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철학자 마그리트
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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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푸줏간에서 한 여인이 좋은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끔찍한 콩팥 두 점을 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습니다.'(17쪽) 마그리트의 말이다. 그의 그림들이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이유가 절반은 숨어있지 않을까? 나머지 절반은 장담컨대, 저자인 수지 개블릭이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마치 '당신이 마그리트에게 알고 싶었던 모든 것, 하지만 차마 옆사람에게 물어보지는 못한 것'에 대해서 답해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마그리트와 그의 철학과 그의 회화에 대해서 폭넒고 깊이있게 쓰고 있다. 그래서 뒷표지에 실린 '확실히 마그리트 연구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타임스의 서평이 허사만은 아니지 싶다.

의미심장하게도 책의 시작은 '철학과 해석'이다. 사실 재현을 거부하는 그의 그림들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개념들의 낯선 병치와 그것이 거두는 효과이다. 이런 사실은 그가 일생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걸 알게 되면 아주 자연스레 이해된다.

요컨대 '회화작품에서 그는 거의 천부적인 싫증을 보여 주었으며, 권태, 피로, 혐오감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꾸며냈다'(9쪽) 그에게 회화가 가지는 의미? '그에게 있어서 회화란 정신이 지닌 두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들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으로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란'(9쪽)이었다.

그는 일생을 두고 자신의 생각(정신)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가의 특이한 유형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특이한 유형에 속한다. 넓은 의미에서 초현실주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브르통 등과 결별했던 것도 그런 기질상의 차이가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데 키리코와 시인 로트레아몽을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팝아트와 마그리트의 관계에 대해서도 요령있게 설명한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보다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회화에서의 '재현의 위기'를 주제화하고 있는 마그리트 회화의 특징과 그 전략이다. 그녀는 파이프를 그려놓고 밑에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아 어깃장을 놓는 그의 심보(?)를 아주 유려하게 해설해 보이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전략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138-140쪽) (1)회화에서 단어는 이미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단어=이미지) (2)회화에서 오브제는 단어나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다(오브제≠단어, 이미지) 그리하여 이제 더이상 재현적 회화란 가능하지 않으며 유효하지도 않다.

재현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회화적 불가능성에 직면한다. 무엇을 그린다는 것이 더이상 가능하지도 의미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는 무언가를 그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모순으로부터 현대 회화의 희소한 가능성과 과제가 동시에 산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비단 마그리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현대 회화를 조망하는 데 있어서도 아주 유익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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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데리다와 예일 마피아, 그들은 무슨 짓을 한 걸까?
데리다와 예일학파 - 모더니티총서 7
페터 지마 지음, 김혜진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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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미학>의 저자로 잘 알려진 페터 지마의 이 책은 데리다의 해체론과 '예일 마피아'라 불리는 그 미국식 적용(예일학파)에 대한 가장 뛰어난 입문서로서 읽힌다. 지마는 이미 여러 저작들을 통해 문학이론 분야에서의 뛰어난 '지도 제작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왔는데, 그가 그리고 있는 해체론의 지도 또한 명쾌하고 일목요연하다. 게다가, 막힘이 없는 훌륭한 번역에도 크게 빚지고 있을 테지만(몇 군데 오타가 흠이지만), 재미있다!

물론 이 책은 대중적인 교양서는 아니다. 데리다의 몇몇 저작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만, 아직까지도 해체론은 일종의 '막가파식 무정부주의'로 치부되기도 한다. 게다가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예일학파 구성원들의 저작은 해롤드 블룸의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입문서이긴 하지만, 문학비평과 이론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독자에게는 다소 난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읽기'이론으로서의 해체론이란 게 어떤 것이고, 그것은 어떤 사상적 계보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개개 비평가들에게 어떤 식의 변주를 얻고 있는가에 대해 약간의 흥미를 갖고 따라가 본다면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

