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데리다와 예일 마피아, 그들은 무슨 짓을 한 걸까?
데리다와 예일학파 - 모더니티총서 7
페터 지마 지음, 김혜진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문예미학>의 저자로 잘 알려진 페터 지마의 이 책은 데리다의 해체론과 '예일 마피아'라 불리는 그 미국식 적용(예일학파)에 대한 가장 뛰어난 입문서로서 읽힌다. 지마는 이미 여러 저작들을 통해 문학이론 분야에서의 뛰어난 '지도 제작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왔는데, 그가 그리고 있는 해체론의 지도 또한 명쾌하고 일목요연하다. 게다가, 막힘이 없는 훌륭한 번역에도 크게 빚지고 있을 테지만(몇 군데 오타가 흠이지만), 재미있다!

물론 이 책은 대중적인 교양서는 아니다. 데리다의 몇몇 저작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만, 아직까지도 해체론은 일종의 '막가파식 무정부주의'로 치부되기도 한다. 게다가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예일학파 구성원들의 저작은 해롤드 블룸의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입문서이긴 하지만, 문학비평과 이론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독자에게는 다소 난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읽기'이론으로서의 해체론이란 게 어떤 것이고, 그것은 어떤 사상적 계보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개개 비평가들에게 어떤 식의 변주를 얻고 있는가에 대해 약간의 흥미를 갖고 따라가 본다면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

먼저, 해체론은 해체(구성)론이다. 그건 일종의 번역론이고, 언어의 이동건축술이다. 번역론으로서의 해체론은 번역불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것을 칸트미학의 어법으로 표현하자면, '예술작품은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예술작품에 대한 개념적 이해 혹은 규정은 반드시 그 잉여(나머지)를 남기게 된다는 것. 따라서 모든 이해는 불충분하며 언제나 아포리아(불가해한 곤경)에 직면하게 된다. 그 아포리아를 데리다는 윤리적인 유희의 공간으로 만들고 폴 드 만 같은 비평가는 (이해의) 마비의 장소로 지목한다. 이러한 해체론의 선구적 계보로 지마가 제시하는 것은 칸트미학과 슐레겔의 낭만주의, 청년헤겔파, 그리고 니체이다. 사실 이러한 해체론의 윤곽은 그의 주저 <문예미학>에서 이미 암시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지마는 해체론적 전략에 비교적 호의적이면서도 때론 비판의 칼날을 감추지 않는다. 그 비판은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텍스트사회학적 입장에서 도출된다. 저자는 예술작품의 미적 자율성을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사회학적 규정과 양립할 수 있음을 줄곧 논증해 왔는데, 해체론은 그러한 사회학적 규정 혹은 사회 비판(헤겔과 하버마스 계보)에 무기력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저자인 지마에게서 문예미학, 혹은 문학이론은 칸트와 헤겔 사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론과 비판이론 사이의 변증법적 지양이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지마는 이 책에서 아도르노의 문학론을 이전의 저작들에서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지마는 몇 년 전에 방한하여 국내 대학에서 특별강연을 하기도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의 독어강연을 들으며 그때 받은 인상은 그가 훤칠하면서도 소탈한 유럽 신사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인상을 다시 떠올려볼 수 있었다. 더불어 오스트리아(중부유럽의 중립국)에 있는 대학에 오래 재직하고 있으면서 독어/독일철학, 불어/프랑스철학에 동시에 정통하다는 점이 그의 중립적인(지양적인!) 문학이론을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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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칸트, 코뮤니즘을 말하다!
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고진의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번역될 것이고, 번역될 필요가 있다. 최소한 그의 책을 읽으면 독자는 좀더 똑똑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이유에서만으로도. 최근에 무하마드 알리에 관한 자전적인 영화가 헐리우드에서는 만들어진 모양인데, 고진이야말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특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가볍고 경쾌하지만, 정확하고 진지하다.

<윤리 21>은 가라타니 고진의 칸트 다시 읽기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칸트론을 의도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칸트와 대면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책은 칸트의 도덕론/윤리학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입문서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고진은 도덕이란 말을 공동체적 규범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윤리를 '자유'라는 의무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한다. 이것은 그만의 독특한 어법이며, 그에 따르면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윤리를 뜻한다. 나는 흔히 절대론적 윤리설, 형식주의적 도덕론 등으로 분류되는 칸트의 도덕론에 대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좀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고진의 시각을 통해서 칸트의 도덕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그는 칸트의 원전을 직접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 가령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는 자연세계에서의 인과율과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하는 도덕적 당위의 주체로서 인간이 가지는 자유(의지)가 어떻게 양립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 등에 대해서 글의 서두에서부터 아주 간명하게 규정/해결하고 있다.

