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들뢰즈와 푸코는 니체를 어떻게 오해했나

'들뢰즈와 푸코는 니체를 어떻게 오해했나'란 제목은 최근에 박찬국 교수(서울대 철학과)가 <인문논총>(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제54집)에 발표한 서평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수용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을 소개하고 있는 '교수신문'(06. 03. 08) 강성민 기자의 기사 타이틀이다. 박교수의 서평 대상이 된 책은 독일 학자 레만의 저서 <포스트모던적 좌익 니체주의(Postmoderner Links. Nietzscheanismus)>(2004)이다.

저자 레만은 우리에게도 이미 소개되어 잘 알려진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이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시도하고 있는데, 참고가 될 만하기에 서평과 기사를 여기에 옮겨온다(먼저 나오는 전체 서평을 읽기가 부담스러운 분들은 나중에 나오는 요약기사를 읽으시면 되겠다). 참고로, 인용에서 군말과 강조는 나의 것이며, 서평은 '자꾸 때리다'님의 서재에서 옮겨왔음을 밝혀둔다. 덧붙여진 이미지들은 모두 나의 '조작'이다.    

서평(박찬국) 이 책의 서문은 1980년에 지오르다나(Giordana)라는 감독에 의해서 만들어진 'Maledetti Vi Amer'라는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는 좌익테러리즘과 여피(Yuppi) 문화 사이에서 방황하던 리카르도라는 이름의 청년이 자살하기 바로 직전에 포스트 좌파의 새로운 가치관을노트에 쓴다.

“에로틱은 좌파적이고 포르노는 우파적이다. [섹스에서] 전희(前戱)는 좌파적인 반면에 삽입은 우파적이다. 이성애는 우파적이지만 동성애는 [사회적 금기의] 위반(違反)이라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좌파적이다. 해쉬시(Haschisch)는 좌파적이지만, 암페타민, 코카인 그리고 헤로인은 우파적이다. 니체는 새롭게 평가되었고 이제는 그는 좌파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우파다.”(*'해쉬시'는 '해시시'를 말한다.)

 

 

 

 

“니체는 좌파고 마르크스는 우파다.” 얼핏 기상천외하게 들리는 이 주장은 푸코 바람이 지나가자 이제 들뢰즈 바람이 불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생소한 주장만은 아니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심설당, 1997)와 같은 책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처럼 니체는 한때 좌파에 의해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이자 서양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이데올로그로 간주되었었다. 그 니체가 이제는 일부 급진좌파들에 의해서 관료주의에 대한 저항과 함께 차이와 다원성에대한 존중을 설파하는 사상가로 간주되고 있다. 역사상 그 어떠한 사상가에 대한 평가도 이렇게 극에서 극을 달린 적은 없었다.

 

 

 

 

우리는 니체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니체를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이데올로그로 보는 루카치식의 견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니체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가이고 초인들에 의한 귀족주의적인 지배를 주창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니체는 분명히 그의 <안티크리스트>에서 이상적인 사회형태는 다음과같은 세 계층, 즉 정치를 전담하는 정신적으로 탁월한 소수와 육체와 기질이 강하여 방위를 전담하는 군인 그리고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다수의 평균인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니체가 생각하는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는 플라톤에 대한 니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이상국가와 극히 유사하다는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레만의 책 <포스트모던적 좌익 니체주의>는 이렇게 엘리트주의적인 사상가인 니체를 다원성과 차이의 존중을 설파하는 철학자로 보는 최근의 니체 이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책이다. 이러한 비판적인 검토는 레만이 이러한새로운 니체 이해가 주로 들뢰즈와 푸코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에결국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수용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된다. 

레만은 들뢰즈야말로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 경도된 지식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니체 해석을 제시한 철학자로 보고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사상은 근대의 관료주의적인 정신과 문화에 의해서 침윤되어 있는 반면에 니체는 근대의 합리적인 관리 메커니즘을 거부하는 유목적인 사유(das nomadisierende Denken)를 제창하고있다. 근대의 철학자들은 근대의 합리적인 관리 메커니즘을 순수이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반면에, 니체에게 사유는 그러한 메커니즘에 대한 ‘전쟁 기계’(Kriegsmaschine)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푸코 역시 고고학적인 사유단계에서든 계보학적인 사유단계에서든 자신이 니체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주체와 휴머니즘 그리고 도덕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역사적인 자료에 입각하여 구체화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있다.