먼저, 해체론은 해체(구성)론이다. 그건 일종의 번역론이고, 언어의 이동건축술이다. 번역론으로서의 해체론은 번역불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것을 칸트미학의 어법으로 표현하자면, '예술작품은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예술작품에 대한 개념적 이해 혹은 규정은 반드시 그 잉여(나머지)를 남기게 된다는 것. 따라서 모든 이해는 불충분하며 언제나 아포리아(불가해한 곤경)에 직면하게 된다. 그 아포리아를 데리다는 윤리적인 유희의 공간으로 만들고 폴 드 만 같은 비평가는 (이해의) 마비의 장소로 지목한다. 이러한 해체론의 선구적 계보로 지마가 제시하는 것은 칸트미학과 슐레겔의 낭만주의, 청년헤겔파, 그리고 니체이다. 사실 이러한 해체론의 윤곽은 그의 주저 <문예미학>에서 이미 암시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지마는 해체론적 전략에 비교적 호의적이면서도 때론 비판의 칼날을 감추지 않는다. 그 비판은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텍스트사회학적 입장에서 도출된다. 저자는 예술작품의 미적 자율성을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사회학적 규정과 양립할 수 있음을 줄곧 논증해 왔는데, 해체론은 그러한 사회학적 규정 혹은 사회 비판(헤겔과 하버마스 계보)에 무기력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저자인 지마에게서 문예미학, 혹은 문학이론은 칸트와 헤겔 사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론과 비판이론 사이의 변증법적 지양이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지마는 이 책에서 아도르노의 문학론을 이전의 저작들에서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지마는 몇 년 전에 방한하여 국내 대학에서 특별강연을 하기도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의 독어강연을 들으며 그때 받은 인상은 그가 훤칠하면서도 소탈한 유럽 신사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인상을 다시 떠올려볼 수 있었다. 더불어 오스트리아(중부유럽의 중립국)에 있는 대학에 오래 재직하고 있으면서 독어/독일철학, 불어/프랑스철학에 동시에 정통하다는 점이 그의 중립적인(지양적인!) 문학이론을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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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누가 라캉을 두려워하랴?
라캉 하룻밤의 지식여행 15
다리안 리더 외 지음, 이수명 옮김 / 김영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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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이 귀환하고 있다(그가 언제 억압되었던가?). 한때 근거없는(텍스트 없는!) 라캉 유행을 경계하면서 그의 대책없는 난해성과 현학에 대한 비판이 떠돌기도 했지만, 라캉의 한국 상륙, 혹은 라캉의 한국화는 더이상 저지할 수 없는 대세인 듯하다. 이미 그는 두툼한 책으로 <재탄생>되었고, 사위이자 유산 상속자인 알랭 밀레르 계열(지젝과 핑크 등)의 저작들도 연이어 번역되고 있다.(밀레르의 가장 큰 기여는 라캉 이론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 있다.) 그의 주저인 <에크리>와 세미나들도 곧 한국어본을 얻을 예정이라고 하니 아마도 푸코와 들뢰즈를 잇는 새로운 열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르겠다(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다리안 리더의 <라캉>은 그런 열풍을 슬쩍 예감하게 하는 미풍처럼 다가온다. 그 바람은 가볍고 경쾌하지만, 라캉의 매력과 라캉 읽기의 곤경 또한 집약적으로 전해준다. 라캉 자신이 '프로이트로의 귀환'을 이야기하고, 혹자는 프로이트를 읽지 않고 라캉을 읽는 일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래도 그 읽기의 순서는 라캉부터이어야 할 듯싶다. 우리가 아무리 프로이트를 읽어도 거기서 라캉이 도출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미 '라캉 이후의 프로이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후에 사람들이 나라는 의식 너머에 있는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무의식에 대해 근심했다면, 라캉 이후의 '나'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정신분석학은 여느 책처럼 읽어'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의 망각과 억압 속에서도 그것은 귀환한다! 라캉에 대한 거부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작동한다. 우리의 모든 신경증과 편집증과 분열증이 그의 수수께기 같은 언어들과 도식 속에서 되살아난다. '나'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선가 라캉은 모든 정신분석(학)은 저항을 동반한다고 했다. 그것은 라캉을 읽는 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그 '저항'이 바로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형식이다. 우리의 앎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방식으로(not-all) 이루어지니까. 거기엔 항상 어떤 잔여가 남는다. 어떤 불충분성이 항상 떠도는 것이다. 다리어 리더의 '만화'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라캉의 모든 것을 요약해서 전해주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이해의 막다른 길(impasse)에서 그대로 통과(pass)된다. 사실 그것이 이 책의 의의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지 징후이고 예감이며 미풍일 따름. 아직은 전부가 아닌(not-all) 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라캉을 두려워하기에 너무 이른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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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까치글방 145
리처드 로티 / 까치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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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이 주저는 꽤 오래전에 번역된 책이지만, 그다지 많이 읽히지는 않은 듯하다(꽤 오래전에 써두었던 리뷰를 다시 옮겨오는 이유이다). 사실 로티가 철학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한 철학교수의 말을 빌면, 문학이 철학에 맞먹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우수한 장르라고 치켜세우는 '反철학자'이다. 때문에 미국 본토에서는 "전문적 철학훈련이나 철학적 지식은 부족하면서 막연히 철학이라는 것에 흥미를 표시하는" 각종 문학자나 문학 교수들간에서 더 인기가 있다고. 

