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이글턴과 '이론 이후'

재작년 5월에 띄운 모스크바 통신문 가운데 '이론 이후에 무엇인 오는가?'라는 게 있었다. 당시에 모스크바에서 우편으로 받은 북매거진 <텍스트>(2004년 3월호)를 읽다가 해외서평란에 소개된 글을 읽고 간단한 코멘트를 적은 것이었는데, 그걸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텍스트>에서 ‘직업상’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해외서평란에 연재된 것인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영국의 맑시스트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신작 <이론 이후(After Theory)>(2003, 256쪽)에 대한 매튜 프라이스란 사람의 서평이 번역/소개돼 있었다(*이글턴의 책은 번역본이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제목은 ‘자기비판(The Self Critic)’이고, 부제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문학이론을 권했던 남자가 이제는 그들이 문학이론을 폐기하길 바라고 있다”이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서평에서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은 <문학이론입문>(1983)의 이글턴이다. 이 책은 국내에 2종(창비, 1986/ 인간사랑, 2001)이 번역돼 있고, 내가 알기엔 원저도 최소한 2판 이상을 찍었다(나는 원저의 2판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 친숙한 건 창비에서 나온 <문학이론입문>인데, 내가 이 책을 처음 본 건, 책이 나온 지 얼마 안된 시점인 학부 1학년 때 공대에 다니던 동창생의 하숙방에서였다. 물론 서점에서도 이 책을 봤지만, 비로소 이 책을 ‘알아’보고 흥미를 갖게 된 게 그때였던 것인데, 공대생도 읽는 문학이론서를 인문대생이 아직 읽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 묘한 경쟁/분발심이 생겼던 것 같다. 이후로 나는 이 책을 최소한 서너 번은 읽었는데, 책이 재미있기도 했고 ‘문학학회’의 이론 교재로서도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 소개돼 있는 문학이론입문서는 이글턴의 것 말고도, 레이먼 셀던의 책이나 입슈/포케마의 책 등이 있지만, 역시나 가장 개성이 강하면서도 권장할 만한 것은 이글턴의 책이다(셀던의 책도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있고 많이 읽히지만, ‘교과서’적이어서 개성이 떨어진다). 약간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8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문학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참조/인용하는 문학이론서로는 1위가 르네 웰렉과 펜 워렌의 <문학의 이론>이었다는 사실이다(2위가 미셸 제라파의 <소설의 사회사>였다). 요즘은 누가 웰렉/워렌을 읽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은 ‘적절한 시기’에 <문학의 이론>을 대체했다.

그런데, 제목과는 다르게,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은 문학이론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소개하면서 한편으론 공박하는 책이었다. 결론도 ‘정치적 비평’이 아니었나? 앞의 서평 부제는 ‘문학이론을 권했던 남자’로 이글턴을 지칭하고 있지만, 내가 아는 이글턴은 그러한 ‘이론’의 정치성을 폭로하면서, 이론의 과학성/객관성이라는 ‘허상’을 예리하고 비판하는 ‘반골적인’ 이글턴이다(그의 재치있고 신랄한 문체는 사르트르에 견줄 만했다!). 그러니까, 내가 읽기에는 이미 <문학이론입문> 시절부터 이글턴의 문제의식 속에 ‘이론 이후’가 함축돼 있었던 것인데, 신간은 웬 ‘뒷북’인가 싶기도 하다. “이론의 황금기가 지나간 지는 오래되었다”고?

 

 

 



현재 맨체스터대학의 ‘문화이론’ 교수로 재직중이라는 이글턴은 신간에서 이론이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혼란에 빠져 있는 것으로 진단/고발한다, 고 한다. 예컨대, “학계라는 거친 바닷가에서는 프랑스철학에 대한 관심이 매혹적인 프렌치키스에 대한 관심에 자리를 내놓게 되었다. 일부 문화연구 서클에서는 자위행위의 정치가 중동의 정치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데리다를 이용해서, 세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프렌즈>를 해체”하게 되었는바, 이글턴은 이것을 ‘정치적 재앙’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론이 언제나처럼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렇듯 이론(특별히 ‘포스트모던 이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즉, 이론은 ‘문턱’이지만, 비평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해방’ 혹은 ‘진리’는 이론 속에서 구해질 수 없다. 그런데, 이게 과연 새로운 주장인가? 이글턴이 언제 이론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를 늘어놓은 적이 있는가? 이론은 언제나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지 않았던가?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이러한 입장이 과연 이글턴에게서 ‘변화된’ 입장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정세의 변화에 따른 방점의 이동은 있을지언정(이론은 진보적일 수도 있고, 보수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지지도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이론관’이다), <이론 이후>에서 제기하고 있는 건 이미 20년전 <문학이론입문>에서도 충분히 암시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결론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1)이론에 대한 이글턴의 입장이 정말로 달라졌으며, 나는 이글턴을 오해하고 있었다. (2)이론에 대한 이글턴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서평자(혹은 어쩌면 이글턴 자신이)가 이글턴을 오해하고 있다.

물론 어느 쪽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신간을 읽어봐야겠지만, 내 생각에 이글턴은 문학이론을 권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폐기하길 바랄 이유도 없어 보인다. 그는 단지 이론의 오용/남용과 오염에 대해서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오용/오염이 제거될 수 없는 거라면, 물론 이론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때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은 ‘이론 이후의 이론’, ‘이론 이후에 관한 이론’일 것이다. 이글턴에 충실할 때, 우리는 이론이라는 ‘문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이론은 전부가 아니지만, 적어도 ‘최소한’이다). 비유컨대, 우리는 ‘언어’에 구속돼 있지만, 우리의 자유는 언어 ‘이전’이 아닌 ‘이후’에 얻어질 수 있듯이 말이다. 그것은 구원이 또한 우리의 비천한 삶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오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밝혀두자면, 상당한 식견과 적절한 언어구사를 통해서 이 해외서평을 번역하고 주를 단 역자에게서 나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좋은 번역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글턴의 이 신간이 번역된다면, 그 적임자의 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한가지 궁금한 건, 역자의 주8)에서 이글턴의 ‘포스트모던 사상’을 공박하고 로티와 함께 지목하다는 스탠리 피쉬의 대표작 'Is There a Text in This Class?'(1980)가 <이런 기준의 텍스트는 있는 것인가?>로 번역된 점이다. 'Class'란 말이 여기서 중의적이긴 하지만, 보통은 ‘수업’이나 ‘교실’로 옮기기 때문인데, 내가 그 책을 읽지 않아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Class'를 ‘기준’으로 옮긴 것은 특이해 보인다. 참고로, 피쉬의 이 책을 패러디한 글의 제목 중에는 'Is There a Fish in This Text?'란 것도 있다...

