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43)

막간을 틈타 몇 자 적는다. 몇 권에 대하여. 흔히 전체주의 사회라고 지칭되는, 그래서 모든 인민이 철저한 감시하에 놓여 있었다고 간주되는 스탈린 시대 소련사회에서도 '인민들'은 (직접적/공식적인 방식은 아니었더라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다 표현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령, <1984년>(문예출판사/민음사)이나 <멋진 신세계>(문예출판사)에서와 같은 '거의 완벽한' 통제사회는 아마도 '이론'이나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이들 반유토피아 소설의 원조가 되는 자먀찐의 <우리들>(열린책들)이 절판된 것은 유감스럽다). 갑자기 이런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긴급한 프로젝트에 발목이 잡혀서 학교에 나와 있으면서도 손가락은 이런 식으로 '탈주'하며 자신의 '향락'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변호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엔 우리가 말릴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지난주에는 고맙게도 나에게 부담을 주는 책들이 한권도 나오지 않았다. 부담을 주는 책들이란 (1)급하게 읽어야 하는 책, (2)그런데, 읽기가 버거운 책(영어식 표현이 'great books'라고), (3)게다가 값비싼 책이다. 부담감의 난이도는 그런식으로 증가하는바,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에는 고난도의 책이 없었다는 것(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너무 없다 싶어서 네댓 종의 북리뷰들을 읽고 나서도 이래저래 검색을 하다가 찾은 것이  엘스베트 볼프하임의 가벼운 평전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아카넷)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독일 사람이고 슬라브문학을 전공한 문학애호가이다(약력에는 강단에 몸담았다는 기록이 없다). 20세기 러시아문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썼다고 소개돼 있는데, 약간의 뒷조사를 해보니까, <안톤 체홉>(1996), <불가코프>(1996) 등의 저서를 갖고 있고 이번에 번역돼 나온 건 2000년 신작이다. 203쪽 분량이니까 원서로는 150-160쪽 정도의 분량일 것이고 나로선 특별히 기대할 만한 내용이 없어 보인다. 이미 마야코프스키의 전기와 관련해서는 <마야코프스키>(까치글방, 2001재판)이 나와 있고, 절판됐지만 후고 후퍼트의 <나의 혁명, 나의 혁명>(역사비평사, 1993)도 207쪽 분량이었다. 볼프하임의 책은 그 절반 정도에도 못 미친다. 대신에 에이젠슈테인과 같이 묶었다는 게 특장이다. 에이젠슈테인이 영화론 번역서들이 이전에 많이 출간됐었지만(1990년 전후였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해져 가는데, 신간은 그에 관한 기억을 다시 되살려줄지도 모른다.

러시아에서도 몇 년 전부터 에이젠슈테인 전집이 다시 편집돼 나오는바, 작년에 나는 두툼한 책 네 권을 구입했었다. 그의 회고록 2권은 별권이고. 영화사나 혁명영화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필독서가 되겠지만, 그들을 위한 책이 과연 쉽게 (번역돼)나올 수 있을는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회고록은 889쪽 짜리로 영역돼 있다. 영화론은 저명한 소련영화사가 제이 레이다가 엮은 책 2권이 있고, 최근엔 리처드 테일러가 엮은 선집도 나왔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의 연구서 <에이젠슈테인의 영화>(하버드대출판부, 1994)가 영어권의 가장 유용한, 에이젠슈테인 가이드북이다(그만한 연구서는 러시아에서도 나온바 없지 않을까 싶다. 모스크바의 대형서점들에 처음 갔을 때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영화학' 책들이 없을까, 라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박물관'에서 에이젠테인 영화의 카메라나 소품 등을 구경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러시아쪽 책부터 소개하는 건 나로선 불가피하다. 두번째 책은 그걸 중탕시키기 위한 꼽은바 로알드 달의 소설집 <맛>(강). 동아일보 리뷰에 굉장히 크게 소개가 되었길래 내겐 생소한 이름이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까 <마틸다>(시공사)의 저자였다. <마틸다>는 내가 드물게 읽어본 어린이 책('주니어부'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인데, "천재이지만 어리석은 부모와 학교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마틸다의 학교생활과 어리석은 어른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유쾌하게" 그린 작품. 이 요약에 빠져 있는 건 마틸다가 '천재적인 독서광'이라는 사실. 당연히 내가 좋아할 만한 캐릭터인데, 사실 그런 이유만으로 그 책을 읽은 건 아니고 생업을 위해서 학원강사로 뛸 때 초등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책을 찾다가 고른 게 <마틸다>였다. 내가 두어 개의 에피소드들을 복사해서 나누어주고 줄거리를 말해봐라, 느낀 점을 써라 등등의 주문을 학생들에게 했다. 비록 기대와는 다르게 '나도 마틸다처럼 독서광이 되고 싶어요'란 반응은 얻어내지 못했지만, 나는 어쨌든 (어른을 괴롭히는 일에 있어서) 마틸다 못지 않을 아이들과의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저자의 이름도 잊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로알드 달이었던 것.

<마틸다>를 떠올려보니까 입심 하나로 유명 여배우와 결혼했다는 작가의 '영웅담'도 허황돼 보이진 않는다. 그가 "현대 동화에서 '가장 대담하고, 신나고, 뻔뻔스럽고, 재미있는" 어린이책을 만든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구미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손꼽힌다."는 것도 믿어줄 만하다(국내에도 이미 '로알드 달 베스트'가 3권 짜리로 나와 있다). 물론 이번에 나온 '선집'은 어른용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역자인 정영목씨 왈 "재미없다는 쪽에 당신이 내기를 걸면 아마 남아날 손가락이 없을 것"이라고 하고, 소설가 성석제가 거들기를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의 서열을 매기라 한다면 나는 로알드 달의 소설을 다섯 손가락 안에 놓겠다." 이 정도면 거의 칼만 안든 수준 아닌가?


 

 

 

사실 달(Dahl)이란 이름에서 내가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로알드가 아니라 로버트이며, 로버트 달은 저명한 정치학자이다. 출간순서를 역순으로 꼽으면 <미국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문학과지성사, 1999), <민주주의>(동명사, 1999) 등이 그의 책이다. 제목에서부터 '민주주의'론의 권위자란 게 팍팍 드러난다. 한때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란 테마로 책을 좀 읽어보려고 자료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로버트 달 정도 읽어주면 절반은 카바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지만(요즘은 다시 전체주의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어쨌든 같은 성씨를 쓰는 걸로 봐서 로알드와 로버트가 인척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그것까지 뒷조사할 여력은 없지만(알라딘에는 세계 미스테리 어쩌구 하는 책들도 로버트 달의 책으로 뜨는데, 로알드와 로버트를 혼동한 착오이다).

 

 

 

 

<정치인을 위한 변명>(개마고원)은 지나가는 김에 꼽아본 책이다. 아직 정치의 계절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런 제목의 책이 나오는 게 좀 이상하지만, 현대의 '상시적인' 정치체제라는 걸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책은 강준만과 떼놓을 수 없는 출판사에서 나왔으므로 '중도 좌파'(?) 정도의 입지점을 갖는지 모르겠고.  저자인 헤르만 셰어의 말을 다시 옮겨둔다. "민주주의는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을 위해서는 구분이 필요하다. 정치인, '정치계층', '정치계급'에 대한 일반화된 폄하와 개별 정치인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더욱 정열적이고 능력 있는 정치인에 대한 사회의 요구는 공허한 외침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참여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 민주주의 공부를 위해서도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다.

 

 

 

 

세번째 책은 <맛>의 역자인 정영목씨와 공역서 <세계를 뒤흔든 반항아 말론 브란도>(푸른숲, 2003)까지 낸바 있는 한겨레의 문화부 고명섭 기자의 <지식의 발견>(그린비)이다. 소개에 따르면, "출판 담당 기자를 지냈던 저자가 예민하고 꼼꼼한 시선으로,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쓴 19권의 책에 대한 서평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책들은 모두 우리 학자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현실을 진단하고 바꿔보려 한 노력의 산물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학자들이 쓴 책 19권에 대한 서평집이라는 것. 아직 실물을 보지 않아서, 그리고 목차에 대한 정보가 뜨지 않아서 19권의 목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한가닥하는 식견과 의식을 갖춘 저자이기에 읽어봄 직하겠다(내게 고기자는 '벤야민'의 표기를 '베냐민'으로 고집하는 기자로 각인돼 있는데, 시집을 낸 경력도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 생각건대, 그러한 고집은 기자의 것이 아니라 시인의 것이지 않을까?).

요즘은 이름이 잘 눈에 띄지 않아 퇴직하거나 휴직한 게 아닐까 생각되는 이로 역시 한겨레의 이상수 기자가 있다. 기자생활과 병행하여 그는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었는데, 그 부산물이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길, 2001)이었고, 내가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이 책의 일부는 고등학생들 논술 수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해서, 고기자의 <지식의 발견>은 내게 이기자의 <오랑캐의 즐거움>과 나란히 놓인다. 억지스럽지만, 둘을 섞어서 <오랑캐의 발견>이나 <지식의 즐거움>이란 책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으므로 그냥 그렇게 놓도록 하겠다. 하긴 이런 조합도 가능하군. '지식(인)=오랑캐' '발견=즐거움'.

