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37)

지난주에는 다른 주저없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책 몇 권이 출간됐다. 이런 경우는 반가우면서도 속이 쓰리다. 속이 쓰린 건 당장에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혹은 보다 원초적으론 책을 구입할 만한 여력이 안된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그러다가 품절/절판되는 책들도 드물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어떻게 해야지 출판사들이 책을 알아서들 보내줄까, 간혹 그런 공상을 하기도 하지만, 주로 칭찬보다는 험담을 늘어놓는 주제이기에 곧 그런 기대를 접어둔다. 물론 나는 거저 얻은 책에 대해서는 험담하지 않으며, 나의 험담은 주로 내 돈 주고 산 책들에 대해서이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투자한 게 있으니!

해서 이것도 일종의 악순환이다. 내 돈 주고 사서 읽으니, 책에 대한 기대가 높을 수밖에 없고, 그러니 자연스레 이것저것 트집을 잡게 된다(물론 완벽한 책은 드물며, 대다수는 엉성한 책들이기에 꺼리들은 차고 넘친다). 또 그러니 이래저래 출판사로선 달갑잖은 독자일 테고 그런 독자에겐 책을 거저 보내줄 리 없다. 해서, 나는 여러 곤란 속에서도 책은 내 돈 주고 사서 읽어야 된다. 더더욱 눈을 부라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책이냐?!(혹 '출판평론가'라는 이들에겐 책을 거저 보내주는지? 영화평론가들에게 시사회 티켓을 보내주는 것처럼. 사실이 혹 그렇다면 조만간 '평론가'란 직함이라도 구해봐야겠다. 그것도 혹 사야 되는 건가?)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슬라보예 지젝의 책과 그에 관한 책이다. 올해도 두 권의 책이 근간예정으로 돼 있는 지젝은 인문학 출판계에 '아무도 그보다 더 많이 쓸 수는 없다!' 상이 있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에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다. 이번에 나온 건 그의 주저에 속하는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와 입문서인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이다.

'이론서'로서 <까다로운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이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에 이어지는 책이다(그 사이에 <부정성과 함께 남아있기> 등이 놓여 있다). 지난 토요일 마이어스의 책에 대한 중앙일보의 소개 기사에는 국내에 지젝의 저서가 17종이 번역/소개돼 있다고 했는데(그는 개정판이 나온 <향락의 전이>를 두 권으로 카운트했다), 실제 단독 저작은 히치콕에 대한 책까지 포함해서 13권이다(<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은 지젝이 편집한 책이고, 그의 글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중 내가 '이론서'라고 분류한 책들이 그래도 번역이 양호한 책들에 속하며 부분적인 오역들을 빠져나가면서 꼼꼼하게 읽으면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물론 아무리 지젝의 책들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좀 무겁긴 하다.

 

 

 

 

지젝의 또다른 책들은 '영화책'이라 분류될 만한데, 실제로 영화들을 주된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다.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새물결, 2001)을 필두로 해서 <삐딱하게 하기>(시각과언어, 1995),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1997),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등이 그런 책들이다. 여기에 분류된 책들도 비교적 읽을 만한데, 나열된 순서를 거꾸로 하면 오역이 그래도 적은 순서가 된다. 지젝의 책 가운데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삐딱하게 하기>는 처음 소개한 공로는 인정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오역이 적지 않다(해서 이 책에 대한 만족도는 뒤로 갈수록 점점 떨어진다). 요즘도 절판되지 않고 계속 팔려나가는 책이므로 개정판이 나올 법하지만, 아주 명백한 오타나 오역들이(적지 않은데) 교정되지 않은 채 판을 찍고 있는 걸로 보아서 출판사로선 그럴 의향은 없는 듯하다(전향적인 방향으로 개정본 출간을 검토해주었으면 한다).

해서, 영화책들 가운데, 내가 보기에 그래도 가장 안전하게 참조할 수 있는 건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진짜 눈물의 공포>인데, 이건 의외로 판매실적이 저조한다. 알라딘을 기준으로 하면, 조잡한 번역의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보다도 세일즈 포인트가 낮게 나온다(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그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그리고 몇몇 오타나 오역이 없지 않지만, 나로선 지젝에 입문하려는 독자라면 가장 안전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추천하겠다.

그리고 물론 지젝의 나머지 책들이 있으며 대부분은 오역의 지뢰밭이다(오역 사례집으로의 활용가치는 있겠지만, 일반 독자라면 차라리 안 읽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하다). 그러니 지젝을 미워하고 말고 이전에, 지젝은 우리말로 읽는 것 자체가 드물고도 어려운 저자이다(사실, 정도의 문제일 뿐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그렇다. 해서 한국어로 똑똑해진다는 건 정말 힘들다!).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읽을 만한 입문서가 절실히 요구되는데, 이번에 출간된 마이어스의 책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책이다. 요컨대,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

이미 루틀리지의 같은 시리즈('Critical Thinkers')의 책으로 클레어 콜브룩의 <들뢰즈>(태학사, 2004)가 출간된바 있고, 나는 그 책을 '가장 쉬운 들뢰즈 입문서'라고 부른바 있다. 그러니 마이어스의 책에 대해서도 같은 소개를 하는 것이 형평에 맞을 것이다(신생 출판사로 보이는 '앨피'는 이 루틀리지 시리즈의 에드워드 사이드 편도 출간했는데, 이 시리즈의 저작권을 상당수 인수한 모양이다. 좋은 시리즈인 만큼 양질의 번역서들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거기엔 니콜라스 로일의 <데리다>도 포함돼 있는데, 나는 로일의 책을 모스크바에서 지난 가을에 읽었더랬다.)

마이어스의 책은 지난 2003년에 나왔는데, 영어권에서도 그런 류의 지젝 입문서로서는 최초의 책이 아닌가 싶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해 나온 것이 사라 케이의 <지젝: 비판적 입문>(Polity, 2003)이고, 작년에는 이안 파커의 <슬라보예 지젝: 비판적 입문>(Pluto Press, 2004)이 출간됐다. 모두 컴팩트한 분량의 '입문서'들이다. 마이어스의 책도 원제는 국역본처럼 요란한 게 아니라 그냥 <슬라보예 지젝>이며, "왜 지젝인가?(Why Zizek?)"와 "핵심 사상(Key Ideas)", 그리고 "지젝 이후(After Zizek)"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책을 구하러 맘먹고 오늘 구내서적에 갔더니 아직 들어와 있지 않았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이, 쉬운 문장으로 간결하게 서술돼 있고, 핵심적인 아이디어들은 따로 박스처리돼 있는 등 입문서로서의 요건은 깔끔하게 충족시키고 있는 책이므로 일독할 만하다. 그런데, 국역본의 제목은 왜 그 모양인가? 그거야 책이 좀 쉽게 눈에 띄게 하기 위한 출판사측의 계산 때문일 것이다. 그 계산이 통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모쪼록 지젝에 대한 오해의 많은 부분이 걷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지젝은 그에 대한 숭배자들 못지 않게 많은 혐오자들도 거느리고 있는 사상가이다. 나로선 그가 내가 읽고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더불어 나는 '같잖은' 비판들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중요한 것은 '읽기'라고 생각한다. 데리다의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읽기'는 모든 비판보다 멀리 간다('같잖은'이란 표현은 강유원의 것이다. 그는 현대 프랑스 철학은 '같잖은' 철학이라고 말한다. 사후 50년이 되지 않은 데리다나 들뢰즈 철학은 아직 유아적인 철학에 불과하고. 나는 그의 표현을 '같지 않은'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읽는다. 데리다의 철학은 헤겔의 철학과 '같지 않다'. 그래서 '같잖은' 철학이다. 아울러 지젝의 철학은 알튀세르의 철학과 '같지 않다'. 그래서 '같잖은' 철학이다. 강유원의 프랑스 철학 비판은 그 자신의 시인대로 감정적인 것인바, 내가 읽고 싶은 건 그런 '같잖은' 감정이 아니라 비판의 실내용이다. 그건 지젝에 대한 갖가지 비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두번째 책은 박노자의 <우승과 열패의 신화: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한겨레신문사)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의 목적은 '힘 숭배' 수용의 몇몇 초기 단계들-1883년 부터 1910년까지 미국에 다녀온 초기의 조선 지식인들이나 량치차오와 같은 한국 개신 유림의 '큰 스승', 그리고 개신 유림 계통의 주요 논객 등을 중심으로-을 짚어서 오늘날의 '승자 독식사회',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개화기에 사회진화론 사상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에 대한 관심과 문제제기는 이미 박노자의 이전 저작에서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슬라보예 지젝의 '동유럽의 기적' 혹은 '슬로베니아의 기적'이라면, 원래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란 러시아 이름을 가졌던 박노자는 '러시아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나는 그가 러시아의 '선진적인' 교육 시스템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으론 그런 시스템과 무관한 '별종'이지 않을까 싶다. 이미 여러 권의 저작을 통해서 한국인보다 더 예리하게 한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비판하고 분석해온 그의 작업은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서조차도 더없이 값지고 소중하다. 해서 당분간은 '박노자의 모든 책'이다. 그런 책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아주 소략한데, 짐작에 메이저 언론이라는 조중동이 모두 북리뷰에서 이 책을 다루지 않았다. 책을 낸 한겨레에서만 장문의 서평을 실어주었다. '우승과 열패의 신화'(우수하면 승리하고 열등하면 패배한다는 신화)는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유효하다는 걸 그들의 불편한 '침묵'이 말해주는 것은 아닌지.