06.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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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8)

바쁜 일들에 치이다보니, 새로 나온 책들을 몇 권 사두고도 눈길 한번 주기 어렵다(*이 글은 2004년 3월 초순에 씌어졌다). 계획상으론 이 연재도 3번을 마저 채워야 하는데(*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30회를 채우고자 했었다), 이래저래 더 바쁘게 됐다. 막간을 이용하여, 몇 권의 책을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그리고 아마도 당분간은 읽기 힘든 책은, 조지 존슨의 <스트레인지 뷰티>(승산)이다. 물리학자 ‘머리 겔만과 20세기 물리학 혁명’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겔만의 전기이다. 지난 주말 이전에 나는 이 책을 첫손에 꼽을 작정이었지만, 이미 여러 지면에 크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때를 좀 놓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은 이런 류의 책이 나에겐 ‘휴식’ 같기 때문이다.

같은 출판사에선 나온 <뷰티풀 마인드>(2002)와 마치 시리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칼텍(캘리포니아공대)의 동료이자 ‘적대자’ 리처드 파인만의 인기 덕에 좀더 빨리 소개된 감이 없지 않다. 이미 여러 권의 물리학 강의가 번역돼 있는 파인만이 ‘유쾌한 천재’의 전형이라면, ‘쿼크’(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말)의 '아버지' 겔만은 ‘괴팍한 천재’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사실 겔만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복잡성 과학을 소개하는 책들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복잡성 연구의 메카인 산타페 연구소의 ‘대부’로 자주 소개되었다(‘머레이 겔만’이라고 보통 표기되었다). 이 연구소와 관련된 내용도 신간의 마지막 부분에는 실려 있다. 바로 그 겔만이 어떤 인물이었고, 무슨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라 할 만하다. 물론 부제처럼 ‘20세기 물리학’의 현장을 둘러보는 재미도 겸할 수 있겠고. 내가 ‘휴식 같은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문학이나 철학쪽 책들을 읽는 게 내겐 ‘일’이라면, 교양과학서나 과학자들의 전기를 읽는 건 ‘휴식’이다. 여름에 휴양지에서 읽으면 더더욱 제 맛인!...

 

 

 



두 번째 책은 다른 지면들에선 아직 소개되지 않은(아마도 이번 주말 리뷰들에선 다루어질)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그린비)이다. 그간에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 소개된바 있지만, 이번에 나온 신간을 통해서 이 ‘신형’ 사상가 비릴리오는 비로소 그 이름을 우리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언젠가 잡지 <문화과학>에 비릴리오를 소개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비릴리오는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에 끼친 변화를 면밀히 추적했다. 여기에는 속도의 가속화에 의한 변질 과정과 권력과의 상관관계도 포함된다. 인류는 속도를 통해 그들의 존재의의를 높여왔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생체속도(달리기, 돌격)와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를 거쳐 기계적 속도(함대, 자동차, 탱크)를 선점함으로써 동양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서구의 악몽이 됐다.” 등등의 내용이 다루어진다고(*그의 인터뷰집 등이 먼저 소개된다면 그의 책을 읽는 어려움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얼핏, 보드리야르를 연상케 하는데(키워드가 ‘시뮬라크르’에서 ‘속도’로 달라졌을 뿐?), <정보과학의 폭탄>의 역자가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인 배영달 교수인 것도 그러 심증을 갖게 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 신간의 역자가 배영달 교수가 아니라, 수잔 손택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 이재원씨인 것. 자신의 출판사 ‘이후’에서 책을 내지 않은 것은 ‘판권’ 때문으로 보이지만, 기간된 번역서들을 볼 때, 비릴리오로선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대개의 저자들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런 ‘운’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세 번째 책은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생각의 나무). 저자는 '영화 제임스 본드 007 시리즈의 서사체계 연구'란 논문으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한 ‘정통’ 영화서사학자이다. 이번에 두툼하게 나온 신간은 이미 예고돼 있었기 때문에 언제쯤 나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단 빨리 출간됐다. 덕분에, 이 분야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수고가 많이 덜어지게 됐다.

이 책은 그동안에 나온 이 분야의 역서들,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영화와 문학의 서술학>(동문선, 2003) 등이 갖는 불편함을 한꺼번에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은 믿기지 않는 오역들이 수시로 출몰하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말’ 입문서의 강점일 텐데, 다루어지는 내용도 기대보다 충실해 보인다.

영화이론 분야에서 국내 필자의 저작으로 내가 기억하는 건,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이론>(열화당, 1996)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박성수의 <디지털 영화의 미학>(문화과학사, 2001) 정도까지 더 끼워줄 수 있을까? 한국의 영화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네 번째 책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도서출판b)이다. 살레츨(살레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이어서 ‘슬로베이나학파 총서2’로 나온 이 책은 거의 ‘번역-기계’를 자처하는 역자의 땀과 자부심이 배어 있는 듯한 책이다. 신간은 살레클의 책보다 더 매끈하게 번역돼 있기 때문에, 역자 특유의 ‘기계적인’ 번역(모든 universe는 ‘우주’로, articulate는 무조건 ‘조음하다’로 등등)과 몇 개 번역어에 대한 ‘습관’ 혹은 ‘고집’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predemocratic을 ‘선-민주주의적’이라고 옮기는 식), 쉽게 보조비치의 통찰과 통할 수 있다.
내가 모든 번역서를 꼼꼼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스트레인지 뷰티> 같이 ‘휴식 같은 책’들은 발장난 치면서 읽는다), ‘일’로 읽는 책들은 ‘시’처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다. (하도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미 읽은 걸 또 읽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지젝이 서문과, 벤담(벤섬)의 판옵티콘론을 다루고 있으면서 표제가 된 6장 ‘암흑지점’을 읽었는데, 옥의 티처럼 눈에 띈 오역/오타 두 가지를 지적해둔다.