'칸트가 말한 지상명령이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한 명령 혹은 의무에 의해 비로소 '자유'라는 차원이 나온다. 그것은 원인에 의해 규정당하는 세계로부터는 나오지 않는다. 혹은 인식의 차원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칸트는 스스로 '자유롭다'는 것, 나아가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자유로운 주체)로서 대하라', 라는 것을 보편적인 도덕 법칙으로 삼았다.'(<머리말>)

다소 길게 인용되었지만, 이것이 고진이 말하는/이해하는 칸트 도덕론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기정립은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고진은 그 명령/의무를 사르트르의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에 처해졌다'는 표현과 연관짓고 그러한 바탕에서, 마르크스를 코뮤니스트로 다시 읽어낸다(사르트르와 맑시즘의 관계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그때의 코뮤니즘이란 타자를 수단으로 하면서 또한 목적으로 대하는 사회적 관계에 근거한다. 이 코뮤니즘을 통해서 '독일 사회주의의 진정한 창시자'인 칸트와 마르크스는 만난다.

'따라서 코뮤니즘에 대해서는 임노동(노동력 상품)의 폐기가 핵심이다... 임노동의 폐기란 바로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한 말의 현실적인 형태다.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지상명령'이었다. 그것은 결코 자연사적 필연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적 경제는 영원할 것이다. 그것은 폐기하는 것은 윤리적인 개입이다. 즉 그것은 '자유'의 차원에서만 오는 것이다.'(189쪽)

내 생각에, 이 대목에 고진의 칸트와 마르크스론이 집약돼 있다. 여기서 일차적 폐기처분되는 것은 역사발전의 합법칙성 따위를 주장하는 사적 유물론이다. 고진이 보기에 칸트와 마르크스는 그런 인과율의 과학을 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특히 마르크스에게서 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무망하다. 그의 정치학은 곧 윤리학이며,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의 실천과 책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제 단계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발전은 결코 역사적 필연'이 아니다.(191쪽) 자본주의(=인과율)로부터 코뮤니즘(=자유)로의 이행은 오로지 실천적(윤리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그런 자유를 원하기는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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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곰브리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에른스트 곰브리치 외 지음, 정진국 옮김 / 민음사 / 1997년 6월
평점 :
절판


아주 오래전에 <장난감 말에 대한 명상>이란 에세이가 내가 접한 곰브리치의 유일한 글이었다. 얼마전 필요 때문에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을 찾았는데, 뜻밖에도 절판이었다. 국내에서는 <서양미술사>로 번역된 그의 <미술 이야기The Story of art>가 스테디셀러로 팔려나가고 있는 것에 견주어볼 때 의아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 책을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대신 손에 든 것이 이 책 <이미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책은 미셸 푸코의 전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디디에 에리봉과 곰브리치와의 대화이다. 그러니 보다 정확하게는 '곰브리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미술사가로서 자신의 학문적 자화상이다. 세 장으로 구성돼 있는 책의 1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그의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어린시절과 학창시절, 그리고 2차 대전시 영국 런던에서의 피난생활 등이다. 전시에 그는 BBC의 독일방송 통역원으로 일했는데, 히틀러의 사망소식을 다우닝가의 처칠에게 전달하게 한 메신저 역할을 했다고. 안정된 직장이 없던 차에 우연한 계기로 쓰게 된 <미술 이야기>는 뜻밖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청소년을 위한 미술사로 기획된 대중적인 그 책을 그의 동료들은 거의 읽지 않았다고 한다!).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로 임명된 것. 이후의 삶은 비교적 탄탄대로였다.

2장, 3장에서는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미술가만이 있을 뿐이다'란 표현으로 시작되는 <미술 이야기>에서부터 대화가 진행되면서 그의 학문적 관심과 방법에 관한 얘기들이 오고간다. 특이하게도 그는 동물행동학자인 로렌츠와 틴버겐의 영향을 언급하는데, 미술사학자로서는 유일하게 동물하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내 접근 방식은 항상 생리학적인 것입니다. 나는 항상 모든 것의 뿌리를 잡고 싶습니다.'(149쪽)(조류의 <각인행동>을 <자취>로 옮긴 것은 옥의 티이다.) 더불어서 그는 독일적 미술사의 전통을 대변했던 파노프스키와 자신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친절하게 해명하고 있는데, 예술을 어떤 시대정신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그는 끝까지 반대한다. 그가 보기에 예술은 창조적 개인의 소산이다. 포퍼주의자(Popperian)로서 그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지지하는 듯하다.