 

 

 

 

세번째 책은 진화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의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철학과현실사)이다. 이 양반이 지난 2월에 작고했다는 걸 서평을 보면서 알았는데, 1904년생이니까 101세의 장수를 누린 셈이다. 책은 그가 100세 때에 쓴 마지막 저서라고 하는데, 이래저래 경탄스럽다(103세에 세상을 뜬 철학자 가다머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 진화생물학계의 태두로서 진작부터 '20세기의 다윈'으로 불린 마이어이지만, 국내에 출간된 그의 책은 빈약하다. <진화론 논쟁>(사이언스북스, 1998)으로 처음 소개됐고, <이것이 생물학이다>(몸과마음, 2002)로 거장의 면모를 살짝 보여주었을 뿐. 마이어의 모든 책이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하게 소개됐지만, 나중에 나온 두 권 정도는 읽어둘 만하다(<진화론 논쟁>은 소략한 책이다). 같이 나온 과학책으론 개리 마커스의 <마음이 태어나는 곳>(해나무)이 있다(마이어의 책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이 지난주의 교양과학서이다). 저자는 미국 인지과학계의 새로운 기대주인 듯한데, 노암 촘스키나 스티븐 핀커 같은 대가들이 추천사를 쓴 걸로 봐서 집어들어 손해보지 않을 책이다.

 

 

 



네번째 책은 사이먼 윈체스터의 <영어의 탄생>(책과함께)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OED라고 불리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곡절 많은 사전 편찬사이며, OED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 노력, 자부심, 좌절 등을 함께 담은 흥미로운 휴먼스토리이다. OED 제작에 깊이 관여한 머리 교수와 죄수 마이너의 이야기를 담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교수와 광인>의 저자 사이먼 윈체스터가 썼다." 내가 덧붙일 말은 없으며, '영어의 시대'를 살고 있는 만큼, 그 사전 편찬과 관련한 이야기도 한번쯤 귀담아 들어봄 직하다. <한국어의 탄생> 같은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끝으로, 이젠 '원로' 비평가가 된 김윤식 교수의 <김윤식 선집 7 - 문학사와 비평>(솔출판사)이다. 서점에 깔린 것만 보고 책을 들춰보지는 않았는데, 하여간에 아직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평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집이 거의 다 추스려지고 있는 듯하여 한편으로 세월무상을 느끼게 된다. 학부시절 신간으로 나온 <낯선 신을 찾아서>(일지사, 1988)를 서점에서 사들고는 도서관에서 읽던 기억이 새로운데 말이다. 나는 이 독보적인 문학사가이자 비평가의 '자질'이 '낯선 신'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갈망/열정을 안은 이라면, 방황은 영원할 수밖에 없으며 책읽기 또한 종결될 수 없다(그때 비평은 운명의 표정을 갖게 되리라). 개인적으로 비평집들을 읽을 때 내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러한 열정/수난의 함량이며, 그 기준은 김윤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선집과 함께 나란히 나온 것이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시나가와역>(솔출판사)인데(역시 예술기행), 책읽기의 어느 경지에 이르면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어떤 영토에 가닿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시방 내가 있는 곳은 아직도 바람 많이 불고 꽃이파리 나부끼는 땅, 생의 푸르름이 아직 이념의 회색빛보다 진한 곳, 진하다고 믿어지는 곳.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그 어느 저녁을 위해서 아직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 갈길이 멀다..

05. 04. 25.

 

 

 


 

P.S. 좀 지난 책이지만, 지난 2월말 정현종 시인의 정년퇴임 기념으로 나온 책 <영원한 시작>(민음사)도 기록해 두고 싶다. 후배 교수인 정과리가 시인의 제자들의 글을 묶은 것으로 일종의 기념논총이다. 소개에 따르면, "필자들은 정현종 시학의 요체가 '상상력'이라고 보았고, 상상은 질료의 운동과 교감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은 1부 '질료'와 2부 '운동'으로 구성돼 있고, 3부에서는 '교감'이란 제하에 스승과 제자들이 나우었던 정담을 싣고 있다. 이러한 구성을 틀지우고 있는 건 물론 바슐라르의 상상력론인바, 그것이 한 시인의 총체적인 시세계를 조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해서 정현종의 독자와 바슐라르의 독자가 모두 한번쯤 읽어볼 만하겠다. 읽어서 남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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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30)

이전에 29회까지 연재했던 ‘최근에 나온 책들’의 30회를 쓰기로 한다(*이 글은 2004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씌어졌고, 모스크바통신에도 나누어서 올린 적이 있다. '에피소드' 시리즈의 '에필로그'로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다시 올려놓는다. 31회부터는 '로쟈의 노트2'에 연재돼 있다).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어제 한국식당에 갔다가 지난 토요일자 동아일보의 복사본 한 부 들고 왔기 때문이다. 토요일자에는 물론 북리뷰(‘책의 향기’)란이 실려 있다(동아일보는 아직 타블로이드판 북리뷰를 내지는 않는 모양이다). ‘책의 향기’에 소개된 신간들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끄는 책 5권 꼽아보았다. 물론 이 선택은 나의 주관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최근에 나온 책들에 반드시 꼽혀야 하는 것들로는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원제는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등이 있고,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문선)도 슬그머니 출간됐지만, 지난주 북리뷰에는 빠진 걸로 봐서 이미 그 전 주에 다 ‘소화’되었던 모양이다. 언급한 저자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신뢰하는 이들이며(번역자들 또한 어느 정도 수준급이다), 그 책들은 모두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리라고 본다. 서울에 있었다면, 벌써 각 권의 몇 페이지씩은 읽어 넘겼을 테지만, ‘현지사정상’ 나는 이 책들을 인터넷서점의 ‘보관함’에 넣어두는 걸로 일단은 만족한다.

 

 

 


그럼,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고 싶은 책은 무엇이냐? 그건 학술면에서 가장 크게 다루고 있는, 리차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이다. 원제가 'The Extended Phenotype'인 이 책의 2판이 1999년에 나왔는데, 국역본은 이 2판을 옮긴 듯하다(2판에는 다니엘 데넷의 후기가 들어가 있다). 알다시피, 도킨스의 출세작은 <이기적 유전자>이며, 이 책 역시 1판과 2판(개정판)이 있는바, 우리말로는 둘 다 번역돼 있다. 1판은 이용철 번역으로 동아출판사에서 나왔었고(현재는 품절된 걸로 보인다), 2판은 홍영남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됐다(현재도 잘 나가고 있다). 이번에 나온 <확장된 표현형>은 그 후속작인데, 도킨스 자신이 (자신있게!)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유전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개체들마저도 자신의 운반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아마도 책은 그 사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예컨대, “거미줄, 흰개미집, 새의 둥지와 같이 동물이 만들어낸 인공물들도 모두 자신의 유전자를 더 효율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확장된 표현형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논리를 인간에까지 적용해 보면 우리의 문화와 문명도 결국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전자의 전략과 그 결과로서의 ‘확장된 표현형’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side-effect)이나 오작동(malfunction)이다. ‘눈먼 유전자’들의 전략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목표한 타깃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Not in our genes)!”라는 반박도 충분히 가능하다(하지만, 그런 반박의 타깃은 나이브한 ‘유전자 결정론’일 뿐이다). 즉, 진화는 적응(adaptation)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스티븐 제이 굴드의 표현을 빌면) 외적응/굴절적응(ex-adaptation 혹은 exaptation)의 산물이기도 하다(지젝, <이라크>, 83쪽). 좀더 쉽게 말하면, 진화는 ‘의도한 적응’과 ‘의도하지 않은 적응’의 복합적 산물이다(가령, ‘의도하지 않은 아이’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하는 커플들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뒤집어 말하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조차도 ‘조물주-유전자’의 확장된 손(=섭리)이 만들어낸 ‘효과’일 뿐이며, 유전자의 메시지(=편지)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다만 상상계-상징계-실재라는 프리즘을 관통하면서 굴절될 따름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접합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혹은 그 분리 자체가 ‘진리’일는지도 모른다), 이 두 ‘문턱’에 대한 참조 없이 우리의 마음과 문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해본다(물론 언제나 그렇지만, ‘수다’는 어느 때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말은 이런 책들을 읽으시라는 것이다. 그것도 진지하게 말이다.

