 도와준다고 어설픈 시도를 했다가는 조난당한 사람의 목숨을 거둘수도 있다는 것이다.

덕윤리는 이성을 기반으로 생각하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의무론과 공리주의와 달리 자신을 사랑하는 본성으로부터 그 뿌리를 둔다.

덕윤리가 지향하는 사회. 그러나 사회의 한계
이와 같은 이유로부터 저자는 덕윤리가 현대에 매우 필요한 것으로 보며, 결과적으로 덕윤리가 사회적 공감 능력으로부터 성공할 수 있다는 기대를 심어준다.

그러나 나는 이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원하면 무엇이든 이끌어내며 성공할 수 있는 사회적 현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해보자. 한국에서 로스쿨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면 방송대학교 등에서의 소정의 법학 점수를 이수하고 사법고시를 볼 수 있었다. 그다지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로스쿨 법안 통과로 인해 한 학기 800만원 이상되는 등록금으로 로스쿨을 나와야지만 변호사 시험을 볼 수 있게 된다. 경제적으로 배려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덕성만으론 도저히 이뤄낼 수 없는 일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사회가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시시각각 크게 변해온 지금 우리는 덕윤리에 집중할 필요는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덕윤리만으론 항상 모든 것이 좋은 결과를 낳을 순 없다.

종점을 향해서..
덕윤리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라디오헤드" 그룹도 본인들이 지향해야 할 바를 충실히 알고 있고 실천하지만 우리는 덕윤리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나는 덕윤리를 이해하고 실천하기에 앞서 덕윤리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시스템의 구축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덕윤리가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어떻게 보면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논란이 일지도 모른다.

덕윤리는 오랫동안 역사속에 가리워져 있었지만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 필요한 윤리라는 점에선 한치의 의심을 품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덕윤리. 바로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일이 되는 지름길이 될것으로 기대하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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