굳이 분류하자면 (한때) 로티의 애독자로서 나 또한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니 이런 식의 '뒷북치는' 리뷰가 흠이 되지는 않겠다. 좋아하는 걸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몇년 전 그의 내한 강연에도 나는 기꺼이 참석했었다). 한편, 기존 철학 패러다임의 종언을 주장하여 직업철학자 동료들의 미움을 산 로티 자신은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교수 자리를 내놓고 버지니아 대학의 인문학교수로 옮겨갔다가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걸로 안다(이젠 '비교문학자'라고 불러줘야 할까?).  

그럼, 로티의 어떤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또 통쾌하게 하는가? 전문철학자가 아닌 일개 문학도로서 이 점에 대해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제멋대로 말하자면, 그가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비판하는 있는 근대철학의 전통, 즉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이 걸어온 길은 근대의 철학적 이성이 ‘발명한’ 인간 '정신'이 '자연'이나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거울로서의 특권적인 지위를 확보하면서 모든 지식의 기초나 바탕이 될 만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자갈로 깔려 있는 길이다.

 

'인식론'에 정향되어 있는 그 길을 로티는 '토대주의'라고 부르고 그것을 일종의 병리적인 것으로 다룬다(로티는 자신의 철학이 ‘치료적’이라고 공표한다). 그것은 가지 않아도 될 길, 안 가면 더 좋았을 어떤 사유의 길이기에 그렇다. 이에 따라,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그 토대주의적 존재론 비판(1부), 토대주의적 인식론 비판(2부), 반토대주의적 철학관 제시(3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대안적 철학, 그러니까 근대철학이 ‘가지 않은 길’은 일종의 해석학으로서, 기존 철학이 누려왔던 제 1학문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한 '교화적 철학', 쉬운 말로 대화의 철학, 지혜의 철학이다.

 