 

 

 

 

오래 전 얘기지만, 한 대학 신입생이 당시에 과 조교였던 나에게 추천도서를 물어왔다. 내가 골라준 책 세 권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한권을 덧붙인다면, <장자>를 집어넣고 싶다). 물론 그 신입생이 이후에 이 책들을 다 읽었을 거 같지는 않지만, 만약에 다 읽었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조개삿갓이나 말미잘, 수달 등과 다른 점은 그런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고, 그런 읽기를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성장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우리의 게으른 정신은 저 혼자 알아서 크지 않으며 끊임없는 자양분과 닦달을 필요로 한다). 물론 ‘수달의 친구들’은 그런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자면, 도킨스는 다윈-예수의 바울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는 라캉-예수의 바울인 지젝과 유사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과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또한 유사한 운명을 겪은 책들이다. 각각 <이기적 유전자>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어제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다. *위의 이미지)이라는 ‘처녀작’으로 (본인들도 놀랄 만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작 도킨스나 지젝이 자신들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리고 보다 ‘대담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그 후속작들인 <확장된 표현형>과 <그들은…>이다. 하지만, 이 책들은 상대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점은 두 저자 모두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가 도킨스를 처음 읽은 것은 11-2년쯤 전이다. <도덕적 동물>의 저자 로버트 라이트의 <3인의 과학자의 그들의 神>(정신세계사)를 읽고, 그 3인의 과학자 중 한명인 에드워드 윌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에 눈뜨게 됐다. 그리고 이어서 읽은 게 <이기적 유전자>(동아출판사)의 1판이었다(을유문화사의 개정판은 몇 년 뒤에 나왔다). 당시에 (적어도 국내에서는) 거의 주목 받지 않은 책이었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하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미 제목만으로도 책은 나에게 숨통을 터 주었다. 이후에는 물론 ‘도킨스의 모든 책’이다(그러면서 알게 된 이가 <다윈 이후>의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이다).

나는 작년에 <확장된 표현형>의 원서(2판) 또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장서용’으로 사서 서가에 꽂아 두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들도 몇 권 더 갖고 있다). 번역본이 나온다면 <이기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굳이 원서를 살 필요는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 번역본에 이제야 나와서 다소간 ‘유감’이지만, 그 유감은 ‘반가움’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다.

 

 

 



두번째 책은 거의 모든 언론의 북리뷰에서 톱으로 다룬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 원저(Who are we?)가 올해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아마도 곧장 국역본이 나온 듯하다. <문명의 충돌>도 나는 읽지 않았지만(하도 떠들어대기 때문에 안 읽어도 내용을 아는 것 같은 책들이 있다), ‘미국의 정체성’이란 제목이 더 걸맞은 이 책 또한 굳이 읽게 될 것 같지는 않다(적어도 돈 주고 사서는). 하지만, 읽을 ‘필요’는 있는 책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세계관보다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한미관계에만 관심을 집중해 온 우리에게는 오히려 이 책이야말로 평균적인 백인 사회의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의 절반은 이라크 침공의 명분 상실에도 불구하고 올 11월의 미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을 여전히 테러라는 적을 응징할 선봉장으로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전혀 신비롭지 않지만, 여전히 ‘미스터리’인 이러한 현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앵글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생각을, 그 이데올로기를 알 건 알고 직시할 건 직시해야겠다. 더불어 헌팅턴의 두 가지 예언, 즉 ‘문명의 충돌’과 (히스패닉으로 인한) ‘미국의 붕괴’ 중 한 가지만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후자 말이다(그것만으로도 그는 정치학자로서는 별볼일 없더라도 예언가로서, ‘선지자’로서는 후세에 이름이 남을 것이다).

 

 

 



세번째 책은 레너드 쉴레인의 <알파벳과 여신>(파스칼북스)이다. 저자는 생소하지만(*2005년엔 그녀의 책으로 <자연의 선택, 지나 사피엔스>도 출간됐다), 640쪽이란 분량이 마음에 들었다(가격도 만만찮지만. 3만 4천원이면 그 정도 두께의 러시아 책을 최소한 5권은 살 수 있다). 원제는 “The Alphabet versus the Goddess”(1998)이다. 그러니까 우리말 제목의 ‘과’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이 둘의 대립적/적대적 관계이다(즉 ‘알파벳 대 여신’).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외과 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문자 언어, 특히 알파벳은 선형적, 추상적, 남성적으로 특징되는 좌뇌적 사고를 강화하고 종합적, 시각적, 여성적 우뇌의 기능을 퇴보시켰다. 우뇌적 가치에 대한 좌뇌적 가치의 승리는 여신을 죽이고 가부장제와 여성 천시 사상을 가져왔다.”

물론 ‘가설적인’ 주장이지만(이러한 주장이 입증되려면, 비문자 사회, 즉 원주민 사회에는 가부장제나 여성 천시 사상이 생소한 것이어야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럴 거 같지 않다), 그걸 이 만한 분량으로 밀어붙인 노고에 대해서는 치하할 만하다. 아무튼 저자는 “이미지로의 회귀 현상을 의미 있게 보고, 앞으로 좌뇌와 우뇌, 남성과 여성의 가치, 문자와 이미지가 균형을 찾고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잠깐 든 생각은 요새 한글(=알파벳)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딸아이가 점차 문자에 익숙해지는 것이 그 아이의 행복과 무관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다.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네번째 책은 얇은 프랑스 소설이다.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열린책들).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고르기 힘들었을 것이다(*책은 1998년에 나왔던 것이 재출간된 형태이고, 오르세나의 소설들은 <새들이 전해준 소식>을 포함해 여러 권이 출간돼 있다). 알고 보니 제목의 ‘두 해 여름’은 번역가인 소설의 주인공이 “독자로서 경탄하고 번역자로서 낙담했다”고 한 나보코프의 소설 <아다>(‘에이다 혹은 아더’)를 번역하면서, 진탕 고생하면서, 보낸 기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실제의 번역자를 모델로 했다는 이 소설에는 기껏 번역을 해놓으니까 “내 걸작을 망쳐놓았다”고 타박하는 작가 나보코프도 등장하는바, 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쨌든 번역에 대한 한바탕 소동을 다루면서 저자는 번역가에 대한 예찬으로 소설을 마무리짓고 있는 듯하다. “내가 서가에 꽂힌 책의 반은 번역가들 덕분에 내게로 온 것이다. 나는 번역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번역가는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바다를 건너 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하니, ‘한 해의 겨울과 또 다른 해의 여름’을 번역에 바치고 있는 나로서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번역자는 고작 200쪽짜리를 쓰고/옮긴 것이니 번역의 괴로움을 말하기에는 뭐하다(내가 옮기고 있는 원서는 640쪽 가량이다).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이 옮기고 있는 <아다>라면 사정이 좀 다를 테지만(나보코프의 이 소설은 ‘신기하게도’ 우리말 번역본이 있다. 물론 지금은 구하기 힘들 테지만).

나보코프 또한 번역일에 낯설지 않은데, 그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러시아어로 옮긴바 있고,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방대한 주석을 달아서 영어로 옮겼으며, 그의 아들 드미트리와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씌어진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을 영어로, 러시아어로 다시 옮겼다. 참고로, 그의 외아들 드미트리 나보코프는 아버지 나보코프의 영어본/러시아본 전 작품의 저작권을 갖고 있으며 가장 엄격하게 저작권을 관리/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국내에 나보코프의 책들이 잘 번역돼 나오지 않는 것은 그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너무 시간을 끌고 있다. 빨리 끝내도록 해야겠다. 마지막 책은, 복간된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이다. 이 책은 1989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인데, 이번에 개정판이 다시 나온 것. 서문에서 김훈은 “여기에 모이는 글 부스러기들은 대부분 밥을 벌기 위해 허둥지둥 쓴 글들”이라면 “그걸로 밥을 먹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건 김훈답지 않다. “그걸로 법을 먹게 해준 만큼” 그 글 부스러기들은 위대하지는 않을지언정 부끄러울 이유도 없다(밥벌이가 부끄러운 게 아닌 이상 말이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글들은 내가 이미 15년 전에 읽었던 것일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조금씩 교정을 보기도 했고, 새로 들어간 글도 있고, 새로이 시인 이문재의 발문도 챙겨 넣은 모양이니까 여기서 소개해도 부끄럽지는 않겠다…

2004.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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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risoner > 지젝 필독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이 지젝의 비판가를 포함한 지젝 독자들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 이상이다.

우선 그 이유들을 지적하기 전에 이 책의 제2판 서문에서 지젝 스스로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킬 것을 이야기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국내에서의 지젝에 대한 (비판적인 것을 포함한) 언급들이 주로 <숭고한 대상>에 집중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저자의 이 권고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책에서 지젝은 한편으로 헤겔의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한 재독서를 시도한다. 이 '재독서'는 <숭고한 대상>에서의 헤겔 독해에 대한 재독서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과 라캉의 기표의 논리를 동일한 모체의 두 판본으로 다루면서, 양자가 서로를 해명하도록 배치했다. 이 이론적 독파의 결과물인 지젝식 변증법적 유물론은, 오늘날 지성적 영역에서 보기드문 수준의 성과물이며, 지젝을 단번에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독자들 편에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서와 사유를 요구한다. 

지젝은 또한 이 책에서 <숭고한 대상>에서 견지된 민주주의에 대한 유보적 지지를 철회한다. 이점은 지젝 스스로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숭고한 대상>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잔재를 명확히 규정하고 청산하기 위해 수년 동안 이론적 작업에 몰두했다고 고백한다. 그 이론적 작업/노동의 결과물이 다름아닌 <그들은>이다.

따라서 지젝이 최근에 와서, 그러니까 예컨대 9.11 사건이나 이라크 전쟁 이후에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보는 견해는 <그들은>에 대한 미독에서 오는 잘못된 견해이다. 이 책은 한 명의 철학자가 현실과 이론, 혹은 정치와 철학 양쪽에서 어떻게 진지한 대결을 전개해왔는가를 보여주는 보기드문 사례이다.