이 책은 들뢰즈의 니체 해석을 분석하고 있는 1부와 푸코의 니체 해석 뿐아니라 푸코 사상 전체를 그의 니체 해석과 연관하여 분석하고 있는 2부와 3부 그리고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레만은 들뢰즈의 책 <니체와 철학>에서 들뢰즈가 니체 철학에 의거하여 변증법에 대해서 가하고 있는 비판을 검토하는 것으로 1부를 시작하고 있다. 들뢰즈는 변증법이 차이를 무시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총체적인 종합의 틀안에 가두게 된다고 본다. 들뢰즈의 변증법 비판에 대해서 레만은 들뢰즈가 헤겔의 사변적인 변증법을 변증법 자체와 동일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들뢰즈가 부정, 대립 그리고 모순이라는 변증법의 사변적 원리에 대해서 그에 못지않게 사변적인 원리인 차이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레만은 대립에 대해서 말할 경우 우리는 반드시 부정과 모순에 대한 헤겔적인 개념에 의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는 헤겔의 ‘분열’(Entzweiung)과 부정 그리고 모순 개념이 선행적인 전체적인 통일을 전제하는 것에 반해서 대립개념은 일차적으로 실제의 사회적 대립을 가리키며 논리적으로 이미 전제되어 있는 통일적인 체계연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논리적인 모순 관계가 아닌 실제적인 대립관계를 가리키며 이러한 대립관계를 단순한 차이로 보는 것은 사회적인 현실에서는 다양한 차이들이 사실상 서로 간의 적대적인 대립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레만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실제적인 대립을 사변적인 통일의 계기로 환원시키지 않는 변증법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즉 ‘고독한 사상가가 자기 자신과 나누는 독백인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포이에르바하의 변증법은 ‘나와 너의 대화’에 입각해 있으며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미리 구성되어 있는 모순의 논리에 대해서 ‘실제적 차이들’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변증법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과 관련해서 레만은 초기의 니체는 변증법을 그것이 천박한 낙관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동시에 니체의 이러한 변증법 비판은 귀족주의적인 지배에 대한 민중들의 거부에 대한 비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변증법은 귀족주의적 지배에 대해서 민중들이 가졌던 원한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레만은 니체는 헤겔을 공격하면서도 그의 변증법적인 사유방법을 나름대로 수용하고 이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은 레만에 의하면 <도덕의 계보학> 3부에서 범례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니체는 여기서 금욕주의적인 생명부정이 빠지는 자기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금욕적인이상은 삶을 부정하면서도 그것은 사실상 삶에 대한 보존본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떠한 사태 내에 존재하는 대립적 긴장을 강조하는 것은 들뢰즈가 니체에서 읽어내고 있는‘다원적인’차이를 중시하는 사유와는전혀 성격을 달리 한다.

니체를 다원주의자로 보는 들뢰즈의 니체 해석을 그것이 의거하는 텍스트자체에 입각해서 검토해 보면 그러한 해석은 후기 니체의 관점주의가 갖는 신분차별적인 성격을 무시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들뢰즈는 자신의 ‘차이’개념을 니체가 말하는 ‘거리의 파토스’라는 귀족주의적인 열정으로부터 끌어내고있다. 그러나 니체에서 신분적으로 고귀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의 간격을 가리키는 이 개념은 들뢰즈에서는 생을 긍정하는 능동적인 힘들을 수동적이고 생을 부정하는 힘들로부터 구별하는‘차이’로 변형된다. 니체에서는 정치적인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 개념이 들뢰즈에서는 그러한 정치적인 성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레만은 들뢰즈가 니체의 통찰을 자기 나름대로 변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들뢰즈가 정치적인 위계질서에 대한 니체의 집착을 무시하면서 니체의 이름으로 자신의 사상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다.

레만은 들뢰즈가 니체 사상이 가지고 있는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무시하는 것은 그가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스피노자의 ‘행위능력’(potentia agendi)과 동일시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본다. 포스트모던적인 사고에 따르면 역사적인 ‘연속성’은 부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들뢰즈는 니체와 스피노자 사이에 연속성을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와 니체의 철학을 텍스트에 입각해서 검토해 보면 들뢰즈가 양자의 힘 개념과 의지 개념이 갖는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와 동시에 들뢰즈는 후기 니체가 스피노자에 대해서 비판적인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는 사실과 스피노자가 민주주의를 주창한 반면에 니체는 반민주주의를 내세웠다는 사실을 무시하고있다.