이 새로운 철학, 제대로 된 철학은 다시금 과학이 아닌 우리의 일상적 삶을 철학의 중심적인 주제로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주장과 입장은 그 자체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으로서 영미철학의 주류였던 분석철학의 종말뿐만 아니라 인식론 전반, 더 나아가 전통적인 철학 전반에 대한 거부와 해체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과 논쟁이 벌어진 것은 당연하며, 로티는 그를 통해 철학계의 문제적인 인물이면서 중심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그의 논변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또한 일개 문학도로서는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나의 판단은 다만 그것이 그의 문제의식과 논변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독자 개개인이 수고스럽게 숙고할 만한 문제라는 것 정도이다. 그 수고스러운 길에 들어서는 독자가 유의할 것은 로티가 주장하는 새로운 철학이 기존의 철학적 언어-게임의 어휘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독해에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분석철학에 대한 예비지식이 어느 정도 요구된다. 비록 반(反)-철학, 탈(脫)-철학에 대한 일종의 선언적인 의미를 지니는 책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철학‘책이라는 걸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로티 자신은 철학적 논변에 대해서 매우 엄정한 태도를 갖고 있다. 그 자신 분석철학의 훈련을 받은 전도유망한 기대주이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나로선 이 문제적인 저작을 많이들 사서 읽어보시든가, 책장에 모셔놓든가 하시라고 권유하고 싶다. 특히 대중적인 철학교양서로서 이름높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독할 만하다. 듀란트는 그 책의 저자의 말에서 이렇게 적어놓았었다: ”저자는 인식론이 근대철학을 납치해서 거의 파멸시켰다고 믿는다. 저자는 인식과정의 연구가 심리학의 과제로 인정되고 철학이 다시금 경험 자체의 방식과 과정의 분석적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경험의 종합적 해석으로 이해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분석은 과학에 속하고 지식을 제공한다. 철학은 지혜를 위한 종합을 마련해야 한다.“ 로티는 바로 이런 듀란트의 믿음을 철학적으로 논증하고 실천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철학적 지식보다는 지혜를 좀더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 지혜에 대해서라면 문학이 철학에 전혀 뒤질 것이 없다. 헤르메스의 철학자 미셀 세르는 어느 대담에서 오직 과학만이 철학이 과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걸 이런 식으로 고쳐 말해도 무방하리라 나는 믿는다: “오직 철학만이 문학이 철학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철학을 좋아하는 이유이고 로티를 반기는 이유이다.  

 

참고로, 이 번역서에 대한 나의 유일한 불만은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라는 제목에 놓인다. 원제인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를 그냥 '철학과 자연의 거울'이라고 옮기지 않은 것은 다소 중의적인 이 번역에서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이격시켜놓기 위함일 터이지만, 그런 노파심이 우리말로 다소 어색한 지금의 제목을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내가 아는한 로티를 언급하고 있는 국내의 어떤  학자도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란 제목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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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노마드, 노마드, 노마드

교수신문(06. 04. 01)에 게재된 '트랜드비평: 노마드론의 전개와 철학적 쟁점'을 옮겨온다. 강성민 기자의 기사이며, 최근 인문출판의 '트랜드'도 짚어볼 겸 따라가면서 군말도 덧붙이도록 하겠다. 아래 사진은 라다흐의 노마드(유목민) 텐트와 노마드(유목민)들. 인용문의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Ladakh - Nomad TentLadakh - Nomads

-전 세계에 노마드(nomad, 유목) 열풍이 불고 있다. 노마드란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현재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방식으로, 특정한 소속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 동안 한국의 지적 담론에서 노마드는 이미 조금 낡은 말이 돼버린 감이 있었는데, 독일의 미래학자 군둘라 엥리슈가 펴낸 <잡노마드 사회>(문예출판사)에 이어 최근 프랑스의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가 <호모 노마드>(웅진출판)를 펴내면서 다시 유행에 불이 붙고 있다.

 

 

 

 

-그런데 아탈리의 노마드는 바뀌어진 인간의 보편적 삶의 조건을 관찰한 끝에 건져올려진 개념이라 철학적 유목과는 엄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최근 노마드가 신자유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는 이런 구분없이 전부 싸잡아 비판을 했다가 심각한 반론이 제기된 상황이다.

(*)교수신문 사이트에 갔다가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의 서평을 읽었는데, '심각한 반론'이란 건 그걸 지칭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식이다: "저자에게 물어보자. 철학이라는 게 무슨 장난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 책 뒤표지에 ‘농사꾼 철학자’라고 버젓이 씌어져 있다. ‘철학자’라는 말이 그렇게 만만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전구 다마 잘 갈아 끼면 물리학자인가? 찌개를 잘 끓이면 화학자인가? 물건 사고 돈 계산 잘 하면 수학자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지만, 저자야말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지식인인 척하는 인간이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된다: "서구 철학의 정점에서 나온 사유를 기본 공부도 안 된 대학원생이 그야말로 엉터리로 번역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번역본을 다시 엉터리로 읽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들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이야기를 듣고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비판’을 하고, 선정성에만 눈이 먼 기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책에 찬사를 던진다. 세상이 온통 사기요 장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를 떠나고 싶다."(*우리는 곧 한 철학자의 이민을 보게 될지 모르겠다.) 

