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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네 각시 도라지 총각 ㅣ 비룡소 전래동화 39
배삼식 지음, 김세현 그림 / 비룡소 / 2025년 11월
평점 :
#도서제공
요즘 아이들과 전래동화를 읽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착한 사람은 꼭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는 이야기들, 그 익숙한 공식이 지금 아이들의 마음에도 그대로 와닿을까 하고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조금은 다르게, 조금은 더 깊이 마음으로 들어오는 전래동화를 자꾸 찾게 되더라고요. 《지네 각시 도라지 총각》은 그런 갈증을 조용하지만 깊게 채워준 전래동화 그림책이에요.
이 책은 전래동화 ‘천 년 묵은 지네’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사건의 흥미보다 사람의 마음에 더 집중한 이야기예요.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보다는, “얼마나 아팠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들어요. 읽는 내내 권선징악보다는 관계와 감정이 오래 남는 느낌이었어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극작가 배삼식 작가님의 첫 전래동화이고, 한국출판미술상과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잘 알려진 김세현 작가님의 그림이 함께한 작품이라 시작부터 기대가 컸어요. 그리고 그 기대를 충분히 채워주더라고요.
이야기의 주인공 도라지 총각은 몸도 머리도 팔다리도 말짱한 총각이지만, 왼쪽 눈이 파아란 이유로 사람들 속에 섞여 살지 못하고 산속으로 들어가 살게 됩니다. 사람들 눈에는 징그럽고 도깨비 같은 눈이었지만, 지네 각시의 눈에는 그 눈이 도라지꽃처럼, 청옥처럼 곱고 예쁘게 보였어요. 도라지 총각 역시 지네 각시의 빠알간 손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죠. 서로의 다름은 두려움이 아니라 끌림이 되었고, 그렇게 둘은 산속에서 조용히 함께 살아갑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꽃 피면 봄이구나 싶고 잎 지면 가을이구나 느끼며 석삼 년이 흐르는 동안, 지네 각시는 약초를 캐 오고 도라지 총각은 그것을 내다 팔며 소박한 일상을 이어가요. 하지만 이 평온은 오래가지 않아요. 어느 날 장에 나갔던 총각은 토룡 대사를 만나고, 토룡 대사는 지네 각시의 정체를 밝히며 죽이지 않으면 네가 잡아먹힐 거라며 먼저 공격하는 방법까지 알려줍니다.
그 순간에도 도라지 총각의 마음은 분명해요. 징그러운 내 눈을 웃으며 들여다보던 사람, 예쁘다고 말해주던 사람, 석삼 년 한솥밥을 먹으며 정든 하나뿐인 각시를 어떻게 해칠 수 있겠냐고요. 결국 총각은 지네 각시를 해치지 않기로 선택하고, 그 마음을 알게 된 지네 각시는 토룡 대사와 자신 사이에 천 년 동안 이어진 원한의 사연을 들려줍니다.
서로의 부모를 죽이며 쌓여 온 오래된 원한은 결국 싸움으로 이어지고, 그 싸움은 며칠이고 계속돼요. 지네 각시는 이기기 위해 큰 소리를 내 달라고 하지만, 도라지 총각은 끝내 그러지 못합니다. 누구 하나 쉽게 나쁘다 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총각은 그저 목 놓아 울 뿐이에요. 그리고 그 울음 덕분에 둘의 원한은 서서히 녹아 흘러내리고, 토룡 대사는 자취를 감추고 지네 각시는 점점 작아져 풀숲으로 사라집니다.
이 장면을 읽으며 우리 아이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싸우는 모두가 다 슬퍼 보여.” 아이 눈에는 이미 이 이야기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이야기로 보였던 거죠. 그 말 한마디에 이 책의 힘을 다시 느꼈어요.
글의 호흡은 마치 옆에서 누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술술 흘러가고, 그림은 먹과 색을 절제해 흑과 백, 빨강과 파랑의 대비로 감정을 또렷하게 전해요. 새파란 눈동자와 빠알간 손, 그리고 텅 빈 여백까지, 글과 그림이 서로 앞서지 않고 조용히 손을 잡고 이야기를 완성합니다.
다름 때문에 상처받아 본 아이, 친구 관계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아이, 그리고 아이와 함께 전래동화를 다시 읽어보고 싶은 부모님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에요. 누군가를 이기는 이야기보다, 끝내 누군가를 해치지 못한 마음이 더 오래 남는 전래동화. 읽고 나면 아이와 나란히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책이었어요. 올겨울, 따뜻한 이불 속에서 아이와 함께 천천히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