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2002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Ⅰ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차원은 시간, 공간 및 사회(또는 사회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인간 존재들로 구성된 사회적 존재 또한 시?공간적으로 구성되고 재구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간, 공간 및 사회는 인간과 서로 변증법적으로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이론은 칸트의 계기적(nacheinander) 관계나 마르크스의 역사발전이라는 용어가 시사하듯이, 주로 사회의 존재와 생성을 시간적 맥락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발생되는 역학관계를 통해서 세계를 파악해 왔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실증주의 사회과학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역사적인 과정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역사의 발전 과정 속에서 설명하였고, 그 결과 공간은 철저하게 탈정치화되고 무시되어 왔다. 특히 후기 베르그송주의의 영향은 “시간을 풍요롭고 생기있고 변증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공간은 죽은 것, 고정된 것, 비변증법적인 것, 정지된 것으로 간주하는”(Foucault, "Questions on Geography" 70) 경향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이처럼 시간을 특권화해 온 근대 이론의 이면에는 의미와 행위를 사회적 존재의 시간적 구성과 시간적 경험으로 환원시켜 합리화하는 이른바 역사주의의 논리가 깔려 있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에드워드 소자(Edward W. Soja)가 지적하듯이 비록 해방적 통찰력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사회생활과 사회이론을 지나치게 역사적으로 맥락화함으로써 공간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억제하고 주변화해 왔으며, 아울러 사회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공간적 해석을 덮어버림으로써 공간을 시간에 맹목적으로 종속시키는 우를 범해 왔다.(15)
한편 모더니스트들은 공간을 외적 환경으로 보지 않고 의식의 산물―이를테면 인지적 직관―로 환원시켜 공간을 추방함으로써 제국주의의 확장에 위협이 되는 지방주의, 지역주의 및 민족주의를 차단하고자 하였다(Soja 35). 역사주의에 매몰된 근대 이론은 시간에 대한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정치적 전략과 맞물려 탈공간화를 가속화하였고, 심지어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acs)는 『역사와 계급의식』(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에서 공간에 대한 의식 자체를 계급투쟁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국가와 자본이 조작해낸 허위의식이자 사물화의 징후로 간주함으로써 반공간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냈다(89-90). 그 결과 사회적 현상을 공간적 개념이나 공간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른바 공간화(spatialization) 담론은 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서구의 지식사에 있어서 역사주의의 패권적 담론이 견고한 성을 구축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공간성에 침묵해 온 역사주의의 과오를 간파하여 역사와 역사적 서사를 공간화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간성을 사회적 산물이자 동시에 사회생활을 구성하는 원동력으로 인식하면서 공간 담론이 오늘날 이론의 중심 무대로 전경화하는 데 유용한 출발점을 제공한 두 이론가는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이다. 특히 이들은 공간의 생산을 역사발전과 동일한 문제설정에 뿌리를 둔 일련의 사회적 과정으로 간주함으로써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공간적 선회를 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공간이 모든 형태의 공동체적 삶에 있어서 근본이 되며 인간 존재의 공간적 질서가 공간의 사회적 생산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점을 간파한 이론가는 르페브르였다. 르페브르가 『자본주의의 생존』(The Survival of Capitalism)에서 지적하듯이, 사회적으로 생산된 공간은 지배적인 생산관계가 재생산되는 곳으로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파편화되고 등질화되고 계층적으로 구조화된다(21).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우리의 삶과 시간 및 역사의 침식이 일어나는 공간은 그 자체로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서로 환원될 수 없고 서로 겹칠 수 없는 장소들로 대표되는 일련의 관계 속에 살고 있다. 지식, 권력, 공간성의 관계를 일관되게 탐구해 온 푸코는 「타자의 공간에 대하여」("Of Other Spaces")에서 이러한 장소와 관계의 이질적 공간을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고 부른다(23). 이질적이면서 상관적인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은 르페브르가 경험공간(l'espace vecu)이라고 부르는 공간으로 사회적으로 창출된 공간성이며 사회적 실천의 아비투스(habitus)이다(Soja 18).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은 타자의 공간을 창출하며 이러한 공간은 생산되고 지배되고 통제된다.
본 논문은 푸코가 말하는 소위 타자의 공간에서 권력의 공간화와 차이의 공간화가 어떻게 전개되며 타자가 어떻게 생산?재현되는가를 살펴보고, 나아가 타자가 타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진정한 탈주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Ⅱ
푸코는 자신의 저작에서 위치(position), 대치(displacement), 장소(site), 장(field), 영토(territory), 영역(domain), 토양(soil), 지평(horizon), 군도(archipelago), 지정학(geopolitics), 지역(region), 지방(province) 등과 같은 공간 메타포를 즐겨 구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들은 군사전략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가령, ‘대치’는 군대용어로 병력의 교체를 의미하고, ‘지역’은 군대에서 쓰는 명령에서 유래되었으며, ‘장’은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며, ‘지방’은 군사적으로 정복된 영토라는 뜻을 갖는다. 푸코가 이처럼 군사전략적인 공간 메타포를 즐겨 쓰는 이유는 이러한 메타포가 전략적이며 전투적인 사고를 드러낼 뿐 아니라 공간담론을 정치적 실천의 문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Questions on Geography" 68-70)
이처럼 공간은 정치와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된 과학적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정치적이고 전략적이었다. 르페브르 역시 「공간의 정치성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Politics of Space")에서 공간이 등질적이고 가치중립적이며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주장한다.