여기서 '눈이 먼 기자들'은 여럿이겠지만, 짐작에 한겨레의 리뷰어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이정우의 <탐독>(아고라)와 나란히, 하지만 기사의 크기는 몇 배 더 크게 실린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의 리뷰는 이런 문단을 포함하고 있었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는 저자의 선언은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류의 유목주의(노마디즘)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이라도 되는 양 떠받들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세계시장제국주의와 신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변설임은 애써 외면'하는 세력을 겨냥하고 있다."

"말하자면 유목주의란 신자유주의, 세계시장제국주의, 신침략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열쇠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휘어잡고 있다. 밖으로는 유일 초대국 미국이 대표하는 서구 자본주의 문명, 안으로는 거기에 추수하는 노무현 정권, 그리고 '보상금 타먹고 체제 안에 들어간 옛 민주투사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우리 생명의 주권이고 공동체문화의 바탕인 쌀과 우리 농업도 전체국익(공산품 수출)을 위해서라면 버리고 가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한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이들의 가짜 진보에 열불을 못 참아 쓴 글들을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란다."

기사에서 '이런 구분없이 싸잡아 비판을 했다가'에 걸리는 내용이 대략 인용한 대목과 관련되지 않나 싶다. 여하튼 이정우 대표는 '보상금' 타먹은 '민주투사들'과 무관하겠지만, '노마드투사'로서 그러한 무차별적인 비판에 날세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공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의 저자인 농부철학자에게로 넘어간 듯하다. 계속해서 읽어본다. 

 

 


 

 

-국내에서 철학적 노마드를 유행시킨 사람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다. 그는 들뢰즈·가타리의 저작 <천의 고원>을 해설한 <노마디즘1·2>(휴머니스트)을 통해 그것이 “끊임없이 자신의 사유를 변이시켜가는, 앉아서 하는 유목”이라고 말했다. 어떤 외부적인 체계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탈주하면서 사는 것,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그것과 안녕하는 것이 노마드적 사유라고 말했다(*그러니까 노마디즘이 가리키는 것은 '노마드'가 아니라 '노마드 사유'이다. 즉, 철학에서의 노마드는 일차적으론 비유이다. 삶의 노마드들이 개념을 창안하고 깊이 생각할 만한 여유를 가졌을 법하지 않으니까 ).

-들뢰즈에 대한 이진경의 이러한 ‘번역’은 또 다른 들뢰즈 전문가인 김재인 씨에게 반박을 당하기도 했는데, “들뢰즈 철학에서 노마드는 그 존재감이 아주 미미하며, 명확한 개념규정도 되어있지 않은 단어일 뿐”이라는 것이다.(*그런 걸 따져보는 건 '전문가들'의 몫이겠지만, 노마디즘은 '들뢰즈의 정신으로' 이진경이 발명한 것이라고 하면 사실 더 따져볼 것도 없지 않을까. '공자 가라사대'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혹은 'Simon says'라고 하는 식으로.)  