역사가로서 그는 역사가 <정확한 과학>(엄밀한 과학)이 될 수 없음을 시인한다(그런 의미에서 그의 주저가 그냥 <미술 이야기>란 제목을 달고 있는 것은 겸양이 아니다): '사실상, 나는 동료들에게 우리가 아직도 미술사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209쪽) 다만 합리적 포퍼주의자로서 그가 기대하는 것은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해 감탄하면서 예술작품을 더 잘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아는 만큼 감동받는 것인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에필로그에서의 그의 마지막 말이다. 미술사가로서 수호하려는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서유럽의 전통 문명>이라고 간단히 말한다: '미술가는 우리 문명의 대번인입니다.... 위대한 예술에서 위로를 받지 못한다면 삶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겠지요. 이런 과거의 유산과 접촉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안타갑게 생각해야겠지요. 모차르트를 들을 수 있고 벨라스케스를 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겨야 하겠지요.'(213쪽) 측은한 축이 아닌 감사하는 축에 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곰브리치를 좀 읽어야겠다!(그런데 이 책도 절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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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미술의 고고학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Beliving is seeing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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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전에 사둔 책을 불쑥 끄집어 내어 뒤적거린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원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인데, 이것은 아사 버거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를 뒤집은 것이다. 믿는 것(believing)이란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과 선입견이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인식틀이자 제도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저자 스타니젭스키는 우리가 보기(seeing) 전에 이미 작용하고 있는 믿음(beleing)들에 대해서 폭로하고자 한다.

사실 번역서의 제목인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또한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 같은 제목의 푸코의 마그리트론을 패러디한 것인데, 마그리트/푸코가 문제삼은 것 또한 이미지와 재현 사이의 불일치이기 때문이다. 그것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일치를 가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선입견이자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당수의 도판을 통해서(도판이 흑백이란 것이 좀 아쉽다) 저자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비교적 간명하다: '우리가 아는 미술은 상대저으로 최근에 나타난 현상으로,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그 무엇이다.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소용이나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 미술작품들은 미술의 여러 제도들 내로 순환하면서 비로소...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하고 그 가치가 증폭된다.'(38쪽)

이러한 주장을 저자는 논증한다기보다는 많은 사례들을 동원해 암시하고 있는데, 가령 마르셀 뒤샹이 화장실 변기를 미술 전시회의 좌대 위에 올려놓고 <샘>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변기를 미술로 바꾼 것은 미술사가들이 25,000년 전의 인물상을 박물관에 전시하여 <비너스>라 명명한 것(빌렌도르프의 비너스)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하는 대목들이 그렇다(41쪽).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보다 본격적인 본론을 아직 남겨놓고 있다. 좀더 빽빽하고 무게 있는 책이 기다려진다.

존 버거의 <이미지>(원제는 <보는 방법>)과 함께(버거의 책도 아쉽지만 흑백 도판이다) 미술에 대한 유용한 입문서인 이 책에서 저자가 도달하는 결론. '미술은 근대-지난 200년간-의 발명품이다'(38쪽) 여기서 미술을 '인간'으로 바꾸면,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도달하고 있는 결론과 동일하다. 즉, 거꾸로 말하면 이 책은 일종의 미술(개념)의 고고학인 것이다. 하여간에 그런 저자의 도발적인 문구, 혹은 곰브리치의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미술가만이 있을 뿐이다.'란 문구로 우리의 미술 교과서가 시작된다면 얼마나 멋질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미술을 배우며, 또 미술의 얼굴이 바닷물에 씻겨져 가는 걸 보며 싱긋이 미소지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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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까치글방 145
리처드 로티 / 까치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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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이 주저는 꽤 오래전에 번역된 책이지만, 그다지 많이 읽히지는 않은 듯하다(꽤 오래전에 써두었던 리뷰를 다시 옮겨오는 이유이다). 사실 로티가 철학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한 철학교수의 말을 빌면, 문학이 철학에 맞먹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우수한 장르라고 치켜세우는 '反철학자'이다. 때문에 미국 본토에서는 "전문적 철학훈련이나 철학적 지식은 부족하면서 막연히 철학이라는 것에 흥미를 표시하는" 각종 문학자나 문학 교수들간에서 더 인기가 있다고. 