이 책은 <숭고한 대상>에 대한 교정작업일뿐만 아니라, 그동안 주로 대중문화적 영역에서만 소개되어온 '지젝'의 이미지 자체에 대한 훌륭한 교정이다. 지젝의 철학적 작업은 이 책에서 원형적 모습으로 전개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숭고한 대상>뿐만 아니라 지젝의 모든 다른 저술들에 대한 독서는 바로 이 책에 대한 독서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역자의 번역은 몇몇 오류들에도 불구하고 지지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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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55)

창밖은 단풍이 절정이고 오늘은 10월의 마지막날이다. 이런 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세월은 제 갈길을 가고 남아있는 자들만 뒤늦게 정신 (못)차린다(그런 세월 죽이는 일로 세월을 다 보내다니!). 그나마 가을이어서 다행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좀 붉어져도 단풍에 묻혀갈 수 있으니. 점심 먹고 잠시 걸었지만, 천성이 다소간 게으른 탓에 산책은 눈으로만 즐기기로 한다. 그럴 때 도서 산책은 꽤나 요긴한 핑계가 된다. 교양있는 척하며, 게으름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덤으로 천재들과도 아는 척하고...

 

 

 

 

이번에 맨처음 꼽을 책은 단연 도날드 스포토(D. Spoto; 1941- )의 <히치콕>이다. 나대로 히치콕의 대해서는 작년에 지젝 편,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에 실린 평문들을 자세히 읽으면서도 언급한 적이 있고, 그때 스포토의 저명한 전기 <천재의 이면: 알프레드 히치콕의 생애>가 번역되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더랬다. 이번에 <히치콕>이란 제하에 신간이 나왔길래 나는 그 전기인가 했는데, 책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예술세계: 그의 영화인생 50년>이란 원제의 또다른 책이다. 국역본의 제목은 <히치콕: 히치콕의 영화 50년>(도서출판 동인).

이번주 영화주간지 <필름 2.0>에도 소개가 됐는데, 잠시 옮겨보면 이렇다. "드디어 나왔다. <히치콕>의 저자 도날드 스포토는 슬라보예 지젝과 로빈 우드, 그리고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와 클로드 샤브롤에 뒤지지 않는 히치콕 마니아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예술'이라는 원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처음 1976년에 나왔고(*아마존에서 현재 판매중인 건 1991년판이다), 이를 받아본 히치콕은 도날드 스포토를 LA로 초청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는 히치콕의 초기 무성영화로부터 <로프> <이창> <토파즈>까지 45편의 영화들을 연대기적 접근방식으로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스포토의 신간은 그의 전기와 함께 히치콕 기본서에 속한다. <필름 2.0>의 기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한나래, 1994)가 그런 기본서이며, 역시나 '까이예' 비평가 출신의 샤브롤과 에릭 로메르가 편집한 책으로 작년에 국역본이 나온 <알프레드 히치콕>(현대미학사, 2004)도 히치콕의 초기작들을 다루고 있는 기본서이다. 거기에 새로운 기본서로 추가된 것이 지젝의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고. 해서, 반갑고 고무적이다(기본서들은 우리 교양의 기초를 튼실하게 해준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히치콕의 영화 대부분은 국내에 비디오나 DVD 타이틀로 출시돼 있다(주로 '유니버설'이나 '씨네코리아'에서 나왔고, 나오고 있다). 하니 여유만만한 분들은 45편의 영화 리스트와 스포토의 해설을 옆에 놓고 히치콕의 영화들을 연대기순으로 죽 관람하시면 되겠다. 

로로로 시리즈로 나온 또다른 전기 <앨프레드 히치콕>(한길사, 1997)은 너무 간략한 느낌이 있지만 일독할 만하다(이 책에 대해서는 '리뷰'를 쓴 적이 있다). 저작 목록을 보건대 스포토는 일급의 전기작가이며,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즈와 배우 마릴린 먼로, 제임스 딘, 로렌스 올리비에, 잉그리드 버그만 등에 관한 전기도 갖고 있다. 그 중에서 국내엔 <제임스 딘>(한길아트, 1999)이 번역돼 있다. 예수와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전기도 쓴 걸로 봐서 거의 종횡무진이라고 해야 할 듯. 국내에 잘 알려진 전기작가로서는 20세기 전반기의 슈테판 츠바이크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 물론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소개된다면...  

 

 

 

 

두번째 책은 히치콕(1899-1980)과 같은 생년을 가진 미국 작가 헤밍웨이(1899-1961)가 "모든 현대 미국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헉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예찬한 가장 '미국적인'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의 '철학이야기'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북인)이다. 원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What is man?)'. 지난 여름에 <지구로부터의 편지>(베가북스)라는 풍자적인 이야기가 번역/소개된바 있지만, 근년/최근에 와서 트웨인의 책들이 신간으로 자주 눈에 띈다. 사실 이번 신간 때문에 새삼 더 주목하게 된 책은 지난 2월에 나온 그의 자서전, <마크 트웨인 자서전>(고즈윈, 512쪽)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내가 이 연재를 잠시 쉬던 때에 나온 책이서 거명하지 않고 지나갔던 책인데, 이 기회에 눈도장을 찍어둔다.

그의 자서전은 서강대 장영희 교수가 "대작가 마크 트웨인이기 전에 인간 마크 트웨인으로서 철저한 자기성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 이웃으로서의 모습과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성격, 삶을 꿰뚫는 예리한 풍자 밑에 흐르는 슬픔과 페이소스가 담겨 있는 자서전 문학의 정수"라고 평하고 있는 책으로 트웨인의 독자나 예비독자라면 반드시 읽고 넘어가야 할 책이다.

 

 

 

 

미국 문학의 '간판' 작가답게 트웨인은 국내에도 헤밍웨이만큼 잘 알려져 있지만 주로 '아동물'을 통해서이다. <톰 소여의 모험>이 웬만한 아동/청소년 문고에는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이고, 나도 초등학교 때 소년소년 세계명작 시리즈로 트웨인을 처음 만났다. 유감스러운 건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게 트웨인과의 인연의 전부라는 점. 나 또한 사실 대학에 와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미국문학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작품이란 걸 알게 되고서 다소 놀랐을 정도였다(특히, 현대 미국문학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의 견해 참조). 그간에 머리가 큰 만큼 <허클베리 핀의 모험>(민음사, 1998/2005)도 이젠 '고전'으로 다시 읽어볼 만하다.

 

 

 

 

레슬리 피들러의 제자이기도 한 김성곤 교수의 <미국문학과 작가들의 초상>(서울대출판부, 1993)은 내가 '미국문학 사전'으로 자주 애용하는 책인데, 거기엔 영국시인 오든(W. H. Auden)의 흥미로운 평문 '허크와 올리버'가 실려있다(전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든은 두 작품, 즉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현대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명하면서 두 주인공 허크와 올리버를 비교한다. 그는 자연에 대한 태도, 현실에 대한 태도, 그리고 시간과 돈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이들을 대조하는데, 가령 유럽(영국)인에게서 자연이 어머니의 품 같다면, 미국에서의 자연은 야성적이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인들이 읽기에 <헉핀>은 매우 슬픈 소설이라고 말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끝장면에서 올리버가 사랑이 있는 가정에 입양되면서 그의 꿈을 실현하는데 반해서 유사한 모험들을 겪게 되지만 허크는 그의 친구 짐과 결국엔 헤어질 것이며 다시는 못나게 되리라는 걸 독자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사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요소를 보지 못하는 반면에(사건들은 '반복'으로 의미화된다) 미국인들은 반복의 요소를 보지 못한다(사건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지각된다. 이런 경우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돈의 경우도 대비되는데, "올리버의 경우, 그것은 법적 상속권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허크의 경우에는 그것이 순전히 행운일 뿐이다." 오든은 거기서 조금 더 나간다: "미국에서 돈은, 자연이라는 용(龍)과의 전투를 통해 빼내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곧 성인의 표증을 상징한다. 미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다... 유럽의 단점은 탐욕과 인색이며, 미국의 단점은 이 양적인 돈이 성인의 표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디에서 중단해야 될는지 알기 어려운 데서 기인하는 근심이다... 사실 미국인들은 물질에 대해서 별로 연연해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것은 미국의 소비일 뿐이다. 마치 유럽의 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 유럽의 탐욕이듯이." 음미해볼 만한 견해이다.

 

 

 

 

세번째 책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초원>(범우사). 이번에 나온 5권짜리 체호프 선집 중 제3권인데, 특별히 이 책을 꼽은 건 중편 <초원>이 최초로 번역됐기 때문이다(책에는 '구세프' 등 4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작년에 서거 10주년을 맞아 여러 행사들이 치러졌었다는 얘기는 '모스크바 통신'에서 전한 바 있다. 국내에서는 오종우 교수의 체호프 선집 2권,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벚꽃동산>이 열린책들에서 나왔었는데, 탄생 145주년을 맞은 올해 좀더 그럴 듯한 5권짜리 선집이 나온 것. 그간에 많이 번역된 드라마의 경우에는 이채로울 것이 없지만(희곡 <바냐 아저씨>가 <바냐 외삼촌>으로 번역된 게 좀 튄달까), 초기 단편들이 대거 포함된 1-3권은 주목할 만하다.

