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노마드, 노마드, 노마드
교수신문(06. 04. 01)에 게재된 '트랜드비평: 노마드론의 전개와 철학적 쟁점'을 옮겨온다. 강성민 기자의 기사이며, 최근 인문출판의 '트랜드'도 짚어볼 겸 따라가면서 군말도 덧붙이도록 하겠다. 아래 사진은 라다흐의 노마드(유목민) 텐트와 노마드(유목민)들. 인용문의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전 세계에 노마드(nomad, 유목) 열풍이 불고 있다. 노마드란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현재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방식으로, 특정한 소속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 동안 한국의 지적 담론에서 노마드는 이미 조금 낡은 말이 돼버린 감이 있었는데, 독일의 미래학자 군둘라 엥리슈가 펴낸 <잡노마드 사회>(문예출판사)에 이어 최근 프랑스의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가 <호모 노마드>(웅진출판)를 펴내면서 다시 유행에 불이 붙고 있다.




-그런데 아탈리의 노마드는 바뀌어진 인간의 보편적 삶의 조건을 관찰한 끝에 건져올려진 개념이라 철학적 유목과는 엄밀한 구분이 필요하다. 최근 노마드가 신자유주의의 지배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는 이런 구분없이 전부 싸잡아 비판을 했다가 심각한 반론이 제기된 상황이다.
(*)교수신문 사이트에 갔다가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의 서평을 읽었는데, '심각한 반론'이란 건 그걸 지칭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식이다: "저자에게 물어보자. 철학이라는 게 무슨 장난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 책 뒤표지에 ‘농사꾼 철학자’라고 버젓이 씌어져 있다. ‘철학자’라는 말이 그렇게 만만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전구 다마 잘 갈아 끼면 물리학자인가? 찌개를 잘 끓이면 화학자인가? 물건 사고 돈 계산 잘 하면 수학자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지만, 저자야말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지식인인 척하는 인간이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된다: "서구 철학의 정점에서 나온 사유를 기본 공부도 안 된 대학원생이 그야말로 엉터리로 번역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번역본을 다시 엉터리로 읽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들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이야기를 듣고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비판’을 하고, 선정성에만 눈이 먼 기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책에 찬사를 던진다. 세상이 온통 사기요 장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를 떠나고 싶다."(*우리는 곧 한 철학자의 이민을 보게 될지 모르겠다.)
여기서 '눈이 먼 기자들'은 여럿이겠지만, 짐작에 한겨레의 리뷰어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다. 이정우의 <탐독>(아고라)와 나란히, 하지만 기사의 크기는 몇 배 더 크게 실린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의 리뷰는 이런 문단을 포함하고 있었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는 저자의 선언은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류의 유목주의(노마디즘)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이라도 되는 양 떠받들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세계시장제국주의와 신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변설임은 애써 외면'하는 세력을 겨냥하고 있다."
"말하자면 유목주의란 신자유주의, 세계시장제국주의, 신침략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열쇠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휘어잡고 있다. 밖으로는 유일 초대국 미국이 대표하는 서구 자본주의 문명, 안으로는 거기에 추수하는 노무현 정권, 그리고 '보상금 타먹고 체제 안에 들어간 옛 민주투사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우리 생명의 주권이고 공동체문화의 바탕인 쌀과 우리 농업도 전체국익(공산품 수출)을 위해서라면 버리고 가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한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이들의 가짜 진보에 열불을 못 참아 쓴 글들을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란다."
기사에서 '이런 구분없이 싸잡아 비판을 했다가'에 걸리는 내용이 대략 인용한 대목과 관련되지 않나 싶다. 여하튼 이정우 대표는 '보상금' 타먹은 '민주투사들'과 무관하겠지만, '노마드투사'로서 그러한 무차별적인 비판에 날세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고, 공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의 저자인 농부철학자에게로 넘어간 듯하다. 계속해서 읽어본다.