 

 

 

 

네번째 책은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역사비평사). 서평마다 미국의 잡지 <애틀랜틱 먼스리>의 헌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8세기를 대변하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를 대변한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20세기를 대변할 것이다." 물론 대중에 대한 혐오와 독설로 가득 차 있는 책 자체는 세기의 책에 값하진 못하지만, 문제의식 자체는 20세기를 관통하는 것이기에 <대중의 반역>이 갖는 대표성을 얼마간 인정 못할 것도 없겠다. 나는 이전에 한마음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갖고 있는데, 이번에 보다 좋은 번역본이 나왔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책이 역사비평사에서 나왔다는 건 다소간 의외인데, 우나무노와 함께 20세기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러시아에도 가세트의 책들은 문고본으로까지 나와 있다) 철학자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론 철저한 엘리트주의자로 평가되는 가세트이기에(이런 점을 표나게 강조한 이가 문학비평가 이동하였다), 내가 알기로 '민중의 역사'라는 역사관을 내세우는 역사비평사와는 뭔가 안 맞지 않은가란 생각 때문.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만, 한겨레와 동아일보의 서평은 각기 다른 입지점에서 씌어졌다. 먼저, 한겨례: "당시 가세트가 목격한 것이 주로 파시즘의 군중 대열에 선 대중의 신념에 찬 얼굴이며 '유럽의 몰락'과 동시에 등장한 소비에트 정권과 미국의 대량산업 사회의 군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고, 또 지금은 자연현상이 된 대중사회가 서투른 '원시성'을 지닌 채 막 등장하던 시대에 성찰한 대중사회 초입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그의 분석은 유익하다. 그래서 '평균'과 '편의'의 안위에 길든 현대인이 바로 가세트의 대중은 아닌지 다시 성찰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그리고 동아일보: "그렇다면 21세기 한국에서 이 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따돌림당하는 '왕따 현상'과, 평범함이 비범함보다 우선되는 반지성주의, 그리고 대중의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참여민주주의 시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겨레는 현대인과 대중간의 간격을 도입하면서, '우리 가세트의 대중은 되지 말자!'라는 자기반성을 유도한다는 데에서 책의 현재적 의의를 찾고 있고, 동아일보는 참여민주주의라고 에둘러서 표현한 현 참여정부('포퓰리즘 정권')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같은 책에서 발견한다. 이런 제각각의 읽기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독자의 반역'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대중의 반역>은 '고전'에 근접한다.  

 

 

 

 

네번째 책은 그러한 가세트의 대중들을 '당나귀들'로 호명하는 배수아의 장편소설 <당나귀들>(이룸)이다. 1995년에 첫 소설집을 냈으니까 올해는 작가가 데뷔한 지 만 10년이 되는 해이고, 그간에 열댓권 이상의 책을 냈으니까 제법 부지런한 작가군에 속한다. 한국 소설 읽기에 둔감은 내가 제대로 읽은 작품은 한 권도 없지만, 이런저런 풍문을 통해서 그녀의 향방에 대해서는 얼마간 가늠하고 있다. 병무청을 그만두고 독일에 둥지를 튼 것까지도(고고학을 배우러 떠난 시인 허수경이 아마 그녀의 말벗이 돼 주는지).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그냥 좀 특이한 여자애' 소설쓰기에서 점차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대중 비판으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재작년에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던 걸로 기억되는(그리하여 소위 문단의 '주류'로 인정받게 되는) 작품 <일요일 스키야기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이 그런 방향으로의 전환점이 아닌가 싶고(아직 '독자'가 아닌 나로선 확증할 수 없지만).

물론 그러는 과정에서 소설이란 '미학적 형식'은 그녀에게 이전만큼의 제어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하다. "계몽의 시대가 도래했어야 할 바로 그 적절한 순간에 굶주림의 시대에서 천박의 시대로 바로 월반해 버린 윌반해 버린 우리의 역사"(25쪽) 같은 대목에 대해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는 '울림 깊은 문장'이라고 평하지만 내가 보기엔 소설의 문장으로서 천박하다. 그런 문장들로 재단되고 구획될 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나는 작가가 세상에 대한 혐오감(혹은 '복수심'이라도 무방하다)을 그런 서툰 방식(최재봉 기자는 소설의 3요소가 빠진 '독후감 소설'이라고 평했다)이 아니라 보다 본때나는 방식으로 형상화해주기를 바란다. 혐오도 경우에 따라선 '위대한 혐오'에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배수아의 신작과 나란히 나온 소설집은 김경욱의 <장국영이 죽었다고?>(문학과지성사)이다. 배수아와 마찬가지로 내가 별로 읽은바 없는 젊은 작가이지만, 나는 그가 영화를 너무 많이 베낀다는 불만은 한켠에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 불만은 교정되지 않게 돼버렸다. 짐작에 소설은 배수아의 그것보다 재미있을 것이며 더 많이 팔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쓴 소설'들의 최상급은 김영하의 소설 정도이다(돈벌게 해주는 '포스트잇'을 쓰는 게 작가이다. 역사도 팔고, 사랑도 팔고, 때론 운명도 팔면서). 해서, 나로선 매끈한 김경욱보다는 천박한 배수아를 지지하겠다. 그가 아닌 그녀에게 베팅하겠다. 신용불량자가 되어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김경욱의 인물은 "그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겨우 존재할 수 있다"(9쪽)고 말하지만, 배수아는 어차피 장국영도 없는 세상에서 당나귀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를 증언한다. 내가 편드는 건 소설의 테크닉이 아니라 작가의식이다.

05. 06. 04.

P.S. 그밖에 마크 롤랜즈의 (미디어2.0)도 눈길을 줄 만한 책이다. "소크라테스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SF 영화로 본 철학의 모든 것"이란 부제 때문에 이미 좀 팔려나가고 있는 책인데, 원제 "The Philosopher at the End of the Universe"(2003)대로 했다면, 다소 무겁게 여겨졌을 법한 책이다. 이른바 SF영화라는 당의정 속에 철학적 주제를 담아놓은 것이 될 텐데, 그런 것에 얼마간 식상한 나로선 별로 새로운 게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저자는 <동물의 역습>(달팽이, 2004)을 전작으로 갖고 있는 철학자이다. 해서 신간보다 오히려 눈길이 가는 것은 그의 구간이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그 책은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좌파출판사로 유명한 영국의 Verso Books의 Practical Ethics Series(실천윤리학 시리즈) 중 한 권"이고,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인간사랑, 1999)에 비견될 만한 책이다: "이 책은 핵심적 주장은 "동물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주제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Peter Singer가 1973년 발표한 <동물해방>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Mark Rowlands가 2002년 발표한 이 책은 더욱 세련되고, 더욱 설득적이며, 더욱 읽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아마도 <동물해방>에 못지 않은 새로운 걸작이라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철학자 데리다가 말년에 숙고한 주제 또한 이 '동물(성)'인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조만간 가볍고 묵직한 책들이 여러 권 더 선보일 것이다.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들로 나는 (죽음 대신에) '노인/노년'과 (타자 대신에) '동물'을 꼽고 싶다. 물론 이때의 동물은 우리 안의 '동물'을 포함하는 것이다. 동물(짐승)과 신 사이의 존재로 인간을 규정했던, 그리하여 "동물에서 신으로!"란 구호를 내건 형이상학이 상승의 철학이라면, 하강의 철학으로서 탈형이상학의 관심은 "신에서 동물로!" 향한다. 아마 이 대목에서 형이상학에 고질적으로 고정된 인간의 지능/두뇌는 고전을 면치 못할지도 모르겠다. 해서, 인간을 대신하여 철학(궁리질)을 담당할 동물들이 나서야 하는지도. 누구? 들뢰즈의 진드기? 데리다의 고양이? 카프카의 물벼룩?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를 대신할 호모 사피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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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가라타니 고진과 동아시아

 

 

 

 

가라타니 고진의 인터뷰를 옮겨오도록 한다. 작년 봄 한겨레(2005. 05. 31)에 실렸던 것으로 대담자는 컬럼비아대학에서 고진의 강의를 듣기도 한 황종연 교수이다(<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의 저자 서문에는 두 사람이 인연이 잠깐 언급돼 있다). 동아시아 지성들과의 연쇄 대담 시리즈의 한 꼭지였는데, 타이틀은 "중/일은 '동양은 하나'라고 말해선 안돼"이며, 주요 화제는 '동아시아의 근대와 탈근대'이다. 작년봄에 읽을 때에는 굳이 옮겨오거나 할 생각이 없었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보인다. 고진에 입문하시려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고려대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일본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 긴키대 교수를 황종연 동국대 국문학 교수가 만났다. 황 교수는 <문학동네> 편집위원을 겸하면서 ‘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 등을 주제로 삼은 활발한 문학평론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가라타니와 황 교수는 동아시아의 근대와 탈근대, 한·일 민족주의 극복 등에 관해 대담했다. 

황종연= 동아시아론이 유력한 지역주의 담론이 됐다. 이런 지역주의 유행은 ‘중화 체제’ 붕괴 이후 역사상 처음이 아닌가 한다. 어떤 중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느낌이 든다.

가라타니= 세계사 전체에서 역사의 반복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120년 전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1880년대의 동아시아를 살펴보면 지금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현재 중국은 제3세계 사회주의 국가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청나라 말기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중국은 국가자본주의로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제국주의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유럽의 공동체 형성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세계적으로 세계화가 진행되는 동시에 지역적 공동체화가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동아시아는 세계적으로 높은 위상을 갖고 있는 동시에, 중동과 마찬가지로 위기에 놓여 있다.

황종연= 동아시아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기 이전부터 나름의 교역 체제를 갖고 있었다. 핵심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 체제다. 여기서 유래한 국제적 교역 공동체가 현재 동아시아 경제의 강력한 통합 고리를 이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동아시아 경제 통합의 움직임과 관련해 과거 중화 제국 체제와는 다른 어떤 초국민국가적 질서가 가능한가.

가라타니= 조공은 구 제국의 세계적 모습이다. 중국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에 두루 존재했다. 이때 구 제국주의는 국민국가를 확장한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다른 국민국가를 지배할 필요가 없었다. 프랑스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 각지의 국민국가 형성을 (저해한 게 아니라) 촉발시켰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제국주의는 각 국민국가들이 민족 자결을 주장하게 만들었다. 그 시기 한국, 중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독립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때의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이 지배하고 있는 국민국가를 넘어선 경계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이런 제국주의를 파괴하면서 현대의 국민국가가 성립됐다. 유럽의 경우에는 제국의 이념이 유럽 통합의 이념 아래 계속됐다.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이기고 지기를 반복하다가, 서로 분쟁하지 말자는 형태로 유럽연합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유럽은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을 형성했다. 나는 제국주의가 아닌 지역 공동체를 제국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동아시아에서 그런 제국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정해진 것은 아니다.