들뢰즈의 니체 수용에 대한 이러한 비판에 의거하여 레만은 들뢰즈가 과연 니체를 제대로 읽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와 함께 레만은 들뢰즈 자신은 당연히 물론이고 들뢰즈와 같은 포스트모던적인 니체주의의 주창자들뿐 아니라 하버마스와 같은 그것의 비판가들마저도 들뢰즈가 니체를 올바르게 해석했다고 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레만에 의하면 들뢰즈는 니체의 사상을 자신의 사상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는 경향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들뢰즈의 니체 해석이 타당한지를 엄밀하게 검토해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구조주의가 지배하던 프랑스에서 니체는 들뢰즈를 통해서 권력이론가로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니체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은 올바른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니체의 권력개념과 들뢰즈의 권력개념을 양자의 텍스트에 입각해서 철저하게 검토하고 있지 않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들뢰즈와 마찬가지로 니체를 ‘모든 규범에 대한’ 무정부주의적인 반항아로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파악과 함께 하버마스는 니체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비판이론 그리고 포스트모던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상정하고 싶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만은 이렇게 니체와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아도르노 사이에 연속성을 상정하면서 이들을 모두 ‘반근대적인 이데올로기 비판가’로 보는 하버마스의 해석은 후기 니체가 주인 도덕의 입장에서 자신의 규범비판과 이데올로기비판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본다.

제2부와 3부 그리고 4부는 푸코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푸코는 자신의 사유도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니체주의자(Nietzscheaner)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푸코의 니체 해석은 들뢰즈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레만은 푸코의 니체주의가 어떠한 성격을 갖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의 탐구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푸코처럼 자신을 권력과 주체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가로서 이해하는 사상가가 후기의 니체처럼 가장 철저하게 권력과 지배를 긍정하는 사상가를 거듭해서 원용한다는 것이 이론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의식 아래 행해진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물론 레만은 니체를 파시즘의 사상적인 원조로 보는 루카치식의 니체 해석이 니체 철학이 가지고 있는 다의성과 19세기후반과 1차 대전 이후 파시즘의 생성기 사이의 역사적인 거리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치의 친위대가 니체에 열광했으며 니체 사상이 이들에 의해서 ‘살 가치가 없는 인간들’의 절멸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니체의 형이상학비판과 보편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보편주의적인 진리주장들에 대한 비판은 포스트모던과 상통하지만 그것이 파시스트들의 손에서 전쟁과 인종청소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은 아니라는 것이다.

푸코는 니체 사상의 엘리트주의적인 성격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레만은 푸코 자신이 니체 사상을 텍스트에 충실하게 해독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975년의 한 인터뷰에서 푸코는 니체 사상에 대해서 우리가 표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중은 ‘그를 이용하고왜곡하며 학대하고 비명을 지르게 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푸코의 니체 해석이 텍스트 자체에 대해서 얼마나 정당한지에 대한 문헌학적인 물음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다만 남는 것은 푸코가 이용하고있는 니체가 어떠한 니체인지를 밝히는 것뿐이다.

 

 

 

 

2부는 1960년대의 초기 푸코, 특히<사물의 질서>(*<말과 사물>을 가리킨다)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 푸코는‘인간의 종말’에 대한 니체의 사상에 의거하면서 ‘인간학적인 시대’의 휴머니즘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이론들을 이미 낡아버린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니체는 ‘인류’라는 개념이 초인들의 육성에 방해가 되는 평등을 상정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는 반면에, 푸코에서는 인간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거부가 마르크스의 소외와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을 극복해야만 하는반-인간학(Anti-Anthropologie)으로 변용되고 있다. 아울러 푸코에서는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이 갖는 종교적인 성격도 무시되고 있다. 니체의 ‘초인’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니체에서 초인이 갖는 정치적 성격, 즉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지배자로서의 성격’이 무시되고 있다. 

