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죽음 -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에 대하여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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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다. 죽음의 어둠을 직시하는 육중한 텍스트인데, 자살자의 정신으로 성큼성큼 헤쳐 나아가는 강인한 텍스트인데, 책을 덮을 때까지 줄곧 희극인들의 들뜬 목소리가 떠오른다.


장 아메리가 “생명은 최고의 자산이 아니다.”라고 쓰면(40p), 머리가 벗겨진 뚱뚱한 코미디언, 루이 C.K.가 무대에 오른다. 멀끔한 양복을 입고는 태연하게 ‘생명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자, 청중이 실소인지 폭소인지 모를 웃음을 터뜨린다. 루이 C.K.는 강변한다. 우리가 싫어하는 그 모든 게 ‘삶(life)’에 들어 있는데, 도대체 왜들 그렇게 생명(life)을 중요시하는 거냐고. 그렇게도 뭣같은 삶을 우리는 왜 다들 이렇게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거냐고.


“살아야만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은 없다(119p).”라는 장 아메리의 문장에도, 이 대머리 아저씨가 끼어든다. 정말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 필요는 전혀 없다고. 사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무시무시한 소환장 같은 게 날아와도 걱정 없다고. 그냥 자살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자살은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그저 질 나쁜 농담일 뿐이라고 웃어넘겨 버리려는 찰나, 장 아메리가 ‘수험생의 상황’에 처한 우리의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숙제로 가득한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에게 장 아메리가 범상치 않은 모범답안을 들려준다.


저, 죄송하지만 제가 존경해마지 않는 시험관님, 저는 문제를 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호라티우스와 횔덜린과 모든 공식을 깨끗이 무시하고 휘파람이나 불렵니다.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뭔가요? 시험에 떨어진다고요? 그래서요? ... 나는 ... 내 머리를 총으로 쏘리라(230p).


‘육신의 요구(165p)’와 생명 논리의 ‘달콤한 유혹(167p)’을 결연하게 끊어낸 정신에게서, 우리는 기묘한 맹랑함과 당당함을 느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맹랑함과 당당함은 우리에게 뭣같은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경이롭게 살아낼 에너지를 준다. “죽기로 각오한 당당함은 삶의 길을 열어준다(264p).”


하지만 이 역설은 오로지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감(264p)’이었기에 작동하는 것이다. 삶의 이야기가 ‘그 삶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실패의 이야기(225p)’이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이다. 생의 부조리와 무의미함에 대해 역설하는 장 아메리와 사르트르의 글 너머로, 이번엔 헝클어진 머리로 우스꽝스러운 가사를 써대는 뮤지컬 작가, 팀 민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37.9세의 ‘대선배’가 되어 앞날 창창한 모교의 졸업생들 앞에서 ‘인생의 교훈’을 읊어댄다. 우주에서 의미를 찾는 짓은 요리책에서 운율을 찾는 짓하고 똑같다고. 그런 짓을 하다간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요리마저도 망쳐버릴 거라고. 아무 의미 없는 이 우주에서 유일한 ‘낭만’을 하나 알려주겠다고. 그건 당신들 모두 다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이라고. 그러니 머나먼 성취나 꿈꾸는 야망 따위는 내려놓고 어차피 죽을 인생을 마음대로, 빽빽하게 채워보라고.


명예박사의 조언 덕분일까. 장 아메리의 글로 돌아와 보면, 그가 죽음보다도 자유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음이 보인다. 장 아메리는 지금 당장 목을 매거나, 발코니 밖으로 몸을 던지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죽음마저도 결연한 선택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죽음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죽음에 곧장 먼저 다가가보라고 말한다. 그러면 죽음의 농담이 자유의 비밀을 뱉어낼 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책도, 자살에 대한 책도 아닌, 자유의 비밀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을 읽을 이들에게 미리 그 비밀을 말해줘 버리련다. 그래, 자유는 우리 수험생들에게 언제 자기 머리에 총을 쏠지를 일러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자유는 우리에게 언제 휘파람을 불지도 알려준다.


66세에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둔 장 아메리는, 정작 자기 뼈를 으스러뜨리는 나치의 고문장과 수용소에서는 자살하지 않았다(266-267p). 자유가 그의 귓속에 ‘네 목숨은 오로지 네 거야.’라고 속삭여줬기 때문이었다면, 장 아메리는 자기 목숨을 남의 손에 넘길 수는 없다는 오기로 이를 갈며, 태연하게 휘파람을 불었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나치들의 연극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엿이나 먹게(231p)’라고도 덧붙였을지.


그러니 자 어서, 우리 모두 언제 어디서 자기 머리에 총을 쏠지 정해보자. 처음엔 진지하게. 소름 끼치도록 구체적으로. 그리고 죽음의 농담이 들려올 때가 되면, 홀가분하게 웃어버리자. 그러면 우리는 마침내, 험상궂은 표정으로 우리 앞에 앉아 있는 삶의 시험관들에게 태연하게 휘파람을 불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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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vorji 2022-08-22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 C.K. 2017, 넷플릭스 제공
https://www.netflix.com/kr/title/80161109

trevorji 2022-08-22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 Life Lessons - Tim Minchin UWA Address, UWA 유튜브 채널
https://youtu.be/yoEezZD71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