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73)

토요일 오전에 결혼식에 갔다가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 2006)의 역자를 만났다. 바로 물어본 것은 책의 근간 여부였는데, 벌써 깔렸다는 것이었다, 이번주에 말이다(알라딘의 새로나온 책 코너는 언제나 뒷북친다). 몇달 전 근간 소식을 접하고 고대하던 책이었던 만큼 제일 먼저 꼽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이미지를 띄우는 기능이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이 페이퍼는 언제 완결될지 알 수 없다).

 

 

 

 

한 차례 날려먹고 다시 쓴다. 하지만 조금 짧게. 어쨌든 가라타니 고진(1941- )은 현재 비평가로서 일본 최강이며 그런 만큼 최우량의 퀄리티를 보증한다. 신간 또한 예외가 아닐 거라고 믿어봄 직하다. 책의 표제가 된 글은 이미 <문학동네>(2004년 겨울호)에 '근대문학이 종말'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어 국내에서도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그걸 포함하고 있는 고진의 최신간 비평집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며 일어판은 작년 11월에 출간됐다. 그런데 불과 5개월 만에 국역본이 출간된 것이니까 이런 유형의 책에 관한 한국의 출판관행에 견주어 이례적이며 파격적이다. 그 '스피드'에 있어서 거의 일본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자와 출판사의 '순발력'이 놀라울 뿐(역자는 이미 고진의 비평집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2004)를 옮긴 바 있는 '전문가'이다).  

 

일어본의 부제는 '가라타니 고진의 현재'이고, '가라타니 고진 사상, 총결산과 새로운 전개'라는 광고문구가 큼지막하게 달려 있다. 그의 <일본근대 문학의 기원>이 '대외적인' 출세작이었으므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계기로 '총결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래저래 합당하다. 그 종언 이후의 새로운 전개(신전개)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은가? 

 

 

 

 

두번째 책은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아카넷, 2006)이다.  흔히 신랄한 독설가이자 <인간과 초인> 같은 희곡 작가로 잘 알려진 버나드 쇼이지만, 사회주의 사상서까지 쓴 줄은 미처 몰랐었다. '이상주의, 점진주의, 의회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주의 이념으로 영국 노동당의 정치노선을 대변한다는 것이 페이비어니즘인데, 쇼는 그 핵심멤버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참고가 될 만한 칼럼의 일부를 옮겨오면 이렇다. 김성이 교수(이화여대, 사회복지학)의 국민일보 칼럼(05. 12. 14)이었다.

 

 

 

 

-근세 영국의 사회보장제도는 베버리지 보고서에서 기인한다. 베버리지는 “나는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적 조건하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다” 라는 이념으로 영국 사회보장에 기초가 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베버리지 보고서를 기초로 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는 영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설립되게 되었다. 이베버리지에게 영향을 준 것은 영국의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페이비언 협회의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버리지는 청년기 때 토인비홀에서 불우이웃을 위한 사랑실천 운동을 했으며,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여 자본주의의 자유시장체제와 사회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페이비언 협회는 1884년 영국에서 소수의 지식인에 의해 설립되어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단체로 발전되었다. 페이비언(Fabian)이란 한니발 대군을 격파한 로마 장군 파비우스(Fabius)에서 기인한다. 그는 카르타고 전쟁에서 접전을 피하고 꾸물거린다고 로마 시민으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기를 포착해서 한니발을 격퇴하여 로마를 구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페이비언주의의 기본 이념은 점진적 사회개혁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페이비언 협회는 사회개혁의 네 가지 원칙을 강조한다. 첫째, 민주적이어야 한다. 모든 국민이 사회개혁에 대하여 대응할 준비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둘째, 점진적이어야 한다. 개혁의 속도가 사회혼란을 야기시켜서는 안 된다. 셋째, 도덕적이어야 한다. 부도덕한 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더욱 도덕적이어야 한다. 넷째,그 어떤 개혁도 입헌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페이비언 협회는 침투와 설득이라는 전략으로서 사회개혁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설득의 대상으로 삼았다. 페이비언 협회의 노력 결과 런던의회가 개최되었고 구빈활동에 개혁을 가져와 영국 복지국가의 기본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복지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복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의 개념이 조화로운 박애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뉴라이트운동은 모든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존중해야 하며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해치는 어떠한 장애물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맞서 싸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싸움은 설득과 관용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뉴라이트의 정치이념이 '페이비언 사회주의'와 조화를 이루는 것인지는 의문이지만(어찌됐든 사회주의 아닌가!), 그리고 현재의 영국이 '복지국가'의 모델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페이비언 사회주의 유래와 내용은 그러하다고 한다. 쇼의 책은 그 이념적 정수를 짚어내고 있는 책이고. 버나드 쇼의 신간들 가운데에서는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이너북, 2005)을 바그너의 원작 <니벨룽의 반지>(책과소금, 2005)와 함께 읽어보는 게 그간의 희망사항이었는데,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추가해야 될 모양이다. 덧붙여, 지난번에 자유주의 관련서들을 짚어보았던 김에 이번에는 사회주의 관련서 몇 권의 이미지도 띄워둔다.   

 

 

 

 

세번째 책은 지구상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던 나라, 그리고는 현실 사회주의를 지난 세기에 끝장낸 나라 러시아의 경제사를 다룬 따찌야나 찌모쉬나의 <러시아 경제사>(한길사, 2006)이다. 다루는 범위는 방대해서 고대 러시아부터 푸틴(뿌찐) 시대까지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총2부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기술되어 있다. 제1부은 고대부터 1917년 10월 혁명 이전까지의 시기인데, 기존 연구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부분들-고대와 중세의 러시아 경제-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좀더 상세히 알 수 있다. 제2부는 10월 혁명부터 뿌찐 시대 초기까지의 경제개혁을 다루고 있는데, 기존의 책들과는 시각이 전혀 새로운 뿐만 아니라, 1990년대의 시장경제 체제개혁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워낙에 이 분야의 책들이 드문지라 따로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 경제발전사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정치, 사회 등 폭넓은 범위에 걸쳐 풍부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교양서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하니까 두루 읽어보심이 어떠할까? 참고로, 저명한 경제사학자 알렉 노브의 <소련경제사>(창비, 1998)는 이미 오래전에 출간된 바 있다. 나란히 꽂아둠이 마땅하다.  

 

 

 

 

네번째 책은 알코올 소비 세계 1위국인 러시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테마의 책이기도 한데(러시아의 술 얘기는 <굿모닝 러시아> 참조),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장 메종디외의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알코올>(정신의서가, 2006)이다. 부제는 '사랑의 이야기'.(아마 러시아판이었다면, '알코올 중독 이야기' 정도가 부제로 어울림직하다.) 내용은 제목 대로라면,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알코올이 무슨 역할을 할까, 정도를 기대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알코올 중독이라고 말하는 알코올 의존증과 남성성·여성성의 관련성을 살펴본다"고.

"오랫동안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을 치료해 온 지은이가 만난 남녀 알코올 의존증 환자들의 사례를 분석하여 술의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사랑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벗겨낸다. 이 책은 알코올 의존증에 대한 흔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알코올 의존자들은 어쩌다가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을까? 이는 알코올 중독의 원인이 술뿐이 아닌 심리적인 데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은이가 찾아낸 심리적 원인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고정된 타입을 강요하는 사회문화이다. 남성은 과음으로 남성성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반대로 여성은 여성스러움이 강요하는 결함을 은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술 없이는 이성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남녀의 생리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사람은 관계를 가깝게 만들기 위해 술을 마시는가, 아니면 술은 역설적으로 관계를 갈라놓는 벽인가의 흥미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이런 내용 소개보다 좀더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의 한 소제목인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술을 마셔요, 내 사랑" 같은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러브샷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러브샷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고 싶지만/있지만,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람을 두고서 술을 마신다. 엄청. 그게 알코올 중독의 흔한 시작 아닌가?(하다못해 황태자 주지훈도 한번 실연을 하고 소주를 하루에 3-4병씩 한달을 퍼마셨다지 않은가?) 그리고는 이렇게 주절거리곤 한다: "당신과 나, 알코올과 함께, 죽는 날까지". 결론? "알코올이냐 여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알코올이라면 황태자급에 해당하는 이들이 작가, 예술가들이다. 이 주당들의 면면들은 <알코올과 예술가>(마음산책, 2002), <작가와 알코올 중독>(랜덤하우스중앙, 2005) 등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문학작품으로는 '미라보 다리'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알코올>(문학과지성사, 2001)이 가장 유명하다. 이 시집 연구서로는 황현산 교수의 <얼굴 없는 희망>(문학과지성사, 1990)이 있다.  

 

 

 

 

네번째 책은 미국의 전설적인 얼터너티브 록밴드 '너바나'의 리드싱어였던 커트 코베인(1967-1994)의 평전으로, 음악/연예 전문기자라는 찰스 크로스의 <커트 코베인 평전>(이룸, 2006)이다. 27살에 자살을 선택한 코베인은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이를 정서적 바탕으로 하여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 냉소 등을 펑크록에 담아 표출했다고.

 

 

 

 

사실 나는 너바나의 음악이나 커트 코베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그의 아내였던 커트니 러브를 먼저 알았을 정도이다).

미국의 현대 팝음악에 대한 나의 취향은 '도어즈'의 짐 모리슨에서 R.E.M 정도까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에 '전설'로 남은 리더이고, 그룹인지라('너바나'는 물론 불교에서 해탈을 뜻하는 '니르바나'를 영어식으로 읽어준 것이다. 그런데, 밴드 이름이 '니르바나'라고 하면 왜 촌스럽게 들릴까?) 이런저런 귀동냥으로부터 면제될 수 없었다. 또,코베인의 개인사 못지 않게 당대의 문화사에 대한 식견도 얻을 수 있을 거 같아 이 평전에 눈길이 간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작가 김훈의 첫 소설집 <강산무진>(문학동네, 2006)이다. 여러 일간지에서 이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는데, 여기서는 문화일보(06. 04. 17)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온다.

-김훈(58). 1995년에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를 펴낸 직후 바로 문단의 큰 나무가 돼버린 사나이. 장편소설 <칼의 노래>(2001년), <현의 노래>(2004년)로 우리말 문학의 아름다움을 한껏 쳐든 언어의 수공업자. 그가 첫 중·단편 소설집 ‘강산무진(江山無盡)’을 펴냈다. 8편의 작품을 모은 책의 제목은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의 산수화 이름에서 따왔다. 책이 담고 있는 풍경은 이승과 저승, 생시와 꿈의 경계를 넘어 무한히 펼쳐져 있는 그림의 강산을 닮았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삶의 불우(不憂)와 슬픔을 늙어가는 육신에 혼자서 짊어지고 막막한 시선으로 이 세상과 그 너머의 풍경을 응시한다. 이들은 자신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도 ‘밥벌이’를 신경써야 하는 당대의 일상을 아픈 심신으로 힘껏 견디면서도 끝내 신음소리를 흘리지 않는다.(*김훈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쓴다. 에세이스트들의 천형처럼.)

-지난 13일 저녁, 경기 일산에 있는 작가의 집 주변의 한 맥주전문점에서 만났을 때 그는 가능하면 소설 이야기를 피하려 했다. 출판사 측은 그가 소설집 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를 싫다고 해서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문예지 ‘문학동네’의 신수정 주간과 류보선, 서영채, 이문재, 황종연씨 등 편집위원들, 그리고 일산파 젊은 문인들인 김연수, 김중혁씨 등이 ‘김훈 선생’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며 소설동네의 경사를 축하했다.