-어쨌든 이것은 들뢰즈에 대한 두 국내학자의 해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진경의 압도적 대중성 때문인지 노마디즘은 들뢰즈가 주창한 것으로, 철학사적으로는 데리다의 ‘차연’과 비슷한 비중을 갖는 ‘탈주의 철학’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탈주냐 도주냐'란 논란에서만큼은 나는 김재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탈주'는 '성공한 도주'에 붙여질 만한 명명인바,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기들이 도공의 손에서 숱하게 깨어져 나가듯이, 예술(=탈주)은 험하고 어려우며 드문 것이다. 우리는 도공의 손바닥 안에 있다). 이 때 탈주한다는 것은 들뢰즈가 <철학이란 무엇인가>(현대미학사, 1995)에서 강조했듯 '과거의 개념을 가지고 사유하고 판단하는 철학'을 비판적으로 벗어나 '새로운 철학', '진짜 철학'을 한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사유가 우리에겐 이미 낯설지 않았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가 펴낸 <가로지르기>(민음사, 1997)란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이정우는 “요컨대 가로지르기는 이것저것 많이 하는 것도 아니요, 여기저기 방황하는 것도 아니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하지만, 이정우에 따르면 '가로지르기 철학'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를 프랑스어로 읽은 사람만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격자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그 격자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다”라고 말이다(*패러다임론은 다 같은 얘기 아닌지? 한편, 공평하게 말하자면 노마디즘이라는 격자 또한 그러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격자란 바로 들뢰즈가 말한 '과거의 개념'이란 말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정우의 ‘격자 파괴’는 이진경 식의 탈주 철학과 만나기보다는 ‘학제적 사유’의 원천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이진경과 이정우는 ‘리좀’에서 서로 접속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실체 중심의 서구 철학을 수목형(樹木型) 사유라고 비판하며, 또한 관계를 강조했지만 관계 그 자체가 딱딱해져 삶을 얽어매는 현대철학 역시 비판하며, 다양한 접속방식을 통해 관계가 끊임없이 생성하도록 고안한 철학적 체계를 말한다. 리좀적 사유는 유목적 사유의 수학적 풀이 정도인 것인데, 이정우는 이것을 동양 氣철학과 연결시켜 고찰하기도 했다. 유배된 氣의 부활을 말한다는 <기학의 모험>(들녘, 2004)이 그것이다. 여기서 그는 “개체는 氣를 제한하지만 기는 개체를 넘어서는 잉여로서, 개체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라고 파악한다. 이 때 그가 머리에 그리는 것은 주자의 ‘理一分殊’라는 동양적 ‘선험론’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기학’을 리좀적으로 재인식하는 것이다.(*<장자>에 보면, '氣-形-生-死'란 표현이 나온다. '기학'은 '형태학'과 '생명학' '죽음학'의 바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의 이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이러한 철학적 유목이 인구에 회자하면서 나타난 현상은 가관이었다. 우선 지식인의 존재론으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실천의 명제에서 존재를 설명하는 언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목적 주체>(로지 브라이도티 지음, 여이연, 2004)에서 이런 경향은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 정의하는 유목적 주체란 바로 페미니즘적으로 세팅된 여성인데, “남성중심적인 담론들과 정치경제에 깔려 있는 구조적 아포리아와 씨름하고, 기존의 범주들과 경험의 층위들을 가로지르며 혁명적 실천을 위한 혁명적 이론의 원천들을 찾아나서는” 여자들을 말한다. 페미니즘적 주체가 알고 봤더니 유목적 주체와 꼭 닮았다는 뒤늦은 자각이라고 할까. 하지만 게토화된 페미니즘의 지나친 캐치프레이즈 행위가 아닐까.(*멋있고 폼나는 페미니즘!) 

-또 어떤 이들에게 유목적 사유는 엄청난 실천적 에너지로 끌어 올려진다.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장시기, 당대, 2005)는 <도덕경>을 노마드적 텍스트로 규정하고, 노마드의 인식체계로 그것을 다시 읽어내는 작업이었다. 저자인 장시기 동국대 교수(영문학)는 ‘노마드’를 근대에 종지부 찍을 수 있는 하나의 관문으로 여길 정도로 열렬한 글을 많이 써왔는데, 그가 아프리카로 건너가 그곳 지식인들을 만나고 쓴 논문 ‘아프리카의 노마드적 주체와 탈근대 지식’을 보면 노마드 철학은 곧 새로운 지식의 체계를 건설하는 일로 간주되고 있다.(*'새로운 지식의 체계를 건설하는 일'이 왜 노마드 철학으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인지?) 

