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 걸 클래식 컬렉션 1
요한나 슈피리 지음, 이경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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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월화수목 금금금"이라는 노랫말처럼 워킹맘인 나에게 일상이란 치열함과 지난함의 반복이다. 시간이라는 압력에 못 이겨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이끌고 출근하는 순간, 딱딱한 보도블록을 밟으며 빌딩사이를 걸어가는 순간, 그리고 마침내 아이콘으로 가득찬 컴퓨터 모니터를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까지도 여유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전쟁과도 같은 일상.

 

그 일상의 순간에 하이디를 만났다. 무수히 피어 있는 들꽃을 헤치고하얀 양들이 뛰노는 알프스 산자락의 귀여운 소녀. 마치 이 책은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을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아이로 캐스팅한 것 느낌 이랄까. “힐링이라는 소재를 키워드로 낱낱이 나열해 뒀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알프스 삼촌이 만들어준 침대위에서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보며 잠들어 한 번도 깨지 않는 나른한 동심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이의 시선으로 풀어졌다가

어른의 시선으로 긴장했다가

 

하이디는 나에게 힐링이면서 동시에 불편함도 주는 인물이다. 스위스 작은 마을에서 펼쳐지는 천혜의 경관과 그 무엇도 뒤섞이지 않은 신선한 공기, 선의로 가득 찬 아이가 그려내는 사랑스러운 일상들이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다가, “저렇게 마냥 해맑은 소녀는 과연 착하고 좋기만 한 걸까?” 라는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들이다.

 

저길 봐. 산들이 전부 장미처럼 빨간색이 되었어! 꼭대기가 눈으로 덮인 산을 봐.” p54

 

할아버지에게 그래니에 대해서 알려드릴 때까지만 참으세요. 할아버지라면 그래니의 눈을 고칠 수 있어요. 집도 뚝딱뚝딱 잘 고치고요. 할아버지는 뭐든 할 수 있거든요.” p67

(하이디의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들이다.)

 

나는 돈이 없어, 하지만 클라라는 있을 거야. 네게 줘야 하니까 돈을 좀 달라고 하면 분명 줄거야. 얼마를 받고 싶어?” p113

 

어서 들어오세요.” 그는 하이디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말했다. 소년은 미처 보지 못한 채 문을 쾅 닫아버렸다. 혼자 남겨진 소년은 몹시 황당한 심정이 되었다. P118

(이 장면에서 나는 모든 판단이 하이디의 일방적인 것이었기에 클라라가 착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 책은 아이처럼 마음을 다 풀어놓고 보아야 의미가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어른이었기에 이따금씩 서른 넷의 눈으로 하이디를 보았다. 때로는 너무 대견하고, 때로는 매우 염려스러우며, 사랑스러웠지만 가끔은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을 들고 있는 순간에 나는 아이가 되었고, 다시 어른으로 돌아갔다.

 


하이디, 새로운 세상을 만나다

 

하이디의 세계관이 확장되는 것은 알프스 대자연에 안기는 그 순간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실은 그녀가 읽기를 시작하고, ‘기도의 의미를 깨달은 바로 그 시점이 아닐까 싶다. 나는 하이디가 글을 읽으려 결심하는 것과 폭발하는 감정을 전능한 존재와 교류하게 되는 이 장면이 그토록 벅찰 수가 없었다.

 

내 말을 잘 들어봐, 하이디. 너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읽기를 배운 적이 없어. 왜냐하면 페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거든. 지금부터는 이 할머니의 말을 믿어. 페터가 아니라 네 자신을 믿어봐. 그러면 얼마 후 다른 아이들처럼 너도 글을 잘 읽게 될 거야. 네가 글을 읽게 되면 들판의 목동 그림이 있는 이 책을 주마. 그러면 스스로 이야기를 읽어서 목동과 그의 동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면 너도 좋겠지, 그렇지?”


지금 당장 읽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P153

….

……


하이디의 눈이 다시 빛났다.

그분에게는 뭐든 다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아이가 물었다.

그럼, 뭐든 다 말할 수 있고말고.” P156

 

제제만 부인은 산 속의 마냥 해맑기만 했던 소녀 하이디에게, 이런 식으로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읽기를 통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보게 하며, 기도를 통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감정의 잔해들과 고통을 해소하게 한다. 어린 아이든, 어른이든 새로운 것은 늘 두려움을 동반하며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때로는 지금이 편하고 익숙한 것이 좋을 때가 있다. 읽지 않아도 하이디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읽기기도를 통해 더 큰 세상을 보여주는 제제만 부인의 지혜는 그야말로 긴 시간을 보낸 진짜 어른의 그것이다. 훌륭한 선생님에게 배운 하이디가 훌륭한 아가씨로 성장할 것은 자명하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현재의 우리네 삶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동료, 이웃, 친구라는 단어들은 점점 더 낯설어진다. 스마트폰만 켜면 하루 종일 내가 보고싶은 것만 골라 볼 수 있고,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일보다 사진과 영상에 댓글이나 좋아요 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더 익숙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컨텐츠 생산의 원동력은 타인의 관심주목이라는 것에 있다. 심지어 시청자 댓글에도 좋아요를 표시하여 가장 뛰어난 공감을 얻어내는 댓글이 상위로 노출된다. 너무나 쉽게 나를 공유할 수 있으며 남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외로울까?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세대가 아닐까 싶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해가 지면 엄마를 비롯해 온 동네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그것은 이제 돌아올 시간이다. 어서 같이 따뜻한 밥을 먹어야지.” 라는 다정한 부름이었다. 나는 최근에 이런 목소리를 잘 들어본 적이 없다. 타인과 뒤섞이는 것이 불편하고, 가족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낯설고 어색하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외로워진다.

 

하이디가 도심 속 클라라의 집에서 병이 들 정도로 알프스를 그리워하는 장면은 단연 나에게 잃어버렸던 인간의 본성을 일깨워 준다. 그대로의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 냄새, 사람, 모든 것이 존재하는 그리운 내 고향, 돌아갈 곳에 대한 따뜻한 그리움 말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이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노인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눈가가 촉촉히 젖어와 노인은 한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마침내 노인이 하이디의 두 팔을 자신의 목에서 떼어낸 후 아이를 무릎 위에 앉혔다.


돌아왔구나 하이디.” P202

 

오랫동안 이 장면은 내 가슴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하이디가 알프스로 돌아와서 차례로 소중한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만나고, 마침내 할아버지에게 안길 때의 그 설렘과 벅차는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가, 언제든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아마도 내일은 또 전쟁 같은 일상에 뛰어들겠지만, 늘 보이는 자리에 두고 하이디를 언제든 꺼내 읽고 싶다. 사랑으로 가득한 어린아이가 되고 싶을 때마다, 온기로 가득한 누군가의 이웃이, 친구가 되고 싶을 때마다.



*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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