-첫 소설집을 낸 작가는 이날 미치도록 부끄럽다고 되뇌었다. 그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억지로 말을 시키자, 이번 소설집이 ‘나’의 이야기에 머무르고 ‘너’ ‘우리’에게까지 넓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더듬더듬 말을 꺼내놨다. 자전거 레이서로서 시속 30㎞까지 달릴 수 있다고 자랑을 할 때와는 판이한, 어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나는 편협한 글밖에 못 써요. 개인만 가지고 쓰잖아요. 시대 전체를 보고 역사의 구조를 통찰하는 황석영, 조정래 같은 작가도 있는데, 나는 그게 안 보이니…. 그래도 내 팔자가 있기 때문에 나는 내 글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의 ‘내 글’은 아내의 죽음을 맞거나(‘화장’) 자신이 암에 걸려 죽음 앞에 있으며(표제작 ‘강산무진’)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뒀고(‘고향의 그림자’) 하청업체 사장을 하다가 부도후 택시운전을 하는(‘배웅’) 인물들이 주변 사람들의 삶과 부딪치며 빚어내는 내면 풍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신 주간은 책 뒤의 해설을 통해 그의 소설이 고대(‘빗살무늬의 토기’)와 역사(‘칼의 노래’ ‘현의 노래’)를 거쳐 3각 꼭짓점처럼 당대의 현실에 이르렀다고 묘파했다.

-탁월한 문학기자로,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소설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때, 많은 이들이 그의 문체로 소설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나도 그렇다.) 삶에 깃든 슬픔과 허무를 아름다움으로 한껏 밀어올리는 그의 문체 미학이 저잣거리의 잡사를 다루는 소설에 들어올 수 없다고 여겼던 것. 그는 그러나 발품을 팔아 얻어낸 삶의 거래 현황을 소설 속에서 치밀하게 묘사, 현장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우리 삶의 남루한 구석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독자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안기고 있다.(*아직 확언할 수 없다.) 신 주간은 이를 “새로운 형태의 서정을 획득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주변의 높은 평가와 달리 작가 스스로는 “산문보다 소설 쓰는 게 훨씬 어렵고, 짧은 구조에 완결성을 가져야 하는 단편 쓰기는 참 힘들다”며 “소설을 업으로 삼지 못하고 아마추어로 영원히 머물 것”이라며 사뭇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내 생각도 그렇다.) 그는 그러면서도 소설을 쓰는 일은 모국어와 몸을 힘껏 써야 한다는 점에서 연애하는 것과 같다며 소년처럼 설레는 듯한 미소를 보여주기도 했다. 소설에서 ‘몸’의 미학에 천착해 온 그는 집필할 때 연필로 쓰는 것을 고집하는 까닭이 어깨로부터 팔에 전해지는 힘을 느끼는 게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내가 김훈에게서 가장 높이 사는 것은 이 '소년'의 '연필로 쓰기'이다. 소설의 내용은 상관없다. 거기에 비하면 사소하다. 작가 김훈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앞으로의 창작 계획을 묻자 그는 요즘 병자호란, 한일합방 등 우리 역사의 치욕이 어떻게 된 것인지 책과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인간의 삶은 영광과 자존, 찬란함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소설이 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게 내 일이지요.”(*그 역사의 치욕이 그의 치욕과 어떻게 상관적인지는 다른 자리에서 지적한 바 있다. 김훈에 대한 나의 신뢰는 간혹 위악적인 그의 포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관성'에 대한 그의 집요한 몰입에 놓인다. 그는 '열심히' 자신의 길을 갈 것이며, 자신의/역사의 치욕을 되뇌일 것이다. 나는 그가 훌륭한 소설가가 아니어도/못 되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06. 04. 15-17.

P.S. 마감후에 눈에 띈 책은 (드디어 출간된) 미하일 바흐친의 <말의 미학>(길, 2006). 원제는 '언어적 창조의 미학'인데, 보기 이해하기 쉬운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바흐친 사후에 편집된 책으로 기억되는데(러시아판 1979년), 초기 바흐친의 주요 이론적 관심과 주장들을 모아놓은 그의 주저이다. 국내에서 한풀 꺾인 듯한 바흐친 '열기'에 다시 기름을 붓는 격이 될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모처럼 출간된 '무게' 있는 저서(580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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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70)

지난번에 마저 다루지 못한 예술 관련서들을 호출하도록 한다. 신간이라고 나왔으면 무대인사 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 라는 건 혼자 생각이고 미리 안면을 터두어야 머리속에 오래 담고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호출한 책들은 (혼자 생각에) '내놓은' 책들이다.

 

 

 

 

첫번째로 내놓을 책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음악, 회화, 그리고 예술>(동문선, 2006)이다. 원제는 'Deleuze on Music, Painting and the Arts'(2003)이다. 들뢰즈 전문가의 한 사람인 보그는(알라딘에서는 '로널드보그'로 검색된다) 우리에게 <들뢰즈와 가타리>(새길, 1995)로 이미 소개된 바 있는 저자인데, 이후에 이번에 나온 책을 포함하여 <들뢰즈와 문학(Deleuze on Literature)>(2003), <들뢰즈와 시네마(Deleuze on Cinema)>(2003) 등을 한꺼번에 출간했다(이름을 붙이자면 보그의 '들뢰즈와 예술 3부작'쯤 되겠다. 보그의 최신간은 'Deleuze's Wake'[2004]이다). 얼마전에 이 세 권 중에서 'Deleuze on Music, Painting and the Arts'의 원서를 마지막으로 구했었는데, 이번에 번역본이 나와준 것(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이미 '들뢰즈의 미학'을 주제로 한 <사하라>(산해, 2006)도 얼마전 출간된 바 있고 해서 바야흐로 들뢰즈의 미학과 예술론에 대한 읽을 거리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느낌이 든다(나는 들뢰즈의 철학이 '예술철학'과 '실험철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예술가/실험가 철학'). '들뢰즈와 음악'에 대한 연구서들도 최근에 더 나오고 있지만(가령 뷰캐넌 등의 책) 내가 더 관심을 갖는 쪽은 영화나 미술이고, 특히 미술 방면으론 콜브룩의 입문서 <질 들뢰즈>(태학사, 2004)를 먼저 참조하신 후에 <감각의 논리>(민음사, 1995)를 옆에 끼고서 보그의 신간을 읽으시면 되겠다(내가 그럴 계획이라는 얘기이지만).   

역자는 '사공일'씨인데 관료출신의 경제학자와는 무관한 동명이인이고 후기를 보니 <들뢰즈와 가타리>(세종출판사, 2004)의 저자 정형철 교수의 제자이며 번역 용어는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출판사가 흠없는 책들을 좀체로 내지 않는 동문선이라 미심쩍긴 하지만, 초면의 반가움을 더 증폭시켜줄 수 있는 책이기를 기대한다(대충 훑어본 바로는 기대 이상의 번역이다).  

동문선 얘기가 나온 김에 그동안 모른 체했던 책을 한 권 언급하자면, 프랑스 저명한 신화학자 조르주 뒤메질(1898-1986)의 대담짐 <대담>(동문선, 2006)이 출간됐다. 대담자는 학술전문 저널리스트인 디디에 에리봉. 에리봉의 대담집으론 레비스트로스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와 곰브리치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민음사, 1997)이 이미 출간돼 있다(에리봉의 푸코의 전기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1995)의 저자이기도 하다. 푸코는 뒤메질의 제자이다). 내 기억에(푸코의 전기를 읽다보면 종종 언급된다) 뒤메질은 인도신화의 최고 권위자였는데(레비스트로스가 북미신화의 권위자였듯이), 자전적 <대담>이 그의 책으론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책이다. 그런 책들이 어디 한둘이랴만.

 

 

 

 

두번째로 짚어볼 책은 서성록 교수의 <한국 현대회화의 발자취>(문예출판사, 2006)이다. 한국 미술과 미술계에 문외한인지라 저자나 이번 저서가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저명한 미술평론가 오광수 교수와 함께 <우리 미술 100년>(현암사, 2005)을 출간한 바 있는 중견이다. 현대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오광수 교수의 <한국 현대미술사>(열화당, 2004)와 같이 읽어봄 직하겠다. 그런 미술사 공부의 연장선상에서 요즘 우리 젊은 화가들의 작업을 둘러보고 싶다면, <한국의 젊은 화가들>(다빈지기프트, 2006)에 눈길을 주어보시길.

두툼한 분량은 아니지만, '45명과의 인터뷰'란 부제대로 에누리 없이 "한국의 젊은 미술가 45명의 삶과 철학 그리고 예술 이야기를 대표작과 함께 수록"한 책이다. 소개를 더 옮겨오자면, 책은 "45인의 작가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여섯 개 항목의 질문을 통해,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살펴보았다. 나아가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해 보고자 했다. 동시대 젊은 미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나 큐레이팅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할 목적으로 씌어진 책." 그러니까, 눈요기와 귀동냥을 위한 책이다.

  

 

 

 

세번째 찍어둘 책은 <옥스포드 세계영화사>(열린책들, 2006) '보급판'. 실상 양장본 책은 작년에 나왔었지만, 도서관을 위한 '그림의 떡'이었고, 이번에 나온 보급판은 나름대로 '저렴한' 가격이기에 장서용으로라도 서가에 꽂아둘 만하다. 굳이 소개가 필요없는 책이지만, "전세계 80명 이상의 영화학자와 영화평론가들이 함께 만든 영화의 역사에 관한 백과사전. 1000쪽에 이르는 페이지와 1만 개의 색인 목록이 말해주듯 '세계 영화사'가 다루어야 할 항목들을 빠짐없이 수록했다"는 점에서 소장가치는 충분하다. 단, (나처럼) 데이비드 보드웰/크리스틴 톰슨의 <세계영화사>(시각과언어, 2000)를 이미 갖고 있는 경우에는 약간 망설여지기도 하겠다. 이런 경우엔 주머니 사정에 맡겨두면 되겠다. 국내 버전으론 김성태/임정택의 <세계영화사 강의>(연세대출판부, 2001)도 있다. 1000쪽이나 되는 영화사를 관람하기엔 시간이 부족한 독자들에게 적합해 보인다.  

 

 

 

 

<옥스포드 세계영화사>는 "현대 영화이론의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책이면서도 전체적인 시각의 균형을 잘 유지해 특정 학파의 이론을 중심으로 씌어진 기존의 영화사 책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지역적으로도 유럽과 미국뿐 아니라 아프리카, 인도, 라틴 아메리카 등까지 아우르며 고르게 안배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에 대한 소개가 빠진 부분이 약간 아쉽다."(한국의 세계영화사의 바깥이다!) 그 아쉬움을 달래줄 책들이 자료집들을 포함해서 최근에 계속 나오고 있다(중요한 건 이런 영화사들이 해외에도 소개되는 일이겠다). 이런 분야를  '쌈박하게' 정리해줄 분이 주변에 없는 게 아쉽다.   

 

 

 

 

덧붙여 한국영화의 현재를 점검해주는 책들로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의 '영화와 시선' 시리즈의 신간들도 최근에 출간됐다. <공동경비구역 JSA>(삼인, 2002)로 시작된 이 시리즈의 10번째 책은 역시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새물결, 2006)이고, 같이 나온 9번째 책은 <살인의 추억>(새물결, 2006)이다. 이 시리즈의 강점은 한 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깊이있는 읽기를 시도한다는 데 있는데, 한편으론 우리 '영화담론'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넓이'에 주목하고픈 독자라면 <2006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작가, 2006)에 눈길을 돌려 마땅하다.

