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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평점 :
매일 밤 12시.
여자들은 손목에 차고 있는 카운터가 리셋되는 그 시간만을 기다린다. 그녀들에게 허락된 말은 하루에 100단어... 그 이상의 소리는 카운터를 통한 찌릿한 고통으로 돌아온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신경언어학자로 남편과 네 명의 아이들과 함께 정상적인 삶을 살아왔던 주인공 '진'은 이러한 현실을 당연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달라진 가족의 일상으로 남편과 아들과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고 무엇보다도 딸 '소니아'의 미래는 더 끔찍하리라는 생각으로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진은 정부로부터 실어증 치료제를 완성하라는 선택의 여지도 없는 제안을 받게 되고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친구 '재키'를 떠올리게 된다. 재키라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
진은 자신이 했어야 할 모든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 자유로워지려면 뭘 해야 할지 생각해봐 '
그녀는 잃어버린 목소리와 온전한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는 소름 끼치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어느 미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지만 이 책은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 그 모든 시대의 모습이 될 수도 있기에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미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 다만 카운터만 차지 않았을 뿐...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아 자유와 정신을 잃게 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려 하지 않았던가. 영원한 종속을 위해, 그들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디스토피아는 언제 어디서나 얼마든지 다가올 수 있다. 뒤틀린 세계관으로 권력의 맛을 알고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미치광이와 그의 추종자들만 있으면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시간문제일 뿐이다. 우리가 만약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악마는 착한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승리한다."
이 책에서는 '순수 운동'이라는 명목하에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을 확실히 구분하며 자신의 위치를 지키던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 믿던 그 시대로 되돌리고 있다.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칼코빈의 동기가 여성 혐오인지 반체계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y염색체가 없다는 이유로 여성은 말, 돈, 여권을 가지지 못하고 범죄자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공공의 영역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다. 필요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일 뿐이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지더라고 사람들의 순응 정도는 다르게 마련이다. 책 속의 등장인물들인 진, 패트릭, 재키, 린, 로렌조, 올리비아 ... 그들은 같은 시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어떠한 인생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기에
각각의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그 길의 끝이 어디일지 지켜보게 된다.
마침내 한곳을 향하는 결말에 우리의 역사를 다시 마주하게 되면서 잊고 있었던, 당연하게 생각했던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 일단 읽기 시작하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재미가 있다. 책을 읽는 동안 '진'이 되어 그 상황을 상상해보면서 계속 손목을 보게 된다. 역시나 끔찍하다.
개인적으로 '진'의 지극히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마음이 가지 않지만... 전개를 위해서는 필요했던 부분이었기에 반전과 결말에서 결국 그 씁쓸함이 남는다.
디스토피아와 현실 그 경계에서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로 한동안은 말을 많이 하고 싶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