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할 권리 책고래숲 8
최준영 지음 / 책고래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회사와 집만 들락거리며 일과 씨름하던 시절, 우연히 들은 ‘향유’(享有)라는 단어에 울컥한 적이 있었다. 멍하니 서서 거의 울뻔했다. 술 한잔 걸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자유와 혜택이라는 ‘권리’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일이 나를 향유 했고, 운명이 나를 누렸다. 안 되겠다 싶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다만 읽고 쓰는 모양새는 여전히 씨름하는 형국이었고, 상대가 일에서 나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싸우지 말라고 한다. 싸워서는 답이 안 나온다는 얘기다. 특히 자기 자신과 싸움이 그렇다. 싸울 때는 상대만 드러나고 다른 풍경들은 지워진다. 그렇게 앞에 보이는 한 놈만 팬다는 식의 싸움은 방식은 쉬울지 몰라도 중국에는 자신을 테두리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느 순간, 다른 풍경은 죄다 지우고 일만 집중하는 삶이 쉬웠을 테고, 그나마 가장 상대하기 쉬운 나를 붙들고 싸우는 것이 수월할 터였다. 나는 ‘나’라는 껍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싸움에서 자주 졌다.

무심히 지워 낼 때는 무엇을 지웠는지 알지 못하지만, 무엇을 지웠는지 알았을 때는 되돌리기 어려운 게 우리네 삶이다. 한사코 삭제했던 풍경들에는 한사코 지켜내야 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나는 하나의 일도 아니고, 하나의 지위도 아니고, 온전히 나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관계하는 수많은 목소리의 합이 나일 것이다. 우리가 지운 목소리는 자기가 아주 특별하니 챙겨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지운 풍경들도 이러할 진데 우리가, 우리 사회가 지운 풍경들은 또 어떤 모습일까?

최준영의 『가난할 권리』에는 우리 일상에서 삭제된 풍경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거리의 삶을 살았던 김 씨, 대학 진학을 꿈꾸는 탈학교 청소년 윤수, 보육원 꼬마 시인, 자활 여성 가장, 인문학을 알고 나서 16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했던 노숙인 임 씨, 자신을 찾기 위해 전국에 노숙인지원센터를 뒤졌던 딸을 둔 아버지, 키가 엄마보다 커지면서 어머니라고 불렀다던 수형인, 이 나이도 꿈이 있기에 강의에 오신 어르신들, 그리고 아기를 키우는 어린 미혼모의 꿈과 눈물.

이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들은 절대 가난하지 않다. 이들은 서로 안고 안기면서 사랑을 키워나간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사랑은 다른 목적이나 의도 없이 순수하다. 진심이 느껴진다. 책에 나오는 익명의 사람들은 어디쯤에서 다시 흩어지고 단절된다. 그리고 또 어디쯤에서 다시 이어진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책에 담긴 풍경에는 사회의 약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도 속살 그대로 담겨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복지’라는 이름을 가진 가상 시스템을 만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죄다 복지에게 맡긴 채 외면하는 중이다. 나눔마저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차별을 두려고 하고, 사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시스템 안에서만 도와주려고 또 다른 벽을 세운다. 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담기지 않는 복지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지우는 창백한 도구로 변질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생명에는 높고 낮음이라는 계층적 사다리가 없다.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계층적 사고가 아니라 관계망식 사고가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이 지은 작은 관계망이, 들고 나는 나눔이 그리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관계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겐 모든 것일 수 있다. 관계를 맺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가 된다. 부적합자라는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나’는 중요한 존재다. 계층적인 시선으로 보면 알 수 없지만, 관계망이 수 놓은 수많은 공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피를 돌게 하는 존재다.

최준영의 『가난할 권리』는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지웠는지, 그리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려준다. 바로 ‘사람의 가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난할 권리 책고래숲 8
최준영 지음 / 책고래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회사와 집만 들락거리며 일과 씨름하던 시절, 우연히 들은 향유’(享有)라는 단어에 울컥한 적이 있었다. 멍하니 서서 거의 울뻔했다. 술 한잔 걸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자유와 혜택이라는 권리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일이 나를 향유 했고, 운명이 나를 누렸다. 안 되겠다 싶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다만 읽고 쓰는 모양새는 여전히 씨름하는 형국이었고, 상대가 일에서 나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싸우지 말라고 한다. 싸워서는 답이 안 나온다는 얘기다. 특히 자기 자신과 싸움이 그렇다. 싸울 때는 상대만 드러나고 다른 풍경들은 지워진다. 그렇게 앞에 보이는 한 놈만 팬다는 식의 싸움은 방식은 쉬울지 몰라도 중국에는 자신을 테두리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느 순간, 다른 풍경은 죄다 지우고 일만 집중하는 삶이 쉬웠을 테고, 그나마 가장 상대하기 쉬운 나를 붙들고 싸우는 것이 수월할 터였다. 나는 라는 껍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싸움에서 자주 졌다.

무심히 지워 낼 때는 무엇을 지웠는지 알지 못하지만, 무엇을 지웠는지 알았을 때는 되돌리기 어려운 게 우리네 삶이다. 한사코 삭제했던 풍경들에는 한사코 지켜내야 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나는 하나의 일도 아니고, 하나의 지위도 아니고, 온전히 나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관계하는 수많은 목소리의 합이 나일 것이다. 우리가 지운 목소리는 자기가 아주 특별하니 챙겨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지운 풍경들도 이러할 진데 우리가, 우리 사회가 지운 풍경들은 또 어떤 모습일까?

최준영의 가난할 권리에는 우리 일상에서 삭제된 풍경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거리의 삶을 살았던 김 씨, 대학 진학을 꿈꾸는 탈학교 청소년 윤수, 보육원 꼬마 시인, 자활 여성 가장, 인문학을 알고 나서 16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에게 사랑한다말했던 노숙인 임 씨, 자신을 찾기 위해 전국에 노숙인지원센터를 뒤졌던 딸을 둔 아버지, 키가 엄마보다 커지면서 어머니라고 불렀다던 수형인, 이 나이도 꿈이 있기에 강의에 오신 어르신들, 그리고 아기를 키우는 어린 미혼모의 꿈과 눈물.

이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들은 절대 가난하지 않다. 이들은 서로 안고 안기면서 사랑을 키워나간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사랑은 다른 목적이나 의도 없이 순수하다. 진심이 느껴진다. 책에 나오는 익명의 사람들은 어디쯤에서 다시 흩어지고 단절된다. 그리고 또 어디쯤에서 다시 이어진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책에 담긴 풍경에는 사회의 약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도 속살 그대로 담겨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복지라는 이름을 가진 가상 시스템을 만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죄다 복지에게 맡긴 채 외면하는 중이다. 나눔마저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차별을 두려고 하고, 사회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시스템 안에서만 도와주려고 또 다른 벽을 세운다. 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담기지 않는 복지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지우는 창백한 도구로 변질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생명에는 높고 낮음이라는 계층적 사다리가 없다.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계층적 사고가 아니라 관계망식 사고가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이 지은 작은 관계망이, 들고 나는 나눔이 그리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관계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겐 모든 것일 수 있다. 관계를 맺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가 된다. 부적합자라는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는 중요한 존재다. 계층적인 시선으로 보면 알 수 없지만, 관계망이 수 놓은 수많은 공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피를 돌게 하는 존재다.

최준영의 가난할 권리는 우리가 그동안 무엇을 지웠는지, 그리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려준다. 바로 사람의 가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