공간이 그 내용물에 대해 중립적이고 무관심하다는 인상을 풍긴다면, 따라서 ‘순전히’ 형식적이라는 느낌, 즉 이성적 추상의 축도라는 느낌을 준다면, 그것은 바로 공간이 점유되어 이용되어 왔고 이미 지나온 과정들(그 궤적들이 경관 속에 반드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의 중심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공간은 역사적?자연적 요소로부터 형성되고 주조되어 왔지만, 이것은 정치적 과정이었다. 공간은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이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이데올로기로 가득 찬 산물이다. (31)
공간이 정치적이라면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문제가 개입된다. 푸코는 「권력의 시선」("The Eye of Power")에서 “거창한 지정학적 전략에서부터 작게는 작은 삶의 공간을 지배하는 전술에 이르기까지 공간들에 대한 기술은 곧 권력들의 역사가 될 것”(149)이라고 밝히고 있다. 공간이 모든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근본적이라면, 공간화에는 동일자와 타자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의해 작동하는 권력의 논리가 필연적으로 작용한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듯이, 동일자와 타자의 이분법적 구도에 의해 공간적 배제의 과정을 거친 것은 광인이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나 셰익스피어의 극에 나오는 광적인 인물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고상하면서도 어리석은 기사, 15세기 독일의『바보들의 배』에 관한 우화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르네상스 시대에 광기는 사회적으로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이성 너머에 있는 의미의 영역―즉 의미있는 비이성―으로서 일정량의 진리를 공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푸코의 말을 빌면, “모든 광기는 광기를 판단하고 지배하는 자신의 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이성은 이성의 보잘것없는 진리를 발견하게 해주는 광기를 담지하고 있었다”(Gutting 72에서 재인용). 이처럼 광기는 마치 리어왕과 그의 어릿광대(fools)가 서로 말을 건네듯이 이성과 대화하는, 즉 이성과 함께 하는 세계의 일부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광인은 사회적 공간으로부터 축출당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이성과 광기의 이러한 관계에 커다란 단절을 초래한 것은 고전주의 시대인 17세기 중엽에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대감금(Great Confinement)이라는 이른바 ‘차이의 공간화’였다. 그런데 이 무렵 나병원을 정신병원으로 개조하고 광기를 질병으로 파악하는 생리적 개념이 강조됨으로써 광인들은 국가 통제하의 감금시설이라는 제도적 공간으로 축출되었는데, 여기에는 단순히 광인들만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거지, 범죄자, 병자, 극빈자, 성문란자, 신성모독자, 심지어는 반항적인 아이들과 무책임한 부모들까지 광인으로 분류되어 수용되었다. 이 시기의 광기의 특징은 감금된 자들이 게으름이라는 경제적 태만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감금이 완전고용의 시기에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실업의 시기에는 게으른 자들을 재흡수하여 선동과 폭동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는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동기를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Madness and Civilization 51).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또 다른 특징은 광기가 더 이상 이성의 대화 상대가 아니라 비이성의 변종으로 완전히 타자화되었다는 점이다. 물리적 감금은 광기가 이성적 삶으로부터 개념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의미하며, 광인에 대한 배제는 이성과 광기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어떠한 공간도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하였다. 또한 광기가 모든 형태의 비이성과 마찬가지로 게으름의 한 종류로서 타자화된 것은 광기가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 윤리의식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광기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자 행정적 통제를 요구하는 대상으로 지각되었다.
푸코가 근대라고 부르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영국의 윌리엄 튜크(William Tuke)와 프랑스의 필리프 피넬(Philippe Pinel)이 주도한 정신의학 개혁운동으로 인하여 광기를 게으른 질병이라기보다는 정신질환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싹트면서 광인을 범죄자와 극빈자의 무리로부터 분리해내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산업의 번창으로 인하여 인력과 예비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극빈자를 더 이상 감금해둘 수 없다는 자본주의의 경제논리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노동력의 일부가 될 수 없는 광인, 죄수 및 환자는 여전히 감금의 필요가 있었고, 특히 광인은 정신의학 개혁운동의 영향으로 별도의 감금체계를 필요로 했는데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수용소였다.