 

 

 

 

"2005년 한 해 동안 국내에 개봉된 영화들 가운데 34편의 작품을 선정하고, 각 영화에 대한 평론을 덧붙였다. 영화인, 영화 이론가, 영화평론가, 각 분야의 문화 예술 전문가, 출판.편집인으로 구성된 105명의 추천 위원을 위촉하여, 한국 영화 16편과 외국 영화 15편, 독립(단편) 영화 3편을 '2006 오늘의 영화'로 선정했다. 2006년 선정된 작품들 중 한국 영화 부문에서는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17회)가, 외국영화 부문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15회)가, 독립(단편) 영화 부문에서는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14회)가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추천을 받은 감독과 영화를 목록으로 작성하여 부록으로 수록하고, 추천 위원들의 '선정 이유'도 함께 실었다"는 책.

 



 

 

네번째로 꼽아보는 책은 마틴 켐프의 <레오나르도>(을유문화사, 2006)이다. 2004년에 나온 책이 이렇듯 재빨리 번역/소개되는 것은 아무래도 <다빈치 코드>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지만, 저자가 옥스포드대학의 미술사학과 교수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시회 등도 기획했다고 하니까 허술한 책은 절대로 아니겠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이 어떻게 예술과 과학을 탄생시켰으며,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같은 걸작들에 숨겨진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또 레오나르도의 다양한 이력을 추적함으로써, 그의 꿈과 힘 있는 패트론(후원자)과의 관계, 신과 인간, 자연에 대한 관점들을 풀어낸다." 아래 사진은 켐프 교수.

한 외국저널의 서평이 간명하다: "레오나르도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마틴 켐프는 창조적이면서 지적인 삶을 살았던 레오나르도에 대하여 간결하면서도 통합적으로 서술하였다. 마틴 켐프는 르네상스 거장의 경력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받은 임무, 그를 유혹했던 돈, 그가 섬긴 궁전에서의 임무, 잘 알려진 간결한 그림들이 갖고 있는 여담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그의 접근을 매혹적이고 계몽적이며 읽기도 쉽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로널드 보그의 책과의 수미상관을 고려하여 전방위 문필가 장석주의 비평서 <들뢰즈, 카프카, 김훈>(작가정신, 2006)을 고른다. 소개에 따르면, 저자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 개의 고원>이 제시하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문학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저자의 사유는 '공무도하가'를 비롯해 이상, 김소월, 서정주, 김춘수, 이성복, 신경림, 황지우, 황동규 등과 이문과, 김훈 등 한국작가들의 시와 소설, 그리고 카프카를 종횡무진 아우른다. 지은이는 문학이 '나'와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현실과 역사, 더불어 그 내부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사유체계를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단면들―타자, 시선, 욕망, 개인, 가족, 국가, 질병, 순수, 유목주의, 술, 스타일―을 통해 그 전체적인 국면을 들여다본다."

 

 

 

 

과거  출판사 편집/경영까지도 했었던 저자를 '비평가'가 아닌 '문필가'로 칭한 것은 비평가는 물론 시인, 소설가에다 에세이스트까지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전 5권의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시공사, 2000)이 그의 재기작이었다. 의외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소설창작론인 <소설>(들녘, 2002)로 돼 있다. 입소문이 난 책인가?). 아마도 그는 손으로 꼽을 만한 다산성을 자랑하는바, 이제까지 40여 권에 육박하는 책들을 출간했다. 물론 나의 독서력은 저자의 집필력을 따라가지 못하며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그의 책은 시집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문학과지성사, 1996)와 산문집 <절망에 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프리미엄북스, 1997) 등이 아니었나 싶다. 여유가 생기면, 작년에 나온 <풍경의 탄생 - 한국시의 이미지 계보학을 위해>(인디북, 2005) 등을 읽어보고 싶다. 물론 그 전에 <들뢰즈, 카프카, 김훈>을 손에 들겠지만...

06. 03. 30.

 

 

 

 

P.S. 덧붙이자면, 아주 오랜만에 장 필립 뚜생(1957- )의 소설이 번역돼 나왔다. 그의 2002년 신작 <사랑하기>(현대문학, 2006)이 그것이다(<텔레비전>(문학사상사, 1997) 이후 거의 10년만이다). 역자는 이번에도 그의 소설 <욕조>(세계사, 1991)를 소개했던 이재룡 교수이고, 분량은 180쪽 정도니까 역시나 경쾌한 중편 정도이다. 소개에 따르면, 뚜생은 작년 2005년에 <도망치기>란 작품으로 프랑스 메디치상을 수상했다. 아래는 뚜생과 <사랑하기>의 불어본.

줄거리인즉, "디자이너인 '마리'와 마리의 애인인 '나'는 패션쇼를 위해 일본으로 간다. 마리는 내가 키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짓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경미한 지진이 일어난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지진이 마리와 나의 관계를 어긋낼 것이란 예감을 한다"는 식이며, "노골적 성 행위를 뜻하는 원제목(Faire l'amour)에서 알 수 있듯, '육체적 충동과 욕망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사랑의 파괴적 에너지가 허무를 낳고 소멸과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차갑고 건조한 문체로 묘사했다. 소설의 배경은 도쿄이다. 후기 누보로망의 기수로 명성을 떨친 작가 장 필립 뚜생은 일본 문단으로부터 '프랑스 스타일의 선(禪)문학'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는 자주 일본을 방문하고,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물렀는데, 2002년 발표한 <사랑하기>는 일본 체류시의 기억을 되살려 쓴 작품이다. (메디치상 수상작인 <도망치기>는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 아래 사진은 일역본. 덧붙이자면, 사랑도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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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호모루덴스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과 계승
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Le masque et vertige)
로제 카이와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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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와 더불어 놀이하는 인간에 대한 고전적 명저로 알려져 있는 것이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이다. 카이와의 이 책은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여 확대 재해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카이와는 우선 호이징가가 "호모 루덴스"에서 내렸던 "놀이"의 정의를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호이징가는 놀이란 "허구적인 것으로 일상생활 밖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이하는 자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자유로운 행위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떠한 물질적 이익도 효용도 없는 행위로서, 명확하게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행해지며, 주어진 규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데, 기꺼이 자신을 신비로 둘러싸거나 아니면 가장(假裝)을 통해 평상시의 세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집단 관계를 생활 속에 생기게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카이와는 일단 호이징가의 정의에 동의하면서도 "놀이활동은 필연적으로 비밀과 신비를 희생시키면서 행해진다는 것을 덧붙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비밀을 드러내고, 공표하며, 어떻게 보면 비밀을 소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놀이 활동은 비밀로부터 비밀의 성질 자체를 빼앗아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비밀, 가면, 의복이 성사(聖事)로서의 역할을 한 때는,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제도라고 단언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카이와는 호이징가의 놀이에 대한 정의에 대해 일정하게 동의하면서 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놀이와 제도(혹은 성사)를 명백하게 구분하는 근거로 비밀과 신비의 희생유무를 들고 있다. 즉, 비밀과 신비로 포장된 활동은 놀이가 아니란 말이다.

카이와의 호이징가에 대한 비판은 거듭된다. 호이징가의 정의에 의하면 놀이 가운데 물질적 이해가 포함되는 것은 제외되어 버리는데, 내기와 우연놀이(도박, 카지노, 경마, 복권 등)이 제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어째서 카이와는 호이징가의 놀이에 대한 정의에 대해 저렇게 비판하고 있으며, 흡사한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일까?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을 읽으며 나는 그런 의문을 품었다.

이 책의 1부는 "놀이의 정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해명하는데 쓰이고 있다. 호이징가는 1933년 라이덴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행한 주제 강연에서 '문화에 있어서 놀이와 진지함의 경계에 대하여' 를 다뤘다. 그리고 1938년 "중세의 가을"과 더불어 그를 대표하는 저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호모 루덴스"를 통해 놀이의 본질적 성질에 대해 정의내리려 하였고, 한편으로 예술과 철학,시와 법률제도,전쟁 의례의 몇몇 측면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모든 표현 속에 내재되어 있는 놀이의 역할을 설명하고자 했다. 로제 카이와는 그런 호이징가의 노력과 학문적 성취에 대해 찬사를 보내면서 동시에 그의 정의에서 미진한 부분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카이와에 의하면 놀이는 크게 네 가지 범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이들 놀이는 다시 놀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두 가지 의식으로 나뉜다. 놀이의 네 가지 분류는 "경쟁, 우연, 모의, 현기증"이라는 역할 가운데 어느 것이 좀더 중요한 속성인가로 구분되는데, 우선 대등한 입장에서 출발하여 서로의 능력을 통해 승부가 결정되는 경쟁 놀이ㅡ 아곤(ex. 스포츠 등)과 우연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우연 놀이 - 알레아(ex. 주사위, 제비뽑기 등), 정해진 약속에 의해 몇 가지 허구적 모의(역할 놀이)에 의한 놀이 - 미미크리(ex. 소꼽놀이 등), 일시적으로 지각의 안정을 파괴하여 기분좋은 패닉 상태를 일으키는 놀이 - 일링크스(ex. 놀이기구 등)으로 구분한다.

카이와는 놀이의 잠재된 의식으로 "파이디아와 루두스"를 말한다. 파이디아는 놀이 본능의 자발적 속성으로 흥분하고, 소란을 피우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와 본능이라 할 수 있다. 파이디아에 약속(규칙)이나 기술, 도구가 등장하면서 최초의 놀이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에 비해 루두스는 이런 원초적인 욕망에 새로운 임의의 장애물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의적으로 설정된 장애를 극복하고, 해결하면서 맛보는 즐거움으로 파이디아를 길들이고,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루두스는 경쟁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장애들과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카이와는 아곤, 알레아, 미미크리, 일링크스와 파이디아, 루두스의 결합관계를 통해 이들 놀이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루두스와 아곤, 알레아, 미미크리는 서로 결합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나, 파이디아와 알레아, 루두스와 일링크스는 서로 결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파이디아의 속성인 흥분하고, 소란을 피우고 싶은 욕망이므로 수동적인 기다림, 근본적으로는 침묵의 게임인 알레아(우연놀이- 화투는 우연놀이가 아닌가?)와 결합할 수 없고, 설정된 (지적이든 육체적이든)장애를 극복하는 묘미를 즐기는 루두스의 속성은 순수한 흥분의 결정체인 일링크스(유원지 놀이기구)와 결합할 수 없다. 카이와는 루두스의 현대적 변용, 중요한 속성의 한 부분으로 아곤의 경쟁심리가 작용한다면서 완(玩)의 정신을 말한다.