-1880년대에도 여러 선택의 길이 있었다.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결합했다. 일본은 현재 중국 공산당과 북한에 의한 군사적 위협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종류의 위협은 없다. 그 위협은 외부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위협으로 인한 피해가 최소화된다면 동아시아 공동체, 또는 동아시아 제국의 형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황종연= 근대 동아시아 정치사에서는 국민국가 이념과 함께 지역 정치공동체의 이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근대 일본에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를 만한 담론 전통이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의 아시아주의나 동양론은 제국주의와 얽혀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 공동체 주장을 들을 때면 역사의 악몽이 떠오른다.

가라타니= 어떤 슬로건이건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오카쿠라 덴싱이 말한 ‘동양’이라는 이상은 대단히 좋은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동양’은 그가 일본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건너간 뒤 인도의 독립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일본 시기의) 동양 또는 아시아는 하나라는 말은 오카쿠라라는 사람을 내쫓은 ‘국가’의 말이다. 그러니 말 자체가 아니라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동양이 하나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중국과 일본은 그런 말을 하는 게 적절하지 못하다. 한국이나 대만이 아시아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장래에 형성이 된다면 그 열쇠를 쥔 것은 일본도 중국도 아닌 한국이다. 북한과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 5개 나라 가운데 스스로 시민운동을 일으킨 것은 한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황종연= 선생님은 80년대 이후 일본에 출현한 포스트모던한 상황에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하나는 ‘백치의 천국’이 될 가능성, 다른 하나는 광신적 내셔널리즘으로 나아갈 가능성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가라타니=당시 내 예언이 맞은 것 같다.(웃음) 1980년대 일본인들의 행동이 지금은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백치들의 천국’은 세계적 현상이 돼버렸다. 미국의 경우 한편으론 백치 천국이 되고 있고, 한편으론 기독교나 유대교의 근본주의가 퍼지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것이다. 세계 근대 시스템 전체를 모더니즘이라 본다면, 이를 뛰어넘는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지금 (서구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안에 국한된 것이다. 실제로는 이를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황종연= 지금 우리는 상호연관성이 전지구적으로 확장되고 여러 문화가 중첩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런 만큼 확고한 소속감과 충성심을 갖기 어렵다. 오히려 다중적 소속감과 다면적 충성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코스모폴리턴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선생님은 언젠가 한일작가회의에 참석해 칸트의 코스모폴리턴한 이상에 대해 말했었다.

 

 

 

 

가라타니= 작가회의에서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웃음) 칸트가 말한 ‘공공(public)’이라는 개념은 공공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흔히 공공을 국가나 민족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칸트는 반대로 매우 ‘자기 중심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칸트는 한 개인이 가족이나 국가에 속해 살아가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서 ‘공공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공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코스모폴리턴이다. 그래서 코스모폴리터니즘은 민족적·지역적인 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지역주의를 부정하면 오히려 진정한 코스모폴리터니즘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국민국가를 극복한다고 해서 이를 부정하게 된다면, 오히려 보다 국가적·민족적인 흐름에 빠질 수 있다. 코스모폴리터니즘은 자기가 처한 위치를 뛰어넘어 생각하는 것이다.

황종연= 최근 한일 양국의 대중 언론은 일제히 내셔널리즘으로 복귀하고 있는 듯하다. 한일 양국의 민간에서는 상호 이해와 협력을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내셔널리즘을 넘어선 연합이란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라타니= 내셔널리즘의 문제는 각 국가 안에서 해결돼야 한다. 한국인이 일본 내셔널리즘을 극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반대로 일본인이 한국 내셔널리즘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굉장히 모순된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상대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언급하면서 상대의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고 있다.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는 것이다.

-지난 2000년 한일 작가회의에 참석한 뒤에 나는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한국을 비판할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통해 일본에도 일본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이런 신뢰 속에서 ‘연합’이라는 것이 가능하다.(정리 안수찬 기자)

06. 0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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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들뢰즈와 경험론의 비밀

 

 

 

 

들뢰즈와 경험론에 대한 걸 정리해놓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특별히 '생산적인' 뭔가에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닌데(이때 '생산'은 노동가치와 관련된다), 해야 할 일들이 계속 미뤄지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이런 '일' 때문인가?). '들뢰즈와 경험론'에 관련한 읽을 거리들도 머리속에 몇 개 생각해둔 게 있었는데,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다(책들도 분산돼 있기 때문에 한번에 작업을 끝내지 못한다). 

그나마 남아있는 아이디어는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 중 '보론'으로 포함돼 있는 글 '경험론과 철학 - 들뢰즈, 레비나스, 데리다'를 정리하면서 살을 붙인는 것이었다. 이 보론은 짧지만 생각할 거리들은 많이 제공해주는 유익한 글이다. 나는 막바로 3절부터 시작하겠다. '경험론에서 계사는 존재 동사가 아니라 접속사이다'란 소제목을 달고 있는데, 들뢰즈와 데리다를 레비나스를 사이에 두고 비교하는 내용이다(인용문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많은 면에서 서로 전혀 다른 종류의 철학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와 레비나스를 같은 종족으로 묶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들은 사상적으로 그리스에서 온 자들이 아니라는 것, 로고스 없이 경험의 부스러기들만을 가진 자들이라는 점이다."(64쪽) 들뢰즈와 레비나스는 철학의 고향을 아테네가 아닌 다른 곳을 가정하므로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없지 않다. 대신에 레비나스가 '예루살렘'을 새로운 고향으로 지목하는 데 반해서, '노마드' 들뢰즈는 그러한 태생적 장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차이일까?

저자가 이어서 읽고자 하는 것은 <글쓰기와 차이>에 실린 데리다의 레비나스론의 한 구절인데, "경험론과 관련하여 데리다와 들뢰즈의 극명한 대립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줄 이 구절은 물론 레비나스 비판을 위해 씌어진 것이다."(65쪽) 그렇다면, 레비나스의 주장은 무엇이었나?

"레비나스는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본질인 '존재'를 존재자의 모든 이기적 권력의 원천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타인에 대한 폭력은 존재 사건 자체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참다운 윤리의 가능성은 '존재와 다르게'라는 부사구를 통해서 타인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비로소 희망해볼 수 있는 것이다."(이 '존재와 다르게'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저자의 <차이와 타자>, <일상의 모험>을 참조.)  그런데, 데리다에 따르면, 이 경우 "윤리적 언어는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가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데, 그런 언어는 불가능하다는 것. 즉, 레비나스여, 그게 가능합니까? 라고 젊은 철학자 데리다는 묻는다.

데리다 왈: "레비나스에 따르면 비폭력적인 언어는 동사 '존재하다'가 금지된 언어, 즉 어떤 술어적 기능도 없는 언어일 것이다. 술어적 기능은 최초의 폭력이다. 동사 '존재하다'와 술어적 활동은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비폭력적인 언어는 궁극적으로... 모든 '동사'로부터 정화된 언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언어가 여전히 언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로고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리스인들은 그런 언어를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에게... 명사들과 동사들의 얽힘을 전제하지 않는 로고스는 없다고 말한다."(65-6쪽)

데리다의 견해로는 레비나스적/윤리적 언어가 술어적 기능을 갖는 '존재' 사를 금지할 경우 그것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언어'란 이름에 값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레비나스의 윤리는 언어적 표현을 가질 수 없다는 것. 그와는 반대로, "타자들을 그들의 진리 속에 '내맡겨져' 있게끔 하는 유일한 것"이 존재이며(보가 구체적으로는 '존재(est/is)'라는 계사(copula)이며), "존재의 이 근본성 때문에 데리다는 동사 '존재하다'는 모든 다른 동사와 모든 보통 명사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가령, '책상'이란 말에는 '책상(이 있다)'가 함축돼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건은 경험론이 '존재하다'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가이며, "진정한 경험론은 존재 개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 때문에 멸망하기는커녕, 바로 데리다가 레비나스를 비판하기 위해 옹호하는 그 존재동사 'est'를 극복해야 할 표적으로 삼는 데서 비로소 경험론으로서 존립한다. 데리다와 정반대로, 경험론은 모든 동사들과 명사들을 존재 동사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66쪽)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들뢰즈이다. 그가 <디알로그>에서 말하고 있는 경험론의 핵심은 이렇다: "철학, 철학사는 존재의 문제 때문에, 이다EST 때문에 방해받는다. 사람들은 속사(속성)의 판별(하늘은 푸르다le ciel est bleu)과 현존의 판별(신은 있다Dieu est)을 논의한다... 그것은 항상 '존재etre' 동사와 원리에 관한 물음이다. 오로지 영국인들과 미국인들만이 접속사들을 해방시켰고, (주어와 속사 사이를 맺는) 관계들에 대해 반성해왔다." 문단이 길기 때문에 잠시 쉰다. 여기서도 '앵글로-색슨' 들뢰즈의 면모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모든 문법, 모든 삼단논법은, 존재 동사에 대한 접속사들의 종속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꿰뚫고 변조시키며, 존재를 손상시키고 무너뜨리는 관계들과 만나야 한다. EST를 ET로 대체해야 한다(A 'et' B). ET는 심지어 특정한 관계나 접속사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의 기초를 이루는 것, 모든 관계들을 열어주는 길이다. 그것은 관계들이... 존재, 일자, 전체 바깥에서 짜이도록 만든다. ET는 특별한 존재extra-etre이고 사이의 존재inter-etre이다... EST를 사유하는 대신에, EST를 '위해' 사유하는 대신에, ET와 '더불어' 사유하는 것, 경험론에 이것 말고 다른 비밀은 없다."(66-7쪽)

경험론의 유일무이한 비밀을 누설하고 있는 만큼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는데, 국역본 <디알로그>(동문선, 2005)에서 한번 더 인용하기로 한다. 2장 '영미문학의 탁월함에 대하여'에 나오는 대목이다.