수용소에 감금된 광인들은 정신의학적 담론의 권위 아래 놓여진 환자가 되면서 쇠사슬에서 풀려나 육체적으로 해방되었고 보다 인간적인 환경 하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푸코에 의하면, 이는 광인들의 정신을 장악하여 보다 은밀하게 조정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광기에 대한 공공연한 공포는 책임감에 대한 숨막히는 고통으로 대체되었다. 두려움은 더 이상 감옥문 밖에서는 만연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의식의 봉인 아래에서 휘몰아쳤다. . . .수용소는 더 이상 광인의 죄를 처벌하지 않았다. . . .그러나 그 이상을 행했는데, 그것은 죄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 . . 이러한 죄로 인해서 광인들은 . . .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처벌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인정함으로써, 즉 자신의 죄를 인식함으로써 광인은 자신을 자유롭고 책임있는 주체로 인식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이성을 회복하였다. (Madness and Civilization 247)
광인들은 책임감이라는 깊은 심리적 시련을 겪게 됨으로써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는 해방될 수 없었는데, 이러한 도덕적 고문은 물리적 구속보다는 인간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훨씬 기만적이고 지배적이었다.
수용소라는 제도적 공간에서 의사는 아버지이자 심판관이자 법으로 신격화되면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의사의 의학적 실천―즉 치료―은 곧 질서, 권위, 처벌에 대한 오래된 의식의 수행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의사는 가장의 권위에 초점을 둔 가족-자녀 관계, 즉각적인 정의에 초점을 둔 위반-처벌 관계, 사회적?도덕적 질서에 초점을 둔 광기-무질서 관계 등을 통해서 치료에 대한 권력을 행사했는데(Madness and Civilization 274), 이는 수용소가 부르주아 사회의 권위주의적 구조와 가치관을 반영하는 거울임을 그대로 드러낸다.
푸코에 의하면, 의사는 광기에 대한 과학적 지식 때문에 수용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공간 내에서의 도덕적 권위 때문에 지배하며, 우리가 정신의학적 치료라고 부르는 것도 18세기 말에 이루어진 일종의 도덕적 전술이었다(Madness and Civilization 276). 나아가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도 도덕적 지배의 기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환자를 수용소 밖에서 치료하고 수세기만에 처음으로 광인 자신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는 대화를 도입함으로써 수용소 심리를 결정적으로 파괴했지만, 환자를 정신분석자의 권력에 복종시킴으로써 권위주의적인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즉 프로이트는 수용소 내에서의 도덕적 지배의 도구인 의사의 권위를 유지하고 심지어는 강화하기까지 했는데, 결과적으로 정신분석은 광인이 말을 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그들이 말한 것을 실제로 듣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근대 심리학과 정신의학 및 정신분석은 광인에게 해방을 가져다 준 것 같지만, 그것은 반어적인 의미에서의 해방이며 사실은 거대한 도덕적 감금이나 다름없었다(Madness and Civilization 278). 이는 곧 차이의 공간화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넘어 의식의 공간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이 사상의 통제를 통해 신체를 복종시키고자 함에 따라 의식은 이제 권력이라는 글자가 새겨지는 표면이 된 것이다.
한편,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사회의 기본적 가치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여 침묵시키고 통제하기 위해 광기를 공간화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총체적 전략과 그 효과가 어떻게 작용해 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푸코는 거대구조나 통치계급 속에 안주하는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권력이 아니라 생산적인 권력, 이를테면 여러 세력들을 방해하고 복종케 하거나 분쇄하기에 열중하기보다는 여러 세력들을 낳아서 기르고 조종하는 데 몰두하는 권력의 출현을 알리는 역사상의 단절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권력양식을 생체제어 권력(bio-power)이라고 부른다. 생체제어 권력의 대표적인 유형은 “광기/제정신, 위험/무해, 정상/비정상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구분과 이름붙이기라는 이중적 방식에 따라 작동하는”(Discipline and Punish 199) 이른바 훈육적 권력이다.
훈육적 권력은 훈육이 제도적 공간에 제대로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 공간배분의 기술, 행위의 통제, 훈련, 전술 등과 같은 네 가지 조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공간배분의 기술은 능률과 통제를 위해 공간을 적절하게 분할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공장의 작업장을 인쇄, 조판, 염색 등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도록―또한 감시가 용이하도록―분할하거나 군인과 젊은이를 더 잘 통제하기 위해 병영이나 기숙사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기술이었다. 행위의 통제는 노동자나 재소자의 일과를 엄격하게 짜놓아 신체적 움직임까지 통제하는 것이었다. 훈련은 군대와 학교 등에서 신체와 훈육의 지속을 위한 정치적 기술을 지탱하는 강력한 도구였다. 전술―즉 힘의 조합―은 개인을 신속하게 동원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네 가지 조건은 신체공간을 지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이는 사회생활의 모든 공간을 더욱더 집요하게 감시하고 식민화하여 훈육사회의 밑거름이 되는 온순한 신체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수도원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17세기말 페스트의 창궐로 인하여 공간적 분리와 주민 감시의 방법이 필요했던 도시에서 발전된 이러한 훈육기술은 곧 사회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결과 근대사회라는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군도를 형성하였다.