완하면 먼저 완상(玩賞), 완구(玩具)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때의 완은 애호가들의 수집, 손수 무엇인가를 만들어 보는 일 등을 말한다. 완의 취미, 즉 루두스는 일정하게 아곤과 결합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이들과의 경쟁이 루두스의 지속에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놀이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일종의 제도를 만들어내고, 문화현상(놀이의 사회성)으로 파악된다. 놀이의 특징은 "자유롭고, 분리되었으며, 확정되지 않았고, 비생산적이며, 규칙이 있는, 허구적인 활동"으로 규칙과 허구는 서로를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카이와가 놀이를 통해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놀이의 타락"이다. 놀이는 종종 일상생활(놀이와 반대되는), 현실에 오염되면서 타락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경쟁놀이인 아곤에서 놀이를 유지하고, 즐기기 위한 규칙, 심판과 판정이 무시될 때, 경쟁에 내재된 선천적 난폭성이 드러나게 된다. 우연놀이인 알레아는 놀이를 즐기는 이가 더이상 운명의 뜻에 따를 의사가 없거나 미리 판결을 알고자 하거나(사기 도박) 은혜를 받고 싶은 유혹(미신)에 따를 때 생겨난다. 미미크리(모의 놀이, 역할 놀이)의 타락은 모의된 역할을 현재의 자신과 구분하지 못해 생겨나는 광기로, 현실 세계와 꿈의 세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카이와는 이를 현대 세계, 인류의 현실과 연결시킨다. 아곤의 타락할 때, 인류는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라는 최초(야만)의 상황으로 복귀하게 되고, 알레아의 타락은 지금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로또복권 열풍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미미크리의 타락은 개인적으로는 광기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부자되기 열풍이 될 때는 성취되지 못한 열망을 해소하기 위한 막가파로 등장하기도 한다. 동시에 이것이 국가적인 권위와 결합할 때는 제복이 하나의 가면이 되어 권위의 표시로 등장한다.

앞서 호이징가가 내린 놀이의 정의와 카이와가 내리고 있는 놀이의 정의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이 두 학자가 살아온 시간의 차이, 역사적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카이와의 호이징가 비판에서 놀이는 비밀과 신비를 소비하고, 해소하는, 심지어는 희생시켜야 한다고 말한 까닭,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나치즘)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호이징가는 1872년에 태어나 1945년에 세상을 떠난 학자로 그의 학문적 틀은 고전 시대의 그것과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가 "호모루덴스"를 집필한 것은 분명 독일에서 발호하고 있는 나치즘에 대한 비판이지만, 그의 이런 비판은 그가 "호모 루덴스"를 발표한 이듬 해인 1939년 나치에 의해 네덜란드(호이징가는 네덜란드 학자임)가 점령당하고, 가택구금된 상태에서 종전을 눈앞에 두고 사망한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다소 무력해보인다. 그의 학문적 뿌리는 고전시대의 그것(전통)과 연결되어 놀이의 본질을 설파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종교, 신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상업적인 놀이(프로스포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백안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호이징가는 고전적 지식인의 면모를 지닌 학자였다.

그에 비해 카이와는 나치즘이 신비와 비밀스런 제의적 놀이(ex. 히틀러 유겐트, 야영놀이, 청소년 스포츠 제전 등)을 통해 놀이의 본질을 어떻게 오염시키고, 변질시켰는가를 살펴볼 시간적 여유(역사를 냉정하게 관찰해볼 물리적, 역사적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놀이와 인간은 1959년에 발표되었다). 그런 까닭에 카이와는 놀이의 정의에 있어 신비와 비밀스런 가장(假裝)과 성사(聖事)로서의 역할을 할 때는 놀이가 아니라 제도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카이와는 놀이의 타락이 현대사회의 타락과 연결되어 제한없는 전쟁, 광기의 사회, 집단의 개인에 대한 공격(린치, 테러)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것이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이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를 비판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이를 확대계승한 형태로 나타난 이유다.

호이징가는 놀 수 있다는 것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놀이는 물리법칙(현실)을 벗어난 이상의 의미를 지닌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즉, 본래 인간에게 있어 삶의 의미는 노동으로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고, 놀이를 통해 즐거움을 얻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중세의 인간은 (많은 인류학자, 생태학자들이 예시하고 있듯, 필요한 만큼만 생산해서 공유하는)결코 현대의 인간처럼 많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며, 노동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공통된 찬미는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결합하여 인간에게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노동을 강요하며 생겨난 일종의 문화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건강한 놀이를 회복할 때 인류는 건강해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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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는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가 던진 질문이면서, 자크 오몽 등이 지은 영화학 입문서 <영화미학>의 4장(영화와 언어) 2절 제목이기도 하다. 1983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프랑스에서 나온 대표적인 입문서로 보이는데, 이미 지난 94년에 강한섭 교수에 의해 <영화학, 어떻게 할 것인가>(열린책들)란 제목으로 국역본이 나오기도 했다(현재는 절판됐다). 그때 후배들과 영화학 세미나를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우리말로 읽기에 난감했던 기억은 없다. 'code'를 '기호'라고 옮긴 것이 다소 낯설었을 뿐. 이 책의 새로운 국역본이 <영화미학>(동문선, 2003)이며 역자 후기에 따르면, 1994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을 옮긴 것이다(들뢰즈에 관한 내용이 추가된 걸로 돼 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들뢰즈의 <시네마1,2>는 <영화미학>의 초판 이후에 출간됐다).

 

 

 

 

자크 오몽의 책으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영화학자 4인의 공저로 돼 있는 이 '교과서' 말고도 또다른 공저 <영화분석의 패러다임>(현대미학사, 1999)과 단독저서인 <영화감독들의 영화이론>(동문선, 2004)이 번역/소개돼 있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오몽은 한국 여성과 결혼했으며 여럿의 한국인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런 인연들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프랑스에서 대표적인 한국영화의 옹호자이다(특히 홍상수를 지지한다고). 이른바 '한국통'인 것이다. 해서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소개되어 나쁠 건 없어 보인다(개인적으론 그의 '교과서적인' 책들에 큰 감흥을 느끼진 않지만, 영화학도들이 적극 추천하는 <몽타주 에이젠슈테인>의 영역본까지 구해두었다) .

이런 '좋은 얘기'들로 화기애애하게 책 이야기를 이어나갔으면 좋겠지만, 굳이 이런 자리를 빌어 오몽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영화미학>의 번역에 다소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정색을 하기로 하자. 오래전 책이라 책꽂이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영화미학>보다는 <영화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는 게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판단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란 절이며 여기서는 213-4쪽 두 페이지를 따라가본다. 내가 읽은 것은 국역본 외에 2004년(5판)에 나온 영역본 (텍사스대학출판부)이다. 이 영역본은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1983년의 초판본을 옮긴 것이고(해서 본문에서는 들뢰즈에 대한 언급이 딱 한번 등장한다), 참고문헌만이 업데이트 돼 있다. 덧붙여 말해두자면, '영화와 언어'를 다룬 4장은 공저자 중 미셸 마리가 집필했다.

영화학사에 관련한 책을 한번이라도 들춰본 독자라면 '영화와 언어'라는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그것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섯 가지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여러 영화학자들이 '영화언어'에 대해 언급하고 자기주장을 펼쳤지만, 이 문제에 관한한 권위자는 단연 메츠이다. 일단 그 자신이 언어학자였던 메츠는 영화학에서 다소 무분별하게, 혹은 언어학적 엄밀성을 결여한 채 사용되고 있던 영화-언어의 문제에 메스를 가하면서 이 문제를 새롭게 정식화한다.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라는 물음은 그러한 메츠의 문제의식을 집약해주는 물음이다.

문제는 불어에서의 '랑그'와 '언어(랑가주)'의 구별을 영어나 한국어는 안 갖고 있다는 것. 해서, 불어권에서 유의미하게 제기되고 정리된 문제가 영어나 한국어에서는 다소 현학적인 논쟁으로 비쳐질 수 있다. 불어의 '랑그'나 '랑가주'나 일반적으론 '언어'라고 통칭되기 때문이다(마치 '개'나 '소'나, 처럼). 둘 사이의 구별을 영어에서는 '언어체계(language system)'와 '언어(language)'라는 말로 표시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국어 대응어가 다소 어색한 조합이지만 '랑그'와 '언어'이다.

그런 사전지식을 배경으로 다음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크리스티앙 메츠의 연구 방법의 출발점은 이런 명제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어법으로 가정되지만 곧 문법적으로는 언어로서 연구된다." 무슨 뜻인가? 문제는 제목에서 던진 '랑그'와 '언어'의 대립이 이 두 페이지에서는 실종되고 대신에 '언어'와 '어법'으로 대치된 데 있다(이건 좀 이상한 일인데, 214쪽부터는 '랑그'란 말이 다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이 두 페이지만 어떤 미숙한 조력자가 번역을 따로 했던 것일까?)

어려운 내용이 아니므로 불어본과 별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영어본에서 이 대목을 옮겨오면 이렇다: "By contrast, the point of departure for Christian Metz's work is based on a very different assumption: the cinema is postulated as a language, yet it is immediately studied as a verbal language system."(142쪽) 우리말로 옮기면, "크리스티앙 메츠의 작업은 이와는 좀 다른 가정에서 출발한다. 영화가 언어(=랑가주)로 간주되면서도 실제로는 랑그로서 연구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언어학에 좀 '약한' 이들이 언어와 랑그의 차이를 무시한 채 '영화언어'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짐작에 국역본은 (랑그도 아닌) '랑가주'를 '어법'으로 옮기고, '랑그'를 '언어'로 옮겼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교통정리가 되는 건지?

이어지는 문장이 더더욱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겠다: "메츠는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이 되는 삼분법(언어와 말의 총체로서의 어법)에서 착상하여 영화 언어를 언어를 규정하는 특징들에 대립시키면서 영화언어의 규범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이 되는 삼분법이 '언어의 총체로서의 어법'이라는 내용을 어떤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지, 혹은 인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3분법이니까 우선 세 항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인바, 번역문에서 그 세 항은 '언어' '말' '어법'이다. 짐작에 그 세 항은 원문에서 '랑그'와 '파롤', 그리고 '랑가주'이며, 이것은 영어로는 'verbal language system'(=랑그), 'speech-act'(=파롤), 'language'(=언어)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법'이란 것이 그보다 더 큰 '언어'와 '말'의 합, 그러니까 <어법=언어+말>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의문을 따져보는 건 한가한 시간에 하고, 일단 진도를 나가자면 소쉬르가 제시한 3분법이란 <언어=랑그+파롤>을 말한다(이건 나의 '잡학'과는 정말로 무관한 지극히 기본적인 내용이다. 모든 언어학 개론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서, 인용문장을 다시 옮기면, "언어를 랑그와 파롤의 총합으로 이해하는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적인 3분법에 의거하여, 메츠는 영화언어를 랑그의 특징들과 대조시킴으로써 영화언어의 지위를 자세히 해명하고 있다."

언어체계로서의 랑그란 말이 생소한 분이 있다면, '이중분절체계로서의 언어'라는 걸 떠올리시면 된다. '이중분절'이란 건 우리가 쓰는 자연어(한국어, 불어, 영어 등)에서 각 단어가 형태소로 분절되고, 또 그 형태소는 더 작은 단위의 음운으로 분절되는 식의 현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절의 가능조건은 '형태소'나 '음운' 같은 단위들의 존재이다(기호학의 가장 기본적인 작업은 그러한 단위들을 분리/추출하는 것이다). 영화의 쇼트나 프레임이 그러한 단위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영화언어'의 지위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메츠의 입장은 영화언어가 그런 이중분절체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 즉 랑그가 아니라는 것이다(에코는 보다 강경하게 랑그로서의 영화언어를 주장한다).