(1)7쪽에서 ‘(절제되지 않은) 나체의 이와 같은 외양’ ‘이와 같은 나체의 외양’은 ‘this appearance of the (unmutilated) naked body’를 옮긴 것으로 ‘나체의 이 같은 출현’의 오역이다. 이미 6쪽에서 “‘자연적인’ 그 나체가 오로지 데카르트적 근대성의 공간 내부에서 출현했다”고 지젝은 지적하며, 그것을 부연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부분인데, 역자는 ‘외양’에만 너무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190쪽, 중간에 ‘지각가능한 실재적 신체들’은 ‘perceptible real entities’를 옮긴 것인데, ‘지각가능한 실재적 실체들’로 옮기든가 (앞에서 entity를 ‘존재자’로 옮겼으므로) ‘지각가능한 실재적 존재자들’로 옮겨야 한다. 아마도 오타인 듯싶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이건 궁금한 것이기도 해서) 6쪽의 3행에서 역자가 “유사-여성주의적 주장을 때마침 생각해볼 때”라고 옮긴 대목에서 ‘때마침’은 (지젝이 즐겨쓰는) apropos of의 apropos를 옮긴 것인데, 이건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되는 단어이다. 이후에 나오는 apropos를 역자가 굳이 옮기지 않은 것처럼. 유독 이 대목만 ‘때마침’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본 것일까?

또, 188쪽. “행동이 사고를 따르는 속도라고 해도, 여기서 실행이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속도에 비해 가까스로 더 빠를까말까 하다”라는 벤섬 인용문은 “action scarcely follows thought quicker than execution might here be made to follow command.”를 옮긴 것인데, 일반적으로 scarcely나 hardly 같은 부정 부사어는 ‘거의 -않다’나 ‘결코 -않다’란 뜻이다(물론 ‘가까스로 -하다’란 뜻도 있다). 내 짐작에 이 문장이 번역과제로 주어진다면, 열에 아홉은 “사고에 뒤따르는 행동이라도 여기서 명령에 따르는 실행의 속도보다 결코 빠르지 않다.”라는 식으로 옮길 것 같다. 역자의 유머일까?

유머라고 하기엔 좀 썰렁한 대목도 있다. 160쪽에서, “벤섬이 ‘철학의 위대한 개혁가’였음을, 하지만 밀(J. S. Mill)의 견해와는 달리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판옵티콘과 허구이론이다.” 우리말로도 어색한데, 그건 ‘하지만’이란 접속사 때문이다. 원문은 “It is the panopticon and the theory of fictions that prove Bentham was not only 'a great reformer in philosophy' but, contrary to the opinion of J. S. Mill, also 'a great philosopher'."이다. 말 그대로 not only A but (also) B("A뿐만 아니라 B이다”) 구문인데, 거기서 but을 ‘하지만’이라고 굳이 번역하는 건 상당히 특이하다. 단순한 실수일까 싶었는데, 내가 읽은 대목 중 다른 한 곳에서도 이런 번역이 나오기 때문에, 나름대로 역자의 ‘지론’ 혹은 ‘노하우’인 것인지 궁금하다...

 

 

 

 
다섯 번째 책은 지난 연말에 나왔지만, 최근에 눈에 띈 이정호 교수의 <텍스트의 욕망>(서울대출판부, 2003)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읽기’를 표방하는데, 주로 영문학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저자 나름의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 편저를 포함해 10여권 남짓한 저자의 책들이 대부분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대학출판부 ‘단골저자’이다), 신간은 교양서라기보다는 교양학술서로 분류됨 직하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부 3.4학년이나 대학원생들에게 적합하다는 뜻이다. 저자의 책들을 여러 권 갖고는 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읽기에의 동기를 충분히 자극한다.

 

 

 



그밖에 미술 관련서들이 최근 1-2년 사이에 강세를 보이면서 국내 필자들의 수준있는 교양(학술)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나, 나의 안목은 첫눈에 그 질을 판가름할 만한 수준에 있지 않다. 최근에 신준형의 <파노프스키와 뒤러>(시공사)를 구입했는데, 전재국(전두환의 장남)이 운영하는 시공사의 책들도 요즘은 간간이 사는 걸 보면 책에 대한 욕심은 나의 정치의식을 능가한다(한동안 나는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도 사지 않았었다). 존 쿳시의 신간 <철의 시대>(들녘)를 비롯하여 문학 신간들도 여럿 나왔지만, 현재로선 내가 카바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쿳시의 책은 왕은철 교수의 번역으로 이후에도 여러 권이 더 출간됐다. 그의 최신간은 얼마전에 나온 <어둠의 땅>이다).

 

 

 

 

한국소설로는 김종호의 <검은 소설이 보내다>(열림원)에 대해서도 아직 할말이 없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저 인상만을 적자면, 김종호는 ‘베게트과’에 속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영문과 경쟁하고 이인성과 경쟁한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 혹은 개성이 남기 위해서는, 정영문보다, 그리고 이인성보다 잘 써야 하며, 더 멀리가야 한다. 내 관심은 그것이다. 과연, 그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라는 것(누군가 읽으신 분이 답해주시면 좋겠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쯤 가고 계시는 걸까?..

200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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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8)

바쁜 일들에 치이다보니, 새로 나온 책들을 몇 권 사두고도 눈길 한번 주기 어렵다(*이 글은 2004년 3월 초순에 씌어졌다). 계획상으론 이 연재도 3번을 마저 채워야 하는데(*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30회를 채우고자 했었다), 이래저래 더 바쁘게 됐다. 막간을 이용하여, 몇 권의 책을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그리고 아마도 당분간은 읽기 힘든 책은, 조지 존슨의 <스트레인지 뷰티>(승산)이다. 물리학자 ‘머리 겔만과 20세기 물리학 혁명’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겔만의 전기이다. 지난 주말 이전에 나는 이 책을 첫손에 꼽을 작정이었지만, 이미 여러 지면에 크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때를 좀 놓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은 이런 류의 책이 나에겐 ‘휴식’ 같기 때문이다.