3부에서는 1969년에서 1972년 사이의 푸코 사상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시기는 푸코가 급진좌파로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시기다. 여기에서는 푸코가 알튀세의 초기 이데올로기 개념을 거부하고 그것을 우선 ‘인식’이란 범주로 해소한 후 니체처럼 진리와 권력 의지의 결부에 주목하면서 권력이란 범주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레만은 푸코는 모든 것이 권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일종의 권력 환원주의에 떨어지게 되며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과 투쟁을 고려하지 않게 된다고 보고 있다. 

4부에서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대해서 상세히 검토하고 있다. 이 책은 푸코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의 주제를 수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레만은 여기서 푸코가 주장하는 신-니체주의적인 이론이 푸코가 역사를 파악하는 데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 있다. 레만은‘감시와 처벌의 역사’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서인 <처벌과 사회구조>(저자는 Rusche와Kirchheimer)와 푸코의 책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편으로 푸코는 복종과 주체 구성의 공간적.시간적 구조들을 분석하는 방향으로 사회사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자료들을 지나치게 이념형적으로 구별함으로써 분석의 섬세함에서는 루쉐(Rusche)와 키르히하이머(Kirchheimer) 수준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감금이 각 시대마다 어떠한 형태들을 취하는지를 세심하게 구별하고있다. 이에 반해서 푸코는 경제적인 이익의 획득을 주요한 목표로 삼는 형벌체계들과 교화를 주요한 목표로 삼는 형벌체계들을 구별하지 않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통해서 개혁된 감금방식과 나치체제 하에서의 감금 방식을 구별하고 있지 않다. 더 나아가 푸코는 감방과 일반적인‘규율사회’를 본질적으로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레만에 의하면 푸코의 분석이 갖는 이러한 문제점은 푸코가 니체의 <도덕의계보학>에서 제시 되고 있는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고 본다. 즉 니체는 형벌체계의 역사적인 전개를 신체에 대한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폭력(고문)에서 주체에 대한 정교하면서도 완화된 지배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시각을 푸코가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푸코가 형벌체계들이 갖는 차이들과 형벌과 일반적인 사회적인 규율이 갖는 본질적인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푸코는 형벌체계를 자본주의각 시기의 특성과 연관해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에 입각하여 레만은 포스트모던적인 니체주의는 사회에 대한 넓은 의미의 비판이론과 사회과학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볼 때 해롭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보다 섬세한 사회분석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를 전복시키겠다는 제스처만 취할 뿐 그때 그때의 사회구조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분석도 변혁의 방안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적인 니체주의가 어떻게 해서 유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레만은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푸코와 들뢰즈에 의해서 재평가된 니체는 급진좌파들에게 사회변혁을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실천적인 방안도 제시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급진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통찰력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전쟁’과 ‘전쟁기계’라는 들뢰즈의 은유가 들뢰즈의 난해하기 그지없는 비교( 敎)적인 철학적인 담론에 게릴라 전쟁이라는 혁명적인 색채를 부여하고 있다. 레만은 이러한 실속 없는 과격함이 치루는 대가는 좌익으로도 우익으로도 기울 수 있는 정치의 모순적 미학화(eine widerspruliche Asthetisierung des Politischen)라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레만은 포스트모던 니체 좌파들에 대한 이글턴(T. Eagleton)의 풍자를 인용하고 있다. 

“좌익으로 기우는 주장: 진리, 인식 그리고 도덕을 분쇄하라, […] 그리고 그대의 창조적인 힘들을 자유롭고 근거를 갖지 않는 유희 속에서 실현하면서 풍요롭게 살아라. 우익으로 기우는 주장 […] 이론적인 분석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감각적인 개별자를 소중히 하라, 사회를 자기를 근거지우는 유기체로서, 즉 그것의 모든 부분들이 아무런 갈등 없이 서로를 기적적으로 침투하고 아무런 합리적인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 유기체로 간주하라.” 