뒤따르는 부연설명: "이런 대조적인 측면은 본질적으로 1964년 <코뮈니카시옹> 제4호에 처음으로 실렸고 <영화의미론> 제1권에 수록된 "영화, 언어인가 어법인가?"라는 논문에서 알 수 있다. 이 잡지에는 또한 그후 10년간 기호학 연구의 프로그램에 뛰어든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의 여러 가지 요소"라는 논문도 실려 있다." 즉, <코뮤니카시옹>이란 잡지의 제4호에 매우 중요한 논문 두 편이 실려 있는 것. 메츠의 책 <영화의미론>의 원제는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시론> 정도가 되며, 두 권짜리이다. 그 중 1권이 <영화언어(Film Language)>로 영역돼 있다. 바르트의 책은 흔히 <기호학 요강>으로 알려진 책이고, <영도의 에크리뛰르/ 기호학의 원리>(동인, 1994)란 책에 포함돼 있다(역시나 번역은 추천할 만하지 않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도 어렵지만). 그리고 "기호학 연구 프로그램에 뛰어든" 게 아니라 "기호학 연구 프로그램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기호학이 본격화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기호학은 다른 어법들의 언어학적 착상의 분석방법의 일반화로 규정될 수 있다." 젠장, 오역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어가 왜 이 모양인가? 영어로는 "Semiology may be summarized as the application of the process of analysis originating in linguistics to other languages."이다. 이런 대목은 기호학의 기본 상식이기에 알아둘 필요가 있다. "기호학은 언어학의 분석절차를 다른 언어들에 적용하기로 정리될 수 있다." 이때 다른 '언어들'이란 '영화' '회화' '음악' '사진' 등등을 말한다. 그리고 물론 '언어학'은 우리가 쓰는 자연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지식을 뜻한다. 이게 모델이 되는 것이고, 그걸 다른 분야(언어)들에 적용해본다는 것.

그리고 이 시기(1964-1970) 연구의 주종은 내러티브 연구, 즉 서사학이었다. 브레몽, 주네트, 토도로프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브레몽의 단행본 저작은 번역된바 없으며, 토도로프의 경우엔 <구조시학>(문학과지성사, 1987)이나 <산문의 시학>(문예출판사, 1992; 예림기획, 2003) 이 대표적인 초기 연구서이다. 서사학 관련서들은 차고 넘치지만, 영화와 관련하여 네 권만 언급하자면, 앙드레 고드로 외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서정남의 <영화서사학>(생각의나무, 2003), 그리고 채트먼의 책 두 권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처음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서정남의 <영화서사학>이 안전할 듯하며, 서사학 전반에 대한 개관으로는 박진의 <서사학과 텍스트이론>(중앙M&B)을 참조하는 게 간편하겠다(신간인 이 책은 나도 아직 실물을 구경하지 못했다). 사실 나로선 현단계 서사학에 별 흥미를 못 느끼지만, 유리 로트만의 플롯이론이나 폴 리쾨르의 철학이 접맥되고 정신분석적 서사론이 더 보강된다면(피터 브룩스가 대표적이다) 서사학도 업그레이드 될 가능성은 있다.

 

 

 

 

하여간에 당시의 그런 분위기 때문에 메츠도 영화에서의 서술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렇게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의미론>은 우선 영화 서술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1971년에 출간된 <언어와 영화>에서는 루이 옐름슬레우의 <언어이론의 전제 원리>(1943)의 개념들을 직접 사용하여 언어학적 착상의 방법론적 급진화가 강조되고 있다." 거명된 옐름슬레우의 책은 <랑가쥬 이론 서설>(2000)이란 제목으로 다름아닌 동문선에서 출간된 책이다. <영화미학>의 역자는 들춰보지도 않았다는 얘기(물론 그 번역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지만). 옐름슬레우 계보의 적통을 잇고 있는 구조주의 언어학자는 쥘리앙 그레마스이다. 메츠의 <영화언어>가 아직 번역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 못지 않게 기이한 것은 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이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는 것. 말도 안되는 번역서가 나오는 것보다는 그 편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은 들지만 인문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좀 허전한 일이다(참고로, <구조의미론>의 러시아어본은 작년에 나왔으며, 메츠의 경우 논문들은 번역돼 있지만 단행본은 출간되지 않았다).  

어쨌든 <언어와 영화>에서 메츠의 영화기호학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는 얘기였다. 그 다음은? "언어학적 유산이 <상상적 기호표기>(1977)에서 더욱더 결정적인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완성된 것은 속임수와 관객에 대한 연구로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충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번역은 '속임수'이다. 영역은 "It was only by Metz's gradual progression from working on film devices to working on the spectator that linguistic heritage was further complemented by the psychoanalytic illumination that gained more and more acceptance after his Imaginary Signifier(1974)." 다시 옮기면, "언어학적 유산이 정신분석적 조명(통찰)에 의해 더욱 보완되는 것은 메츠의 관심이 영화적 장치들에서 관객으로 점차 옮겨감으로써이다. 그러한 (영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조명은 그의 <상상적 기표>(1974) 이후에 더욱 광범위하게 수용된다."

이제 마지막 문단이다: "사실 기호학은 연구 분야마다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통일된 도표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학 분야에서는 어떤 동질성이 인정될 수 있지만 그 반면에 루이 마랭의 회화기호학과 장 자크 나티에즈의 음악기호학은 이후에 폭넓게 다시 연구된 최초의 기준이 되는 것만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기호학과 공통성이 있다." 뜻은 이렇다. 뒤에 '기호학'이란 이름만 갖다 붙이면, '회화기호학'이니 '음악기호학'이니 '영화기호학'이니 하는 게 되지만, 이들간의 공통성, 동질성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 그저 "최초의 기준이 되는 것"(?), 즉 이러한 연구들이 처음 참조하는 문헌들(가령 소쉬르의 <일반기호학 강의>나 바르트의 <기호학 요강> 같은)이나 공통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기호학 패밀리'에는 속할 테지만, 얼굴이 제각각이고 성격도 제각각이며 하는 짓도 제각각이라는 얘기다. 

영화언어와 랑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어서 계속된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 존중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인터넷 클릭만 몇 번 해도 대략 필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비상식적인 번역문'들이 계속 양산된다는 건 미스테리한 일이다(이젠 입아픈 일이다). 얼마만큼의 계몽이 우리에겐 더 필요한 것일까?..

05. 07. 30.

P.S. 기호학 참고문헌들을 좀 나열하다가 지워버렸다. 사실 '너무 많은' 기호학 서적들을 나열하는 것 자체는 별의미가 없을 듯하다(그냥 '기호학'을 검색어로 집어넣으면 된다). 다만, 우리에게 좀 드물게 소개된 것이 음악기호학인데, 이에 대해서는 서우석 교수 등이 쓴 <음악의 연구>(문학과지성사, 2000)에 실린 논문들을 참조할 수 있다(또 건축기호학과 관련하여 <현대건축과 기호학의 대화>(시공문화사, 2000)란 책도 있는데, 기호학에 문외한인 건축학 교수들이 옮긴 관계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언어학/기호학에 대한 무지가 '부실한 번역'을 낳을지언정 '부실한 건축'을 낳는 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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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행복나침반 > 차이의 공간화와 타자의 정치학

차이의 공간화와 타자의 정치학

전 봉 철

*이 논문은 2002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차원은 시간, 공간 및 사회(또는 사회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인간 존재들로 구성된 사회적 존재 또한 시?공간적으로 구성되고 재구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간, 공간 및 사회는 인간과 서로 변증법적으로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이론은 칸트의 계기적(nacheinander) 관계나 마르크스의 역사발전이라는 용어가 시사하듯이, 주로 사회의 존재와 생성을 시간적 맥락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발생되는 역학관계를 통해서 세계를 파악해 왔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실증주의 사회과학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역사적인 과정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역사의 발전 과정 속에서 설명하였고, 그 결과 공간은 철저하게 탈정치화되고 무시되어 왔다. 특히 후기 베르그송주의의 영향은 “시간을 풍요롭고 생기있고 변증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공간은 죽은 것, 고정된 것, 비변증법적인 것, 정지된 것으로 간주하는”(Foucault, "Questions on Geography" 70) 경향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이처럼 시간을 특권화해 온 근대 이론의 이면에는 의미와 행위를 사회적 존재의 시간적 구성과 시간적 경험으로 환원시켜 합리화하는 이른바 역사주의의 논리가 깔려 있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에드워드 소자(Edward W. Soja)가 지적하듯이 비록 해방적 통찰력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사회생활과 사회이론을 지나치게 역사적으로 맥락화함으로써 공간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억제하고 주변화해 왔으며, 아울러 사회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공간적 해석을 덮어버림으로써 공간을 시간에 맹목적으로 종속시키는 우를 범해 왔다.(15)

한편 모더니스트들은 공간을 외적 환경으로 보지 않고 의식의 산물―이를테면 인지적 직관―로 환원시켜 공간을 추방함으로써 제국주의의 확장에 위협이 되는 지방주의, 지역주의 및 민족주의를 차단하고자 하였다(Soja 35). 역사주의에 매몰된 근대 이론은 시간에 대한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정치적 전략과 맞물려 탈공간화를 가속화하였고, 심지어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acs)는 『역사와 계급의식』(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에서 공간에 대한 의식 자체를 계급투쟁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국가와 자본이 조작해낸 허위의식이자 사물화의 징후로 간주함으로써 반공간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냈다(89-90). 그 결과 사회적 현상을 공간적 개념이나 공간적 현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른바 공간화(spatialization) 담론은 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서구의 지식사에 있어서 역사주의의 패권적 담론이 견고한 성을 구축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공간성에 침묵해 온 역사주의의 과오를 간파하여 역사와 역사적 서사를 공간화하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간성을 사회적 산물이자 동시에 사회생활을 구성하는 원동력으로 인식하면서 공간 담론이 오늘날 이론의 중심 무대로 전경화하는 데 유용한 출발점을 제공한 두 이론가는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이다. 특히 이들은 공간의 생산을 역사발전과 동일한 문제설정에 뿌리를 둔 일련의 사회적 과정으로 간주함으로써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공간적 선회를 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공간이 모든 형태의 공동체적 삶에 있어서 근본이 되며 인간 존재의 공간적 질서가 공간의 사회적 생산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점을 간파한 이론가는 르페브르였다. 르페브르가 『자본주의의 생존』(The Survival of Capitalism)에서 지적하듯이, 사회적으로 생산된 공간은 지배적인 생산관계가 재생산되는 곳으로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파편화되고 등질화되고 계층적으로 구조화된다(21).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우리의 삶과 시간 및 역사의 침식이 일어나는 공간은 그 자체로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서로 환원될 수 없고 서로 겹칠 수 없는 장소들로 대표되는 일련의 관계 속에 살고 있다. 지식, 권력, 공간성의 관계를 일관되게 탐구해 온 푸코는 「타자의 공간에 대하여」("Of Other Spaces")에서 이러한 장소와 관계의 이질적 공간을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고 부른다(23). 이질적이면서 상관적인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은 르페브르가 경험공간(l'espace vecu)이라고 부르는 공간으로 사회적으로 창출된 공간성이며 사회적 실천의 아비투스(habitus)이다(Soja 18).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은 타자의 공간을 창출하며 이러한 공간은 생산되고 지배되고 통제된다.
본 논문은 푸코가 말하는 소위 타자의 공간에서 권력의 공간화와 차이의 공간화가 어떻게 전개되며 타자가 어떻게 생산?재현되는가를 살펴보고, 나아가 타자가 타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진정한 탈주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푸코는 자신의 저작에서 위치(position), 대치(displacement), 장소(site), 장(field), 영토(territory), 영역(domain), 토양(soil), 지평(horizon), 군도(archipelago), 지정학(geopolitics), 지역(region), 지방(province) 등과 같은 공간 메타포를 즐겨 구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들은 군사전략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가령, ‘대치’는 군대용어로 병력의 교체를 의미하고, ‘지역’은 군대에서 쓰는 명령에서 유래되었으며, ‘장’은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며, ‘지방’은 군사적으로 정복된 영토라는 뜻을 갖는다. 푸코가 이처럼 군사전략적인 공간 메타포를 즐겨 쓰는 이유는 이러한 메타포가 전략적이며 전투적인 사고를 드러낼 뿐 아니라 공간담론을 정치적 실천의 문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Questions on Geography" 68-70)
이처럼 공간은 정치와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된 과학적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정치적이고 전략적이었다. 르페브르 역시 「공간의 정치성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Politics of Space")에서 공간이 등질적이고 가치중립적이며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주장한다.