"철학, 철학사가 존재의 문제, 즉 -이다/있다(EST)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만큼 이러한 관계들의 지리학은 그만큼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전제하는, 귀속판단(하늘은 파랗다)과 존재판단(신은 있다)에 대해 논하죠.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존재' 동사이고 원리의 문제입니다. 오로지 영미인들만이 접속사들을 자유롭게 하고 관계들에 대해 성찰했습니다. 이는 영미인들이 논리학에 대해 아주 특별한 태도를 지녔기 때문입니다."(109쪽)

서동욱의 인용에서 생략된 부분을 마저 인용하면 이렇다: "다시 말해 그들은 논리학을 제1원리들을 은닉하는 본래적 형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이렇게 말하죠. '당신들은 논리학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중 하나를 발명하게 되겠지요!' 논리학은 정확히 대로(大路) 같은 것으로, 처음에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을 갖는 것도 아닙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멈출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 관계들의 논리학을 만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관계판단의 권리들을 존재판단 및 귀속판단과 별개인 자율적 영역으로 재인식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접속사들(가령 '그런데' '그리하여' 등등)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관계들이 존재동사에 종속된 채로 남지 못하게 해주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110쪽) 요는 관계판단 또한 존재 동사에 종속되는 것을 면치 못한다는 것.

즉, "모든 문법, 모든 삼단논법은 접속사들이 존재동사에 계속해서 종속되도록 하는 수단입니다. 접속사들의 존재동사의 둘레를 돌게끔 만드는 수단이죠. (따라서) 더 멀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관계들과의 마주침이 모든 것을 꿰뚫고 망가뜨리도록, 존재를 침식시키도록 만들어야 하고, 존재가 동요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다/있다(EST)를 그리고(ET)로 대체해야 하는 것입니다. A 그리고 B."

"그리고(ET)는 특별한 관계도, 특별한 접속사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 모든 관계들의 길을 연결하는 것이죠. 관계들이 그 항들의 바깥, 그 항들 집합의 바깥, 존재나 일자나 전체로 결정될 수 있을 모든 것의 바깥에서 질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불어에서 EST와 ET는 발음이 동일하다. 이게 영어로는 IS와 AND이다. 우리말로는 좀 번거루운데, '-이다/있다'와 '과(와)'가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열외-존재, 사이-존재로서의 그리고(ET). 관계들은 여전히 그 항들 사이에서 혹은 두 집합들 사이에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성립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고는 관계들에 다른 방향을 부여하고, 항들과 집합들이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도주선 위로 차례차례 도주하도록 만듭니다. -이다/있다(EST)를 사유하거나 -이다/있다를 위해 사유하는 대신에 그리고(ET)와 함께 더불어 사유하기 - 경험론에는 이것 외에 다른 비밀이 결코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110-1쪽)

대동소이한 두 번역에 대해서 따로 이견을 달지 않겠다. 다만, "ET는 특별한 존재(extra-etre)이고 사이의 존재(inter-etre)이다"와 "열외-존재, 사이-존재로서의 그리고(ET)"란 번역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약간 부절적하며, 두 경우 모두 '-존재'라고 풀어주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생각에 ET/AND는 무슨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존재-바깥'이며 '존재-사이'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으로 포섭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요컨대, 철학은 'EST철학'(IS철학)과 'ET철학'(AND철학)으로 대별될 수 있다(편의상 'IS철학'과 'AND철학'이라 부르겠다). 'IS철학'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으로서의 존재론을 집약하는 별칭이라면, 'AND철학'은 들뢰즈적인 접속론의 다른 이름이다. 들뢰즈의 용어를 더 갖다 쓰자면, 'IS철학'은 '나무-철학'이며, 'AND철학'은 '리좀-철학'이다.

이 두 철학은 세계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술/분절한다. 가령, "들뢰즈 IS 철학자"와 "들뢰즈 AND 철학자"로. 이 'AND철학', 혹은 들뢰즈적인 경험론은 IS(계사)라는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명사들끼리(혹은 머리들끼리) 막바로 헤딩하게 한다.  

 

 

 

   

여기서 콜브룩의 안내를 잠시 따라가본다(이 책은 순서상 '초월적 경험론' 장부터 읽는 게 타당하다). "들뢰즈에게 경험론은 철학적 이론이나 특별한 사상학파에 대한 인정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윤리학이자 정치학이다."(<질 들뢰즈>, 135쪽). 여기서 '인정(commitment)'은 '관련' 정도의 뜻이다. 그리고, 이 경험론이 갖는 함축: "들뢰즈는 매개에 반대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관념들에 의해 매개되거나 질서 잡히는 삶이나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삶은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들이 우리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세계 자체가, 그것에 대해 우리가 결과로서 드러나는, 그런 관념들이나 이미지들을 생산한다."(136-7쪽) 그리하여 "오히려 관념들은 경험의 결과이다."

너무 오래 끌고 있어서 '남은 비밀'은 다음에 누설하기로 한다...  

06.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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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맥거핀 이야기

재작년 8월 중순에 '열차 속의 이방인 농담'이란 제목으로 올렸던 모스크바 통신문에서 히치콕/지젝의 맥거핀 이야기만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지젝의 히치콕 읽기를 예전에 대략 다 정리한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제오늘 비가 좀 흩뿌린 휴일이었던 만큼, 비 얘기부터...

모스크바에는 하루 종일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다. 제법 많이 비가 내렸고, 토요일과 무관하게 나날이 '휴일'인 룸메이트와 나는 오후에 감자를 삶아먹고 마지막 남은 ‘바지락 칼국수’를 끓여먹었다. 비 오는 날 창밖이나 바라보며 감자를 삶아먹는 일이, 어릴 적 내가 꿈꾸었던 ‘행복한 삶’, 곧 ‘더 바랄 나위 없는 삶’이었는바(그 이상을 바라는 건 몰염치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 하루치의 ‘유토피아’를 산 셈이다. 게다가 저녁을 잔뜩 먹고 저녁잠까지 잤으니, 누릴 호사는 다 누린 셈이다.

정신을 차리고(=각성하고!), 요일과 무관한 본업에 또 착수하기 위해, 먼저 커피 한잔 마시려고 룸메이트의 방에 갔다가(주전자가 그 방에 있다), 룸메이트가 지난번에 공수해온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손이 갔다(내가 그에게 추천한 책이기도 하다). 룸메이트가 보드카를 마시러 간 사이에 잠시 둘러본다는 게 그만 뭔가를 쓸 만한 ‘구실’까지 찾게 되었다. 그건 ‘맥거핀’이다. 맥거핀에 대한 정의 그대로,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액션이 이루어지기 위한 순수 구실”의 역할을 하는 맥거핀. 이 글쓰기(=액션)는 순수하게 그 맥거핀 때문에 씌어진다.

 

 

 

 

모스크바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지젝의 책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3, 초판2쇄), <이라크>(도서출판b, 2004), 이 3권이다(앞의 두 권은 룸메이트의 것이다). 이미 <히치콕>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읽은 바 있고(러시아어로 번역되지 않은 몇 편을 제외하곤), <이라크>는 두 번째 읽고 있으며(따로 읽을 책도 없으니!), <숭고한 대상>은 가을에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영어본으로도 절반쯤 읽었었다). 읽는다는 건, 읽고 교정하고 그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얘기이다. 이번 가을-겨울 시즌에 나의 할 일로 현재 확정된 것은 몇 편의 논문을 쓰는 것과 릴케와 지젝, 들뢰즈를 읽는 것 등이다. 그래야 나의 밥값이 떨어진다(*결과적으론 밥값을 다 치르지 못하고 나는 귀국했다).

적어도 역자들만큼은 자세하게 읽은 <이라크>에 대해서는 조만간(그래도 9월이나 돼야 가능할 것이다) 정리한 글들을 올릴 예정이다(*어느 정도는 계획을 이행했다). 그런 정리를 자청하는 건 일단 나 자신을 위해서이지만, 지젝에 입문하는 독자들이 좀더 ‘편하게’ 그의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나는 지젝이 좀더 많이 읽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런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다(좋아한다는 건 많은 일의 ‘구실’이 되어준다! 자신과 남들을 괴롭히는 일까지도?!). “진정한 사랑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는 지젝의 말을 약간 비틀면, 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너무 자세히 읽고 떠들어대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더불어, 적당히 입다물며 침묵하는 건 ‘가짜 사랑’의 확실한 징표이다.) 그래서, 장정일의 표현을 빌면, 거의 자신이 저자인 걸로 착각한다(왜 아니겠는가!)...

 

 

 



이 글을 시작한 구실이 되었던 맥거핀은 앞에서 나열한 세 권의 책에 모두 나온다. 그건 히치콕 자신이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그가 종종 인용했다는 이 이야기의 주된 출전은 트뤼포가 쓴 <히치콕과의 대화>이다. 먼저, 세 권의 책에서 관련 대목을 인용한다(<히치콕>에서의 직접적인 인용자는 지젝이 아니라 믈라덴 돌라르이다).

(1)히치콕은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했던 농담을 실제로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유고슬라브 판, 하나의 대안적 결미를 갖고 있다: “선반 위의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맥거핀이오.” “뭘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A: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B: “보시오. 그건 작용합니다.” 우리는 두 개의 판을 다 독해해야 한다. 대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실제로 맥거핀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용한다.(<히치콕>, 72-3쪽)

(2)히치콕적인 대상인 그 유명한 맥거핀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직 이야기를 가동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다. 맥거핀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에 관한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두 남자가 기차에 앉아 있다. 그 중 한 명이 묻는다. “저기, 짐칸에 있는 꾸러미는 무엇이죠?” “아, 그거요, 맥거핀이에요.” “맥거핀이 뭐죠?” “아, 그건 스코틀랜드 고지방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장비예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고지방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나머지는 동일하고 마지막 대답만 다른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몰라요.” 그게 바로 맥거핀이다. 순수한 무(無)이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 맥거핀이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작동하는 순수한 구멍의 가장 순수한 사례라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숭고한 대상>, 276-7쪽)

(3)히치콕의 ‘맥거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도 없는 공허한 구실. 그것을 예시하기 위해 히치콕은 종종 다음의 이야기를 인용했다. “두 신사가 기차에서 만난다. 그리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운반하는 이상한 짐가방에 놀란다. 그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하고 동행자에게 묻는다. 그 동행자는 ‘맥거핀이지요’라고 대답한다. ‘맥거핀이 무엇입니까?’ 그가 묻는다. 동행인이 말한다.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당연히 그는 ‘하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는 표범이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동행인이 말하길, ‘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 안 그런가요?” (여기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맥거핀의 지위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가? (<이라크>, 21-2쪽)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는 물론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내가 이 대목을 읽어보지 않아서(그리고 분실했다) 이 일화가 어떻게 번역돼 있는지는 모르겠다. 현재 내가 참조할 수 있는 건 러시아어본 <히치콕과의 대화>이다. 제목은 <히치콕이 말하는 영화>(모스크바, 1996) 정도의 뜻인데, 불어본과 영어본을 대조하여 번역한 걸로 돼 있다. 러시아어본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1962년에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52시간 분량의 대화를 정리한 것이며(사실 이런 류의 책으론 최초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경우, 작년인가 나온 정성일의 ‘임권택과의 대화’는 바로 이 트뤼포의 전범을 따르고 있다), 헬렌 스코트가 통역을 맡았다(그러니까 트뤼포는 불어로 얘기하고, 히치콕은 영어로 얘기했다).

