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들뢰즈여! 안녕"
아침신문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학술기사가 있어서 옮겨온다. 교수신문에 실린 강성민 기자의 학술동향 기사이며 타이틀은 "적과의 동침 혹은 속임수... '들뢰즈여! 안녕'"이다. 국내 철학자의 들뢰즈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의 출간과 함께 다시금 들뢰즈에 대한 재조명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인지라 한번쯤 참고해볼 만하다.

교수신문(06. 06. 28) 국내 철학자가 들뢰즈에게 거의 '사망선고'에 가까운 判官의 언어를 가해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주인공은 프랑스에서 베르그송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계속 '문제적' 논문을 발표해온 박치완 한국외대 교수(철학)이다. 그는 최근 <철학연구> 제31집에 실린 '들뢰즈의 플라톤 비판과 시뮬라크르의 반란 또는 복수-'플라톤과 시뮬라크르'를 중심으로'에서 들뢰즈를 플라톤의 '도플갱어'라고 결론지었다(*강조는 기자의 것. 이하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먼저 박 교수의 비판 이전에 들뢰즈에 대한 비판들은 간혹 제기돼 왔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들뢰즈 10주기를 맞아 들뢰즈의 철학이 '긍정적인 것'을 이리저리 조직하는 일에만 골몰해 정신분석학 같이 병리현상(부정적)에서 출발하는 학문과 조우할 수 없다는 비판, 토론을 싫어하는 독불장군적 기질이 민주주의적 문제를 외면하게 만들고 윤리적 문제로 환원하게 했다는 비판이 가해진 바 있다.(교수신문 인터넷판 2005년 12월 4일자, "해외동향: 佛, 들뢰즈 10주기 맞아 논쟁 활발" 참조. *우연찮게도 어제 옮겨놓으려다 만 기사이다. 기사말미에 옮겨놓는다.)
-독일에서도 레만이라는 학자가 "변증법을 비판하는 들뢰즈가 변증법에 못지않는 사변적인 차이의 철학"을 늘어놓았다고 비판했다. 들뢰즈 이론이 워낙 추상적 사유에 바탕하는 지라 "현실 속에서는 대립관계에 놓인 것들을 차이들로 설명"한다며 허점을 짚어낸 바 있다.(교수신문 인터넷판 2006년 3월 8일자, "들뢰즈와 푸코는 니체를 어떻게 오해했나" 참조. *이기사는 같은 제목으로 옮겨놓은 바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들은 이번 박치완 교수의 비판에 비하면 점잖은 수준이다. 이런 비판들을 통해 들뢰즈에 대한 판에 박힌 인식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들뢰즈적 체계를 눈덩이처럼 불릴 뿐인 것이다. 어쨋든 들뢰즈는 현대철학의 주요한 사유의 수원지로서 기능하고, 노마디즘 같은 현대인의 존재조건과 결부되어 긴밀하게 참조되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주의로 전화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이런 주장을 낳는다. "들뢰즈는 자신이 그토록 비판한 플라톤 이래의 동일성의 철학과 가장 깊은 곳에서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식의 동조이다.


-그렇다면 박 교수의 비판으로 넘어와 보자. 그는 "모든 음모의 신화는 반드시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다름 아닌 우리의 세계를 그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그의 말의 수사나 '언어의 인플레'에 관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어째서 이런 들뢰즈와의 전격적인 작별을 권유하게 된 것일까. 들뢰즈의 정체성은 플라톤과의 대자 관계에서 성립되는 측면이 강하다. 플라톤 타파를 외친 들뢰즈였던 것이다. 박 교수는 두가지를 묻는다. 과연 그의 타파는 성공했는가, 그리고 타파 이후는 무엇인가. 그리고 답한다. 타파는 실패했고 타파 이후는 아무 것도 계획된 게 없다는 것.