공간이 그 내용물에 대해 중립적이고 무관심하다는 인상을 풍긴다면, 따라서 ‘순전히’ 형식적이라는 느낌, 즉 이성적 추상의 축도라는 느낌을 준다면, 그것은 바로 공간이 점유되어 이용되어 왔고 이미 지나온 과정들(그 궤적들이 경관 속에 반드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의 중심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공간은 역사적?자연적 요소로부터 형성되고 주조되어 왔지만, 이것은 정치적 과정이었다. 공간은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이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이데올로기로 가득 찬 산물이다. (31)

공간이 정치적이라면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문제가 개입된다. 푸코는 「권력의 시선」("The Eye of Power")에서 “거창한 지정학적 전략에서부터 작게는 작은 삶의 공간을 지배하는 전술에 이르기까지 공간들에 대한 기술은 곧 권력들의 역사가 될 것”(149)이라고 밝히고 있다. 공간이 모든 권력의 행사에 있어서 근본적이라면, 공간화에는 동일자와 타자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의해 작동하는 권력의 논리가 필연적으로 작용한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듯이, 동일자와 타자의 이분법적 구도에 의해 공간적 배제의 과정을 거친 것은 광인이었다.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이나 셰익스피어의 극에 나오는 광적인 인물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고상하면서도 어리석은 기사, 15세기 독일의『바보들의 배』에 관한 우화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르네상스 시대에 광기는 사회적으로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이성 너머에 있는 의미의 영역―즉 의미있는 비이성―으로서 일정량의 진리를 공유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푸코의 말을 빌면, “모든 광기는 광기를 판단하고 지배하는 자신의 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이성은 이성의 보잘것없는 진리를 발견하게 해주는 광기를 담지하고 있었다”(Gutting 72에서 재인용). 이처럼 광기는 마치 리어왕과 그의 어릿광대(fools)가 서로 말을 건네듯이 이성과 대화하는, 즉 이성과 함께 하는 세계의 일부였다. 따라서 르네상스 시대에 광인은 사회적 공간으로부터 축출당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이성과 광기의 이러한 관계에 커다란 단절을 초래한 것은 고전주의 시대인 17세기 중엽에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대감금(Great Confinement)이라는 이른바 ‘차이의 공간화’였다. 그런데 이 무렵 나병원을 정신병원으로 개조하고 광기를 질병으로 파악하는 생리적 개념이 강조됨으로써 광인들은 국가 통제하의 감금시설이라는 제도적 공간으로 축출되었는데, 여기에는 단순히 광인들만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거지, 범죄자, 병자, 극빈자, 성문란자, 신성모독자, 심지어는 반항적인 아이들과 무책임한 부모들까지 광인으로 분류되어 수용되었다. 이 시기의 광기의 특징은 감금된 자들이 게으름이라는 경제적 태만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감금이 완전고용의 시기에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실업의 시기에는 게으른 자들을 재흡수하여 선동과 폭동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는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동기를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Madness and Civilization 51).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또 다른 특징은 광기가 더 이상 이성의 대화 상대가 아니라 비이성의 변종으로 완전히 타자화되었다는 점이다. 물리적 감금은 광기가 이성적 삶으로부터 개념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의미하며, 광인에 대한 배제는 이성과 광기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어떠한 공간도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하였다. 또한 광기가 모든 형태의 비이성과 마찬가지로 게으름의 한 종류로서 타자화된 것은 광기가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 윤리의식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광기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자 행정적 통제를 요구하는 대상으로 지각되었다.
푸코가 근대라고 부르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영국의 윌리엄 튜크(William Tuke)와 프랑스의 필리프 피넬(Philippe Pinel)이 주도한 정신의학 개혁운동으로 인하여 광기를 게으른 질병이라기보다는 정신질환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싹트면서 광인을 범죄자와 극빈자의 무리로부터 분리해내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산업의 번창으로 인하여 인력과 예비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극빈자를 더 이상 감금해둘 수 없다는 자본주의의 경제논리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노동력의 일부가 될 수 없는 광인, 죄수 및 환자는 여전히 감금의 필요가 있었고, 특히 광인은 정신의학 개혁운동의 영향으로 별도의 감금체계를 필요로 했는데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수용소였다.
수용소에 감금된 광인들은 정신의학적 담론의 권위 아래 놓여진 환자가 되면서 쇠사슬에서 풀려나 육체적으로 해방되었고 보다 인간적인 환경 하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푸코에 의하면, 이는 광인들의 정신을 장악하여 보다 은밀하게 조정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광기에 대한 공공연한 공포는 책임감에 대한 숨막히는 고통으로 대체되었다. 두려움은 더 이상 감옥문 밖에서는 만연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의식의 봉인 아래에서 휘몰아쳤다. . . .수용소는 더 이상 광인의 죄를 처벌하지 않았다. . . .그러나 그 이상을 행했는데, 그것은 죄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 . . 이러한 죄로 인해서 광인들은 . . .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처벌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인정함으로써, 즉 자신의 죄를 인식함으로써 광인은 자신을 자유롭고 책임있는 주체로 인식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이성을 회복하였다. (Madness and Civilization 247)