같은 출판사에선 나온 <뷰티풀 마인드>(2002)와 마치 시리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칼텍(캘리포니아공대)의 동료이자 ‘적대자’ 리처드 파인만의 인기 덕에 좀더 빨리 소개된 감이 없지 않다. 이미 여러 권의 물리학 강의가 번역돼 있는 파인만이 ‘유쾌한 천재’의 전형이라면, ‘쿼크’(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말)의 '아버지' 겔만은 ‘괴팍한 천재’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사실 겔만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복잡성 과학을 소개하는 책들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복잡성 연구의 메카인 산타페 연구소의 ‘대부’로 자주 소개되었다(‘머레이 겔만’이라고 보통 표기되었다). 이 연구소와 관련된 내용도 신간의 마지막 부분에는 실려 있다. 바로 그 겔만이 어떤 인물이었고, 무슨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라 할 만하다. 물론 부제처럼 ‘20세기 물리학’의 현장을 둘러보는 재미도 겸할 수 있겠고. 내가 ‘휴식 같은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문학이나 철학쪽 책들을 읽는 게 내겐 ‘일’이라면, 교양과학서나 과학자들의 전기를 읽는 건 ‘휴식’이다. 여름에 휴양지에서 읽으면 더더욱 제 맛인!...

 

 

 



두 번째 책은 다른 지면들에선 아직 소개되지 않은(아마도 이번 주말 리뷰들에선 다루어질)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그린비)이다. 그간에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 소개된바 있지만, 이번에 나온 신간을 통해서 이 ‘신형’ 사상가 비릴리오는 비로소 그 이름을 우리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언젠가 잡지 <문화과학>에 비릴리오를 소개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비릴리오는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에 끼친 변화를 면밀히 추적했다. 여기에는 속도의 가속화에 의한 변질 과정과 권력과의 상관관계도 포함된다. 인류는 속도를 통해 그들의 존재의의를 높여왔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생체속도(달리기, 돌격)와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를 거쳐 기계적 속도(함대, 자동차, 탱크)를 선점함으로써 동양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서구의 악몽이 됐다.” 등등의 내용이 다루어진다고(*그의 인터뷰집 등이 먼저 소개된다면 그의 책을 읽는 어려움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얼핏, 보드리야르를 연상케 하는데(키워드가 ‘시뮬라크르’에서 ‘속도’로 달라졌을 뿐?), <정보과학의 폭탄>의 역자가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인 배영달 교수인 것도 그러 심증을 갖게 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 신간의 역자가 배영달 교수가 아니라, 수잔 손택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 이재원씨인 것. 자신의 출판사 ‘이후’에서 책을 내지 않은 것은 ‘판권’ 때문으로 보이지만, 기간된 번역서들을 볼 때, 비릴리오로선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대개의 저자들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런 ‘운’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세 번째 책은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생각의 나무). 저자는 '영화 제임스 본드 007 시리즈의 서사체계 연구'란 논문으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한 ‘정통’ 영화서사학자이다. 이번에 두툼하게 나온 신간은 이미 예고돼 있었기 때문에 언제쯤 나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단 빨리 출간됐다. 덕분에, 이 분야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수고가 많이 덜어지게 됐다.

이 책은 그동안에 나온 이 분야의 역서들,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영화와 문학의 서술학>(동문선, 2003) 등이 갖는 불편함을 한꺼번에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은 믿기지 않는 오역들이 수시로 출몰하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말’ 입문서의 강점일 텐데, 다루어지는 내용도 기대보다 충실해 보인다.

영화이론 분야에서 국내 필자의 저작으로 내가 기억하는 건,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이론>(열화당, 1996)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박성수의 <디지털 영화의 미학>(문화과학사, 2001) 정도까지 더 끼워줄 수 있을까? 한국의 영화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네 번째 책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도서출판b)이다. 살레츨(살레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이어서 ‘슬로베이나학파 총서2’로 나온 이 책은 거의 ‘번역-기계’를 자처하는 역자의 땀과 자부심이 배어 있는 듯한 책이다. 신간은 살레클의 책보다 더 매끈하게 번역돼 있기 때문에, 역자 특유의 ‘기계적인’ 번역(모든 universe는 ‘우주’로, articulate는 무조건 ‘조음하다’로 등등)과 몇 개 번역어에 대한 ‘습관’ 혹은 ‘고집’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predemocratic을 ‘선-민주주의적’이라고 옮기는 식), 쉽게 보조비치의 통찰과 통할 수 있다.
내가 모든 번역서를 꼼꼼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스트레인지 뷰티> 같이 ‘휴식 같은 책’들은 발장난 치면서 읽는다), ‘일’로 읽는 책들은 ‘시’처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다. (하도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미 읽은 걸 또 읽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지젝이 서문과, 벤담(벤섬)의 판옵티콘론을 다루고 있으면서 표제가 된 6장 ‘암흑지점’을 읽었는데, 옥의 티처럼 눈에 띈 오역/오타 두 가지를 지적해둔다.

(1)7쪽에서 ‘(절제되지 않은) 나체의 이와 같은 외양’ ‘이와 같은 나체의 외양’은 ‘this appearance of the (unmutilated) naked body’를 옮긴 것으로 ‘나체의 이 같은 출현’의 오역이다. 이미 6쪽에서 “‘자연적인’ 그 나체가 오로지 데카르트적 근대성의 공간 내부에서 출현했다”고 지젝은 지적하며, 그것을 부연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부분인데, 역자는 ‘외양’에만 너무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190쪽, 중간에 ‘지각가능한 실재적 신체들’은 ‘perceptible real entities’를 옮긴 것인데, ‘지각가능한 실재적 실체들’로 옮기든가 (앞에서 entity를 ‘존재자’로 옮겼으므로) ‘지각가능한 실재적 존재자들’로 옮겨야 한다. 아마도 오타인 듯싶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이건 궁금한 것이기도 해서) 6쪽의 3행에서 역자가 “유사-여성주의적 주장을 때마침 생각해볼 때”라고 옮긴 대목에서 ‘때마침’은 (지젝이 즐겨쓰는) apropos of의 apropos를 옮긴 것인데, 이건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되는 단어이다. 이후에 나오는 apropos를 역자가 굳이 옮기지 않은 것처럼. 유독 이 대목만 ‘때마침’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본 것일까?

또, 188쪽. “행동이 사고를 따르는 속도라고 해도, 여기서 실행이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속도에 비해 가까스로 더 빠를까말까 하다”라는 벤섬 인용문은 “action scarcely follows thought quicker than execution might here be made to follow command.”를 옮긴 것인데, 일반적으로 scarcely나 hardly 같은 부정 부사어는 ‘거의 -않다’나 ‘결코 -않다’란 뜻이다(물론 ‘가까스로 -하다’란 뜻도 있다). 내 짐작에 이 문장이 번역과제로 주어진다면, 열에 아홉은 “사고에 뒤따르는 행동이라도 여기서 명령에 따르는 실행의 속도보다 결코 빠르지 않다.”라는 식으로 옮길 것 같다. 역자의 유머일까?