 

 

 

 

-여기서 그는 ‘탁월한 젊은 남아프리카인상’을 받은 대중적 지식인인 막스 두 프레즈의 삶을 노마드적 주체의 모습으로 제시한다. 남아프리카엔 근대화과정에서 만들어진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명백한 적이 있고, 이에 저항하는 탈식민담론이 발달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 장 교수는 이들 탈식민 주제를 노마드적 주체로 재명명하는 것일까. “근대적 주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지식의 창출”이라고 논문 내내 강조되지만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언급되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이쯤이면 '노마드'란 말은 '보드카'에 값한다. 어떤 술과도 잘 화합하는. 그러면서 숙취가 없는 술.)

-노마드는 철학을 벗어나 최근에는 정치학적인 담론으로도 사용됐다. 정치적으로 전유된 노마디즘은 중앙집권화라는 철옹성을 공략한다.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의 저자 조정환 씨는 “중앙집권적 방식으로 개개인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근대적 사유다. 하지만 이는 개체의 자율적 힘을 중립화·무력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라며 노마드가 새로운 개체와 힘의 연결을 의미한다고 본다. 또한 그는 철학적으로도 같은 논리를 사용해 “변증법에서 특수자는 보편자로 빨려들어가며 본질을 잃어버린다”며 “노마드는 이 특수자를 유지하면서 공통점을 찾아 연결시키는 사유”라고 강조한다. 나쁠 것 없는 훌륭한 설명이나, 과연 이것이 ‘차이’의 철학자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불분명하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실천적 방안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노마드적 정치가 가능하려면 일단 모든 시민은 먼저 '노마드'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아무튼 이런 여러 ‘유목적 사유’는 근본적이라는 것과 실용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비슷한 인식론 위에 있다. 그것은 ‘경계’를 없애고 스스로 ‘열려있다’는 태도이다. 노마디즘이 노동의 유연화를 주체성의 논리로 해석하는 것도 이런 낙관주의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낙관주의만큼 ‘대책없음’이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일견 '노마디즘'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쪽은 철학이나 예술인데, 그것이 개념과 이미지의 경계를 너머 삶의 현실로 '일반화'될 경우에 파생되는 문제점들이 아닐까 싶다. 들뢰즈는 삶의 리좀적 모델을 권유하지만, 그리고 물론 그게 '다른' 모델이긴 하지만, 진화과정상 그것이 나무 모델보다 더 빼어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며 윤리적인 것일까?)

-바로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는데 어느 선까지 열려 있고, 어느 선까지 닫혀있냐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완전히 열어놓는 철학적 상상력이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것. 최소한의 철학적 체계라는 것이 있는데 어디까지 열고 어디까지 닫는가의 경계선이 없으면 결국 모든 게 좋다거나 안좋다는 식의 발상과 같지 않을까. 다 열어놓고 넘나드는 게 멋있어 보이지만 기실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없지 않냐는 의혹은 쉽사리 유목적 사유에 동조할 수 없게 한다. 이는 氣에 대한 재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항상 몸에 규제되지 않는 잉여를 가지고 있다면 규제되는 기와 잉여의 기가 갖는 기본적인 속성 정도는 정의가 되어야 하는데, 형식논리학적인 기의 해석만으로는 그 안에 뭘 담아서 얘기하기가 무척 곤란하다는 것이다.

-또한 삶의 태도로서의 유목주의에 대한 비판도 이런 ‘담을 수 없음’에서 제기된다. 즉, “밥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실천적 성격이 약하다”는 것. 한 철학자는 “유목주의 하는 사람들은 ‘날으는 화살은 정지해있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한테 화살을 쏴보면 그 화살이 정지해 있지 않음을 실천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노마드적 사유'는 철학자 들뢰즈처럼 분명 폼나고 매력적이지만, 험난한 삶의 길바닥에서 '진짜' 노마드는 사유하지 않는다.

06. 04.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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