해서, 나온 책이 불어본(파리, 1966)과 영어본(런던, 1967)이며, 1980년(4월 24일) 히치콕이 사망하자 트뤼포는 마지막 16장을 추가하여 다시 책을 내는데, 제목을 <히치콕/트뤼포>(1983)라고 다시 붙였다(러시아어본의 겉표지 제목이 <히치콕/트뤼포>이다). 한국어본은 어느 판본을 옮긴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맥거핀’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참조해야 할 책은 바로 이 책이다. 지젝이 맥거핀에 관해서 무슨 얘기를 하든지 간에 그 출처는 바로 이 책의 일화(=농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의 세 인용보다 먼저 인용되어야 할 것이 바로 <히치콕과의 대화>인 셈이다. 하지만 ‘현지사정상’ 지젝(돌라르)의 인용 번역만을 가지고 맥거핀 일화(번역)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러나 저마다 다르게!



먼저, 일화로 안내하는 내용. “(1)히치콕은 그 대상에 이름을 부여했던 농담을 실제로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유고슬라브 판, 하나의 대안적 결미를 갖고 있다.” 러시아어본 <히치콕과의 대화>를 보거나 <히치콕>을 보더라도, 히치콕이 이 ‘농담’을 ‘열차-속의-이방인’ 농담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은 없다. 러시아어본의 이 대목을 옮기면, “히치콕은 이 대상에 이름(=맥거핀)을 붙여준 일화(=농담)을 얘기하는데, 우연찮게도 ‘열차 속의 이방인’ 종류의 일화이다. 이 일화에는 결말이 다른 유고슬라비아 판(본)도 있다.” ‘우연찮게도’라는 건 같은 <열차 속의 이방인(Strangers on a train)>(1951)이란 영화를 히치콕이 찍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류’라고 했는데, 만약에 이 농담이 여럿이라면 열차-속의-이방인 ‘시리즈’라고 해야 할 것이다(거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음, “(2)히치콕적인 대상인 그 유명한 맥거핀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직 이야기를 가동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다. 맥거핀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에 있다.”와 “(3)히치콕의 ‘맥거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단지 이야기를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떠한 가치도 없는 공허한 구실.” 핵심은 맥거핀이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라는 점이다.

번역에 대한 참견하자면, 읽기에 편한 번역은 내용의 핵심과 주변을 구분해주는 번역이다. 사진으로 치면, 핵심은 뚜렷하게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점을 잘 맞춰야 한다는 말이다. 같은 대상을 놓고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으면 누가 찍더라도 대충 대상이 무엇인지는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찍은 사진과 평범한 사진의 차이는 그 초점 맞추기에 있다. 이야기를 가동/작동시킨다고 할 때, 초점은 ‘이야기’일까, ‘가동/작동’일까? 내가 보기엔 ‘이야기’인데,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려면 아마도 ‘operate’를 옮긴 듯한 ‘가동/작동시키는’은 좀더 약화되어야, 즉 흐릿하게 되어야 한다. (이야기를) ‘끌고가는’이나 ‘진행시키는’으로. ‘작동시키는 데 봉사하는’ 데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serve to operate’의 번역일까?).

같은 맥락에서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도 너무 강하다. 그것과 병렬관계에 놓여 있는 구절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점에 견주어서 그렇다. “특별한 중요성” 정도라고 하면 되고, 실제로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히치콕의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러시아어본으로 짐작해 보건대) ‘unusual’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국역본에 따르면, ‘fatal’인 듯도 하고). Unusual을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이라고 옮기는 것은 좀 과장이다. 아무런 의미/가치도 안 갖고 있는 맥거핀이 그들(=등장인물)에게는 아주 중요하다는 뜻을 전달하는 게 이 문장에서는 ‘핵심’이며 나머지는 부수적이다.



이제 본론이다. (1)“선반 위의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맥거핀이오.” “뭘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 (2)두 남자가 기차에 앉아 있다. 그 중 한 명이 묻는다. “저기, 짐칸에 있는 꾸러미는 무엇이죠?” “아, 그거요, 맥거핀이에요.” “맥거핀이 뭐죠?” “아, 그건 스코틀랜드 고지방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장비예요.” “그런데, 스코틀랜드 고지방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3)“두 신사가 기차에서 만난다. 그리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운반하는 이상한 짐가방에 놀란다. 그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하고 동행자에게 묻는다. 그 동행자는 ‘맥거핀이지요’라고 대답한다. ‘맥거핀이 무엇입니까?’ 그가 묻는다. 동행인이 말한다.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 당연히 그는 ‘하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는 표범이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1)에서 돌라르는 아예 대화체로 옮기고 있는데, 그것이 예시적으로 잘 보여주는바 이 일화/농담에서 핵심은 두 사람이 대화이다(그리고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결말이다). 나머지는 다 약화되어도 무방하다. 즉 두 사람 혹은 두 남자가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상대방의 꾸러미/짐가방에 대해서 물어본다는 내용. 일단 (1)에서 ‘하이랜드’는 좋은 번역이 아니다. 나처럼 ‘하이랜드?’하면서 영한사전을 뒤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사전에 ‘the Highlands’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고지’로 돼 있다. 그러니까 이건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며, 스코틀랜드 사람이 아닌 이상 고유명사 ‘하이랜드’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니까 ‘스코틀랜드의 고지/고지대’ 정도로는 옮겨줘야 한다(그렇다고 해서 ‘스코틀랜드 북부의 고지’라고 친절하게 옮겨주는 것도 초점을 잘못 맞춘 과잉친절이다).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하나도 없는데요.”도 “하지만, 하이랜드에는 사자가 없는데요.”로 충분하다(농담은 리듬과 타이밍이 중요하므로 짧게 받아쳐야 한다). ‘꾸러미/짐가방’으로 옮겨진 건 ‘pack’ 종류 같은데, 가장 무표적인 건 ‘가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3)은 좀 비경제적이다. 일단 ‘두 신사’가 만난 것부터가 그렇다. 히치콕은 그냥 ‘two men’이라고 했을 거 같은데, 지젝이 ‘two gentlemen’이라고 다시 고쳐 말했을까? 이 농담에서 신사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가장 무표적인 ‘두 사람’ 정도가 가장 무난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옆사람’ 혹은 ‘앞사람’이면 된다. ‘운반하는’은 ‘갖고 가는’. “당신이 운반하는 그 이상한 짐가방 속에 무엇이 있나요?”라고 실제로 ‘이상하게’ 물어봤을까? 적어도 농담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자’가 ‘표범’으로 바뀐 건, 지젝의 착각인지 유희인지 모르겠다. 원문에 ‘충실한’ 역자의 ‘창작’일 리는 없을 테니까(주전자가 항아리로 바뀌는 것처럼). 어쨌든, ‘맥거핀은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표범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장치입니다.’도 좀 어색하다. (1)에서 “하이랜드의 사자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지요.”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인데, 물론 ‘죽이다’는 ‘kill’의 번역일 테지만, 이런 경우에 우리말로는 (2)에서처럼 ‘잡는다’고 한다.



이제 가장 핵심이 되는 결말. (1)급소를 찌르는 말 A: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 급소를 찌르는 말 B: “보시오. 그건 작용합니다.” (2)“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나머지는 동일하고 마지막 대답만 다른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몰라요.” (3)동행인이 말하길, ‘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 안 그런가요?”

“사실 이건 맥거핀이 아닌데요.”(1)과 “아,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에요.”(2)/”글쎄, 그렇다면 그것은 맥거핀이 아닙니다.”(3)는 뉘앙스에서 차이가 나는데, 보다 적절해 보이는 건 다수인 (2)/(3)이다. 그리고, “그것은 맥거핀이 아니다”의 원문은 “it is not McGuffin.” 같은데(“McGuffin is not”이란 표현이 가능할까?), 러시아어본은 마치 “So, it means, McGuffin is nothing at all.”을 옮긴 것처럼 돼 있다. 그리고, 이게 좀더 흥미롭다. 즉, “맥거핀이 아닙니다”란 부정/부인 대신에, “맥거핀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란 뉘앙스의 ‘정의(definition)’가 이 농담에는 함축돼 있는 걸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래야 지젝이 말하려는 바가 더 잘 전달된다. 즉 “대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실제로 맥거핀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용한다.”라거나 “순수한 무(無)이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

아무것도 아니지만, “but it works!” 어떤 도구가 잘 작동/작용한다는 뜻을 우리말 구어에서는 어떻게 전달하는가? “잘 들어요?” “잘 먹혀요?” 그럼, 이제까지의 내용을 재구성해보기로 하자. <숭고한 대상>의 번역을 바탕으로 ‘의역’하면: 두 사람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묻습니다. “저기, 짐칸에 있는 가방은 뭔가요?” “아, 그거요, 맥거핀입니다.” “맥거핀이 뭐지요?” “아, 그게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사자를 잡을 때 쓰는 거예요.” “그런데, 거긴 사자가 없잖아요?” “맞아요, 그럼 그건 맥거핀이 아니네요.” 좀더 딱 들어맞는 또 다른 판본이 있다. 마지막 대답만 다르다. “그래도, 얼마나 잘 먹혀 드는데요!” 그리고 실상 <이라크>에서 지젝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는 맥거핀의 지위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가?”라고 말할 때 누락하고 있는 것은 그 작용/효과이다. 그게 맥거핀이라는 걸 누가 모르는가? 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것”이었다.

