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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ㅣ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책을 애독하고 지적 탐구에 헌신적인 소년이었던 나는 전반적으로 우울한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행복한 시간을 많이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의자와 벽난로, 책상 그 밖의 정든 물건들을 둘러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것들을 보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작별의 눈길을 보냈던 물건의 형태와 표정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눈에 선하다. 그 물건은 벽난로 위에 걸려 있던 아름다운 XXX의 초상화였는데, 초상의 눈과 입은 너무나 아름답고 안색은 자애로움과 신성한 평온함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어서, 나는 독실한 신자가 자신의 수호성인에게서 위안을 얻듯이 그 초상에서 위안을 얻기 위해 내 펜이나 책을 수천 번이나 내려 놓곤 했었다. 내가 그 초상화를 쳐다보는 동안, 맨체스터 시의 시계가 굵고 낮은 소리로 4시를 알렸다. 나는 초상화로 달려가서 입을 맞춘 다음, 조용히 밖으로 나와서 영원히 문을 닫았다!
천성적으로 지적인 인간임을 자부하며 철학자의 삶을 살아왔노라는 드 퀸시의 학구적인 성향은 아마도 작은 기숙사 방에서 싹튼 것 같다. 그는 이 곳을 “사색의 성채”라 여기고 밤새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기숙사를 탈출하는 것으로 일년 반 만에 끝이 났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방랑이 시작된다. 드 퀸시는 웨일스와 런던을 떠돌아다니며 힘겨운 생활을 하던 중에 아편을 접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중독자가 되고 만다. 그가 누렸던 독특한 경험과 아편에 얽힌 이야기는 아주 매혹적인 작품으로 탄생했다.
국내에는 1996년 <아편의 쾌락과 고통>으로 번역되었으나 현재 절판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시공사(2010)에서는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으로, 펭귄(2011)에서는 <어느 영국인 아편 중독자의 고백>으로 출판되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 뉘앙스 차이는 있었지만 나는 두 판본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 펭귄판에서는 서문과 부록을 통해 그동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드 퀸시의 생애와 이 책과 관련된 일화들이 자세하게 실려 있어서 참고자료가 더욱 풍부해 진 셈이다.
이 책은 아편 중독에 대한 드 퀸시의 변명 같은 고백서로, 당대 문인들은 물론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다. 나 역시 드 퀸시의 진실한 변명에 너무나 매료된 나머지 이 책을 반복적으로 읽었다. 특히 굶주림과 방랑으로 점철된 <예비고백>편이 얼마나 흥미롭고 매력적인지 이 부분만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그의 경험은 분명 안쓰럽지만 그의 글은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다. 그런 이유(아편이 주는 관능적인 쾌락을 탐미적인 문체로 묘사하고 있어 오히려 아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이 책 때문에 당시 영국에서 아편에 빠지는 사람들이 증가했을까? 드 퀸시의 글은 단순히 아편에 대한 유혹과 충동을 부추기는 부당한 고백이었을까?
드 퀸시의 글이 런던 매거진에 익명으로 연재될 당시만 해도 아편은 금지 약물이 아니었으며 술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드 퀸시는 극단적인 굶주림 때문에 생긴 위장병과 만성적인 치통에서 벗어나고자 아편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마력의 약물이 효과가 있었기에 복용 횟수는 당연히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드 퀸시는 “아편이 주는 천상의 쾌락”에 빠져들게 되었으며 강렬한 쾌감을 위한 탐닉의 습관이 지속될수록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아편은 그를 몇 날 며칠 동안 환상에 빠지거나 몽상에 잠기도록 이끌었다. 이는 그가 타고 났다고 하는 우울한 기질도 한 몫 했다.
물론 드 퀸시는 아편의 고통과 위험성, 이에 따르는 무서운 환각증상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논하면서 날짜 별로 아편팅크의 수치와 그 증상들을 기록하며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끊지 못한 채 평생 아편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을 달고 살아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는 우울증과 고질병으로 일찍 사망했으며, 부채 문제로 빚쟁이들에게 감금되거나 수도 없이 고소당하는 등 늘 가난에 시달렸다. 이쯤 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삶의 의지가 사라질만도 한데 드 퀸시는 그의 가족과 다른 낭만주의 작가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다양한 매체에 에세이와 비평문을 기고하다가 1856년에는 <고백>의 개정판까지 출간하는 등 작가로서의 성공을 거두었다.
<고백>은 개인적인 경험이 아무리 험난하다 할지라도 문학적 소양과 역량이 잘 발휘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문체로 완성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다. 드 퀸시는 비상할 정도로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숙했던 만큼 철학과 문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한 때 그리스어로 연애편지를 대필해주며 숙식을 해결하던 일은 얼마나 낭만적인 노동인가!) 때문에 이 책 전반에 걸쳐 상황에 맞는 고전 문구와 문학 작품을 재치 있게 인용하여 읽는 기쁨을 더해준다. 예를 들면 이런 문구;
일찍이 먹어본 적이 없는 자들은 지금 먹고, 늘 많이 먹어본 자들은 이제 더 많이 먹어라.
드 퀸시가 흉내 낸 2-3세기 경의 라틴어 시 <사랑의 불면>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자, 내일 사랑하라.이미 사랑해본 자는 내일도 사랑하라.
드 퀸시의 주석 때문에 혹자는 독서에 방해가 될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기가 막힌 예시가 <고백>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누구나 아편이 아닌 드 퀸시의 ‘글’에 중독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