레만은 포스트모던적인 니체 해석이 갖는 문헌학적인 문제성과 이론적인 약점들이 대부분의 이차문헌들에 의해서 무시되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레만은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들뢰즈와 푸코를 읽을 때 그들의 생산적인 통찰도 제대로 살릴 수 있다고 본다.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에 대한 레만의 비판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모든 사회적 대립과 차별이 극복된 유토피아 사회에 대한 급진좌파적인 열망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열망은 레만의 열망이기도 하지만 들뢰즈와 푸코의 열망이기도 할 것이다. 들뢰즈와 푸코는 대립과 차별 대신에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존중이 지배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들뢰즈와 푸코 그리고 레만이 지향하는 사회는 사실상 동일하기 때문에 레만은 들뢰즈와 푸코가 이러한 열망 자체를 부정하는 니체 철학을 자신들의 사상적인 기반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본인은 레만이 들뢰즈나 푸코의 니체 해석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밝히는 데 있어서 많은 기여를 했음을 인정한다.

레만이 강조하듯이 니체 사상이 갖는 엘리트주의적인 성격과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은 우리가 니체를 해석함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고 여겨진다. 니체 사상의 엘리트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성격은 레만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의 후기 사상에서만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니체의 사유도정 전체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니체의 형이상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형이상학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레만은 니체 철학의 이러한 성격을 강조하면서 들뢰즈와 푸코 사상이 갖는 문제점을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레만이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이 갖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그가 니체에 대해서 취하는 입장이 공정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들뢰즈와 푸코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대립 대신 차이에 대한 존중이 지배하는 유토피아를 지향한다. 그리고 그는 니체를 평가할 때도 이러한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니체 철학이 얼마나 철학적으로 기여할 수있는지라는 관점에서 니체를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평가는 단호하다. 반민주주의자이자 반사회주의자 그리고 반무정부주의자로서의 니체는 사회변혁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수용에 대한 그의 비판도 니체에 대한 그의 이러한 평가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레만은 들뢰즈와 푸코 사상이 현실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분석도 제시하지 못하고 현실 변혁에 어떠한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사태가 상당 부분 그들이 니체에 의거하고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레만과는 전혀 달리 유토피아를 열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유토피아에 대한 열정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미래에 구현되어야 할 유토피아란 기독교의 피안에 대한 대용개념일 뿐이라고 본다. 그는 동물사회에서 동물들 간의 대립과 갈등이 불가피한 것처럼 인간 사회에서도 집단들 및 개인들 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고통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고통은 인간 개개인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본다. 이는 하나의 나무가 강하게 자라기 위해서 온실이 아니라 폭풍우가 필요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레만이나 들뢰즈나 푸코처럼 차이에 대한 존중이 지배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 제거하려고 하지 않는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들뢰즈나 푸코 못지않게 레만도 니체 자신의 이러한 문제의식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유토피아에의 열정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면서 이러한 전제 하에서 니체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니체를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니체 자신의 문제의식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여기서 길게 논의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니체 자체의 문제의식에 대한 존중에 입각하여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은 레만이 드러낸 것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문제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본인의 이러한 주장은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에 대한 레만의 비판이 부당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레만의 비판은 마르크스적인 사회분석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에 대해서 가해질 수있는 비판이 궁극적으로 가질 수 있는 형태를 전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레만의 비판은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에 대한 레만의 비판은 이러한 특정한 관점에 구속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을 떠나 니체 자신의 문제의식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을 비판하는 길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길은 레만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이 갖는 문제점을 밝혀 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해석을 비판할 때 우리 시대에 니체가 갖는 의미도 새롭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기사(강성민)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이해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박찬국 서울대 교수(철학)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이 펴내는 <인문논총> 최근호(제54집)에서 발표한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수용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에서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박 교수의 이 글은 독일의 학자 레만의 2004년 저서 '포스트모던적 좌익 니체주의'에 대한 서평이다. 박 교수는 글의 서두에서 그간의 니체에 대한 평가에 불만을 표시한다. 니체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렸다는 것.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적이자 서양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이데올로그로 간주되었던 그가 이제는 일부 급진좌파에 의해서 관료주의에 대한 저항과 함께 차이와 다원성에 대한 존중을 설파하는 사상가로 간주되고 있다"고 그 표변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반동된 최근의 니체 이해도 레만에 따르면 문제가 많다. 그는 <포스트모던적 좌익 니체주의>에서 엘리트주의적인 사상가인 니체를 다원성과 차이의 존중을 설파하는 철학자로 보는 최근의 니체 이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박 교수는 이러한 비판적 검토는 레만이 이러한 새로운 니체 이해가 주로 들뢰즈와 푸코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결국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 수용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된다고 보고 있다.