맥거핀이 작용한다, 효과가 있다라고 말할 때, 그 작용/효과의 대상은 무엇인가? 히치콕에게선 이야기이다(부시에게선 전쟁이었지만). 그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구실(만)을 성공적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대상(=밥)은 누구인가? 맥거핀에 말려든/먹혀든 순진한 동승인이다(그리고 파병 중인 한국이다). 그 기의만을 옮길 때 맥거핀에 가장 적합한 우리말 번역어는 ‘헛물’이다. 마신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없는 물이 ‘헛물’이다. 히치콕의 농담에서 직접적으로 헛물을 들이킨 사람이 바로 동승인이며(한국이며), 그의 영화에서는 관객들이다(궁극적으로는 그 헛물을 들이킨 자가 부시이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고 여기까지 읽어온 당신(들)이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맥거핀에 대해서 내가 덧붙일 말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지젝을 반복하자면, “맥거핀이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작동하는 순수한 구멍의 가장 순수한 사례라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굳이 덧붙이자면, 유사 이래로 가장 성공적인 맥거핀은 신이라는 것! “신은 한 가지만 빼놓고 모든 걸 갖췄다. 그 한 가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맥거핀 신자들이 맥거핀 전쟁을 비난하는 건 따라서 모순이다.)

04. 8. 14-15.

 

 

 



P.S.1. 이 글의 절반 이상은 토요일 저녁 이곳 NTV에서 방송된 히치콕의 <프렌지(Frenzy)>(1972)를 보면서 작성한 것이다. 나머지는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를 보면서. <프렌지>는 히치콕 말년의 작품으로, 그는 1976년에 <가족의 음모(Family plot)> 한 편만을 더 만들었을 뿐이다. 다음주 토요일에도 히치콕의 영화를 방영한다는 걸로 봐서 NTV에서는 한동안 히치콕의 영화들을 내보낼 모양이다(좋은 기회이다!). <프렌지>는 여자들을 넥타이로 목 졸라 죽이는 연쇄살인범의 얘기니까, 제목이 뜻하는 바는 ‘미친 놈’ 정도이겠다. 그렇다면, 그 정도는 야코죽이는 ‘유영철’을 다룬 (가상의) 영화 제목은 <프렌지, 프렌지, 프렌지>쯤이 되어야 할 것이다.

P.S.2. 맥거핀 번역에 대해 몇 가지 참견의 말을 했는데, 실상 이론서 번역은 그렇게까지 섬세한 걸 요구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의 번역이라면, 섬세하지 않은 건 ‘오역’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쓸 만하지만, 이론서는 내용(=뜻)만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이론서 번역은 ‘이해한 내용’만을 옮겨주면 된다. 반면에 문학작품 번역은 ‘이해한 내용’을 다시 ‘작문’해야 한다(기표, 혹은 형식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더 쉬운 쪽은 이론서 번역이다. 거기서는 다만, 이해의 난이도가 문제될 따름(그래도/그래서 나는 이론서 번역에서 한국어의 유려함이 이해의 정도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해서, 나의 ‘참견’은 공허하다. 다만, 공허한 참견을 일삼는 것은 모든 번역에는 ‘긴장’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나부터도 번역에 매달려 있지만, 그것이 오역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이라크>의 번역도 마찬가지인데, 문학작품의 번역이라면 아쉬움이 많이 남을 테지만, 이론서 번역으로서는 무난하다. 그렇다고 오역이 없는 건 아닌데, “흠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란 랭보의 말을 비틀면, “오역 없는 번역이 어디 있으랴!”이다. 이 자리에서 크고 작은 오역의 사례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고, 중요한 것 한 가지만을 일단 지적해둔다. 사드에 관한 것이다(중요하다고 한 것은, 사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사드의 <규방철학>에서 돌망스는 “우리에게서 작열하는 빌어먹을 천국 불의 홍수 속에 빠뜨리려고” 외제니를 부른다. 이것은 휠덜린이 시인의 개념을 ‘천국에서 온 불’로 인해 괴로워하는 자들이라고 전개한 것과 동일한 해에 쓰여졌다.”(225-6쪽)

동일한 해라는 건 1806년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시기적으론 사드(1740-1814)의 말년이며, 그래서 <규방철학>은 그의 ‘철학’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라 할 만하다. 사실 이 책은 <안방철학>이란 제목으로 국역돼 있지만, 역자가 참조한 것 같지는 않다(나는 절판된 그 책을 국립도서관에서 복사했었는데, 내 기억에는 마광수 교수가 서문인가를 썼다). 일곱 개의 대화로 구성돼 있는 이 책은 분량이 200쪽 정도이기 때문에, 읽기에도 부담이 없다(그러니까 책을 다시 낼 만하다는 얘기이다).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대목은 세 번째 대화에 나온다.

인용에서 ‘천국의 불’ 혹은 ‘천국에서 온 불’이란 비유가 뜻하는 바는 도덕 법칙이고 양심이다(혹 역자는 ‘천국의 불’을 ‘향유’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따라서, 사드의 주인공인 ‘향락주의자’ 돌망스가 자신의 파트너인 외제니를 “도덕률의 홍수 속에 빠뜨리려고” 부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이론서 번역에서 그런 경우는 대부분 오역이다). 도덕법칙을 향유하기 위해서? 영어 원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러시아어본을 다시 옮기면, 돌망스는 “우리의 가슴에서 불타고 있는 천국의 불을 정액의 물줄기(=홍수)로 끄기 위해서” 외제니를 부른다(그래야 말이 되지 않는가?).



러시아어본 <규방철학>(1992)은 이 대목에서 ‘정액’이란 말을 (사전에도 안 나오는) 은어로 썼다(*이 글이 씌어진 이후에 국역본 <규방철학>이 재번역돼 출간됐다). 그래서 짐작에 ‘빌어먹을’이라고 역자가 옮긴 것이 정액을 뜻하는 영어 은어이지 않을까 싶다. ‘거시기의 물줄기’. 아무래도 역자가 사드를 너무 칸트적으로 (점잖게) 읽어서 빚어진 오역이 아닐까 한다. 알다시피, 라캉의 ‘칸트를 사드와 더불어(Kant with Sade)’란 ‘교훈’이 뜻하는 바는 사드를 칸트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칸트를 사드적으로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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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Slavoj Zizek's Third Way

지난주에 아마존에서 배송된 책들 가운데는 지젝의 신간으로 주문한 지 몇 달만에 도착한 <보편적 예외(The Universal Exception)>(Continuum, 2005)도 포함돼 있었다(바디우의 <존재와 사건(Being and Event)>과 지젝이 편집한 <라캉: 조용한 친구들(The Silent Partners)> 등이 같이 도착한 책들이다). 물론 읽어야 할 책들이 산더미인지라 언제 들춰보게 될는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원래 책이란 그냥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법이다. 지젝의 책이라곤 하지만, 신간은 지젝 연구서를 쓰기도 한 렉스 버틀러(Rex Butler)와 스콧 스티븐스(Scott Stephens)가 편집한 '선집'이며 편자들의 서문을 앞에 싣고 있다. 라캉닷컴에서 원문이 서비스되고 있기에 여기에 옮겨놓는다. 서문 정도를 읽는 건 이 달 안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This essay, "Slavoj Zizek's Third Way", is the Editors' Introduction to the second volume of his Selected Writings, The Universal Exception (Continuum, 2005). This volume includes the essays "Welcome the Desert of the Real", "The Prospect of Radical Politics Today", "Against the Double Blackmail" and "Iraq - Where is the True Danger?", referred to here.

*

Let us begin here by noting an odd coincidence. After the terrorist strikes of 11 September 2001, both Slavoj Zizek and Jean Baudrillard leapt immediately into print. The two authors were, of course, already well-known for their interventions in world political events, often writing responses in newspapers or on the internet mere days after momentous events or at the height of major public debates (the role of NATO in Yugoslavia, the attempted genocide in Rwanda, the fall of the Berlin Wall, the issues surrounding genetic cloning and manipulation). But, paradoxically, for all of their usual haste in making their views known and amid calls from both sides of politics for swift retaliation, they both urged a kind of caution or delay. Baudrillard, for his part, wrote in The Spirit of Terrorism:

The whole play of history and power is disrupted by this event, but so, too, are the conditions of analysis. You have to take your time. While events were stagnating, you had to anticipate and move more quickly than they did. But when they speed up this much, you have to move more slowly-though without allowing yourself to be buried beneath a welter of words, or the gathering clouds of war, and preserving intact the unforgettable incandescence of the images. 1

While Zizek, for his part, in the essay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stated that any immediate reaction would be little more than an impotent passage à l'acte, whose sole purpose would be "to avoid confronting the true dimension of what occurred on 11 September".

To draw out what is going on here more precisely, it is crucial to realize that it is not simply a matter of these two highly "engaged" thinkers suddenly losing their nerve in the face of this almost overwhelming disaster, as so many others on the Left did. Rather, it is astonishing how quickly they formulated their responses to what had happened and distributed them via the internet around the world. And yet at the same time what they advise is a form of inaction, a pause, a time for reflection. This would, however, not be to do nothing, but to take the opportunity to think. It is through the minimal delay introduced by this thinking that we might somehow avoid those hysterical calls for action that would merely reproduce the existing ideological co-ordinates (of which even the claim that everything is different following 11 September is only a variant, a "hollow attempt to say something 'deep' without really knowing what to say"). As Zizek writes in his essay "The Prospect of Radical Politics Today", in a surprising inversion of Marx's famous thesis 11 ("Philosophers have hitherto only interpreted the world; the point is to change it"):

The first task today is precisely not to succumb to the temptation to act, to intervene directly and change things (which then inevitably ends in a cul-de-sac of debilitating impossibility: 'What can one do against global Capital?'), but to question the hegemonic ideological coordinates.