권력과 훈육의 관계가 사회생활의 공간성에 새겨진 근대사회에 있어서 권력은 지식과 담합하여 배제, 감금, 감시, 대상화 등의 실천과 기술체계를 통하여 정신의학, 사회학, 범죄학 등과 같은 분과학문들을 양산?배치하고 이러한 학문들은 역으로 권력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세련되게 다듬고 확산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신체공간을 정치적 전략의 거점으로 인식한 새로운 정치해부학인 신체정치학은 다양한 훈육기술을 발전시켰다. 감옥이나 요양원 또는 병원 등과 같은 공간은 개인을 관찰하고 교정기술을 시험하고 사회적 통제에 활용할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실험실의 기능을 하였다. 다수의 인간(특히 주변부 집단)을 특정한 공간 속에 질서정연하게 배치하는 일련의 과정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차이와 배제의 논리였다. 바꾸어 말하면 권력의 공간화는 바로 차이의 공간화, 즉 성, 계급, 인종 등의 차이에 기반한 공간적 분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위집단을 타자화하고 주변화하는 차이의 공간화는 교묘한 미시권력이 지식뿐만 아니라 자본과 결탁함에 따라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심지어는 무의식의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
하트(Michael Hardt)와 네그리(Antonio Negri)에 의하면, 초기 근대 사회 이론가들은 시민적 질서라는 제한된 내적 공간을 자연의 질서라는 외적 공간과 대립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근대화를 외부 공간의 내재화, 즉 자연공간의 문명화로 간주하였다(187). 또한 근대적 개인에게는 집이 사적 공간인 반면 공적인 것은 자신의 외부였으며, 이 외부는 정치에 적합한 장소로 여기서 개인의 행동은 타자 앞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탈근대화 과정에서 공적 공간은 점점 사유화되어 왔다. 시민광장과 같은 공적 공간에 초점을 맞추던 도시의 풍경은 오늘날 쇼핑몰, 고속도로, 타워펠리스 같은 고립된 공간 등으로 바뀌고 있다. 기 드보르(Guy Debord)가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부르는 탈근대 사회에서 개인은 이제 항상 타자의 시선 아래, 즉 감시카메라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되었고,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이 보장되던 공적 공간은 사이버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내부와 외부,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흐려진다. 일례로 전지구적 자본주의에는 외부가 없다. 세계 전체가 시장인 것이다. 푸코의 원형감옥이 근대권력의 지표였듯이, 세계시장은 제국 권력의 지표이다. 이처럼 자본이 외부를 내재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것은 불균등발전과 지리적 차이였다.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은 「자본주의와 지역불균형」("Capitalism and Regional Disparities")에서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와 같은 차원에서 지역과 국가 간의 불균등발전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하면서 공간의 문제를 지역적, 국제적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했다(43). 그는 공간적 불균등이 자본축적에 필수적이라고 했는데, 이는 자본주의가 차이를 공간적으로 생산하는 주요인임을 시사한다. 차이의 생산과정, 즉 불균등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심과 주변은 자본/권력의 작동에 의해서 조절된다.
지리적 불균등발전의 기저에는 차별화와 균등화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이 있다. 즉, 자본주의는 점유공간을 과잉개발지역과 저개발지역으로 차별화하여 개발과 저개발을 병존시키거나 병행하고 때로는 동질화를 통해 차이를 감소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존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독특한 공간성을 생산해 왔다(Soja 107). 공간은 자본주의 체제의 확대에 있어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자본주의는 공간을 생산하고 점유하면서 문제점을 노출해 왔고 또 그러한 과정에서 살아남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성장의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차이, 즉 공간의 불균등발전이었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적 권력은 한편으로는 동질화 효과를 통하여 차이를 소멸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를 보다 은밀하게 내재화해왔다. 이러한 권력의 속성을 가리켜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Empire)에서 “권력의 장소는 없다―권력은 도처에 있지만 또한 어디에도 없다. 제국은 우토피아(ou-topia), 즉 사실상 무장소(non-place)이다”(190)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자본/권력의 전지구적 공간 지배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전지구적 공간의 곳곳에 스며있는 미시적인 권력은 유리한 조건을 찾아 자본을 신속히 이동시킴으로써 고용의 지역적 차별화와 노동의 공간적 분업을 초래하고 한결 수월해진 자본철수를 통해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약하고 노동자들의 조직화 역량을 통제한다. 전지구적인 공간분절화를 통해 지구의 전지역을 통제하게 된 자본/권력은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전략을 통해 다양한 스펙터클을 창출해냄으로써 비판적 거리가 소멸된 정신분열증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현란하고 파편화된 이미지로 가득 찬 도시공간의 포스트모던한 현상은 바로 자본/권력의 공간 지배 전략이 극대화된 것이며, 이는 공간의 정치학이 중요한 전략적 요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Ⅲ
공간이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면 공간은 필연적으로 타자의 정치학이 전개되는 처소가 된다. 차이의 공간화 과정에서 여성, 유색인종, 비이성애자, 광인 등과 같은 하위집단들은 타자의 자리에서 타자화된 경험을 겪어 왔다. 그런데 타자성은 소여된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권력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담론 속에 내재하여 담론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면서 타자를 문화적으로 생산한다. 이를테면 사이드(Edward Said)가 ‘동양은 창조되었다’라고 하듯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라는 실제대상에 대한 보다 정확한 지식을 획득하려는 학문적 기획이 아니라 담론 그 자체를 통해 자신의 대상인 타자를 창조하는 담론이다. 권력은 보편적 담론의 지배를 통해 타자를 동질화하고(예컨대 동양인은 어디에서나 거의 모두 동일하다) 본질화하는(동양과 동양적 특징은 특정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변하지 않는 정체성이다) 전략을 구사한다. 지배권력은 타자화된 타자를 만들어내는 이른바 재현의 제국주의를 통해 타자에 대한 물신화된 이미지들(담론적 창조물)을 중심부에 투사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 즉 동일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재현은 필연적으로 창조의 형식인 동시에 배제의 형식이 된다. 지배권력은 이러한 재현의 정치학을 통해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공간에까지 타자의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심리적?정치적 중심화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재현(self-representation)을 위한 타자의 모든 시도를 침묵시킨다.
