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성소수자 등 집단마해 어떤 고정된 속성을 남지"25) 않기 때문입니다. 즉 여성, 남성, 장애인, 성소수자 드나는 고정된 특정 집단적 정의밖에 남지 않는다L것이지요. 이는 그가 무엇인가‘ 만을, 다시 말해 어떤 고져가지고 있고, 어떤 범주에 속해 있는지만을 설명해 죽그러나 인간은 그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설명 가단으로 설명 가능한 다른사물들과 달리,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같은 세계를 공유타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사건을 겪어 내는
‘누군가‘로서도 세계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아렌트는 좋은 이야기란 오히려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들을 정의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서 의미를 드러‘ 299 내 준다고, 즉 한 인간의 ‘누구입‘을 나타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어떠한 정해진 개념이나 도식화된 분류 틀, 즉 ‘무엇‘에 대한묘사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은 채로, 어떤 삶을 세계에 나타나는 대로 만나 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렌트 본인도 언어가 ‘누구‘에 대한 묘사를 ‘무엇‘에 대한 묘사로 너무나도 쉽게 바꿔내곤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긴 했습니다. 즉 ‘무엇‘에 대한 묘사를이야기에서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긴 하다는것이지요. 그러나 한 사람의 정체성이 아무리 상세한 ‘무엇들도표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만 가지고서 우리는 그가 ‘누구인시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억압받는 여러 정체성의 ‘
복수로 나열하는 것조차도 그의 ‘누구임‘을 온전히 드리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무엇임에 또 다른 ‘무엇임들이 .
는 여러 정체성의 범주들을「구임‘을 온전히 드러내 줄 수는또 다른 무엇임들이 교차하는것민을 나타내 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생물의크는 ‘생물학적 여성‘이며,
28) 나카마사 마사키, 의의 책, p.348.
29) MDT, p.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