굳이 분류하자면 (한때) 로티의 애독자로서 나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니 이런 식의 '뒷북치는' 리뷰가 흠이 되지는 않겠다. 좋아하는 걸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몇년 전 그의 내한 강연에도 나는 기꺼이 참석했었다). 한편, 기존 철학 패러다임의 종언을 주장하여 직업철학자 동료들의 미움을 산 로티 자신은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교수 자리를 내놓고 버지니아 대학의 인문학교수로 옮겨갔다가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걸로 안다(이젠 '비교문학자'라고 불러줘야 할까?).  

그럼, 로티의 어떤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또 통쾌하게 하는가? 전문철학자가 아닌 일개 문학도로서 이 점에 대해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제멋대로 말하자면, 그가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비판하는 있는 근대철학의 전통, 즉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이 걸어온 길은 근대의 철학적 이성이 ‘발명한’ 인간 '정신'이 '자연'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거울로서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보하면서 모든 지식의 기초나 바탕이 될 만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갈로 깔려 있는 길이다.

 

'인식론'에 정향되어 있는 그 길을 로티는 '토대주의'라고 부르고 그것을 일종의 병리적인 것으로 다룬다(로티는 자신의 철학이 ‘치료적’이라고 공표한다). 그것은 가지 않아도 될 길, 안 가면 더 좋았을 어떤 사유의 길이기에 그렇다. 이에 따라,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그 토대주의적 존재론 비판(1부), 토대주의적 인식론 비판(2부), 반토대주의적 철학관 제시(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대안적 철학, 그러니까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은 일종의 해석학으로서, 기존 철학이 누려왔던 제 1학문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한 '교화적 철학', 쉬운 말로 대화의 철학, 지혜의 철학이다.

 

이 새로운 철학, 제대로 된 철학은 다시금 과학이 아닌 우리의 일상적 삶을 철학의 중심적인 주제로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과 입장은 그 자체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서 영미철학의 주류였던 분석철학의 종말뿐만 아니라 인식론 전반, 더 나아가 전통적인 철학 전반에 대한 거부와 해체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과 논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하며, 로티는 그를 통해 철학계의 문제적인 인물이면서 중심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그의 논변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또한 일개 문학도로서는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판단은 다만 그것이 그의 문제의식과 논변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독자 개개인이 수고스럽게 숙고할 만한 문제라는 것 정도이다. 그 수고스러운 길에 들어서는 독자가 유의할 것은 로티가 주장하는 새로운 철학이 기존의 철학적 언어-게임의 어휘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독해에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어느 정도 요구된다. 비록 반(反)-철학, 탈(脫)-철학에 대한 일종의 선언적인 의미를 지니는 책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철학‘책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로티 자신은 철학적 논변에 대해서 매우 엄정한 태도를 갖고 있다. 그 자신 분석철학의 훈련을 받은 전도유망한 기대주이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나로선 이 문제적인 저작을 많이들 사서 읽어보시든가, 책장에 모셔놓든가 하시라고 권유하고 싶다. 특히 대중적인 철학교양서로서 이름높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독할 만하다. 듀란트는 그 책의 저자의 말에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저자는 인식론이 근대철학을 납치해서 거의 파멸시켰다고 믿는다. 저자는 인식과정의 연구가 심리학의 과제로 인정되고 철학이 다시금 경험 자체의 방식과 과정의 분석적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경험의 종합적 해석으로 이해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분석은 과학에 속하고 지식을 제공한다. 철학은 지혜를 위한 종합을 마련해야 한다.“ 로티는 바로 이런 듀란트의 믿음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실천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철학적 지식보다는 지혜를 좀더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 지혜에 대해서라면 문학이 철학에 전혀 뒤질 것이 없다. 헤르메스의 철학자 미셀 세르는 어느 대담에서 오직 과학만이 철학이 과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걸 이런 식으로 고쳐 말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믿는다: “오직 철학만이 문학이 철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고 로티를 반기는 이유이다.  

 

참고로, 이 번역서에 대한 나의 유일한 불만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라는 제목에 놓인다. 원제인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를 그냥 '철학과 자연의 거울'이라고 옮기지 않은 것은 다소 중의적인 이 번역에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이격시켜놓기 위함일 터이지만, 그런 노파심이 우리말로 다소 어색한 지금의 제목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내가 아는한 로티를 언급하고 있는 국내의 어떤  학자도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란 제목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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