라캉(Jacques Lacan)이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Lemaire 151)이라고 말했듯이,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타자(the Other)와 대타자의 진리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말하자면 상징계 속에 스며든 상상계의 위장된 모습인 무의식, 즉 대타자라고 하는 욕망은 우리에게 말을 하며 타자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무의식적 욕망은 ‘규범적’(normal) 언어 - 이를테면 권력과 법의 언어 - 의 실수나 잘못 또는 오류를 통해서 표명된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적 언어의 오류는 서로 모순되고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규범의 다른 얼굴인 광기와 분열증 또는 일탈로 나타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공간은 제임슨(Fredric Jameson)이 말하듯 역사상 전례없이 자본이 욕망과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침투하여 식민화해 버린 공간이다(Postmodernism 48-49). 이러한 공간에서 자본주의적 권력은 동일성의 논리를 내세워 타자의 일탈을 저지하면서 끊임없이 타자를 영토화한다.
“어떤 사물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다른 사물들(과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전용 행위는 이미 언제나 자기 투사(self-projection)와 동화를 수반할 뿐만 아니라 물화와 수용(expropriation)을 통한 소외도 수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Greenblatt 12에서 재인용)라는 동독의 마르크스주의자 로베르트 바이만(Robert Weimann)의 주장이 시사하듯이, 지배권력은 동일성의 전략을 통해 타자의 일탈을 저지하고 포섭하지만 종국에는 타자는 주변화되고 소외된다. 왜냐하면 지배권력은 타자를 진정한 동일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고 지배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으로 타자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공간에서 자본주의적 권력은 동일성의 전략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의 전략과 차이의 전략을 반복적으로 구사한다. 스티븐 그린블래트(Stephen Greenblatt)가 자본주의를 총체화하는 충동과 파편화하는 충동, 이를테면 총체화와 차이, 획일성과 다양성, 단일한 진리와 이질성 사이를 빠른 속도로 왕복하는 체제로 간주했듯이(5-6), 자본주의적 권력은 한편으로는 차이의 전략에 따라 경계를 만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성의 전략에 따라 경계를 허무는 역동적인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협상과 교환을 통한 조작과 조정이 수반되며, 이 과정에서 타자는 주변화되어 배제되거나 타자성을 상실한 채 지배에 예속된다. 이처럼 타자는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특히 자본주의 문화에 있어서의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에 따라 지배권력은 사회?정치적 공간(사회?정치적 담론과 텍스트)과 미적 공간(미적 담론과 텍스트)을 점유하여 양자간에 경계 만들기와 경계 허물기를 순환적으로 반복하고 때로는 새로운 사회?정치적/미적 공간을 생산함으로써 타자를 조종한다. 이러한 과정은 이른바 “일상적인 행동의 시학”(Greenblatt 8)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오늘날 이미 우리들의 일상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 있다.