박 교수의 서평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들뢰즈는 그의 <니체와 철학> 등의 책에서 니체 철학에 의거 변증법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들뢰즈의 변증법 비판에 대해서 레만은 들뢰즈가 헤겔의 사변적인 변증법을 변증법 자체와 동일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들뢰즈가 부정, 대립 그리고 모순이라는 변증법의 사변적 원리에 대해서 그에 못지않은 사변적인 원리인 차이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대립관계를 단순한 차이로 보는 것은 사회적인 현실에서는 다양한 차이들이 사실상 서로 간의 적대적인 대립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게 레만의 생각. 초기의 니체가 변증법을 비판한 것은, "변증법이 귀족주의적 지배에 대한 민중들의 원한감정의 일종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고, 사실 니체는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방법을 나름대로 수용하고도 있는데 이는 <도덕의 계보> 3부에서 범례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니체를 다원주의자로 보는 들뢰즈의 해석은 후기 니체의 관점주의가 갖는 신분차별적 성격을 무시하고 있다고 레만은 본다. 들뢰즈는 자신의 ‘차이’ 개념을 니체의 ‘거리의 파토스’에서 끄집어내는데, 니체에게는 신분적으로 고귀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의 간격을 나타내는 이 개념이, 들뢰즈에게 오면 생을 긍정하는 능동적인 힘들을 수동적이고 생을 부정하는 힘들로부터 구별하는 ‘차이’로 변형된다는 관찰이 이어진다. 니체에서는 정치적인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개념이 그러한 정치적 성격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스피노자와 니체 사이에 연속선을 긋는 들뢰즈는 후기 니체가 스피노자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분명히 취했다는 점도 무시한다. 들뢰즈는 과연 니체를 제대로 읽었는가. 레만은 들뢰즈 자신은 물론이고 하버마스와 같은 비판가들마저도 들뢰즈의 해석이 옳다고 본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한다.

그 다음은 푸코다. 레만은 푸코처럼 자신을 권력과 주체에 대한 급진적 비판가로서 이해하는 사상가가 후기의 니체처럼 가장 철저하게 권력과 지배를 긍정하는 사상가를 거듭 원용한다는 것이 이론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문제의식 아래 푸코를 살펴본다. 푸코는 니체사상을 텍스트에 충실하게 해독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는 게 레만의 기본적 입장.

니체는 ‘인류’라는 개념이 초인들의 육성에 방해가 되는 평등을 상정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는 반면에, 푸코에서는 인간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거부가 마르크스의 소외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을 극복해야만 하는 반-인간학(Anti-Anthropologie)으로 변용되고 있다. 아울러 푸코에서는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이 갖는 종교적 성격도 무시된다. 니체의 ‘초인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니체에서 초인이 갖는 정치적 성격, 즉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지배자로서의 성격’이 무시되고 있다. 레만은 푸코가 모든 것이 권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는 일종의 권력 환원주의에 떨어지게 되며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과 투쟁을 고려하지 않게 된다고 보고 있다.

4부에서는 현대사회를 관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푸코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감시와 처벌'을 검토하고 있다. 푸코가 주장하는 신-니체주의적인 이론이 푸코가 역사를 파악하는 데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가 볼 때 푸코는 한편으로 복종과 주체구성의 공간적·시간적 구조들을 분석하는 방향으로 사회사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자료들을 지니치게 이념형적으로 구별함으로써 분석의 섬세함에서는 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푸코는 경제적인 이익의 획득을 주요한 목표로 삼는 형벌체계들과 교화를 주요한 목표로 삼는 형벌체계들을 구별하지 않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통해서 개혁된 감금방식과 나치체제 하에서의 감금방식을 구별하고 있지 않다. 더 나아가 푸코는 감방과 일반적인 규율사회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니체는 형벌체계의 역사적인 전개를 신체에 대한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폭력(고문)에서 주체에 대한 정교하면서도 완화된 지배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시각을 푸코가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푸코가 형벌체계들이 갖는 차이들과 형벌과 일반적인 사회적 규율이 갖는 본질적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푸코는 형벌체계를 자본주의 각 시기의 특성과 연관해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에 입각하여 레만은 포스트모던적 니체주의는 사회에 대한 넓은 의미의 비판이론과 사회과학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볼 때 해롭게 작용했다고 본다. 사회를 전복시키겠다는 제스춰만 취할 뿐 그때그때의 사회구조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인 분석도 변혁의 방안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과 전쟁기계라는 들뢰즈 특유의 은유는 들뢰즈의 난해하기 그지없는 秘敎적인 철학적인 담론에 게릴라 전쟁이라는 혁명적인 색채를 부여하고 있다고 레만은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실속 없는 과격함이 치르는 대가는 "좌익으로도, 우익으로도 기울 수 있는 정치의 모순적 미학화"라고 보고 있다.