1888년에 발표된 <초원>은 진지한 주제를 담은 분량 있는 작품을 써보라는 주위의 충고에 답하기 위해 씌어진 작품인데(방점은 '분량'에 있다) 주로 콩트나 단편들 위주로 써온 체호프에게 '중편' <초원>은 모험적인/실험적인 성격을 가진 작품이었다. 한 소년의 초원 여행을 기본 플롯으로 갖고 있는 서정적인 작품인데, 초기 체호프의 전매특허인 '코믹'은 극소화되어 있으며 내게는 작품 자체의 의미보다는 작가가 왜 '장편'으로는 나아가지 못했을까를 궁리해보게 만드는 작품. 역자는 이 작품으로 학위논문까지 쓴바 있기에 적역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초원>이란 작품이 단연 상기시켜주는 이름은 러시아의 저명한 체호프 학자 알렉산드르 추다코프(추다꼬프)이다. 국내 대학에서도 강의를 한바 있고(나도 강연을 한번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인 제자들도 길러낸 분인데, 그의 출세작 <체호프의 시학>에 이 <초원>에 대한 자세한 비평적 분석이 실려 있기 때문(<체호프의 시학>은 체호프에 관한 단일 연구서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그의 또다른 주저가 <체호프의 세계>이고, 이것은 <체호프와 그의 시대>(소명출판, 2004)로 번역돼 있다. 물론 전문서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과는 다소 무관한 책이지만. ('모스크바통신'에서도 거명한 바 있는) 추다코프 교수를 다시금 언급하는 것은 정정하던 그가 얼마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작년에 푸슈킨과 체호프에 관한 그의 강의를 청강해두지 못한 게 아쉽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국내에선 체호프 전공자 오종우 교수의 연구서 <체호프의 코미디와 진실>(성균관대출판부, 2005)이 이번에 출간됐다는 것도 기록해둔다. 역시나 전문서이지만 애호가들도 읽어볼 만하겠다.  

  

 

 

 

네번째 책은 종교학자 엘리아데(1907-1986)의 <세계종교사상사>(이학사)이다. 전3권이 한꺼번에 출간됐는데, 우리 출판의 '역량'을 과시하는 듯해서 나름으로 부듯하다. '엘리아데'란 이름은 내게 좀 각별한데, 대학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들은 낯선 이름이 바로 '엘리아데'였기 때문이다(나는 첫학기에 조기수강신청했던 '철학개론'을 물리고 대신에 '종교학 개론'을 들었다). 해서 엘리아데는 내게 '대학'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모든 것과 결부돼 있다. 지성, 학문, 자유, 학자, 열정, 강의 등과 말이다. 하여간에 이번에 나온 방대한 저작은 <종교형태론>(한길사, 1996)과 함께 서가에 꽂아두고 쉬어쉬엄 읽어보면 좋겠다. 사실 모스크바 체류시 막판에 가장 망설였던 게 고서점에서 본 엘리아데 러시아어본들을 사느냐, 마느냐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은 인터넷에 전문이 올라와 있었다. 덕분에 이 방대한 책의 러시아어본을 나는 손에 물 안 묻히고 소장하고 있다. 

   

 

 

 

그 자체가 종교학 입문의 성격도 갖는 엘리아데 입문은 엘리아데의 제자이기도 했던 정진홍 교수의 <엘리아데: 종교와 신화>(살림, 2003)이 단연 독보적이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다른 적임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엘리아데 자신의 저작으론 <종교의 의미: 물음과 답변>(서광사, 1990)과 함께 <성과 속>(한길사, 1998)이 기본서. 독문학 연구자인 안진태 교수의 <엘리아데.신화.종교>(고려대출판부, 2005)도 다소 전문적이지만 지난 5월에 나온 관련서이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실재의 윤리>의 저자 알렌카 주판치치의 니체론 <정오의 그림자>(도서출판b)이다. 원제는 '가장 짧은 그림자(The Shortest Shadow : Nietzsche's Philosophy of the Two)'. 저자 주판치치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여성 '사무라이'로서 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칸트와 라캉'을 다룬 전작에 이어서 잔뜩 기대를 모으는 책인데(앞으로 '주판치치의 모든 책'이 될 것이다) 혹자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에 비견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론, 인연이 닿았다면 번역을 맡을 수도 있었던 책이라 이번 출간이 반갑고 기대된다(나 같이 게으른 역자를 안 만난 게 여러 모로 다행스럽다). 또 마침 책세상판 니체 전집도 완간된 김에 이번 겨울은 니체에 폭 빠져보는 것도 일리 있겠다. 초심자라면, 이번에 나온 로런스 게인의 '만화책' 입문서 <니체>(김영사) 정도는 떼주시길(나는 작년에 러시아어본으로 읽었다).

니체에 관한 전기로는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 2003)와 홀링데일의 <니체, 그의 삶과 철학>(이제이북스, 2004)가 기본서이다. 전자는 독어권을 대표하며(철학자 전기에 있어서 자프란스키는 최고의 실력자이다) 후자는 카우프만, 아서 단토 등의 책과 함께 영어권(미국)의 대표 저작. 참고로 홀링데일은 카우프만과 함께 니체 영역(英譯)을 양분했었다. 그리고 국내의 대표 저작은 '한국의 책 100권'에 선정된바 있는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민음사, 2000). 이젠 외국어로도 읽을 수 있다!(독역되었나?)...

기타 여러 시인들의 시전집들과 토마스 쿤 평전, 몇 권의 정치학 책과 데이비드 흄에 관한 책 등이 보관함에 들어 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어느새 캄캄하다...

05. 10. 31.

P.S.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제발 이젠, 그만 만나자구요?!

P.S.2. 이 페이퍼를 계기로 즐찾 400이 되었다. 평균 하루에 한 명꼴로 찾아주시는 분들이 늘었다. 찾아주시는 분들의 상당수는 출판관계자들인 것으로 안다(일부는 나를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물론 엉터리나 찍어대는 분들은 나와는 아직도 계산할 게 많이 남아있다. 서로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겠으니, 모쪼록 독감들 주의하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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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발터 벤야민 혹은 세속적 '오역'의 도시

 

 

 

 

필요 때문에 앤디 메리필드가 쓴 <메트로맑시즘(Metromarxism)>(Routledge, 2002), 국역본 제목으로는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시울, 2005)를 읽는다.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메트로맑시스트'들은 '맑스'까지 포함해서 8명인데, 그 중에서 당장에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이는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에 관한 장은 맑스와 엥겔스에 이은 제3장인데, "벤야민은 아마도 20세기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였을 것이다."(149쪽)란 논평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번에 드디어 번역이 나온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의 저자가 '메트로맑시즘' 프로젝트에서 한 자리 차지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언젠가 한번 언급한 바대로,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는(아예 질로크의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란 책이 나와있지만) 벤야민과 관련하여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이유로 <메트로맑시즘>의 국역본 출간에 대해서 반가움을 표하기도 했었는데(212쪽짜리 원서가 439쪽짜리 번역서로 탈바꿈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며 유감스럽게도 그 반가움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이제 그 반가움의 상당 부분은 당혹감이 채우고 있다). 웬만해서는 한국어 책을 읽고 똑똑해질 수 없는 것이 이런 류의 비협조적인 '번역서들' 때문이란 걸 나는 여러 차례 강조해왔는데, 왜 이토록 부실한 번역서들이 계속 양산되는지 궁금하다(이건 상투적인 표현이다.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이젠 오역서들을 읽는 데도 얼마간 익숙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깝다는 생각은 한다. 돈과 시간이, 그리고 엉뚱한 데 투여되는 순진한 독자들의 학구열이).

사실 책의 서두에 붙은 '옮긴이의 말'에서부터 아마추어리즘의 냄새를 풍기기는 했다. "Henri Lefevre의 책을 찾기 위해 '르페브르'가 좋을지 '르뻬브르'가 좋을지 걱정하는 일은 또 어떤가"라고 별걱정을 다하는 역자들을 두고 미소를 지어야 할지 쓴웃음을 지어야 할지 헷갈렸기 때문이다(요즘은 Lefevre를 '르뻬브르'로 읽는 게 가능한가? 물론 Foucault를 '푸꼬'로 읽는 걸로로 모자랐는지 '뿌꼬'라고 읽는 이도 보긴 했지만). 어쨌든 다소 미덥지 않았는데, 번역은 생각보다 더 열악했다. 해서, 벤야민이 강조하는바, '세속적 계몽' 대신에 내가 얻은 것은 '세속적 오역'들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런 불만을 털어놓는 것이 '계몽'에 얼마나 이바지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역의 반복들로부터 (언젠가는!?) 놓여나기 위해서라도 '싫은 소리'를 몇 마디 해야겠다.