-국내에서 철학적 노마드를 유행시킨 사람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다. 그는 들뢰즈·가타리의 저작 <천의 고원>을 해설한 <노마디즘1·2>(휴머니스트)을 통해 그것이 “끊임없이 자신의 사유를 변이시켜가는, 앉아서 하는 유목”이라고 말했다. 어떤 외부적인 체계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탈주하면서 사는 것,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그것과 안녕하는 것이 노마드적 사유라고 말했다(*그러니까 노마디즘이 가리키는 것은 '노마드'가 아니라 '노마드적 사유'이다. 즉, 철학에서의 노마드는 일차적으론 비유이다. 삶의 노마드들이 개념을 창안하고 깊이 생각할 만한 여유를 가졌을 법하지 않으니까 ).
-들뢰즈에 대한 이진경의 이러한 ‘번역’은 또 다른 들뢰즈 전문가인 김재인 씨에게 반박을 당하기도 했는데, “들뢰즈 철학에서 노마드는 그 존재감이 아주 미미하며, 명확한 개념규정도 되어있지 않은 단어일 뿐”이라는 것이다.(*그런 걸 따져보는 건 '전문가들'의 몫이겠지만, 노마디즘은 '들뢰즈의 정신으로' 이진경이 발명한 것이라고 하면 사실 더 따져볼 것도 없지 않을까. '공자 가라사대'나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혹은 'Simon says'라고 하는 식으로.)
-어쨌든 이것은 들뢰즈에 대한 두 국내학자의 해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진경의 압도적 대중성 때문인지 노마디즘은 들뢰즈가 주창한 것으로, 철학사적으로는 데리다의 ‘차연’과 비슷한 비중을 갖는 ‘탈주의 철학’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탈주냐 도주냐'란 논란에서만큼은 나는 김재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탈주'는 '성공한 도주'에 붙여질 만한 명명인바,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기들이 도공의 손에서 숱하게 깨어져 나가듯이, 예술(=탈주)은 험하고 어려우며 드문 것이다. 우리는 도공의 손바닥 안에 있다). 이 때 탈주한다는 것은 들뢰즈가 <철학이란 무엇인가>(현대미학사, 1995)에서 강조했듯 '과거의 개념을 가지고 사유하고 판단하는 철학'을 비판적으로 벗어나 '새로운 철학', '진짜 철학'을 한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사유가 우리에겐 이미 낯설지 않았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가 펴낸 <가로지르기>(민음사, 1997)란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이정우는 “요컨대 가로지르기는 이것저것 많이 하는 것도 아니요, 여기저기 방황하는 것도 아니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하지만, 이정우에 따르면 '가로지르기 철학'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를 프랑스어로 읽은 사람만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격자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그 격자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다”라고 말이다(*패러다임론은 다 같은 얘기 아닌지? 한편, 공평하게 말하자면 노마디즘이라는 격자 또한 그러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격자란 바로 들뢰즈가 말한 '과거의 개념'이란 말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정우의 ‘격자 파괴’는 이진경 식의 탈주 철학과 만나기보다는 ‘학제적 사유’의 원천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이진경과 이정우는 ‘리좀’에서 서로 접속한다. 그것은 들뢰즈가 실체 중심의 서구 철학을 수목형(樹木型) 사유라고 비판하며, 또한 관계를 강조했지만 관계 그 자체가 딱딱해져 삶을 얽어매는 현대철학 역시 비판하며, 다양한 접속방식을 통해 관계가 끊임없이 생성하도록 고안한 철학적 체계를 말한다. 리좀적 사유는 유목적 사유의 수학적 풀이 정도인 것인데, 이정우는 이것을 동양 氣철학과 연결시켜 고찰하기도 했다. 유배된 氣의 부활을 말한다는 <기학의 모험>(들녘, 2004)이 그것이다. 여기서 그는 “개체는 氣를 제한하지만 기는 개체를 넘어서는 잉여로서, 개체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라고 파악한다. 이 때 그가 머리에 그리는 것은 주자의 ‘理一分殊’라는 동양적 ‘선험론’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기학’을 리좀적으로 재인식하는 것이다.(*<장자>에 보면, '氣-形-生-死'란 표현이 나온다. '기학'은 '형태학'과 '생명학' '죽음학'의 바탕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의 이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아무튼 이러한 철학적 유목이 인구에 회자하면서 나타난 현상은 가관이었다. 우선 지식인의 존재론으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실천의 명제에서 존재를 설명하는 언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목적 주체>(로지 브라이도티 지음, 여이연, 2004)에서 이런 경향은 잘 드러난다. 이 책에서 정의하는 유목적 주체란 바로 페미니즘적으로 세팅된 여성인데, “남성중심적인 담론들과 정치경제에 깔려 있는 구조적 아포리아와 씨름하고, 기존의 범주들과 경험의 층위들을 가로지르며 혁명적 실천을 위한 혁명적 이론의 원천들을 찾아나서는” 여자들을 말한다. 페미니즘적 주체가 알고 봤더니 유목적 주체와 꼭 닮았다는 뒤늦은 자각이라고 할까. 하지만 게토화된 페미니즘의 지나친 캐치프레이즈 행위가 아닐까.(*멋있고 폼나는 페미니즘!)