Indeed, once identified, this stress on thinking—on thinking as such—can be seen to form the basis of all of Zizek's specific political commitments. We might just speak of three such instances that occur in this book. In his response to NATO's endorsement of some minimal standard of "human rights" in Kosovo, Zizek insists that the transparent evocation of non-political "humanitarianism" is little more than a ruse to prevent us from thinking "the shady world of international Capital and its strategic interests". In the aftermath of the collapse of the WTC Towers, Zizek unexpectedly endorses the plea of Mullah Omar, the leader of the Taliban in Afghanistan, that Americans should exercise their own judgement when responding to 11 September: "Don't you have your own thinking?" And, finally, in the months following the United States' invasion of Iraq, Zizek, while rejecting the combined French and German opposition as a kind of appeasement "reminiscent of the impotence of the League of Nations against Germany in the 1930s", nevertheless asserts that the very awareness of their failure to provide a substantive alternative itself constitutes a positive sign. But is there a logical form, a consistent structural principle, behind Zizek's various positions with regard to these events? Might they not be seen, like that France and Germany he condemns, as merely the hysterical rejection of the existing alternatives without being able to put forward anything of their own? In a split between form and content, might we not say that on the level of form Zizek wants to see himself as an "engaged" intellectual, but on the level of content he is struck by a kind of paralysis, unable to suggest any meaningful action? In fact, this exact criticism, often coming from the perspective of a pseudo-ethical, pragmatic Realpolitik, is often made against Zizek. It has been put forward by the English deconstructionist Simon Critchley, 2 by Zizek himself (which shows that he is not entirely unaware of its pertinence); 3 but undoubtedly the exemplary instance is that of early Zizek ally and critic of postmodern "identity" politics Ernesto Laclau. As Laclau writes in the exchange between him, Zizek and Judith Butler,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In his previous essay—"Class Struggle or Postmodernism? Yes, please!"—Zizek had told us that he wanted to overthrow capitalism; now we are served notice that he also wants to do away with liberal democratic regimes—to be replaced, it is true, by a thoroughly different regime about which he does not have the courtesy of letting us know anything... Zizek does actually know a third type of sociopolitical arrangement: the Communist bureaucratic regimes of Eastern Europe under which he lived. Is that what he has in mind?... And if what he has in mind is something entirely different, he has the elementary intellectual and political duty to let us know what it is... Only if that explanation is made available will we be able to start talking politics, and abandon the theological terrain. Before that, I cannot even know what Zizek is talking about—and the more this exchange progresses, the more suspicious I become that Zizek himself does not know either. 4

Ironically here, with surprising clarity, Laclau identifies actually what is at stake in Zizek's work, the fundamental wager on which his various interventions depend: the possibility of some "third type" of socio-political organization not covered by either the existing liberal democratic regimes or their socialist alternatives. Again, let us pursue this idea through those three representative examples discussed above. With regard to the NATO intervention in Kosovo, Zizek seeks to avoid what he calls the "double blackmail" of having to choose between sides, the argument that, "if you are against the NATO bombings, you are for Milosevic's proto-Fascist regime of ethnic cleansing; if you are against Milosevic, you support the global capitalist New World Order". Instead, his point is that "phenomena like Milosevic's regime are not the opposite of the New World Order, but rather its symptom, the place from where the hidden truth of the New World Order emerges". With regard to the terrorist attacks on the WTC, Zizek rejects the argument that would have it that, "if one simply, only and unconditionally condemns the attacks, one cannot but appear to endorse the blatantly ideological position of American innocence under attack from Third World Evil; if one draws attention to the deeper socio-political causes of Arab extremism, one cannot but appear to blame the victims who ultimately got what they deserved". Instead, the "only solution is to reject this very opposition and to adopt both positions simultaneously, which can be done only if one resorts to the dialectical category of totality". And, finally, with regard to the American invasion of Iraq, Zizek refuses both proposed alternatives, arguing both for and against military intervention: "Abstract pacifism is intellectually stupid and morally wrong—one must oppose a threat. Of course the fall of Saddam's regime would have been a relief to a large majority of the Iraqi people. Of course militant Islam is a horrifying ideology". Instead, "although this (all these reasons for war) is true, the war is wrong".

Now, in a conventional political discourse, the elaboration of the wrong alternatives would be merely a preliminary to the eventual laying out of the correct one. Or, in a pseudo-Hegelian manner, it would be a matter of somehow finding a compromise between them, picking out the best elements of both. But this is not what Zizek means by any "third type of socio-political arrangement": it is not any balance or negotiation that he is interested in. Rather, if Zizek seeks to make a choice at all between these two alternatives, it is precisely to maintain the choice. If there is a solution to the problem he sets out, it is not to be found by deciding between alternatives or proposing some middle-path between them, but by thinking both together. Or if, within the current political situation, Zizek is forced to choose between them, he nevertheless wants to think what precedes that choice, what both choices exclude and stand in for. In a manner consistent with his analysis of how a subject is formed within the symbolic order by means of a certain "forced choice" as to whether to enter society or not—which, although it appears free, is in fact forced because the only alternative to it is psychosis—so in his political pronouncements Zizek wants to think a situation before what we might call our political "forced choice", as though we did not have to make it.
5

However, Zizek does not stop there, which would again indicate a certain paralysis of thinking before the event. Instead, what he seeks to render through the identification of those two false choices we are confronted with is their speculative identity. Upon what is this identity founded? Why are all choices within our given ideological co-ordinates fundamentally the same choice? Hegel would have it that it is because of the "dark, shapeless abyss" of abstract universality, which like the Lacanian Real is "always in the same place". And Zizek will translate this in his work as the undifferentiated domain of global Capital. That is to say, for Zizek, as for Hegel, thinking is the withholding of the forced choice in thinking the totality that precedes and conditions it. But, in thinking this totality, in immersing it in the medium of representational thinking—Vorstellung—Zizek, following Hegel, also introduces a kind of delay into it, makes it pass from Substance to Subject. 6 In so doing—this is Marx's point that the only alternative to Capital is Capital itself—Zizek shows that Capital is "re-marked" from somewhere else, is only possible because from the beginning it stands in for its own opposite. To the very extent that it can be thought—this is Hegel's point about immersing abstract universality in the medium of representational thinking—it is not a true universality, it is not abstract enough. It is only its own exception. Or, to put it another way, it is revealed as exception by a still greater universality, which is Zizek's point concerning universality: it is nothing else but what makes every particular particular.

But to go back to that passage from Substance to Subject, which is the power of dialectical thinking, we might say that—in a literal way—all Zizek does here is "humanize" Capital (but then, from this perspective, what is the "human"?). And this cannot but remind us of that "Third Way" alternative Zizek so vehemently rejects throughout his work. However, are the reasons for this rejection—and let us even suggest, as he does with regard to Blair and Haider, a certain clinching of Zizek and Blair—not to be explained as arising out of Zizek's own uncomfortable proximity to Blair, as indeed is hinted at by Laclau's suggestion that what is implicit in Zizek is some kind of impossible "third way"?
7 But let us be more exact here. At stake in Zizek's Third Way is a necessary distinction between form and content. With regard to content, he is absolutely in agreement with the Third Way and its desire to institute progressive social programs in the face of conservative opposition. There is simply no alternative to capitalism (at this moment). But with regard to form, Zizek absolutely rejects the Third Way's concession to this fact in advance. For Zizek, the conclusion that there is no alternative to capitalism can only be reached via the thinking of the alternative that, precisely through its exclusion (this again is Hegel's point concerning the distinction between concrete and abstract universalities), ensures there is only capitalism. In other words, as opposed to the Third Way in which we always begin with capitalism, for Zizek capitalism is only the result of a more abstract universality (capitalism and its other).

And this allows us to account for Zizek's much-criticized political practice in the former Yugoslavia in terms consistent with his current political theory. His actions then, from the perspective of what is now assumed to be his radical Leftism, are usually represented as a liberal compromise, something he would wish to leave behind. (Zizek ran as a pro-reform candidate for the Presidency in the first free elections in Slovenia.) However, our point would be that, far from having to be disavowed in the light of his later political theory, these early actions only make sense in light of it. For what Zizek can be seen to be doing at that time is, while acknowledging the necessity of having to make a choice within the newly "liberated" (i.e., capitalist) Yugoslavia, attempting to maintain the fundamental choice, to avoid foreclosing the possibility of some utopian social transformation. (And it is crucial to note that at no point in his work has Zizek ever repudiated the implicit utopian dimension of democracy or a shared civic space, just that platform on which he ran in the election: this may even have analogies to his support for the "inner greatness" of Stalinist bureaucracy.) It is for this reason—and the comparison is intended—that Zizek will call those transitional social movements in the newly ex-Communist countries, such as East Germany's Neues Forum, a "third way". Once more, with regard to their content, these movements were probably nothing different from those Third Way movements that subsequently broke out in the West. (Were they in fact their inspiration?) But, with regard to their form, they were absolutely different. While on the surface appearing to adapt to the new capitalist exigencies, they did, for a brief moment, embody a true alternative to both capitalism and Communism (exactly what Laclau demands of Zizek).

But perhaps this last statement—that is was only for "a brief moment" that those new movements of ex-Communism opened up an alternative—is a little too "pathetic". By this we mean that absolutely—and we insist on this point—Zizek approves of someone like Blair's instrumentalization of the "progressive" policies of the Third Way, his willingness to "get his hands dirty", as Zizek says approvingly of all "conservatives".
8 What he in fact admires about the third way alternative at the breaking down of Communism was not so much its momentary utopianism as its readiness to embody a new liberal bureaucratic state, in short, its desire not to fail, as with much typical Leftism, including even Neues Forum itself, whose tragic character was that it came to embrace its own inevitable failure. (This is also the tragedy of a figure like Havel: that he wasn't always a pathetic, liberal "fool", who knew very well his own impotence, but for a moment was a conservative "knave", who was prepared to do what it took to seize and maintain power.) We might say here that, in the exact sense that Zizek gives to an authentic conservatism, the Third Way is conservative: a way of "maintaining the Old" (that is, maintaining the excluded alternative to capitalism) within the new conditions of multinational capitalism. This is for Zizek the most radical gesture of all—and it might apply even to Zizek himself. His new, seemingly extreme radical Leftism might ultimately only be a way of maintaining his original liberal "conservatism" within the new conditions of the Left's theoretical perversion and decline.