애초에 시작은 '사랑' 이었다. 123쪽에서, "니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 '개인주의의 설교자들'이 '대도시를 그렇게 끔찍하게도 사랑했던 것과 대도시적 인간의 가장 불만족스러운 열망에 대한 예언자이자 구원자로서 앞에 나타난 이유' 사이에 우연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다..."로 나가는 문장이다. 원문은 "it's no coincidence that these 'preachers of individuality' are so 'passionately loved in the metropolis and why they appear to the metropolitan man as phrophets and saviors of his most unsatisfied yearnings."(52쪽) 굵은 글씨는 내가 표시한 것인데, 번역문은 수동문을 능동문으로 옮겼다. '니체와 비슷한 주장을 했던'이란 말은 역자의 서비스로 들어간 것인데, 그런 서비스 정신이 문장의 기본틀을 간과한 건 유감스럽다. '개인주의의 설교자들'이란 앞 페이지에서 언급된 루소, 러스킨, 니체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대도시의 '군집화 경향'에 대해서 혐오했는데, 대도시에서는 이들이 아주 열정적으로 사랑받았다는 것(그러니까 그들이 대도시를 사랑한 게 아니다. 바로 앞에서 혐오했다고 해놓고, 어떻게 '끔찍하게도 사랑했다'고 말을 바꿀 수 있는가?).

같은 쪽에서 "20세기 초반 베를린에서 보낸 10년간 벤야민은 지적인 욕구를 느꼈고, 그 욕구가 가지는 '활동적인 환상'은 알프레드 되블린의 1929년 걸작인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었다."도 원래 끊어진 두 문장을 한 문장으로 바꿔 옮기면서 주어(그 욕구)를 잘못 표기하고 있다. 번역문 대로라면, 벤야민의 지적 욕구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인데, 말이 되는가? 되블린의 작품은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는데(적어도 3종의 번역서가 있다.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1980년 파스빈더에 의해서 15시간짜리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내용은 프란츠 비베르코프의 하층생활에 관한 이야기인데,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알렉산더 광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 광장의 바로 그 이웃인 되블린의 작품 속 등장인물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로부터 자양분을 얻었던 그 공기는 벤야민이 들이마셨던 근대 베를린의 공기였다."는 건 말 그대로 '소설'이다. 원문은 "But one of stars of Doblin's book - the Alexanderplatz neighborhood itself - gulped in, and was nourished by, the same modern Berlin air that Benjamin imbibed." 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문장에서 '소설의 한 배역'과 '알렉산더 광장 지구 자체'는 동의어이다. 번역문은 '지구/지역(neighborhood)'이란 말을 '이웃'으로 오역하는 바람에 연이어 엉뚱한 작문을 한 사례이다.

사실 이런 사례들은 글의 대세(=내용)와는 무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이 허용되다 보면 '유관한' 오역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126쪽에서, "이후 17년 동안 벤야민은 그 도시 자체와 넓은 풍경에 아이와 같은 천진한 포용력을 유지했다."의 원문은 "Seventeen years later, Benjamin retained this wide-eyed, childlike embrace of the city."(53쪽)이다. 먼저, '17년 동안'이 아니라 '17년이 지난 뒤에도'이다. '그 도시'는 파리이고, 파리에 대한 천진한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 호기심어린 시선을 그가 견지했다는 내용. 번역문의 '넓은 풍경'은 무얼 옮긴 것인지 알 수가 없는데, 'wide-eyed'를 옮긴 거라면 눈이 크게 떠질 만한 오역이다.

곧 이어서 "청년이자 성인이었던 벤야민에게, 베를린은 파리의 옆에 있음으로써 핏기를 잃어버린 곳이었다. 파리는 음모, 진기함, 그리고 모험으로 상징화되었지만, 이에 반해, '베를린은 아마도 그토록 작은 것들이 간과되거나 간과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을 것이다." 같은 대목은 내용을 반대로 옮겼다는 점에서 부도덕한 오역에 속한다. 원문은 "For the young and mature Benjamin alike, Berlin paled alongside Paris. The latter symbolized intrigue, novelty, and adventure. Conversely, 'there are perhaps few cities in which so little is - or can be - overlooked as in Berlin."이다. '청년이자 성인이었던 벤야민'이란 번역은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데, 'young Benjamin'은 대학시절 처음으로 두 주간 파리를 여행하던 시절의 청년 벤야민을 말하고, 'mature Benjamin'은 그로부터 17년 후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 일기>를 쓰게 되는 중년의 벤야민을 말한다. 그러니까 "청년 벤야민에게서나 중년 벤야민에게서나 똑같이" 정도로 옮겨져야 한다.

똑같이 어쨌다는 건가? "베를린은 파리에 견주면 창백한(=볼품없는) 도시였다"라는 것. 왜? 비밀스럽고 진기한 모험으로 가득 찬 파리와는 달리 베를린은 그토록 작은 것들이 간과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알다시피, little은 '거의 없다'라는 부정의 뜻이므로 이 대목에서는 간과될 게 거의 없다는 뜻이 된다('그토록 작은 것들'?). 왜? 파리와는 달리 볼 게 별로 없기 때문. 파리에서라면 어제 본 거리와 건물도 오늘 '새롭게' 보이지만, 베를린에서는 '조직적/기술적 정신'의 효과로 한번 보면 더 볼 게 없다는 얘기이다. 해서 약간 의역하면, "베를린만큼 볼 게 별로 없는 도시도 거의 없을 것이다."  

128쪽에서, 'a second dissertation'을 '두번째 박사학위논문'으로 옮겼는데, 역자가 벤야민에 대해서나 독일의 학제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벤야민의 박사학위논문은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비평개념>이고(<베를린의 유년시절>에 번역돼 있다), '두번째 학위논문'이라 지칭된 <독일 비극의 기원>은 그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이다(물론 끝내 통과되지 못한). 원문에는 '박사' 운운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두번째 논문이 'the work of esoteric genius'로 지칭되고 있는데, '비밀스런/비교(秘敎)적인 천재의 작품' 정도가 아니라 '난해한 분위기의 그 논문'이라고 어렵게 옮겨진 것도 이해하기 난해하다.

 

 

 

 

133쪽에서, "블로흐는 다가오는 나치의 무자비한 공격을 마주하는 데 있어서는 벤야민과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벤야민이 망명을 택했던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원문은 "Bloch, however, survived the approaching Nazi onslaught in a way Benjamin never did: he got out."이다. 두번째 문장의 주어(he)를 역자는 블로흐가 아닌 벤야민으로 착각해서 엉뚱한 사람을 망명시켜버렸다.  작년에 대표작 <희망의 원리>(전5권, 열린책들)가 완역돼 나온(영역본은 3권짜리이며 나는 이 책을 갖고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벤야민과 교우관계를 갖고 있었는바, "블로흐가 보여주는 종교적 신비주의와 강경한 공산주의의 혼합은 벤야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블로흐는 벤야민과 달리 비교적 일찍, 1933년에 망명했고(처음엔 스위스로, 그리고는 미국으로)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해서 뒷문장은 "그는 탈출한 것이다."로 옮겨져야 하며, 여기서의 '그'는 '벤야민'이 아닌 '블로흐'이다(앞뒤 문장의 주어가 전부 '블로흐'인데, 대명사 'he'가 '벤야민'을 받는다는 건 난데없는 일이다).

블로흐보다 '정통적인' 맑시스트로 벤야민에게 영향을 끼진 이는 블로흐의 친구이기도 했던 루카치이다. 특히나 중요한 저작은 <역사와 계급의식>(1923; 거름, 1992), 이 책을 벤야민은 이탈리아의 카프리에서 걸출한 볼세비키 아샤 라시스로부터 소개받는다(라시스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히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참조). "그와 그녀는 때로는 카페에서, 때로는 라시스의 호텔에서 발가벗은 채로 루카치의 책을 함께 소리내어 읽었다." 이런 배경지식하에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1920년대의 급진적인 국면을 맹비난했다."란 문장을 읽어보자. 원문은 "...Georg Lukacs, whose History and Class Counscious tore on to the radical scene in the 1920s." 'tear'란 동사에 '비난하다/혹평하다'란 뜻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의 뜻은 내 생각에 말 그대로 '구멍을 내다' '찢어놓다'(=양분시키다)이며, 구어적으론 '들쑤셔놓다' 정도로 보인다.

알다시피, 1930년대에 루카치는 '공식적인 맑스주의'로서의 스탈린주의와 갈등관계에 있었으며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내비친 자신의 사상에 대한 수정을 요구받는다('관념론'이란 멍에를 뒤집어쓰면서). 인용문에 붙은 각주10)은 이에 관한 내용인데,  "최근 들어 밝혀진 바로는, 실제로 루카치가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과거에 그가 집필한 위대한 저작에 대한 폐기통고를 거절하면서 그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에세이를 집필했다."(413쪽) 이에 대한 원문은 이렇다: "More recently it was discovered that Lukacs really believed everything all along: he'd actually written an essay in his own defense, renouncing his earlier denunciation of his great text."(190쪽) 내 생각에 번역문은 일의 영문을 전혀 모른 채 옮겨진 것이다. 당시에 루카치는 소위 '자아비판'을 감행했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가 옳다는 믿음은 내내 견지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시 옮기면,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루카치는 자신의 신념을 정말로 끝까지 견지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텍스트(=<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이전의(=30년대의) (자기)비판을 철회하는 자기옹호의 에세이를 쓰기까지 했다." 