광인들은 책임감이라는 깊은 심리적 시련을 겪게 됨으로써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는 해방될 수 없었는데, 이러한 도덕적 고문은 물리적 구속보다는 인간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훨씬 기만적이고 지배적이었다.
수용소라는 제도적 공간에서 의사는 아버지이자 심판관이자 법으로 신격화되면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의사의 의학적 실천―즉 치료―은 곧 질서, 권위, 처벌에 대한 오래된 의식의 수행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의사는 가장의 권위에 초점을 둔 가족-자녀 관계, 즉각적인 정의에 초점을 둔 위반-처벌 관계, 사회적?도덕적 질서에 초점을 둔 광기-무질서 관계 등을 통해서 치료에 대한 권력을 행사했는데(Madness and Civilization 274), 이는 수용소가 부르주아 사회의 권위주의적 구조와 가치관을 반영하는 거울임을 그대로 드러낸다.
푸코에 의하면, 의사는 광기에 대한 과학적 지식 때문에 수용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공간 내에서의 도덕적 권위 때문에 지배하며, 우리가 정신의학적 치료라고 부르는 것도 18세기 말에 이루어진 일종의 도덕적 전술이었다(Madness and Civilization 276). 나아가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도 도덕적 지배의 기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환자를 수용소 밖에서 치료하고 수세기만에 처음으로 광인 자신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되는 대화를 도입함으로써 수용소 심리를 결정적으로 파괴했지만, 환자를 정신분석자의 권력에 복종시킴으로써 권위주의적인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즉 프로이트는 수용소 내에서의 도덕적 지배의 도구인 의사의 권위를 유지하고 심지어는 강화하기까지 했는데, 결과적으로 정신분석은 광인이 말을 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그들이 말한 것을 실제로 듣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근대 심리학과 정신의학 및 정신분석은 광인에게 해방을 가져다 준 것 같지만, 그것은 반어적인 의미에서의 해방이며 사실은 거대한 도덕적 감금이나 다름없었다(Madness and Civilization 278). 이는 곧 차이의 공간화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넘어 의식의 공간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이 사상의 통제를 통해 신체를 복종시키고자 함에 따라 의식은 이제 권력이라는 글자가 새겨지는 표면이 된 것이다.
한편,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사회의 기본적 가치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하여 침묵시키고 통제하기 위해 광기를 공간화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총체적 전략과 그 효과가 어떻게 작용해 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푸코는 거대구조나 통치계급 속에 안주하는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권력이 아니라 생산적인 권력, 이를테면 여러 세력들을 방해하고 복종케 하거나 분쇄하기에 열중하기보다는 여러 세력들을 낳아서 기르고 조종하는 데 몰두하는 권력의 출현을 알리는 역사상의 단절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권력양식을 생체제어 권력(bio-power)이라고 부른다. 생체제어 권력의 대표적인 유형은 “광기/제정신, 위험/무해, 정상/비정상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구분과 이름붙이기라는 이중적 방식에 따라 작동하는”(Discipline and Punish 199) 이른바 훈육적 권력이다.
훈육적 권력은 훈육이 제도적 공간에 제대로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 공간배분의 기술, 행위의 통제, 훈련, 전술 등과 같은 네 가지 조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공간배분의 기술은 능률과 통제를 위해 공간을 적절하게 분할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공장의 작업장을 인쇄, 조판, 염색 등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도록―또한 감시가 용이하도록―분할하거나 군인과 젊은이를 더 잘 통제하기 위해 병영이나 기숙사를 적절하게 배치하는 기술이었다. 행위의 통제는 노동자나 재소자의 일과를 엄격하게 짜놓아 신체적 움직임까지 통제하는 것이었다. 훈련은 군대와 학교 등에서 신체와 훈육의 지속을 위한 정치적 기술을 지탱하는 강력한 도구였다. 전술―즉 힘의 조합―은 개인을 신속하게 동원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네 가지 조건은 신체공간을 지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이는 사회생활의 모든 공간을 더욱더 집요하게 감시하고 식민화하여 훈육사회의 밑거름이 되는 온순한 신체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수도원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17세기말 페스트의 창궐로 인하여 공간적 분리와 주민 감시의 방법이 필요했던 도시에서 발전된 이러한 훈육기술은 곧 사회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결과 근대사회라는 공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군도를 형성하였다.
권력과 훈육의 관계가 사회생활의 공간성에 새겨진 근대사회에 있어서 권력은 지식과 담합하여 배제, 감금, 감시, 대상화 등의 실천과 기술체계를 통하여 정신의학, 사회학, 범죄학 등과 같은 분과학문들을 양산?배치하고 이러한 학문들은 역으로 권력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세련되게 다듬고 확산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신체공간을 정치적 전략의 거점으로 인식한 새로운 정치해부학인 신체정치학은 다양한 훈육기술을 발전시켰다. 감옥이나 요양원 또는 병원 등과 같은 공간은 개인을 관찰하고 교정기술을 시험하고 사회적 통제에 활용할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실험실의 기능을 하였다. 다수의 인간(특히 주변부 집단)을 특정한 공간 속에 질서정연하게 배치하는 일련의 과정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차이와 배제의 논리였다. 바꾸어 말하면 권력의 공간화는 바로 차이의 공간화, 즉 성, 계급, 인종 등의 차이에 기반한 공간적 분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하위집단을 타자화하고 주변화하는 차이의 공간화는 교묘한 미시권력이 지식뿐만 아니라 자본과 결탁함에 따라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심지어는 무의식의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
하트(Michael Hardt)와 네그리(Antonio Negri)에 의하면, 초기 근대 사회 이론가들은 시민적 질서라는 제한된 내적 공간을 자연의 질서라는 외적 공간과 대립되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근대화를 외부 공간의 내재화, 즉 자연공간의 문명화로 간주하였다(187). 또한 근대적 개인에게는 집이 사적 공간인 반면 공적인 것은 자신의 외부였으며, 이 외부는 정치에 적합한 장소로 여기서 개인의 행동은 타자 앞에 노출되었다. 그러나 탈근대화 과정에서 공적 공간은 점점 사유화되어 왔다. 시민광장과 같은 공적 공간에 초점을 맞추던 도시의 풍경은 오늘날 쇼핑몰, 고속도로, 타워펠리스 같은 고립된 공간 등으로 바뀌고 있다. 기 드보르(Guy Debord)가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부르는 탈근대 사회에서 개인은 이제 항상 타자의 시선 아래, 즉 감시카메라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되었고,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이 보장되던 공적 공간은 사이버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내부와 외부,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경계가 흐려진다. 일례로 전지구적 자본주의에는 외부가 없다. 세계 전체가 시장인 것이다. 푸코의 원형감옥이 근대권력의 지표였듯이, 세계시장은 제국 권력의 지표이다. 이처럼 자본이 외부를 내재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것은 불균등발전과 지리적 차이였다.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은 「자본주의와 지역불균형」("Capitalism and Regional Disparities")에서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와 같은 차원에서 지역과 국가 간의 불균등발전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하면서 공간의 문제를 지역적, 국제적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했다(43). 그는 공간적 불균등이 자본축적에 필수적이라고 했는데, 이는 자본주의가 차이를 공간적으로 생산하는 주요인임을 시사한다. 차이의 생산과정, 즉 불균등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심과 주변은 자본/권력의 작동에 의해서 조절된다.
지리적 불균등발전의 기저에는 차별화와 균등화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이 있다. 즉, 자본주의는 점유공간을 과잉개발지역과 저개발지역으로 차별화하여 개발과 저개발을 병존시키거나 병행하고 때로는 동질화를 통해 차이를 감소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존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독특한 공간성을 생산해 왔다(Soja 107). 공간은 자본주의 체제의 확대에 있어서 결정적 요인이었다. 자본주의는 공간을 생산하고 점유하면서 문제점을 노출해 왔고 또 그러한 과정에서 살아남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성장의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차이, 즉 공간의 불균등발전이었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적 권력은 한편으로는 동질화 효과를 통하여 차이를 소멸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를 보다 은밀하게 내재화해왔다. 이러한 권력의 속성을 가리켜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Empire)에서 “권력의 장소는 없다―권력은 도처에 있지만 또한 어디에도 없다. 제국은 우토피아(ou-topia), 즉 사실상 무장소(non-place)이다”(190)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자본/권력의 전지구적 공간 지배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전지구적 공간의 곳곳에 스며있는 미시적인 권력은 유리한 조건을 찾아 자본을 신속히 이동시킴으로써 고용의 지역적 차별화와 노동의 공간적 분업을 초래하고 한결 수월해진 자본철수를 통해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약하고 노동자들의 조직화 역량을 통제한다. 전지구적인 공간분절화를 통해 지구의 전지역을 통제하게 된 자본/권력은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전략을 통해 다양한 스펙터클을 창출해냄으로써 비판적 거리가 소멸된 정신분열증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현란하고 파편화된 이미지로 가득 찬 도시공간의 포스트모던한 현상은 바로 자본/권력의 공간 지배 전략이 극대화된 것이며, 이는 공간의 정치학이 중요한 전략적 요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공간이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면 공간은 필연적으로 타자의 정치학이 전개되는 처소가 된다. 차이의 공간화 과정에서 여성, 유색인종, 비이성애자, 광인 등과 같은 하위집단들은 타자의 자리에서 타자화된 경험을 겪어 왔다. 그런데 타자성은 소여된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권력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담론 속에 내재하여 담론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면서 타자를 문화적으로 생산한다. 이를테면 사이드(Edward Said)가 ‘동양은 창조되었다’라고 하듯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라는 실제대상에 대한 보다 정확한 지식을 획득하려는 학문적 기획이 아니라 담론 그 자체를 통해 자신의 대상인 타자를 창조하는 담론이다. 권력은 보편적 담론의 지배를 통해 타자를 동질화하고(예컨대 동양인은 어디에서나 거의 모두 동일하다) 본질화하는(동양과 동양적 특징은 특정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변하지 않는 정체성이다) 전략을 구사한다. 지배권력은 타자화된 타자를 만들어내는 이른바 재현의 제국주의를 통해 타자에 대한 물신화된 이미지들(담론적 창조물)을 중심부에 투사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 즉 동일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재현은 필연적으로 창조의 형식인 동시에 배제의 형식이 된다. 지배권력은 이러한 재현의 정치학을 통해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공간에까지 타자의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심리적?정치적 중심화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재현(self-representation)을 위한 타자의 모든 시도를 침묵시킨다.
라캉(Jacques Lacan)이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Lemaire 151)이라고 말했듯이,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타자(the Other)와 대타자의 진리가 우리에게 말을 건다. 말하자면 상징계 속에 스며든 상상계의 위장된 모습인 무의식, 즉 대타자라고 하는 욕망은 우리에게 말을 하며 타자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무의식적 욕망은 ‘규범적’(normal) 언어 - 이를테면 권력과 법의 언어 - 의 실수나 잘못 또는 오류를 통해서 표명된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적 언어의 오류는 서로 모순되고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규범의 다른 얼굴인 광기와 분열증 또는 일탈로 나타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공간은 제임슨(Fredric Jameson)이 말하듯 역사상 전례없이 자본이 욕망과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침투하여 식민화해 버린 공간이다(Postmodernism 48-49). 이러한 공간에서 자본주의적 권력은 동일성의 논리를 내세워 타자의 일탈을 저지하면서 끊임없이 타자를 영토화한다.
“어떤 사물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다른 사물들(과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전용 행위는 이미 언제나 자기 투사(self-projection)와 동화를 수반할 뿐만 아니라 물화와 수용(expropriation)을 통한 소외도 수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Greenblatt 12에서 재인용)라는 동독의 마르크스주의자 로베르트 바이만(Robert Weimann)의 주장이 시사하듯이, 지배권력은 동일성의 전략을 통해 타자의 일탈을 저지하고 포섭하지만 종국에는 타자는 주변화되고 소외된다. 왜냐하면 지배권력은 타자를 진정한 동일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고 지배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으로 타자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공간에서 자본주의적 권력은 동일성의 전략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의 전략과 차이의 전략을 반복적으로 구사한다. 스티븐 그린블래트(Stephen Greenblatt)가 자본주의를 총체화하는 충동과 파편화하는 충동, 이를테면 총체화와 차이, 획일성과 다양성, 단일한 진리와 이질성 사이를 빠른 속도로 왕복하는 체제로 간주했듯이(5-6), 자본주의적 권력은 한편으로는 차이의 전략에 따라 경계를 만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성의 전략에 따라 경계를 허무는 역동적인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협상과 교환을 통한 조작과 조정이 수반되며, 이 과정에서 타자는 주변화되어 배제되거나 타자성을 상실한 채 지배에 예속된다. 이처럼 타자는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특히 자본주의 문화에 있어서의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에 따라 지배권력은 사회?정치적 공간(사회?정치적 담론과 텍스트)과 미적 공간(미적 담론과 텍스트)을 점유하여 양자간에 경계 만들기와 경계 허물기를 순환적으로 반복하고 때로는 새로운 사회?정치적/미적 공간을 생산함으로써 타자를 조종한다. 이러한 과정은 이른바 “일상적인 행동의 시학”(Greenblatt 8)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오늘날 이미 우리들의 일상 생활 속에 깊숙이 스며 있다.
일상적 공간과 무의식의 공간에까지 침투한 자본의 논리는 사회?정치적 공간과 미적 공간 사이에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협상과 교환을 통해 조작과 조정을 반복?강화하여 공간의 점유, 생산 및 재생산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타자로 하여금 공간적 방향감각을 상실케 함과 동시에 정신분열증적 증상을 드러내게 한다. 라캉에 의하면, 정신분열증은 주체가 말과 언어의 영역 속으로 완전히 진입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언어적 무질서, 즉 문장을 만들어내는 의미 사슬의 와해로 정의된다. 의미 사슬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 정신분열자는 아무 연관이 없는 별개의 기표 조각들만 인식할 뿐 과거, 현재, 미래를 문장으로 통합해내는 언어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라캉의 주장대로, 만일 과거, 현재, 미래를 문장으로 통합해내는 언어적 기능이 없어 고립되고 끊어지고 단절된 물질적 기표들밖에 경험하지 못한다면, 타자는 자신의 전기적 경험이나 정신적 삶의 과거, 현재, 미래도 통합해 낼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도 유지할 수 없다. 결국 타자는 마치 정신분열자처럼 시간의 연속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언제나 단절된 영원한 현재 속에서 살면서 리얼리티를 보지 못하고 가식적 껍데기나 입체적 환상, 또는 드문드문 이어지는 일련의 이미지만을 보게 된다. 포스트모던 공간에서 지배권력은 후기자본의 문화논리에 따라 정서보다는 강도(intensities), 숨겨진 깊이보다는 화려한 표면, 기의보다는 무의미한 기표를 부각시키며 때로는 이미지를 포화상태에 이를 정도로 홍수처럼 쏟아 부어 시뮐라크라의 시뮐라크라를 빚어냄으로써 정신분열증적 증상을 심화시킨다. 그 결과 타자는 분열증적 주체로 머물면서 타자성을 상실하게 된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 공간에서 시뮐라시옹이 극에 달하면 선악이나 진실과 거짓의 관점에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치가 파편화되는데, 이 단계에 이르면 인종, 계급 및 성의 차이가 완전히 소멸되어 정치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다. 보드리야르가 초정치적인(transpolitic) 세계라고 부르는 이러한 세계에서 미디어가 포화상태에 이를 정도로 과다한 메시지를 흘려보내 미디어의 내파에 이르게 되면 종속집단(또는 대중)으로서의 타자는 인종, 계급 및 성을 비롯한 모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된다(16-19). 즉 타자는 물질 덩어리처럼 사물화되어 침묵하는 다수의 일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배권력이 사회?정치적 공간과 미적 공간을 장악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이유는 알튀세르(Louis Althusser)와 라캉의 주체 이론이 시사하듯 타자의 타자성이 사회적 혹은 언어적으로 구성되며 가변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개인은 이데올로기의 호명 과정을 거쳐 주체로 구성된다(170-77). 한 개인의 주체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면, 주체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호출을 받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개인이 고정된 불변의 주체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중층결정된 환상이자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란 주체성(또는 주관성)을 차지하기 위해 무수한 주체위치들이 끊임없이 치고 받는 처소이다. 주체구성론에 의하면, 종속집단(subalterns)으로서의 타자의 주체성(또는 주관성)을 특징짓는 타자성은 난공불락의 견고한 요새가 아니라 타자성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무수한 주체위치들―이를테면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소멸될 수도 있다.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에 의하면 아이는 자신의 이상인 타자(상징계)를 자신으로 오인하는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한다(Lemaire 176-78). 따라서 주체는 사실상 타자에 의해서 구성된다. 그런데 이 타자는 언어적으로 구조화된 무의식의 형태로 존재하므로, 결국 라캉에게 주체는 언어적 또는 담론적 구성물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지배권력은 다양한 담론을 통하여 다양한 주체위치들(즉 타자들)을 생산하여 이러한 주체위치들(타자들)이 주체 속에서―엄밀히 말하면 무의식 속에서―주체성을 구성하게 한다. 결국 소외되고 배제된 종속집단인 타자들의 타자성은 지배계급이 생산해내는 무수한 타자들(주체위치들)의 끊임없는 유혹에 노출되고, 그 결과 때로는 자신들의 진정한 주체성(즉 타자성)을 올바로 재현해 내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지배권력은 특정한 재현양식을 특권화하는 제도적 공간을 장악하고 재현체계를 통제하여 재현 속에 깊숙하고도 은밀하게 내재하면서 타자성의 재현을 방해한다.
주체가 자기재현을 하지 못하는 이른바 재현의 위기 속에서 종속집단으로서의 타자가 타자성을 재현하고 새로운 형태의 저항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서 제임슨은 인식적 지도그리기의 실천을 제안한다. 인식적 지도그리기란 노동자, 흑인, 여성, 유태인 등과 같이 타자화된 특정한 사회집단이나 인종집단에 내재화되어 있는 일종의 아비투스와 같은 기억장치를 통해 후기 자본의 패권적 총체성을 읽어내면서 진정한 집단적 삶을 새롭게 재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임슨이 집단적 삶을 내세우는 것은 시뮐라크라로 충만한 포스트모던 공간 특유의 사회적?공간적 혼란으로 인하여 개별주체는 철저하게 탈중심화되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포스트모던 공간에서 개별 주체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계급의식이라는 집단적 의식을 통해 재현기능을 회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속집단으로서의 타자가 의식의 탈물화를 통해 재현기능을 회복하고자 하는 인식적 지도그리기는 종종 동종요법의 전략과 함께 사용된다. 제임슨이 언급하듯이, 독일의 설치미술가인 한스 하케(Hans Haacke)는 자신의 설치물 속에 설치공간을 교묘하게 집어넣는 수법을 통해 구겐하임 미술관을 자신의 주제와 소재의 일부로 끌어들임으로써 미술관이라는 설치공간이 그 너머의 제도적 공간의 담합자본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드러내는 일종의 인식의 지도를 그려낸다(Postmodernism 158, 409). 이 과정에서 하케는 자신의 작품 속에 뉴욕 할렘가의 부동산 소유 실태를 기록한 수백 개의 사진과 지도를 설치함으로써, 즉 이미지 그 자체를 통해 이미지를 약화시키는 동종요법의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담합자본의 실체와 미술관 소유주인 록펠러 가문의 부정 및 소외된 인종집단의 슬럼가라는 현실을 인식시켜준다.
한편, 밀러(J. Hillis Miller)는 『타자들』(Others)에서 타자성의 개념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1-2). 하나는 동일자의 변형으로 어떤 식으로든 동화되고 이해되고 전유될 수 있는 타자이며, 다른 하나는 어떤 형태로든 동일자로 바뀔 수 없는 진정한 타자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모든 타자는 완전한 타자”(22)라고 했을 때의 타자는 쉽게 전유되어 지배되고 통제될 수 없는 후자의 타자, 즉 환원불가능한 타자를 가리킨다. 전자의 타자는 권력에 의해 생산되고, 후자의 타자는 우리 내부의 타자로서 권력에 대한 저항점이자 대항전략의 출발점이 된다. 후자는 소위 푸코가 말하는 반기억(counter-memory), 즉 이전의 억압형태와 투쟁형태에 대한 일반대중의 기억을 촉진함으로써 정치적 저항의 지렛대를 제공한다.
역사란 그 역사집단이 공유하는 기억을 체계적으로 구성한 것이지만 그 기억을 구성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기억은 서사화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재구성되는데, 이때 권력의 패권적 기억은 재현의 폭력 속에서 공식적인 역사를 구성하는 반면에 타자의 억압적 기억은 파편화된 채 침묵된다. 기억은 때로는 각종 의식이나 기념비, 텍스트 및 기타 문화 유물로 재현되어 제도화되지만, 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협상의 과정이 수반된다. 기념비적 기억의 문화는 공공의 기억을 강요하고, 그 결과 기념비, 추모식, 상징물 등과 같은 기억의 장소에는 거짓된 아우라가 자리잡게 되며, 억압의 역사가 스며있는 장소나 공간에 대한 기억은 깊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표면 위를 불안정하게 떠돌게 된다. 이와 더불어 억압적 공간의 공간성은 이러한 기억의 양식들에 의해 재구성되어 목소리를 잃어간다. 이처럼 공식적인 역사에서 지워진 채 파편화되어 떠도는 대중의 기억에 목소리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 반기억의 전략이다. 따라서 반기억은 연속의 역사, 즉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공식적인 역사에 항거하여 저항적 기질을 드러내는 단절[불연속성]의 역사이자 망각의 역사이다.
반기억은 공공의 기억에 가려 단순히 징후로만 머물러 있는 대중의 경험, 즉 파편화된 기억들을 복원한다. 권력의 패권적 기억이 저지른 대대적인 조작과 전용에 맞서 반기억은 주로 신체에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신체는 주체가 타자로 구성될 때 온갖 지배의 기술이 가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의 법과 규율이 쓰여지는 신체는 과거의 경험의 오점뿐만 아니라 욕망과 결점과 오류를 드러낸다. 푸코가 계보학의 임무를 가리켜 “전적으로 역사에 의해서 각인된 신체와 역사가 그 신체를 파괴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듯이, 신체는 극복할 수 없는 갈등의 텍스트이자 사건이 각인된 표면이다(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148). 즉 신체는 저항을 구성하며 반기억을 증거한다. 이처럼 종속집단으로서의 타자가 타자성을 공고히 하는 길은 제도화된 기억들로 구성된 화석화된 역사에 맞서 지배적인 역사해석의 이면에 숨겨진 반기억의 흔적들을 발굴함으로써 그 동안 망각되었던 타자의 목소리들을 복원하는 것이다.
프랑코 렐라(Franco Rella)는 『타자의 신화』(The Myth of the Other)에서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동일자의 부정으로서 타자를 이상화했다고 하면서 변혁의 주체로서의 타자의 위상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기 때문에 타자에 지나치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한다(27-30). 그러나 동일자의 논리가 여전히 모든 공간을 장악하면서 보다 은밀하게 내재화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렐라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자가 절대선이 아니라는 렐라의 견해는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 이를테면 제3세계의 남성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에 의해 타자로 각인되었지만 가부장제적인 사회구조 하에서 자국의 여성들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고, 서구의 여성들은 남성중심주의의 타파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녔지만 백인여성과 흑인여성은 자신들이 겪는 타자화된 경험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백인여성들은 흑인여성들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했다. 여기에 또 계급의 문제가 가미되면 문제는 한층 복잡해져서 백인 여성노동자는 백인 중산층여성의 타자로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 이처럼 지배공간이 무엇이냐에 따라 타자는 달라진다. 타자의 정치학은 이와 같이 여러 겹으로 착종된 문제여서 단순히 해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분법적 구조를 지닌 지배권력을 전복하고 사회적 위계구조화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트와 네그리가 주장하듯이 차이의 복수성과 잡종성 및 문화의 국지성(locality)을 긍정하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145).


