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국경을넘어 > 자유로운 영혼,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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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
최병수.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2006년 4월
평점 :
지난 해 어느 글을 통해서 그가 위암 판정을 받고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잊고 있다가 이 책을 통해 최근 그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위암 3기에서 위의 3분의 2를 도려내고 여수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책을 읽으면서 옛 생각도 나고 해서 서재 한 켠에 꽂혀 있는 <팔십년대 한국민중판화대표작품선>을 들춰 보았다. 최병수의 약력이다.
1960년생
민족미술협의회 회원
1987년 반고문전, 통일전


4.19때 태어나 87년이라는 곳에서 커다란 산을 만났다는 최병수. 87년을 정점으로 그는 쉴 새 없이 달려왔다. 87년 6월 항쟁의 한 복판에서 <이한열 초상>과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만들어 냈고 <분단인>, <철새>, <장수매>, <장산곶매>, <노동해방도> 등도 그의 작품이다. 80년대 대학을 다녔다면 적어도 한 두번은 보았을 작품들이다. 북한산의 터널 공사, 새만금의 갯벌, 평택 대추리, 리우, 교토, 바그다드 등 생명 환경과 반전 평화를 외치는 곳이라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와 그의 작품(퍼포먼스를 포함하여)이 있었다.
그의 인생 역정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하다. 화가가 된 것도 기이하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갖은 직업을 전전하던 최병수가 우연치 않게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목수였던 그가 민중미술한다는 사람들 옆에서 벽화 그리는데 필요한 탁자 등을 짜주다가, 할 일이 없어서 그냥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 “너도 가만 있지 말고 그려” 하는 통에 우연치 않게 붓을 들고 개나리 몇 개 그린 것이 화근이었다. 정릉벽화 <상생도>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경찰서에 끌려간 그에게 이상한 질문들이 던져졌다. 그림 속 태극기의 붉은 색이 북한을 상징하는 데 붉은 반원이 더 크게 그려졌다니(실제로는 청색이 더 크게 그려짐), 대나무는 왜 (죽창처럼) 뾰족하게 잘라졌냐라는 둥(대는 결이 있어서 자르면 뾰족하게 자를 수 밖에 없다), 그림 속 아이의 피부 색이 검은 것은 한국전쟁 당시의 혼혈아를 표현하는 게 아니냐는 둥의 질문이었다. 게다가 목수인 그는 이 사건에 엮이는 과정에서 화가로 둔갑하였다. 국가 기관이 인정하는(?) 화가가 된 것이다.

차츰 현실에 눈뜨고 87년 6월 항쟁 때에는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이한열을 사진을 보고 걸개를 만들고, 장례식을 위해 영정을 만들면서 깊숙이 빠져들었다(?). 불의를 보고선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한 몫 했을 듯싶다. 91년 강경대 치사 사건 때도 여지없이 그는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최근에는 반전 평화 운동과 환경운동에서도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과시했다. 20년 가까이 그는 우리 사회의 온갖 투쟁의 현장을 지켜온 사람이다. 우리에겐 이미 민중미술의 스타들이 여럿 있다. 그러나 최병수만큼 치열하게 몸을 던지면서 민중과 함께 미술 운동을 펼쳐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는 계속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건강하기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최병수. 그가 아이들과 함께 환경학교에서 했던 일을 들춰 보자. 화분에 마음을 심거나 꿈을 심으라고 말하면서 설명을 해주었어. 아이들은 화분에 칼이나 빗자루나 쓰레받기가 꽂혀있는 의미를 처음엔 모르지. 그래서 ‘쓰레받기와 빗자루는 선생님의 화분이다. 세상이 더러워서 청소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렇게 말했어. 화분에는 전구를 심은 화분도 있었어. 그걸 돌리면 불이 들어오게 돼 있었지. 불을 켜고는 ‘이건 누구 화분인 거 같냐?“ 했더니, 한 놈이 ’에디슨‘ 그러는 거야. 이제 아이들이 화분에 무엇을 심어야 하는 지 이해를 한 거지. 다음 날에는 화분에 그림도 그리고 장식을 하고는 자신의 마음을 심고 발표하게 했지. 연필, 볼펜, 붓 뭐 그런 게 꽂혀 있었지. 물어보면, 볼펜을 심은 애는 기자가 되겠다고 하고 연필을 심은 애는 소설가가 되겠다고 하는 거였어. 그런데 한 애는 숟가락을 심었다라고 ’이걸 왜 심었니?”하고 물어 봤더니, ‘사랑을 퍼 주려고 심었습니다’ 그러더라고 … 나는 정말 아이들한테 약간 힌트만 준 거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우주같이 되더라. 내가 일일이 가르쳐 준 게 아니었는데도 아이들이 이렇게 크게 되돌려 주더라. 가르친다는 것은 서로 교환하는 거 같더라. 그래서 아이들한테 많이 배웠다.
이 글을 쓴 김진송이 풀어 본 최병수의 작품 세계이다.
최병수 아니 그의 작업과 작품에 담긴 생각들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스스로 요구하는 방향에서 이끌어진 것이다. 그가 기존의 사고와 이성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충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장승을 주문받아도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을 멋지게 잘 깎는 데 관심이 없다. 그건 사람들의 요구다. 그는 갯벌을 바라보고 거기 꿈틀거리는 생명을 자신의 마음에 담아 생명의 솟대를 무수히 깎아 놓는다. 그건 단순한 아이디어나 기발한 착상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자연이나 환경을 주제로 했기 때문에 동물을 등장시키는 발상과도 거리가 있다. 어떻게 하면 멋있고 그럴듯하게 보일까를 고민하는 작가적 욕심과도 다르다. … 동물이든 식물이든 자연에 자기의 생각이나 의식과 감정을 전이시키는 방식은 단순히 상징과 은유로 전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자기와 동류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전이는 불가능하다.


그의 <펭귄이 녹고있다>는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펭귄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등장할 수 있다. 새만금의 솟대들에서 망둥이나 갯지렁이가 쉽게 나오는 것은 그리고 배를 세워 하늘로 오르게 하는 것은 갯벌에 살고 있는 물고기와 어부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미술이나 운동이나 투쟁이 아니라 거기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생각 속에서 저절로 솟대가 세워지고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배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깎은 ‘얼음 펭귄’은 호텔의 그럴듯한 파티와 행사장에 놓이는 얼음 조각보다 낳을 리 없지만 뜨거운 한낮의 내리쬐는 태양 아래 놓여 녹아내리면 지구의 온난화를 말하는 데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사라져 가는’ 펭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