물론 그 에세이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며, 그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이다. 루카치가 쓴 에세이가 영어로 번역돼 나온 것이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옹호 A Defense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Tailism and the Dialectic>(Verso, 2000)이다(이 책의 후기를 슬라보예 지젝이 쓰고 있다). 이 '옹호'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짐작에 이야기의 줄거리는 그러하다. 해서, '맑스주의' 책을 번역하는 역자들이 ('일반 독자'보다 게으르게도) 걸출한 맑시스트들에 대한 기본사항들마저 챙기고 있지 않은 것은 거듭 유감스럽다.

저자인 메리필드는 이후에 <역사와 계급의식>의 주요 내용을 3쪽에 걸쳐서 요약 정리하고 있다. 비록 "벤야민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란 단서를 잊지 않고 있지만. 그 내용 가운데 134쪽에서, '두번째 자연(second nature)'은 아도르노에게서도 그렇고 '이차적 본성'이라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리고 136쪽에서, "모호한 메시지와 억압적인 힘(subtle messages and repressive force)"은 "교묘한 메시지와 억압적인 힘"이 더 적당하겠다.

"이제껏 존재했던 그 어떤 맑스주의자보다도 가장 덜 실천적인 맑스주의자" 벤야민과 루카치의 차이점? 그건 '총체성'에 대한 의견차이에 두어진다. "처음에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이음매 없는 전체로서 파악할 수 없었다."(138쪽) '처음에'는 'To begin with'를 옮긴 것인데, 당연히 '먼저'란 뜻이다(이런 사소한/자질구레한 오역들은 독자를 허탈하게 한다) . "그의 정신은 폐쇄가 아니라 개방에 의해서 풍부해졌다. 언제나 미세한 균열의 틈과 구멍이 존재했다. (루카치의) 상품화는 더할 나위 없는 개념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문화와 도시주의(=도시화), 모든 건축물 그리고 일상에는 다공성(porosity)이 존재한다."

벤야민이 나폴리에서 발견해낸 '다공성'이란 개념은 '벤야민과 도시'란 주제를 살필 때 핵심적인 것인데,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과 대비시킨 저자의 설명은 일품이다(내가 '다공성'이란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이다). 요컨대, 루카치의 '총체성' 대 벤야민의 '다공성'이란 구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차이 때문에 '가장 덜 실천적인 맑스주의자'가 한편으론 '가장 위대한 도시맑스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내가 아는 한 루카치에게서는 '도시(urbanism)'가 주제화되지 않는다).   

이를 약간 소급시켜서 적용해 보자. 루카치를 읽으면서 벤야민의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은 상품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장되는데, 그 둘은 결국 동일한 것이었다("they'd become one and the same"을 "그 둘은 하나가 되었고 같은 것이 되었다"라고 옮기는 것도 지극히 보기 드문 일이겠다). "그러나 일상의 문화와 경험을 정치-경제적 궤도에 옮겨놓는 것 또한 루카치의 맑스주의라는 브랜드를 붙여야 했다."(138쪽) 벤야민의 '다공성'에 대한 설명 바로 이전에 나오는 것으로 벤야민식 맑스주의를 루카치의 그것과 대비하고 있는 대목이다. 원문은 "But bringing everyday culture and experience into the orbit of political-economy also required a few caveats about Lukacs's brand of Marxism."(58쪽) 역자가 제대로 옮기고 있지 못한 것은 'caveats'란 단어. '보류' '단서' '경고' 등으로 사전에서는 풀이되고 있는데, 문맥상 '(벤야민식으로) 일상적 문화와 경험을 정치경제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또한 루카치식 맑스주의에 대한 몇 가지 유보사항을 필요로 했다" 정도의 뜻이겠다. 그 유보는 루카치가 가정/전제하는 '총체성'에 대한 유보이다.

나폴리의 '다공성'에 대한 설명. "모든 것은 여기에서 우발적인 것의 '극장', '대중적인 무대'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곳도 '그렇게 되거나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 두번째 문장의 원문은 "nowhere is it 'thus and not otherwise'"이다. 벤야민의 짤막한 에세이 <나폴리>로부터의 인용인데, 원문의 이중부정을 단순부정으로 옮김으로써 내용을 거꾸로 옮긴 사례이다. 모든 것이 '즉흥성을 향한 열정'에 의해 좌우되며, 우발적인 것에 개방되어 있다면, "어느 것도 그 밖의 다른 것이 될 수는 없다"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때문에 다른 장소가 될 수 없는 장소란 것은 없다"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이해하기 쉽게 옮기면, "모든 장소가 다른 장소로 변신이 가능했다" 정도이다. 해서, 나폴리에서는 공적인 생활/공간과 사적인 생활/공간이 마구 뒤섞이게 되는 것. 참고로, 나폴리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처음 착안되는 장소이다. 때는 1924년 여름. 수잔 벅 모스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이 벤야민의 텍스트 <나폴리>에 3쪽을 할애하고 있으며, 질로크는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그러한 '과소평가'에 이의를 제기하고 보다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140쪽으로 넘어가자(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인가?). "벤야민은 혁신적이고 경험적인 사상가"였다? '실험적인(experimental)'을 '경험적인'으로 잘못 옮겼는데, 안된 얘기지만 역자가 무식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무성의한가를 보여준다. 좀 심한 비난인가?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무식하며 무성의한가? 141쪽에서 '고상한 초현실주의적 경험(heightened surrealist experience)'는 '강화된/고양된 초현실주의적 경험'이 낫겠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이 그런 경험을 추구했다는 것인데, 벤야민은 좀 다른 방식을 시도한다. 그가 시도한 건 마리화나, 즉 마약이었다. "그는 해시시를 통해 환각 증사에 빠지길 시도했다." '해시시'('하시시')로 옮겨진 'hashish'는 사전에 따르면 통상 '마리화나'라고도 불리는 마약이므로 좀더 익숙한 용어로 옮겨지는 게 낫겠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 "그(=벤야민)는 의사인 에른스트 조엘에게 수 년 동안 마약중독자란 진단을 받아왔다. 조엘은... 벤야민이 주기적인 우울증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벤야민이 마약중독자라고? 원문은 "He'd been medically prescribed the drug for years by Dr. Ernst Joel... to help cope with periodic depression."이다. 내용은 벤야민이 주기적인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친구인 의사 조엘로부터 수년간 (치료용)마약을 처방 받아왔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감기약 등에도 치료용 마약이 소량씩 들어 있으며 이를 다량 복용하면 환각 증세를 일으킨다. 벤야민의 복용한/처방받은 것도 그러한 치료 목적의 마약이었는데, 벤야민이 복용량을 늘림으로써 약간의 환각상태를 경험하고 이를 근거로 <마르세이유에서의 하시시>란 글까지 썼다는 것. 벤야민이 '마약중독자'라는 내용을 어디에서 읽을 수 있나?(마약 복용과 마약중독은 엄연히 다른 문제이다.) 

어쨌든 벤야민은 마르세이유의 한 작은 호텔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며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읽다가 곧 환각상태에 빠져들게 되며(브라스밴드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그는 거리로 나와서는 항구의 선술집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약은 '그때까지만 해도 두려워했던 근본적인 예리함을 드러내며 그것의 진정한 마력'을 발휘했다." 벤야민으로부터의 인용문(내가 강조한 대목)의 원문은 "its canonical magic with primitive sharpness that I had scarcely felt then"이다. 이런 대목은 오역을 지적하기도 쑥쓰러운데, 역자는 'scarcely'란 부정부사를 '두려워했던'이라고 옮긴다(좀 심하지 않은가?). 여기서 'canonical magic'은 마리화나의 아주 '전형적인/일반적인 마력'이란 뜻이고, 그 마력의 내용은 감각이 아주 민감/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그때까지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몇 줄 내려가서 "그는 굴 몇 개에, 아마도 토끼고기나 닭고기를 따위를 먹었을 것이다."에서 '-했을 것이다'로 옮긴 조동사 'would'는 내가 보기엔 '-하곤 했다'는 뜻이다.)

이런 류의 '각성(覺醒)'의 경험이 초현실주의에 대한 벤야민의 경도를 설명해주지만, 한편으로 그는 마약에 의한 황홀경에 비판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자의 경험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단지 종교적 황홀경이나 마약에 의한 황홀경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142쪽) 진정한 초현실주의적 경험은 '세속적 계몽(profane illumination)'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유물론적인, 인류학적인 영감"이다. 아주 부실한 번역문들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 대목에 대한 설명이 또한 ('다공성'에 이어) 메리필드의 책에서 건질 만한 부분이다. 즉, 벤야민에게 있어서 사유란 '뛰어난 마약'이며, 진정한 계몽은 '세속적 계몽'을 통해서, 냉정한 텔레파시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것. 독서야말로 그 텔레파시의 과정인바, 벤야민이 1930년대 내내 파리의 국립도서관을 드나들며 했던 일, 즉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한 자료를 읽고 정리했던 일이야말로 바로 '세속적 계몽'이었으며, '뛰어난 마약'의 장기복용이었던 것이다!(해서, 우리의 청소년들이 배워야 할 것은 '본드'가 아니라 '독서'이다.)