일상적 공간과 무의식의 공간에까지 침투한 자본의 논리는 사회?정치적 공간과 미적 공간 사이에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협상과 교환을 통해 조작과 조정을 반복?강화하여 공간의 점유, 생산 및 재생산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타자로 하여금 공간적 방향감각을 상실케 함과 동시에 정신분열증적 증상을 드러내게 한다. 라캉에 의하면, 정신분열증은 주체가 말과 언어의 영역 속으로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언어적 무질서, 즉 문장을 만들어내는 의미 사슬의 와해로 정의된다. 의미 사슬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정신분열자는 아무 연관이 없는 별개의 기표 조각들만 인식할 뿐 과거, 현재, 미래를 문장으로 통합해내는 언어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라캉의 주장대로, 만일 과거, 현재, 미래를 문장으로 통합해내는 언어적 기능이 없어 고립되고 끊어지고 단절된 물질적 기표들밖에 경험하지 못한다면, 타자는 자신의 전기적 경험이나 정신적 삶의 과거, 현재, 미래도 통합해 낼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도 유지할 수 없다. 결국 타자는 마치 정신분열자처럼 시간의 연속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언제나 단절된 영원한 현재 속에서 살면서 리얼리티를 보지 못하고 가식적 껍데기나 입체적 환상, 또는 드문드문 이어지는 일련의 이미지만을 보게 된다. 포스트모던 공간에서 지배권력은 후기자본의 문화논리에 따라 정서보다는 강도(intensities), 숨겨진 깊이보다는 화려한 표면, 기의보다는 무의미한 기표를 부각시키며 때로는 이미지를 포화상태에 이를 정도로 홍수처럼 쏟아 부어 시뮐라크라의 시뮐라크라를 빚어냄으로써 정신분열증적 증상을 심화시킨다. 그 결과 타자는 분열증적 주체로 머물면서 타자성을 상실하게 된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 공간에서 시뮐라시옹이 극에 달하면 선악이나 진실과 거짓의 관점에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치가 파편화되는데, 이 단계에 이르면 인종, 계급 및 성의 차이가 완전히 소멸되어 정치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다. 보드리야르가 초정치적인(transpolitic) 세계라고 부르는 이러한 세계에서 미디어가 포화상태에 이를 정도로 과다한 메시지를 흘려보내 미디어의 내파에 이르게 되면 종속집단(또는 대중)으로서의 타자는 인종, 계급 및 성을 비롯한 모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된다(16-19). 즉 타자는 물질 덩어리처럼 사물화되어 침묵하는 다수의 일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배권력이 사회?정치적 공간과 미적 공간을 장악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이유는 알튀세르(Louis Althusser)와 라캉의 주체 이론이 시사하듯 타자의 타자성이 사회적 혹은 언어적으로 구성되며 가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개인은 이데올로기의 호명 과정을 거쳐 주체로 구성된다(170-77). 한 개인의 주체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면, 주체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호출을 받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개인이 고정된 불변의 주체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중층결정된 환상이자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란 주체성(또는 주관성)을 차지하기 위해 무수한 주체위치들이 끊임없이 치고 받는 처소이다. 주체구성론에 의하면, 종속집단(subalterns)으로서의 타자의 주체성(또는 주관성)을 특징짓는 타자성은 난공불락의 견고한 요새가 아니라 타자성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무수한 주체위치들―이를테면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소멸될 수도 있다.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에 의하면 아이는 자신의 이상인 타자(상징계)를 자신으로 오인하는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Lemaire 176-78). 따라서 주체는 사실상 타자에 의해서 구성된다. 그런데 이 타자는 언어적으로 구조화된 무의식의 형태로 존재하므로, 결국 라캉에게 주체는 언어적 또는 담론적 구성물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지배권력은 다양한 담론을 통하여 다양한 주체위치들(즉 타자들)을 생산하여 이러한 주체위치들(타자들)이 주체 속에서―엄밀히 말하면 무의식 속에서―주체성을 구성하게 한다. 결국 소외되고 배제된 종속집단인 타자들의 타자성은 지배계급이 생산해내는 무수한 타자들(주체위치들)의 끊임없는 유혹에 노출되고, 그 결과 때로는 자신들의 진정한 주체성(즉 타자성)을 올바로 재현해 내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지배권력은 특정한 재현양식을 특권화하는 제도적 공간을 장악하고 재현체계를 통제하여 재현 속에 깊숙하고도 은밀하게 내재하면서 타자성의 재현을 방해한다.
주체가 자기재현을 하지 못하는 이른바 재현의 위기 속에서 종속집단으로서의 타자가 타자성을 재현하고 새로운 형태의 저항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서 제임슨은 인식적 지도그리기의 실천을 제안한다. 인식적 지도그리기란 노동자, 흑인, 여성, 유태인 등과 같이 타자화된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인종집단에 내재화되어 있는 일종의 아비투스와 같은 기억장치를 통해 후기 자본의 패권적 총체성을 읽어내면서 진정한 집단적 삶을 새롭게 재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임슨이 집단적 삶을 내세우는 것은 시뮐라크라로 충만한 포스트모던 공간 특유의 사회적?공간적 혼란으로 인하여 개별주체는 철저하게 탈중심화되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포스트모던 공간에서 개별 주체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계급의식이라는 집단적 의식을 통해 재현기능을 회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속집단으로서의 타자가 의식의 탈물화를 통해 재현기능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식적 지도그리기는 종종 동종요법의 전략과 함께 사용된다. 제임슨이 언급하듯이, 독일의 설치미술가인 한스 하케(Hans Haacke)는 자신의 설치물 속에 설치공간을 교묘하게 집어넣는 수법을 통해 구겐하임 미술관을 자신의 주제와 소재의 일부로 끌어들임으로써 미술관이라는 설치공간이 그 너머의 제도적 공간의 담합자본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드러내는 일종의 인식의 지도를 그려낸다(Postmodernism 158, 409). 이 과정에서 하케는 자신의 작품 속에 뉴욕 할렘가의 부동산 소유 실태를 기록한 수백 개의 사진과 지도를 설치함으로써, 즉 이미지 그 자체를 통해 이미지를 약화시키는 동종요법의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담합자본의 실체와 미술관 소유주인 록펠러 가문의 부정 및 소외된 인종집단의 슬럼가라는 현실을 인식시켜준다.
