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 단편문학 1318 청소년문고 20
현진건 지음 / 미니책방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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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한한 희망을 품고 글을 써내려 갔을 한 작가의 처녀작을 읽는 것은 익숙하던 사람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신선한 기쁨을 준다. 현진건의 단편은 재미있는 것들이 수두룩하지만 이번에 그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유독 <희생화(犧牲花)>라는 작품에 마음이 갔다. 1920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그의 처녀작으로서 순수한 청춘 남녀의 사랑을 여자 주인공의 동생인 ‘나’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연애→집안의 반대→이별로 이어지는 뻔히 예측 가능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나’가 들려주는 누나의 사랑이야기, 그 풋풋한 표현이 마음에 든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결말이 비극이라 슬프긴 하지만.

이틀 후, 누님이 그를 데리고 왔다. 그의 곱상스러운 얼굴과 얌전한 거동이 어머님의 사랑을 이끌었다. 참 내 딸의 짝이라 했다. 애녀의 평생이 유탁하다 했다. 단꿈이 꾸이리라 했다. 기쁜 날이 오리라 했다. 더구나 맑은 눈과 까만 눈썹이 내 딸과 흡사하다 했다. 누님과 그가 영어로 말하는 양을 보고 뜻도 모르면서 웃으셨다. 재미스러운 딸의 장래 가정을 꿈꾸고 사랑스러운 외손자를 꿈꾸었다. 

무엇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MBC 베스트극장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에피소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어린 내게 애잔한 여운을 남겼던 드라마,  <간직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 참고로 이 드라마는 소지섭의 데뷔작이었다고 한다.​ 말 못하는 시골처녀(전도연)의 이방인(소지섭)을 향한 애틋한 감정이 푸르게 펼쳐진 녹차 밭을 배경으로 퍽 아름답게 그려진다. 말미에는 소지섭의 오토바이에 부딪힌 전도연이, 그가 서울로 간 이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데 사고의 후유증 때문이지, 사랑의 열병 때문인지 결국 세상을 떠난다. <간직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의 무더운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희생화>의​ 싸늘한 겨울은 이렇게 시작되면서 소설이 끝난다.


마침내 한강 얼음 얼고, 남산에 눈 쌓일 제, 누님은 그에게 한숨을 주고 눈물을 주던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아아, 사랑아, 사랑의 불아! 네가 부드럽고 따뜻하므로 철없는 청춘들은 그의 연하고 부드러운 심장에 너를 보배만 여겨 강징난다. 잔인한 너는 그만 그 심장에다 불을 붙인다. 불기둥 같은 불길이 종작없이 오른다. 옥기조차 버리고 홍안도 타 버리고 금심도 타 버리고 수장도 타 버린다! 방 안에 켰던 촉불 홀연히 꺼지거늘 웬일인가 살펴보니 초가 벌써 다 탔더라! 양협이 젖던 눈물 갑자기 마르거늘 무슨 연유 묻잤더니 숨이 벌써 끊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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