물론 읽을 만한 대목이라고 해서 오역이 빠지는 건 아니다. "따라서 벤야민이 보기에 '신비스러운 것의 불가사의한 측면'에 있어 '신파조의' 혹은 '광신도적인 긴장'이 여태까지 이루어낸 것은 하나뿐이었다."(143쪽) 무슨 말인가? 원문은 "Thus, 'histrionic' or 'fanatical stress' on the mysterious side of the mysterious' takes one only so far, Bejamin thought."(강조는 나의 것, 역자는 'stress on'으로 이어지는 대목을 잘못 보고 있다) 벤야민이 강조하는 것은 '미스테리한 것'의 일상성, 일상적인 면모이다. 즉, 미스테리한 것은 연출되는 것도 아니며 들뜬 상태에서 포착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옮기면, "그래서, 벤야민이 생각하기에, 신비스러운 것의 신비스러운 면에 대한 과장적이면서도 열광적인 강조는 기껏해야 일면적일 뿐이다." 왜? 우리는 변증법적인 시각을 통해서, '불가해한 것으로서의 일상', '일상으로서의 불가해성'을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말로 신비스럽고 불가해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것들, 벤야민이 보기엔 저 '아케이드'와 '쇼핑몰' 속에 있다. 따라서, 벤야민이 "만약 초현실주의의 아버지가 다다(Dada)라고 한다면, 초현실주의의 어머니는 아케이드였다"(147쪽)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벤야멘에게서 '다공성'과 '세속적 계몽'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내 생각에 메릴필드에게서 배울 수 있는 핵심은 다 챙긴 것이 된다. 해서, 뒷부분은 그냥 대충 빨리 넘어가기로 하자. 152쪽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풍자적 문체와 천재성에 의지했지만, 파리를 향한 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게 "맑스보다도 시인 보들레르를 더 마음 속 깊이 사랑"했던 벤야민의 보들레르에 대한 태도인가? 원문은 "Benjamin got turned on by the poet's allegorical style and genus, to say nothing of his prodigious passion for Paris." 지적하기도 멋쩍은 일이지만, to say nothing of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은 말할 것도 없이'란 뜻이다(2+2는 5가 아니라 4라고 지적하는 식이니 낯간지럽다). 그리고 'turn on'은 여기서 '의지하다'가 아니라 '흥분되다' '매혹되다'란 뜻이다.

이어지는 문장. "그는 늘 보들레르에 대한 자신의 작업이 다름아닌 자신의 가슴에 소중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원문은 "Benjamin always insisted that his work on Baudelaire was more dear to his heart than any other."(65쪽)이고, 다시 옮기면, "벤야민은 언제나 자신의 보들레르론이 어느 작업보다도 그에겐 소중하다고 말했다." 즉, 비평가로서 자신이 많은 글을 썼지만,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보들레르론이라는 뜻이다. 'any other'를 '다름아닌'으로 옮겼는데, 문맥상 'any other works'란 뜻이다.

153쪽에서 '모호함(ambiguity)'는 '양가성'으로 옮기는 게 이해하기에 쉽다. 근대 파리의 설계자 오스망의 새로운 파리 건설에 대해서 보들레르/벤야민은 개탄했지만, 한편으론 그러한 파괴/건설이 나은 '감각적 즐거움'이라는 새로움도 인정했다는 것(오스망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자세하다). "새로움은 상품의 사용가치와는 독립적인(=무관한) 성질이다. 그것은 부지런한 식료품 상인의 유행이 어떤 것인가와 같은 착각의 원천이 된다." 무슨 소리인가? 원문은 "Newness is a quality independent of the use value of the commodity. It is the source of that illusion of which fashion is the tireless purveyor."이다. 복잡한 문장의 오역이라면, 지적하는 사람도 좀 덜 민망할 것이다. 관계사로 연결된 뒷문장을 분해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즉, Newness is the source of the illusion. + Fashion is the tireless purveyor of that illusion. 해서, "'새로움'이란 (상품물신이라는)환영의 원천이며, 패션은 그 환영의 지칠 줄 모르는 조달자이다."  

벤야민과 엥겔스와의 비교. "벤야민이 '오스망'에 대한 엥겔스의 생각을 인용하긴 했지만, 그의 맑스주의적 방침은 '주택문제'에 대한 엥겔스의 방침보다 오히려 치밀했다. 엥겔스가 자본주의적 근대화로부터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에, 벤야민은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총체적인 경험에 으해 큰 자극을 받았다."(153쪽). 두번째 문장에서 엥겔스 파트는 "Whereas Engels saw little apart from capitalist modernization"을 옮긴 것인데, 내용은 엥겔스가 자본주의 근대화를 약간 떨어져서, 즉 거리를 두고 보았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김에, 154쪽 끝에서 '1789년의 일(the work of 1789)'은 '1789년의 과업'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159쪽에서 "진실은 구체적이다(Truth is concrete)"란 브레히트의 유명한 공리는 "진리는 구체적이다'로 옮겨져야겠다. 더불어, 브레히트의 작품 <3페니 소설(Threepenny Novel)>은 <서푼짜리 오페라>를 말하는 것 아닌가? 브레히트와 벤야민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되고 있는데, 아도르노와 숄렘은 모두 브레히트가 벤야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걸로 평가한다. "그들은 브레히트가 갖고 있던 영악하고 복잡한 심성과 잘 제련되고 세련된 도구가 이제는 벤야민에게 잔혹한 회초리로 변했다고 말했다." 원문은 "Such a sophiscated and complex mind, they said, a fine-tuned instrument of precision, was now converted into a crude mallet."(68쪽) 일단 'Such a sophiscated and complex mind'와 'a fine-tuned instrument of precision'가 동일인으므로 번역문은 지지될 수 없다. '영악하고 복잡한 심성의 브레히트'? 뜬금없는 소리이다. 내용은 벤야민처럼 아주 섬세하면서 복합적인 심성의 소유자가, 아주 정밀하게 조율된 악기 같은 사람이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투박한) 나무 방망이처럼 변해버렸다는 얘기이다.  

지금까지 지겹게 나열한 이 세속적 '오역'의 대미는 나름대로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자본주의 도시를 세속적 계몽이나 혁명 속의 혁명적인 것으로, 또한 신뢰할 만한 빛의 도시로 평가한 최초의 맑스주의자였다"(160쪽)란 결론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좋으련만, 그리고 1940년 9월 피레네 산맥에서 스페인 국경을 넘으려던 벤야민이 50알의 모르핀을 한꺼번에 먹고 자살한 장면에서 끝났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으련만, 저자 메리필드는 가정법 문장들로 벤야민 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만약에 벤야민의 희망대로 무사히 미국에 망명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그는 (결국) 리버사이드 도로를 거닐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가 망명에 성공했더라면, 그래서 미국에 살았더라면, "의심할 나위없이 그는 웨스트사이드 위쪽 거리의 유태인 이민문화에 대해 편암함을 느꼈다."(161쪽) 이하의 과거시제 문장들은 전부 오역이다. 가정법 과거완료형의 문장들이기 때문에, '느꼈을 것이다'란 식으로 모두 수정되어야 한다. 다시 한번, 잔뜩 인상을 써야 할지 웃음을 지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번역 연습'을 '번역'으로 착각하고 책을 내는 일은 삼가해주었으면 싶다...

05. 08. 12-14.

P.S. 벤야민 장의 각주는 '발터 벤야민'이 아닌 '월터 벤야민'으로 표기돼 있다. 아마 본문과 각주의 역자가 달랐던 모양이다. 414쪽 각주22)는 유익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번에 국역본이 나온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발간과 관련된 것이다. "그 책은 전설적인 역사를 갖는다. 1940년 벤야민이 죽은 이후에도 그것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벤야민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로지를 때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커다랗고 낡은 서류가방 안에 그 원고가 있었던 것일까? 당국에 의해 압수당했던 것일까? 벤야민이 나치의 점령을 피해 달아나기 전에,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그 책을 국립도서관 안에 감추어 놓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981년, 이것은 1962년에 사망한, 벤야민의 친구이자 도서관의 전 기록보관인(=사서)인 조지 바타이유('조르주 바타이유'를 말한다)의 사유지에서 기적적으로 발굴되었다. 1년후, 파사젠베르크는 그 책을 독일어로 출판했고, 오랜 기다림 후에서야 벨넵(벨크넵) 출판사(Belknap Press)가 마침내 영어판을 출간했다."

'파사젠베르크'는 벤야민이 자신의 원고에 붙인 이름이고, 그것이 1982년에 드디어 출간됐다는 것. 그런데, '파사젠 베르크'가 그 책을 독일어로 출판했다고? 이 '지독한 무지'에 대해서는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는지? 더불어, 번역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벤야민이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가로지를 때 끈덕지게 끌고 다녔던 커다랗고 낡은 서류가방 안에 그 원고가 있었던 것일까?"에 대한 궁금중을 이 각주는 해결해 주는데,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의 책갈피 벤야민 약력에는 "벤야민은 1940년 9월 26일 밤, 에스파냐 국경 지역 포르 부에서 모리핀으로 자살한다. 그는 에스파냐 국경으로 향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파사젠베르크> 원고를 지니고 있었다."고 돼 있다. 물론 매우 '감동적'이지만 믿기지는 않았었는데(그는 원고를 위해서라면 자살해서는 안되었다!), 내막은 따로 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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