At this point, we return for the last time to those three examples of Zizek's specific political commitments with which we began. With regard to their content, we would say that Zizek's actual position does not much differ from our contemporary 'Really Existing Third Way'. But as to their form, there is an absolute difference. And what we mean by this is that the Third Way alternative—this is the very "speculative identity" with its opposite that makes it possible—can only be arrived at by considering its opposite, or more exactly by comparing its own rule to itself. To put this more simply, Zizek by and large agrees with the actions of democratic liberalism in each of those situations, but each time—and this is the very time of thinking—suggests not merely that they have to apply their own standards to themselves, but that they are only possible because they have already applied their own standard to themselves, are already in a speculative relationship with their opposite. We can only arrive at these decisions in the first place because they stand in for, take the place of, that "dark, shapeless abyss" they imply from the beginning. It is this abstract universality—which in effect makes these decisions always exceptions—that pushes these decisions into realization, precipitates them, makes them pass over from Substance to Subject, a subject that is nothing else but that decision or action within a determined situation. (And, not coincidentally, it just this kind of Hegelian speculative identity of opposites, of actions not only leading to but only being possible because of their opposites, that Baudrillard means by the "symbolic exchange" between the West and its other in his analysis of 11 September.)

In each of these examples, therefore, there is a certain "infinite justice" implied, which we might define here simply as the Third Way being taken more seriously than it does itself, the Third Way applying its own ruthless pragmatism and lack of excuses first of all to itself. Again, it would not at all be an apology for inaction or indicate any moral equivocation, but on the contrary point to the necessity of always doing more, of always acting on time. Thus, with regard to Yugoslavia, Zizek (in a statement significantly left out of the "official" version of the text published in New Left Review) suggests as a "solution" to the problem of NATO intervention: "Precisely as a Leftist, my answer to the dilemma, 'Bomb or not?', is: 'Not yet enough bombs and they are already too late'". With regard to 11 September, Zizek speaks of the way that, to the extent that the "coalition" forces seek their enemy outside of themselves, they would always miss their target; that they would obtain "infinite justice" only insofar as they also struck at themselves: "The justice exerted must be truly infinite in the strict Hegelian sense, i.e., in relating to others, it has to relate to itself—in short, it has to ask the question of how we ourselves, who embrace justice, are involved in what we are fighting against". Finally, with regard to the American invasion of Iraq, Zizek is not opposed to it—those reasons he put forward earlier against its pacifist condemnation still hold—but he objects to who does it, for what reasons it is done: "It is who does it that makes it wrong. The reproach should be: who are you to do this?" And this is why, in essays published after this collection was put together, Zizek argues for the "justice" of Bush's re-election: not for the typical Leftist reason that his excesses will somehow hasten the collapse of capitalism, but in order to ensure that he will be held accountable for his actions. As he writes: "If Kerry had won, it would have forced the liberals to face the consequences of the Iraq War, allowing Bush to blame the Democrats for the results of his own catastrophic a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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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act, it is possible to imagine the organization of this book as a series of these exceptions or "infinite judgements". In the first section, "The Fascinated Gaze", we include a number of essays dealing with Zizek's "original" Yugoslavian context; in the second, "Really Existing Socialism", a number taking up that Communism under which he lived the first part of his life; in the third, "Really Existing Capitalism", a number treating that capitalism under which he currently lives; and, in the fourth, "What is (Not) to be Done?", a number dealing with those world political events we have discussed. In each, the section in question constitutes a kind of exception to the one following it, represents what it has to deny in order for it to constitute itself: Yugoslavia as an exception to Communism; Communism as an exception to capitalism; and capitalism itself as an exception, as shown by the racism of the former Yugoslavia, the terrorist strikes of 11 September and the difficulties of the military occupation of Iraq. The point in each case is not so much that the universal requires some exception to it in order for it to be founded as that the universal itself is an exception, only possible because of some third for which both it and its opposite stand in. There is, however, no final reconciliation implied here because this third is never to be thought outside of its own opposite. There is no gradual synthesis or coming together of opposites that this book witnesses, but only a kind of constant turning back upon itself in a process of infinite judgement, a constant 'raising to a higher power'iii that always remains the same. Each section generalizes, universalizes the section before, but there always remains the 'same' antagonism, the 'same' exception.

To be more specific, for all of the abstraction of which Zizek might be accused, the essays here are full of the details of specific leaders' names, particular events, concrete and nuanced political opinions. Again, we would simply say two things about this. First, we are not to think of these details and the abstract form of Zizek's argument as opposed. As we have tried to make clear, Zizek's invariable method is to think the excluded 'third' option in any political situation, which can never be grasped as such but only as its own exception. However, the details of Zizek's writing—contra Laclau—only come to light because of this abstraction, are only this exception. Second, these details—considered political opinions, the smallest accuracies of fact (Zizek is fond of quoting Lenin's aphorism that the "fate of the entire working class movement for long years can be decided by a word or two in the Party program")—are precisely themselves a way of maintaining the fundamental choice.
10 The patient, meticulous elaboration of the facts is the very time of thinking itself, the refusal to act in such a way that merely reconfirms the existing ideological co-ordinates. And yet, of course, these facts are never neutral: they can only be seen from a particular symbolic perspective. The details in Zizek, that is, are always only an exception, one of two sides, miss what they are aiming at. Indeed, Zizek's entire work—even his so-called theoretical arguments—is merely a series of details understood in this way. It both attempts to think the forced choice (and thus seeks to overcome it) and only repeats it, misses it yet again. It at once is the thinking of the exception and merely itself another exception. And it is in this complicated sense that we might conceive of that split in appearance that is the exception: a split not simply between the world and some transcendental realm for which it stands in, but between the world and what allows it to be remarked as detail, the world itself as exception. True thinking is based not on something outside the world, producing a split between the ought and the is, but only on the world itself, producing a split between the is and the is. It is a split that is the very time and place of thought itself.

And this perhaps is the point at which to rehabilitate Hegel's critique of Spinoza, now infamously characterized by Zizek as "the ideologue of late capitalism"
11 who was unable to contemplate this "Capital-Substance":

On the side of content, the defect of Spinoza's philosophy consists precisely in the fact that the form is not known to be immanent to that content, and for that reason it supervenes upon it only as an external, subjective form. Substance, as it is apprehended immediately by Spinoza without preceding dialectical mediation—being the universal might of negation—is only the dark, shapeless abyss, so to speak, in which all determinate content is swallowed up as radically null and void, and which produces nothing out of itself that has a positive subsistence of it own. 12


NOTES:

1. Jean Baudrillard, The Spirit of Terrorism, trans. Chris Turner, London and New York, Verso, 2002, p. 4.

2. Simon Critchley, "The Problem of Hegemony", 2004 Albert Schweitzer Series on Ethics and Politics, New York University, p. 5 (www.politcaltheory.info/essays/critchley.html).

3. See, for example, Zizek commenting that his recent book on Iraq represents little more than "a bric-à-brac of the author's immediate impressions and reactions to the unfolding story of the US attack on Iraq" (Iraq: The Borrowed Kettle, London and New York, Verso, 2004, p. 7).

4. Ernesto Laclau, "Constructing Universality", in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 London and New York, Verso, 2000, p. 289.

5. For Zizek's analysis of the "forced choice", see the chapter "Why is Every Act a Repetition?", in Enjoy Your Symptom! Jacques Lacan in Hollywood and Out,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2.

6. We might also compare this to the "choice" Lacan proposes between 'Being (the subject)' and 'Meaning (for the Other)' i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trans. Alan Sheridan, Harmondsworth, Penguin, 1979, pp. 210-3.

7. In fact, we would argue that, in the same way that the conciliatory tone of Hegel's claim that his critique of Schelling in The Phenomenology of Spirit was directed not at Schelling himself, but rather at the "shallowness" of those Schellingians who "make so much mischief with your forms in particular and degrade your science into a bare formalism" ("Letter to Schelling, 1 May 1807", in Hegel: The Letters, trans. Clark Butler and Christiane Seiler,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4), p. 80), revealed how grave the philosophical rift between the two of them was, so Zizek's admission that he is "not actually arguing against (Laclau's and Butler's) position but against a watered-down popular version they would also oppose"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p. 91) functions as an internal reflection on the irreducible difference between Zizek and Butler and Laclau. By contrast, we would say that Zizek's most publicly declared antipathies often mask an undeclared affinity. This, we would suggest, is the case with Blair and the Third Way. Indeed, could we not even propose that Zizek sees in Blair something of that great "critique" of bureaucracy he also finds in Stalin, the idea that a revolution without its corresponding form of bureaucracy is ultimately a revolution without a revolution? Or, more exactly, do not recent events regarding the agreed hand-over of power after the recent election in Britain lead us to think that Blair is like Lenin, who understood he was to be thrown away after his usefulness was over, while his deputy, Gordon Brown, the Chancellor the Exchequer, is more like Stalin? That Blair's true greatness—for all of the accusations of the lack of ideals of the Third Way—will ultimately lie in his sacrificing himself for the Cause? To this extent, we would contrast the profound, 'inhuman' self-instrumentalization of Blair with the "objective beauty" of someone like Havel, who remains "human, all too human".

8. Hence the long list of "conservatives" that Zizek has gone on the record as admiring: not just the well-known Pascal, Chesterton, C.S. Lewis and W.B. Yeats, but Pope John Paul II, Christopher Hitchens (with regard to Iraq), Stalin, Hegel, even Lacan himself...

9. Slavoj Zizek, "Hooray for Bush!", London Review of Books 26, 2 December 2004.

10. Slavoj Zizek, The Abyss of Freedom/Ages of the World, Ann Arbor, MI,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7, p. 85.

11. Slavoj Zizek,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1993, pp. 216-9.

12. G.W.F. Hegel, The Encyclopedia Logic: Part 1 of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ical Sciences (with the Zusätze), trans. T.F. Geraets, W.A. Suchting and H.S. Harris, Indianapolis, Hackett, 1991, p. 227.

06.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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