한편, 밀러(J. Hillis Miller)는 『타자들』(Others)에서 타자성의 개념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1-2). 하나는 동일자의 변형으로 어떤 식으로든 동화되고 이해되고 전유될 수 있는 타자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형태로든 동일자로 바뀔 수 없는 진정한 타자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모든 타자는 완전한 타자”(22)라고 했을 때의 타자는 쉽게 전유되어 지배되고 통제될 수 없는 후자의 타자, 즉 환원불가능한 타자를 가리킨다. 전자의 타자는 권력에 의해 생산되고, 후자의 타자는 우리 내부의 타자로서 권력에 대한 저항점이자 대항전략의 출발점이 된다. 후자는 소위 푸코가 말하는 반기억(counter-memory), 즉 이전의 억압형태와 투쟁형태에 대한 일반대중의 기억을 촉진함으로써 정치적 저항의 지렛대를 제공한다.
역사란 그 역사집단이 공유하는 기억을 체계적으로 구성한 것이지만 그 기억을 구성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기억은 서사화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재구성되는데, 이때 권력의 패권적 기억은 재현의 폭력 속에서 공식적인 역사를 구성하는 반면에 타자의 억압적 기억은 파편화된 채 침묵된다. 기억은 때로는 각종 의식이나 기념비, 텍스트 및 기타 문화 유물로 재현되어 제도화되지만, 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협상의 과정이 수반된다. 기념비적 기억의 문화는 공공의 기억을 강요하고, 그 결과 기념비, 추모식, 상징물 등과 같은 기억의 장소에는 거짓된 아우라가 자리잡게 되며, 억압의 역사가 스며있는 장소나 공간에 대한 기억은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표면 위를 불안정하게 떠돌게 된다. 이와 더불어 억압적 공간의 공간성은 이러한 기억의 양식들에 의해 재구성되어 목소리를 잃어간다. 이처럼 공식적인 역사에서 지워진 채 파편화되어 떠도는 대중의 기억에 목소리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 반기억의 전략이다. 따라서 반기억은 연속의 역사, 즉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공식적인 역사에 항거하여 저항적 기질을 드러내는 단절[불연속성]의 역사이자 망각의 역사이다.
반기억은 공공의 기억에 가려 단순히 징후로만 머물러 있는 대중의 경험, 즉 파편화된 기억들을 복원한다. 권력의 패권적 기억이 저지른 대대적인 조작과 전용에 맞서 반기억은 주로 신체에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신체는 주체가 타자로 구성될 때 온갖 지배의 기술이 가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의 법과 규율이 쓰여지는 신체는 과거의 경험의 오점뿐만 아니라 욕망과 결점과 오류를 드러낸다. 푸코가 계보학의 임무를 가리켜 “전적으로 역사에 의해서 각인된 신체와 역사가 그 신체를 파괴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듯이, 신체는 극복할 수 없는 갈등의 텍스트이자 사건이 각인된 표면이다(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148). 즉 신체는 저항을 구성하며 반기억을 증거한다. 이처럼 종속집단으로서의 타자가 타자성을 공고히 하는 길은 제도화된 기억들로 구성된 화석화된 역사에 맞서 지배적인 역사해석의 이면에 숨겨진 반기억의 흔적들을 발굴함으로써 그 동안 망각되었던 타자의 목소리들을 복원하는 것이다.
프랑코 렐라(Franco Rella)는 『타자의 신화』(The Myth of the Other)에서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동일자의 부정으로서 타자를 이상화했다고 하면서 변혁의 주체로서의 타자의 위상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기 때문에 타자에 지나치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한다(27-30). 그러나 동일자의 논리가 여전히 모든 공간을 장악하면서 보다 은밀하게 내재화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렐라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자가 절대선이 아니라는 렐라의 견해는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 이를테면 제3세계의 남성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에 의해 타자로 각인되었지만 가부장제적인 사회구조 하에서 자국의 여성들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고, 서구의 여성들은 남성중심주의의 타파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녔지만 백인여성과 흑인여성은 자신들이 겪는 타자화된 경험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백인여성들은 흑인여성들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했다. 여기에 또 계급의 문제가 가미되면 문제는 한층 복잡해져서 백인 여성노동자는 백인 중산층여성의 타자로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이처럼 지배공간이 무엇이냐에 따라 타자는 달라진다. 타자의 정치학은 이와 같이 여러 겹으로 착종된 문제여서 단순히 해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분법적 구조를 지닌 지배권력을 전복하고 사회적 위계구조화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듯이 차이의 복수성과 잡종성 및 문화의 국지성(locality)을 긍정하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145).