유머라고 하기엔 좀 썰렁한 대목도 있다. 160쪽에서, “벤섬이 ‘철학의 위대한 개혁가’였음을, 하지만 밀(J. S. Mill)의 견해와는 달리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판옵티콘과 허구이론이다.” 우리말로도 어색한데, 그건 ‘하지만’이란 접속사 때문이다. 원문은 “It is the panopticon and the theory of fictions that prove Bentham was not only 'a great reformer in philosophy' but, contrary to the opinion of J. S. Mill, also 'a great philosopher'."이다. 말 그대로 not only A but (also) B("A뿐만 아니라 B이다”) 구문인데, 거기서 but을 ‘하지만’이라고 굳이 번역하는 건 상당히 특이하다. 단순한 실수일까 싶었는데, 내가 읽은 대목 중 다른 한 곳에서도 이런 번역이 나오기 때문에, 나름대로 역자의 ‘지론’ 혹은 ‘노하우’인 것인지 궁금하다...

 

 

 

 
다섯 번째 책은 지난 연말에 나왔지만, 최근에 눈에 띈 이정호 교수의 <텍스트의 욕망>(서울대출판부, 2003)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읽기’를 표방하는데, 주로 영문학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저자 나름의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 편저를 포함해 10여권 남짓한 저자의 책들이 대부분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대학출판부 ‘단골저자’이다), 신간은 교양서라기보다는 교양학술서로 분류됨 직하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부 3.4학년이나 대학원생들에게 적합하다는 뜻이다. 저자의 책들을 여러 권 갖고는 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읽기에의 동기를 충분히 자극한다.

 

 

 



그밖에 미술 관련서들이 최근 1-2년 사이에 강세를 보이면서 국내 필자들의 수준있는 교양(학술)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나, 나의 안목은 첫눈에 그 질을 판가름할 만한 수준에 있지 않다. 최근에 신준형의 <파노프스키와 뒤러>(시공사)를 구입했는데, 전재국(전두환의 장남)이 운영하는 시공사의 책들도 요즘은 간간이 사는 걸 보면 책에 대한 욕심은 나의 정치의식을 능가한다(한동안 나는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도 사지 않았었다). 존 쿳시의 신간 <철의 시대>(들녘)를 비롯하여 문학 신간들도 여럿 나왔지만, 현재로선 내가 카바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쿳시의 책은 왕은철 교수의 번역으로 이후에도 여러 권이 더 출간됐다. 그의 최신간은 얼마전에 나온 <어둠의 땅>이다).

 

 

 

 

한국소설로는 김종호의 <검은 소설이 보내다>(열림원)에 대해서도 아직 할말이 없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저 인상만을 적자면, 김종호는 ‘베게트과’에 속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영문과 경쟁하고 이인성과 경쟁한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 혹은 개성이 남기 위해서는, 정영문보다, 그리고 이인성보다 잘 써야 하며, 더 멀리가야 한다. 내 관심은 그것이다. 과연, 그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라는 것(누군가 읽으신 분이 답해주시면 좋겠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쯤 가고 계시는 걸까?..

200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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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8)

바쁜 일들에 치이다보니, 새로 나온 책들을 몇 권 사두고도 눈길 한번 주기 어렵다(*이 글은 2004년 3월 초순에 씌어졌다). 계획상으론 이 연재도 3번을 마저 채워야 하는데(*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30회를 채우고자 했었다), 이래저래 더 바쁘게 됐다. 막간을 이용하여, 몇 권의 책을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그리고 아마도 당분간은 읽기 힘든 책은, 조지 존슨의 <스트레인지 뷰티>(승산)이다. 물리학자 ‘머리 겔만과 20세기 물리학 혁명’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겔만의 전기이다. 지난 주말 이전에 나는 이 책을 첫손에 꼽을 작정이었지만, 이미 여러 지면에 크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때를 좀 놓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은 이런 류의 책이 나에겐 ‘휴식’ 같기 때문이다.

같은 출판사에선 나온 <뷰티풀 마인드>(2002)와 마치 시리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칼텍(캘리포니아공대)의 동료이자 ‘적대자’ 리처드 파인만의 인기 덕에 좀더 빨리 소개된 감이 없지 않다. 이미 여러 권의 물리학 강의가 번역돼 있는 파인만이 ‘유쾌한 천재’의 전형이라면, ‘쿼크’(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말)의 '아버지' 겔만은 ‘괴팍한 천재’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사실 겔만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복잡성 과학을 소개하는 책들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복잡성 연구의 메카인 산타페 연구소의 ‘대부’로 자주 소개되었다(‘머레이 겔만’이라고 보통 표기되었다). 이 연구소와 관련된 내용도 신간의 마지막 부분에는 실려 있다. 바로 그 겔만이 어떤 인물이었고, 무슨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라 할 만하다. 물론 부제처럼 ‘20세기 물리학’의 현장을 둘러보는 재미도 겸할 수 있겠고. 내가 ‘휴식 같은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문학이나 철학쪽 책들을 읽는 게 내겐 ‘일’이라면, 교양과학서나 과학자들의 전기를 읽는 건 ‘휴식’이다. 여름에 휴양지에서 읽으면 더더욱 제 맛인!...