레만은 포스트모던적인 니체해석이 갖는 문헌학적인 문제성과 이론적인 약점들이 대부분의 이차문헌들에 의해서 무시되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읽을 때 그들의 생산적 통찰도 살릴 수 있다고 본다.

여기까지가 레만의 주장에서 뼈대를 골라놓은 것이고 서평의 말미에서 박찬국 교수는 레만의 비판에 대해서 논평을 가하고 있다. 우선 "니체 사상의 엘리트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성격은 레만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의 후기사상에서만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니체의 사유도정 전체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동의한다.

 

 

 

 

그러나 박 교수는 "니체는 레만과는 전혀 달리 유토피아를 열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유토피아에 대한 열정을 비판하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니체는 인간사회에서 집단들 및 개인들 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고통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따라서 니체는 이러한 대립과 갈등을 레만이나 들뢰즈나 푸코처럼 차이에 대한 존중이 지배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레만도 니체 자신의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는 지적에 오면 이 서평이 얼마나 잘 씌어진 것인지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아무튼 박 교수는 레만의 비판은 마르크스적인 사회분석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들뢰즈와 푸코의 니체해석에 대해서 가해질 수 있는 비판의 형태를 전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그 의의를 평가한다.

06. 0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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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철학자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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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푸줏간에서 한 여인이 좋은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끔찍한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습니다.'(17쪽) 마그리트의 말이다. 그의 그림들이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유가 절반은 숨어있지 않을까? 나머지 절반은 장담컨대, 저자인 수지 개블릭이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마치 '당신이 마그리트에게 알고 싶었던 모든 것, 하지만 차마 옆사람에게 물어보지는 못한 것'에 대해서 답해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마그리트와 그의 철학과 그의 회화에 대해서 폭넒고 깊이있게 쓰고 있다. 그래서 뒷표지에 실린 '확실히 마그리트 연구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타임스의 서평이 허사만은 아니지 싶다.

의미심장하게도 책의 시작은 '철학과 해석'이다. 사실 재현을 거부하는 그의 그림들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개념들의 낯선 병치와 그것이 거두는 효과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일생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걸 알게 되면 아주 자연스레 이해된다.

요컨대 '회화작품에서 그는 거의 천부적인 싫증을 보여 주었으며, 권태, 피로, 혐오감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꾸며냈다'(9쪽) 그에게 회화가 가지는 의미? '그에게 있어서 회화란 정신이 지닌 두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으로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란'(9쪽)이었다.

그는 일생을 두고 자신의 생각(정신)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가의 특이한 유형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 넓은 의미에서 초현실주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브르통 등과 결별했던 것도 그런 기질상의 차이가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데 키리코와 시인 로트레아몽을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팝아트와 마그리트의 관계에 대해서도 요령있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보다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회화에서의 '재현의 위기'를 주제화하고 있는 마그리트 회화의 특징과 그 전략이다. 그녀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아 어깃장을 놓는 그의 심보(?)를 아주 유려하게 해설해 보이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전략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138-140쪽) (1)회화에서 단어는 이미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단어=이미지) (2)회화에서 오브제는 단어나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다(오브제≠단어, 이미지) 그리하여 이제 더이상 재현적 회화란 가능하지 않으며 유효하지도 않다.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무엇을 그린다는 것이 더이상 가능하지도 의미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무언가를 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희소한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비단 마그리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현대 회화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도 아주 유익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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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시는 당신의 권력!
환합니다 - 정현종 대표시집
정현종 지음 / 찾을모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시인이 서른 셋에 낸 첫시집 <사물의 꿈>을 제외한 모든 시집을 나는 갖고 있다. 시집뿐만 아니라 몇 권의 시론집과 산문집 또한. 그 시편들과 글들의 대부분을 읽었을 테니까 나는 시인의 팬이면서 애독자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그런 시인이 재작년에 환갑을 맞았고, 몇 권의 책이 기념으로 나왔는데, 이 육필시집 또한 그런 연관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때문에 이 시집은 말의 좋은 의미에서 장서용이다).