Ⅳ
지젝(Slavoj Zizek)이 타자를 가리켜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외침』(Scream)과 같다고 말했듯이(권택영 31에서 재인용), 타자는 근본적으로 차이와 배제에 대한 저항의 외침이다. 따라서 진정한 타자의 정치학은 동일성의 논리에 사로잡힌 권력에 의해 억압된 타자(탈중심화된 주체)를 복권시켜 동일성의 세계를 전복하고자 한다. 억압된 타자의 주체성은 지배권력이 의존하고 있는 동일성의 현실의 기반 자체를 의문시하여 동일성의 세계를 탈코드화함으로써 복원된다. 타자의 정치학은 타자를 구성하는 자들(이를테면 백인, 남성, 이성애자, 지배계급, 합리주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주체)과 타자성의 구성에 있어서의 재현의 역할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재현에 작용하는 정치성을 폭로하여 제도화된 서열구조를 해체하고 단일한 담론체계의 헤게모니에 저항한다. 또한 타자의 정치학은 재현이 빠뜨리거나 배제한 현실에 주목하여 권력의 담론의 이분법적 논리를 해체할 뿐 아니라, 지배와 식민주의의 영향에 대한 주관적 경험과 지배당하고 주변화된 하위집단의 객관적 역사―즉 대항적 역사(counter-histories)―를 통해 침묵당한 타자의 역사를 복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동일성의 주체인 타자는 보이지 않는 미시권력이 장악한 일상적 공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공간에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탈주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탈중심화되고 주변화된 타자가 타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진정한 탈주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저항과 투쟁을 공간적 실천과 연계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정치와 문화는 국가영토, 공동체 공간, 신체 공간, 사이버 공간을 차례차례 정복하고 지배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소를 완전히”(최병두 28) 말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 공간이든 정신적(또는 은유적) 공간이든 간에 끊임없이 공간을 생산하면서 식민화하기 때문이다.
차이의 공간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간은 정치적 전략의 거점으로서 자본과 권력이 지배의 그물망을 촘촘히 깔아놓은 통제의 장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공간은 또한 자본/권력의 공간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다국적 자본주의의 공간이 전지구적인 공간분절화와 공간의 지리적 차별성이 심화되고 자본/권력의 공간 지배 전략이 극대화되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맞설 수 있는 국지적인 대항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다국적 자본의 공간이 이미지 중독으로 인한 비판적 거리의 소멸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분열증적 하이퍼공간(hyperspace)이라고 한다면, 반기억의 전략을 통해 인식의 지도를 그려나감으로써 끊임없이 공간의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식민화된 공간에서 타자가 자기 재현을 통해 타자성을 간직할 수 있는 해방공간―이를테면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희망의 공간이라고 부르는 그런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본/권력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공간의 공간성을 탈신비화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혁신적인 공간의식을 공간적 실천의 물적?이론적 토대로 삼아 자본/권력의 공간생산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차이의 공간화 속에서 진정한 타자의 정치학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도달하는 길일 것이다.
《신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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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Spatialization of Difference and the Politics of Others
Jun, Bong-Chul
This paper examines how the spatialization of difference by power develops and how others are produced and represented, focusing on the politics of others. Under the influence of Marx's historical materialism and positivistic social science, space has been depoliticized and ignored. Historicism overdevelops a historical contextualization of social life and social theory, actively submerging and marginalizing the spatial imagination. In the middle of hegemonic discourses on historicism, a few theorists, such as Foucault, have foregrounded space discourses. According to Foucault, space is fundamental in any exercise of power and is produced, governed and controlled by power. As Foucault shows through the history of madness and the advent of modern bio-power, space, knowledge, and power are closely linked. Power/knowledge spatializes difference in order to exclude others.
Space is political and ideological because power/capital practices the politics of others by differentiating and controlling space. Power/capital abolishes critical distance and represses the self-representation of others by politicizing and dominating space. But Space is not only the site of control but also the site of struggle. The construction of the liberated space, in which others as subalterns can self-represent the otherness in the colonized space, involves a struggle to demystify the spatiality of space produced and reproduced by power, to consolidate a revolutionary spatial consciousness through counter-memory. Such struggle will be a way to overcome the politics of others.
Key words: Foucault, politics of others, spatialization of difference
이름: 전봉철
소속: 신라대학교
주소: 부산시 사상구 괘법동 산 1번지
Tel: (051) 428-6285
Email: bcjun77@hotmail.com
원고접수일: 2004년 5월 15일 게재여부 판정일: 2004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