 

 

 



두 번째 책은 다른 지면들에선 아직 소개되지 않은(아마도 이번 주말 리뷰들에선 다루어질)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그린비)이다. 그간에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 소개된바 있지만, 이번에 나온 신간을 통해서 이 ‘신형’ 사상가 비릴리오는 비로소 그 이름을 우리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언젠가 잡지 <문화과학>에 비릴리오를 소개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비릴리오는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에 끼친 변화를 면밀히 추적했다. 여기에는 속도의 가속화에 의한 변질 과정과 권력과의 상관관계도 포함된다. 인류는 속도를 통해 그들의 존재의의를 높여왔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생체속도(달리기, 돌격)와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를 거쳐 기계적 속도(함대, 자동차, 탱크)를 선점함으로써 동양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서구의 악몽이 됐다.” 등등의 내용이 다루어진다고(*그의 인터뷰집 등이 먼저 소개된다면 그의 책을 읽는 어려움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얼핏, 보드리야르를 연상케 하는데(키워드가 ‘시뮬라크르’에서 ‘속도’로 달라졌을 뿐?), <정보과학의 폭탄>의 역자가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인 배영달 교수인 것도 그러 심증을 갖게 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 신간의 역자가 배영달 교수가 아니라, 수잔 손택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 이재원씨인 것. 자신의 출판사 ‘이후’에서 책을 내지 않은 것은 ‘판권’ 때문으로 보이지만, 기간된 번역서들을 볼 때, 비릴리오로선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대개의 저자들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런 ‘운’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세 번째 책은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생각의 나무). 저자는 '영화 제임스 본드 007 시리즈의 서사체계 연구'란 논문으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한 ‘정통’ 영화서사학자이다. 이번에 두툼하게 나온 신간은 이미 예고돼 있었기 때문에 언제쯤 나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단 빨리 출간됐다. 덕분에, 이 분야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수고가 많이 덜어지게 됐다.

이 책은 그동안에 나온 이 분야의 역서들,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영화와 문학의 서술학>(동문선, 2003) 등이 갖는 불편함을 한꺼번에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은 믿기지 않는 오역들이 수시로 출몰하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말’ 입문서의 강점일 텐데, 다루어지는 내용도 기대보다 충실해 보인다.

영화이론 분야에서 국내 필자의 저작으로 내가 기억하는 건,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이론>(열화당, 1996)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박성수의 <디지털 영화의 미학>(문화과학사, 2001) 정도까지 더 끼워줄 수 있을까? 한국의 영화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네 번째 책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도서출판b)이다. 살레츨(살레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이어서 ‘슬로베이나학파 총서2’로 나온 이 책은 거의 ‘번역-기계’를 자처하는 역자의 땀과 자부심이 배어 있는 듯한 책이다. 신간은 살레클의 책보다 더 매끈하게 번역돼 있기 때문에, 역자 특유의 ‘기계적인’ 번역(모든 universe는 ‘우주’로, articulate는 무조건 ‘조음하다’로 등등)과 몇 개 번역어에 대한 ‘습관’ 혹은 ‘고집’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predemocratic을 ‘선-민주주의적’이라고 옮기는 식), 쉽게 보조비치의 통찰과 통할 수 있다.
내가 모든 번역서를 꼼꼼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스트레인지 뷰티> 같이 ‘휴식 같은 책’들은 발장난 치면서 읽는다), ‘일’로 읽는 책들은 ‘시’처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다. (하도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미 읽은 걸 또 읽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지젝이 서문과, 벤담(벤섬)의 판옵티콘론을 다루고 있으면서 표제가 된 6장 ‘암흑지점’을 읽었는데, 옥의 티처럼 눈에 띈 오역/오타 두 가지를 지적해둔다.

(1)7쪽에서 ‘(절제되지 않은) 나체의 이와 같은 외양’ ‘이와 같은 나체의 외양’은 ‘this appearance of the (unmutilated) naked body’를 옮긴 것으로 ‘나체의 이 같은 출현’의 오역이다. 이미 6쪽에서 “‘자연적인’ 그 나체가 오로지 데카르트적 근대성의 공간 내부에서 출현했다”고 지젝은 지적하며, 그것을 부연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부분인데, 역자는 ‘외양’에만 너무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190쪽, 중간에 ‘지각가능한 실재적 신체들’은 ‘perceptible real entities’를 옮긴 것인데, ‘지각가능한 실재적 실체들’로 옮기든가 (앞에서 entity를 ‘존재자’로 옮겼으므로) ‘지각가능한 실재적 존재자들’로 옮겨야 한다. 아마도 오타인 듯싶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이건 궁금한 것이기도 해서) 6쪽의 3행에서 역자가 “유사-여성주의적 주장을 때마침 생각해볼 때”라고 옮긴 대목에서 ‘때마침’은 (지젝이 즐겨쓰는) apropos of의 apropos를 옮긴 것인데, 이건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되는 단어이다. 이후에 나오는 apropos를 역자가 굳이 옮기지 않은 것처럼. 유독 이 대목만 ‘때마침’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본 것일까?

또, 188쪽. “행동이 사고를 따르는 속도라고 해도, 여기서 실행이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속도에 비해 가까스로 더 빠를까말까 하다”라는 벤섬 인용문은 “action scarcely follows thought quicker than execution might here be made to follow command.”를 옮긴 것인데, 일반적으로 scarcely나 hardly 같은 부정 부사어는 ‘거의 -않다’나 ‘결코 -않다’란 뜻이다(물론 ‘가까스로 -하다’란 뜻도 있다). 내 짐작에 이 문장이 번역과제로 주어진다면, 열에 아홉은 “사고에 뒤따르는 행동이라도 여기서 명령에 따르는 실행의 속도보다 결코 빠르지 않다.”라는 식으로 옮길 것 같다. 역자의 유머일까?

유머라고 하기엔 좀 썰렁한 대목도 있다. 160쪽에서, “벤섬이 ‘철학의 위대한 개혁가’였음을, 하지만 밀(J. S. Mill)의 견해와는 달리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판옵티콘과 허구이론이다.” 우리말로도 어색한데, 그건 ‘하지만’이란 접속사 때문이다. 원문은 “It is the panopticon and the theory of fictions that prove Bentham was not only 'a great reformer in philosophy' but, contrary to the opinion of J. S. Mill, also 'a great philosopher'."이다. 말 그대로 not only A but (also) B("A뿐만 아니라 B이다”) 구문인데, 거기서 but을 ‘하지만’이라고 굳이 번역하는 건 상당히 특이하다. 단순한 실수일까 싶었는데, 내가 읽은 대목 중 다른 한 곳에서도 이런 번역이 나오기 때문에, 나름대로 역자의 ‘지론’ 혹은 ‘노하우’인 것인지 궁금하다...

 

 

 

 
다섯 번째 책은 지난 연말에 나왔지만, 최근에 눈에 띈 이정호 교수의 <텍스트의 욕망>(서울대출판부, 2003)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읽기’를 표방하는데, 주로 영문학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저자 나름의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 편저를 포함해 10여권 남짓한 저자의 책들이 대부분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대학출판부 ‘단골저자’이다), 신간은 교양서라기보다는 교양학술서로 분류됨 직하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부 3.4학년이나 대학원생들에게 적합하다는 뜻이다. 저자의 책들을 여러 권 갖고는 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읽기에의 동기를 충분히 자극한다.