이미 활자를 통해서 한번쯤 읽은 시들이지만, 육필로 읽는 시들은 새로운 감흥을 준다. 나는 정현종 시의 특징이 독특한 호흡, 혹은 걸음걸이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날아가는 듯한 그의 필체는 유난히 그의 걸음걸이가 그렇지 않을까 하는 연상을 갖게 한다.

그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시인은 시집의 첫머리에서 '외출'하여 페테르부르크의 한 소극장에서 '사랑은 나의 권력'이라고 속삭이는 걸로 시집을 마무리한다. 아니 그 말은 시인의 말이 아니라 시인의 사랑이 시인의 귀에 속삭인 말이다. 시인은 그 사랑의 귀에 이렇게 속삭인다.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런 속삭임도 이 시집에선 모두 걸음걸이로 바뀌어져 있다. 그의 마지막 걸음걸이는 이렇게 읽힌다. '사랑이여/ 우리의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시여, 우리의 막강한 권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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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지음 / 찾을모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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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활자를 통해서 한번쯤 읽은 시들이지만, 육필로 읽는 시들은 새로운 감흥을 준다. 나는 정현종 시의 특징이 독특한 호흡, 혹은 걸음걸이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날아가는 듯한 그의 필체는 유난히 그의 걸음걸이가 그렇지 않을까 하는 연상을 갖게 한다.

그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시인은 시집의 첫머리에서 '외출'하여 페테르부르크의 한 소극장에서 '사랑은 나의 권력'이라고 속삭이는 걸로 시집을 마무리한다. 아니 그 말은 시인의 말이 아니라 시인의 사랑이 시인의 귀에 속삭인 말이다. 시인은 그 사랑의 귀에 이렇게 속삭인다.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런 속삭임도 이 시집에선 모두 걸음걸이로 바뀌어져 있다. 그의 마지막 걸음걸이는 이렇게 읽힌다. '사랑이여/ 우리의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시여, 우리의 막강한 권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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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시학의 표준 번역
시학 - 호라티우스 시학.플라톤 시론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필요 때문에 시학을 다시 읽게 되었다. 물론 이 서평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아니라 그 우리말 번역이다. 손명현 선생의 번역 이후로 <시학>은 적어도 너댓 종 이상의 우리말 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천병희 선생의 번역은 그 중 가장 표준적이라 할 만하다. 기본적으로 희랍어 원전을 번역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권위있는 역자의 자세한 주석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쉽게 읽히는 건 아니다. 대개의 고전이 그러하듯이 <시학> 또한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거의 안 읽히는 책의 하나이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루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미 전승되고 있지 않다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을 듯하다. 더불어 강연을 옮긴 것이어서 군데군데 곁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도 독해를 까다롭게 한다.

즉 저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우리 시대 독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바탕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 역시 빈약하기 마련인 것이다. 고전 문헌학도가 아닌 이상 방대한 주석을 따라가면서 자구 하나하나를 음미해 볼 만한 처지도 못되는 것이고(예림기획에서 나온 주석본이 좀 도움이 된다).

다만, 시학의 줄거리를 간추려 보고, 그것이 문예비평사에서 갖는 의의만큼은 우리가 충분히 헤아려볼 수 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요소들 중에서 왜 플롯을 가장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는가(사실 플롯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비극의 정의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기능을 갖는가, 비극은 왜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가 하는 등의 문제들에 답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 정도의 작업이 가능할 수 있는 것도 이 정도 수준의 번역이 있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이 책은 호라티우스의 <시학>과 함께 플라톤의 <국가> 중 시론에 해당하는 부분(시인추방론이 역설되고 있는 부분)을 옮겨 놓고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구와 대결하고 있고, 또 그의 생각이 어떻게 후대에 이어지는가를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때문에 여전히 일반 독자들에겐 잘 읽히지 않을 책이지만, <시학>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혼의 대하여>에 얼마 전에 번역 출간되었는데, 과연 아리스토텔레스의 또 다른 주저인 <형이상학>은 언제쯤 우리말 번역본을 얻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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