-또 어떤 이들에게 유목적 사유는 엄청난 실천적 에너지로 끌어 올려진다.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장시기, 당대, 2005)는 <도덕경>을 노마드적 텍스트로 규정하고, 노마드의 인식체계로 그것을 다시 읽어내는 작업이었다. 저자인 장시기 동국대 교수(영문학)는 ‘노마드’를 근대에 종지부 찍을 수 있는 하나의 관문으로 여길 정도로 열렬한 글을 많이 써왔는데, 그가 아프리카로 건너가 그곳 지식인들을 만나고 쓴 논문 ‘아프리카의 노마드적 주체와 탈근대 지식’을 보면 노마드 철학은 곧 새로운 지식의 체계를 건설하는 일로 간주되고 있다.(*'새로운 지식의 체계를 건설하는 일'이 왜 노마드 철학으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인지?)


-여기서 그는 ‘탁월한 젊은 남아프리카인상’을 받은 대중적 지식인인 막스 두 프레즈의 삶을 노마드적 주체의 모습으로 제시한다. 남아프리카엔 근대화과정에서 만들어진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명백한 적이 있고, 이에 저항하는 탈식민담론이 발달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어떤 근거로 장 교수는 이들 탈식민 주제를 노마드적 주체로 재명명하는 것일까. “근대적 주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지식의 창출”이라고 논문 내내 강조되지만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언급되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이쯤이면 '노마드'란 말은 '보드카'에 값한다. 어떤 술과도 잘 화합하는. 그러면서 숙취가 없는 술.)
-노마드는 철학을 벗어나 최근에는 정치학적인 담론으로도 사용됐다. 정치적으로 전유된 노마디즘은 중앙집권화라는 철옹성을 공략한다.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의 저자 조정환 씨는 “중앙집권적 방식으로 개개인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근대적 사유다. 하지만 이는 개체의 자율적 힘을 중립화·무력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라며 노마드가 새로운 개체와 힘의 연결을 의미한다고 본다. 또한 그는 철학적으로도 같은 논리를 사용해 “변증법에서 특수자는 보편자로 빨려들어가며 본질을 잃어버린다”며 “노마드는 이 특수자를 유지하면서 공통점을 찾아 연결시키는 사유”라고 강조한다. 나쁠 것 없는 훌륭한 설명이나, 과연 이것이 ‘차이’의 철학자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불분명하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실천적 방안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노마드적 정치가 가능하려면 일단 모든 시민은 먼저 '노마드'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아무튼 이런 여러 ‘유목적 사유’는 근본적이라는 것과 실용적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비슷한 인식론 위에 있다. 그것은 ‘경계’를 없애고 스스로 ‘열려있다’는 태도이다. 노마디즘이 노동의 유연화를 주체성의 논리로 해석하는 것도 이런 낙관주의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낙관주의만큼 ‘대책없음’이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일견 '노마디즘'이 빛을 발할 수 있는 쪽은 철학이나 예술인데, 그것이 개념과 이미지의 경계를 너머 삶의 현실로 '일반화'될 경우에 파생되는 문제점들이 아닐까 싶다. 들뢰즈는 삶의 리좀적 모델을 권유하지만, 그리고 물론 그게 '다른' 모델이긴 하지만, 진화과정상 그것이 나무 모델보다 더 빼어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며 윤리적인 것일까?)
-바로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는데 어느 선까지 열려 있고, 어느 선까지 닫혀있냐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완전히 열어놓는 철학적 상상력이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것. 최소한의 철학적 체계라는 것이 있는데 어디까지 열고 어디까지 닫는가의 경계선이 없으면 결국 모든 게 좋다거나 안좋다는 식의 발상과 같지 않을까. 다 열어놓고 넘나드는 게 멋있어 보이지만 기실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없지 않냐는 의혹은 쉽사리 유목적 사유에 동조할 수 없게 한다. 이는 氣에 대한 재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항상 몸에 규제되지 않는 잉여를 가지고 있다면 규제되는 기와 잉여의 기가 갖는 기본적인 속성 정도는 정의가 되어야 하는데, 형식논리학적인 기의 해석만으로는 그 안에 뭘 담아서 얘기하기가 무척 곤란하다는 것이다.

-또한 삶의 태도로서의 유목주의에 대한 비판도 이런 ‘담을 수 없음’에서 제기된다. 즉, “밥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실천적 성격이 약하다”는 것. 한 철학자는 “유목주의 하는 사람들은 ‘날으는 화살은 정지해있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한테 화살을 쏴보면 그 화살이 정지해 있지 않음을 실천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노마드적 사유'는 철학자 들뢰즈처럼 분명 폼나고 매력적이지만, 험난한 삶의 길바닥에서 '진짜' 노마드는 사유하지 않는다.
06. 04.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