지젝(Slavoj Zizek)이 타자를 가리켜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외침』(Scream)과 같다고 말했듯이(권택영 31에서 재인용), 타자는 근본적으로 차이와 배제에 대한 저항의 외침이다. 따라서 진정한 타자의 정치학은 동일성의 논리에 사로잡힌 권력에 의해 억압된 타자(탈중심화된 주체)를 복권시켜 동일성의 세계를 전복하고자 한다. 억압된 타자의 주체성은 지배권력이 의존하고 있는 동일성의 현실의 기반 자체를 의문시하여 동일성의 세계를 탈코드화함으로써 복원된다. 타자의 정치학은 타자를 구성하는 자들(이를테면 백인, 남성, 이성애자, 지배계급, 합리주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주체)과 타자성의 구성에 있어서의 재현의 역할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재현에 작용하는 정치성을 폭로하여 제도화된 서열구조를 해체하고 단일한 담론체계의 헤게모니에 저항한다. 또한 타자의 정치학은 재현이 빠뜨리거나 배제한 현실에 주목하여 권력의 담론의 이분법적 논리를 해체할 뿐 아니라, 지배와 식민주의의 영향에 대한 주관적 경험과 지배당하고 주변화된 하위집단의 객관적 역사―즉 대항적 역사(counter-histories)―를 통해 침묵당한 타자의 역사를 복원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동일성의 주체인 타자는 보이지 않는 미시권력이 장악한 일상적 공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공간에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탈주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탈중심화되고 주변화된 타자가 타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진정한 탈주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저항과 투쟁을 공간적 실천과 연계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정치와 문화는 국가영토, 공동체 공간, 신체 공간, 사이버 공간을 차례차례 정복하고 지배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소를 완전히”(최병두 28) 말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 공간이든 정신적(또는 은유적) 공간이든 간에 끊임없이 공간을 생산하면서 식민화하기 때문이다.
차이의 공간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간은 정치적 전략의 거점으로서 자본과 권력이 지배의 그물망을 촘촘히 깔아놓은 통제의 장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공간은 또한 자본/권력의 공간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다국적 자본주의의 공간이 전지구적인 공간분절화와 공간의 지리적 차별성이 심화되고 자본/권력의 공간 지배 전략이 극대화되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맞설 수 있는 국지적인 대항전략이 필요하다. 특히 다국적 자본의 공간이 이미지 중독으로 인한 비판적 거리의 소멸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분열증적 하이퍼공간(hyperspace)이라고 한다면, 반기억의 전략을 통해 인식의 지도를 그려나감으로써 끊임없이 공간의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식민화된 공간에서 타자가 자기 재현을 통해 타자성을 간직할 수 있는 해방공간―이를테면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희망의 공간이라고 부르는 그런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본/권력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공간의 공간성을 탈신비화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혁신적인 공간의식을 공간적 실천의 물적?이론적 토대로 삼아 자본/권력의 공간생산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차이의 공간화 속에서 진정한 타자의 정치학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도달하는 길일 것이다.

《신라대》

인 용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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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Spatialization of Difference and the Politics of Others

Jun, Bong-Chul

This paper examines how the spatialization of difference by power develops and how others are produced and represented, focusing on the politics of others. Under the influence of Marx's historical materialism and positivistic social science, space has been depoliticized and ignored. Historicism overdevelops a historical contextualization of social life and social theory, actively submerging and marginalizing the spatial imagination. In the middle of hegemonic discourses on historicism, a few theorists, such as Foucault, have foregrounded space discourses. According to Foucault, space is fundamental in any exercise of power and is produced, governed and controlled by power. As Foucault shows through the history of madness and the advent of modern bio-power, space, knowledge, and power are closely linked. Power/knowledge spatializes difference in order to exclude others.
Space is political and ideological because power/capital practices the politics of others by differentiating and controlling space. Power/capital abolishes critical distance and represses the self-representation of others by politicizing and dominating space. But Space is not only the site of control but also the site of struggle. The construction of the liberated space, in which others as subalterns can self-represent the otherness in the colonized space, involves a struggle to demystify the spatiality of space produced and reproduced by power, to consolidate a revolutionary spatial consciousness through counter-memory. Such struggle will be a way to overcome the politics of others.

Key words: Foucault, politics of others, spatialization of difference


이름: 전봉철
소속: 신라대학교
주소: 부산시 사상구 괘법동 산 1번지
Tel: (051) 428-6285
Email: bcjun77@hotmail.com

원고접수일: 2004년 5월 15일 게재여부 판정일: 2004년 6월 15일


http://www.saehaneng.com/data/papers/nka_journal_2004_46_2_07_junbongchul.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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