 

 

 



그밖에 미술 관련서들이 최근 1-2년 사이에 강세를 보이면서 국내 필자들의 수준있는 교양(학술)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나, 나의 안목은 첫눈에 그 질을 판가름할 만한 수준에 있지 않다. 최근에 신준형의 <파노프스키와 뒤러>(시공사)를 구입했는데, 전재국(전두환의 장남)이 운영하는 시공사의 책들도 요즘은 간간이 사는 걸 보면 책에 대한 욕심은 나의 정치의식을 능가한다(한동안 나는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도 사지 않았었다). 존 쿳시의 신간 <철의 시대>(들녘)를 비롯하여 문학 신간들도 여럿 나왔지만, 현재로선 내가 카바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쿳시의 책은 왕은철 교수의 번역으로 이후에도 여러 권이 더 출간됐다. 그의 최신간은 얼마전에 나온 <어둠의 땅>이다).

 

 

 

 

한국소설로는 김종호의 <검은 소설이 보내다>(열림원)에 대해서도 아직 할말이 없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저 인상만을 적자면, 김종호는 ‘베게트과’에 속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영문과 경쟁하고 이인성과 경쟁한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 혹은 개성이 남기 위해서는, 정영문보다, 그리고 이인성보다 잘 써야 하며, 더 멀리가야 한다. 내 관심은 그것이다. 과연, 그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라는 것(누군가 읽으신 분이 답해주시면 좋겠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쯤 가고 계시는 걸까?..

200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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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8)

바쁜 일들에 치이다보니, 새로 나온 책들을 몇 권 사두고도 눈길 한번 주기 어렵다(*이 글은 2004년 3월 초순에 씌어졌다). 계획상으론 이 연재도 3번을 마저 채워야 하는데(*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30회를 채우고자 했었다), 이래저래 더 바쁘게 됐다. 막간을 이용하여, 몇 권의 책을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그리고 아마도 당분간은 읽기 힘든 책은, 조지 존슨의 <스트레인지 뷰티>(승산)이다. 물리학자 ‘머리 겔만과 20세기 물리학 혁명’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겔만의 전기이다. 지난 주말 이전에 나는 이 책을 첫손에 꼽을 작정이었지만, 이미 여러 지면에 크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때를 좀 놓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은 이런 류의 책이 나에겐 ‘휴식’ 같기 때문이다.

같은 출판사에선 나온 <뷰티풀 마인드>(2002)와 마치 시리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칼텍(캘리포니아공대)의 동료이자 ‘적대자’ 리처드 파인만의 인기 덕에 좀더 빨리 소개된 감이 없지 않다. 이미 여러 권의 물리학 강의가 번역돼 있는 파인만이 ‘유쾌한 천재’의 전형이라면, ‘쿼크’(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말)의 '아버지' 겔만은 ‘괴팍한 천재’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사실 겔만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복잡성 과학을 소개하는 책들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복잡성 연구의 메카인 산타페 연구소의 ‘대부’로 자주 소개되었다(‘머레이 겔만’이라고 보통 표기되었다). 이 연구소와 관련된 내용도 신간의 마지막 부분에는 실려 있다. 바로 그 겔만이 어떤 인물이었고, 무슨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라 할 만하다. 물론 부제처럼 ‘20세기 물리학’의 현장을 둘러보는 재미도 겸할 수 있겠고. 내가 ‘휴식 같은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문학이나 철학쪽 책들을 읽는 게 내겐 ‘일’이라면, 교양과학서나 과학자들의 전기를 읽는 건 ‘휴식’이다. 여름에 휴양지에서 읽으면 더더욱 제 맛인!...

 

 

 



두 번째 책은 다른 지면들에선 아직 소개되지 않은(아마도 이번 주말 리뷰들에선 다루어질)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그린비)이다. 그간에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 소개된바 있지만, 이번에 나온 신간을 통해서 이 ‘신형’ 사상가 비릴리오는 비로소 그 이름을 우리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언젠가 잡지 <문화과학>에 비릴리오를 소개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비릴리오는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에 끼친 변화를 면밀히 추적했다. 여기에는 속도의 가속화에 의한 변질 과정과 권력과의 상관관계도 포함된다. 인류는 속도를 통해 그들의 존재의의를 높여왔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생체속도(달리기, 돌격)와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를 거쳐 기계적 속도(함대, 자동차, 탱크)를 선점함으로써 동양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서구의 악몽이 됐다.” 등등의 내용이 다루어진다고(*그의 인터뷰집 등이 먼저 소개된다면 그의 책을 읽는 어려움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얼핏, 보드리야르를 연상케 하는데(키워드가 ‘시뮬라크르’에서 ‘속도’로 달라졌을 뿐?), <정보과학의 폭탄>의 역자가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인 배영달 교수인 것도 그러 심증을 갖게 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 신간의 역자가 배영달 교수가 아니라, 수잔 손택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 이재원씨인 것. 자신의 출판사 ‘이후’에서 책을 내지 않은 것은 ‘판권’ 때문으로 보이지만, 기간된 번역서들을 볼 때, 비릴리오로선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대개의 저자들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런 ‘운’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세 번째 책은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생각의 나무). 저자는 '영화 제임스 본드 007 시리즈의 서사체계 연구'란 논문으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한 ‘정통’ 영화서사학자이다. 이번에 두툼하게 나온 신간은 이미 예고돼 있었기 때문에 언제쯤 나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단 빨리 출간됐다. 덕분에, 이 분야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수고가 많이 덜어지게 됐다.

이 책은 그동안에 나온 이 분야의 역서들,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영화와 문학의 서술학>(동문선, 2003) 등이 갖는 불편함을 한꺼번에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은 믿기지 않는 오역들이 수시로 출몰하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말’ 입문서의 강점일 텐데, 다루어지는 내용도 기대보다 충실해 보인다.

영화이론 분야에서 국내 필자의 저작으로 내가 기억하는 건,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이론>(열화당, 1996)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박성수의 <디지털 영화의 미학>(문화과학사, 2001) 정도까지 더 끼워줄 수 있을까? 한국의 영화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네 번째 책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도서출판b)이다. 살레츨(살레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이어서 ‘슬로베이나학파 총서2’로 나온 이 책은 거의 ‘번역-기계’를 자처하는 역자의 땀과 자부심이 배어 있는 듯한 책이다. 신간은 살레클의 책보다 더 매끈하게 번역돼 있기 때문에, 역자 특유의 ‘기계적인’ 번역(모든 universe는 ‘우주’로, articulate는 무조건 ‘조음하다’로 등등)과 몇 개 번역어에 대한 ‘습관’ 혹은 ‘고집’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predemocratic을 ‘선-민주주의적’이라고 옮기는 식), 쉽게 보조비치의 통찰과 통할 수 있다.
내가 모든 번역서를 꼼꼼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스트레인지 뷰티> 같이 ‘휴식 같은 책’들은 발장난 치면서 읽는다), ‘일’로 읽는 책들은 ‘시’처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다. (하도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미 읽은 걸 또 읽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지젝이 서문과, 벤담(벤섬)의 판옵티콘론을 다루고 있으면서 표제가 된 6장 ‘암흑지점’을 읽었는데, 옥의 티처럼 눈에 띈 오역/오타 두 가지를 지적해둔다.

(1)7쪽에서 ‘(절제되지 않은) 나체의 이와 같은 외양’ ‘이와 같은 나체의 외양’은 ‘this appearance of the (unmutilated) naked body’를 옮긴 것으로 ‘나체의 이 같은 출현’의 오역이다. 이미 6쪽에서 “‘자연적인’ 그 나체가 오로지 데카르트적 근대성의 공간 내부에서 출현했다”고 지젝은 지적하며, 그것을 부연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부분인데, 역자는 ‘외양’에만 너무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190쪽, 중간에 ‘지각가능한 실재적 신체들’은 ‘perceptible real entities’를 옮긴 것인데, ‘지각가능한 실재적 실체들’로 옮기든가 (앞에서 entity를 ‘존재자’로 옮겼으므로) ‘지각가능한 실재적 존재자들’로 옮겨야 한다. 아마도 오타인 듯싶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이건 궁금한 것이기도 해서) 6쪽의 3행에서 역자가 “유사-여성주의적 주장을 때마침 생각해볼 때”라고 옮긴 대목에서 ‘때마침’은 (지젝이 즐겨쓰는) apropos of의 apropos를 옮긴 것인데, 이건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되는 단어이다. 이후에 나오는 apropos를 역자가 굳이 옮기지 않은 것처럼. 유독 이 대목만 ‘때마침’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본 것일까?

또, 188쪽. “행동이 사고를 따르는 속도라고 해도, 여기서 실행이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속도에 비해 가까스로 더 빠를까말까 하다”라는 벤섬 인용문은 “action scarcely follows thought quicker than execution might here be made to follow command.”를 옮긴 것인데, 일반적으로 scarcely나 hardly 같은 부정 부사어는 ‘거의 -않다’나 ‘결코 -않다’란 뜻이다(물론 ‘가까스로 -하다’란 뜻도 있다). 내 짐작에 이 문장이 번역과제로 주어진다면, 열에 아홉은 “사고에 뒤따르는 행동이라도 여기서 명령에 따르는 실행의 속도보다 결코 빠르지 않다.”라는 식으로 옮길 것 같다. 역자의 유머일까?

유머라고 하기엔 좀 썰렁한 대목도 있다. 160쪽에서, “벤섬이 ‘철학의 위대한 개혁가’였음을, 하지만 밀(J. S. Mill)의 견해와는 달리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판옵티콘과 허구이론이다.” 우리말로도 어색한데, 그건 ‘하지만’이란 접속사 때문이다. 원문은 “It is the panopticon and the theory of fictions that prove Bentham was not only 'a great reformer in philosophy' but, contrary to the opinion of J. S. Mill, also 'a great philosopher'."이다. 말 그대로 not only A but (also) B("A뿐만 아니라 B이다”) 구문인데, 거기서 but을 ‘하지만’이라고 굳이 번역하는 건 상당히 특이하다. 단순한 실수일까 싶었는데, 내가 읽은 대목 중 다른 한 곳에서도 이런 번역이 나오기 때문에, 나름대로 역자의 ‘지론’ 혹은 ‘노하우’인 것인지 궁금하다...

 

 

 

 
다섯 번째 책은 지난 연말에 나왔지만, 최근에 눈에 띈 이정호 교수의 <텍스트의 욕망>(서울대출판부, 2003)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읽기’를 표방하는데, 주로 영문학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저자 나름의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 편저를 포함해 10여권 남짓한 저자의 책들이 대부분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대학출판부 ‘단골저자’이다), 신간은 교양서라기보다는 교양학술서로 분류됨 직하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부 3.4학년이나 대학원생들에게 적합하다는 뜻이다. 저자의 책들을 여러 권 갖고는 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읽기에의 동기를 충분히 자극한다.

 

 

 



그밖에 미술 관련서들이 최근 1-2년 사이에 강세를 보이면서 국내 필자들의 수준있는 교양(학술)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나, 나의 안목은 첫눈에 그 질을 판가름할 만한 수준에 있지 않다. 최근에 신준형의 <파노프스키와 뒤러>(시공사)를 구입했는데, 전재국(전두환의 장남)이 운영하는 시공사의 책들도 요즘은 간간이 사는 걸 보면 책에 대한 욕심은 나의 정치의식을 능가한다(한동안 나는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도 사지 않았었다). 존 쿳시의 신간 <철의 시대>(들녘)를 비롯하여 문학 신간들도 여럿 나왔지만, 현재로선 내가 카바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쿳시의 책은 왕은철 교수의 번역으로 이후에도 여러 권이 더 출간됐다. 그의 최신간은 얼마전에 나온 <어둠의 땅>이다).

 

 

 

 

한국소설로는 김종호의 <검은 소설이 보내다>(열림원)에 대해서도 아직 할말이 없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저 인상만을 적자면, 김종호는 ‘베게트과’에 속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영문과 경쟁하고 이인성과 경쟁한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 혹은 개성이 남기 위해서는, 정영문보다, 그리고 이인성보다 잘 써야 하며, 더 멀리가야 한다. 내 관심은 그것이다. 과연, 그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라는 것(누군가 읽으신 분이 답해주시면 좋겠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쯤 가고 계시는 걸까?..

200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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