-왜 실패인가. 들뢰즈는 플라톤에 대한 비판적 독서에서 "차이를 동일자나 유사성에 근거하지 않는 차이 자체로서 드러내주지 못한다"라고 1차적으로 비판한다. 플라톤이 실재와 이데아, 실재와 실재의 모방물을 구분할 때 어떤 하나(비순수 혈통)를 다른 하나(순수 혈통)와 비교하여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키는 데 목적이 있어 "모순의, 대립의 변증법도 아닌 경쟁관계의 변증법"이라는 것. 차이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게 이 부분에서 들뢰즈의 불만이었다.
-박 교수는 그러나 들뢰즈가 불만을 넘어 "플라톤이 시뮬라크르의 존재(?)에 도덕적 의미의 '악마적 속성'을 부여한 것에 격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로써 그는 도덕적 사유가 발동하는 유사성의 모델 자체를 벗어나 비유사성이 모든 사유의 원천이 되는 타자의 모델을 개발함으로써 마침내 구조를 부수고 그 표면으로 무수한 차이들을 기어나오게 만들게 됐다.
-그런데 "시뮬라크르가 동일성의 논리·구조에 대해 反구조적으로 기능하며, 구제 해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임무까지 떠맡아야 한다면 우리에게 너무 이질적인 것"이라고 박 교수는 질문을 시작한다. 원본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우주의 건설이 들뢰즈의 결론이라면 이런 들뢰즈의 작업은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도 정작 그 행위를 통해 아무 것도 지향하는 바가 없다"는 게 박 교수의 독해다. 전적으로 우리의 인식과 지각 대상 밖에 존재하며, 마치 모든 철학적 범주, 개념들 밖에서 유령처럼 떠돌면서 역설적으로 모든 철학적 범주, 개념들에 간섭하는 걸 어떻게 봐줘야 할까. 과연 이런 방식으로 플라톤주의의 타파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박 교수는 들뢰즈가 "오직 실재의 상에 대한 이미지의 위상을 자신의 상상의 공간, 즉 비장소 안에서 극대화시키고 있을 뿐"이라고 정리한다. 결국 실재의 인식이나 이에 대한 의미 부여는 전혀 안중에도 없고 오직 플라톤 식의 재현시스템의 전복에만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라고 계속 이어나가는데, 이런 집착은 "자신의 '차이' 개념을 새로운 철학의 중심에 위치시키려는 다분히 의도된 공격"이라는 게 박 교수의 견해.


-모더니즘의 붕괴기운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그걸 철학운동으로 연결시키고자 했던 것, 지나친 재현의 논리와 이걸 사유에 강요하는 것에 대한 분격 등이 좀더 내재적인 이유였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종국에 박 교수는 미셸 메이에르를 인용하면서 "차이의 보편적 권리가 이미 그리고 충분히 이념적으로 또는 현실적으로 확보된 마당에 여전히 절대 권리를 차이에 부여하려는 태도는 철지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내보인다. 혹은 윤성우의 저작 <들뢰즈: 재현의 문제와 다른 철학자들>이란 저작에서 주지되었듯 "재현이 갖는 다양한 층위를 고려하지 못하고 곧장 비표상적 결말과 파국으로 치달은 것"으로 평가된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자신의 작업을 일컬어 "우리 자신을 좀 흩뜨리는 것으로, 표면에 존재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우리의 피부를 북으로 사용하고 그래서 '위대한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과연 위대한 정치는 어떻게 구체화되었는가. 헤겔적 변증법을 넘어선 차이의 변증법이 있었던가. 혹시 박 교수의 표현처럼 "모든 사회,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금욕을 요구하는 플라톤 식의 유토피아가, 각자 절제하기 힘든 개인적 욕망을 자유방사하는 그런 무정부주의적인 디스토피아로 전락"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론은 이미 나왔지만, 박 교수는 들뢰즈가 반플라톤주의를 완성했다기보다 플라톤주의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으며, 시뮬라크르, 차이, 생성 등을 통해 동일성의 논리를 보충하기 위해 고심했다기보다, 철저히 對로 부각시키고 나아가서는 '위(上)'에 위치시키려 했기 때문에 결국은 플라톤 전복이 아니라 그와의 이념적 공모이며, 심하게 말하면 '시뮬라크르적 속임수'에 다름 아니라고 가혹하게 말한다.
-왜 이런 점증되는 표현의 반복을 통해 들뢰즈의 철학적 원리가 갖는 모순들이 강조되는 것일까. 왜냐하면 지금은 시뮬라크르들이 "요구하는 '권리'보다 순전히 이념지향적인 허구성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이기 때문이다. 들뢰즈 시대에는 시뮬라크르와의 유희가 건설적이고 유쾌한 사건으로 비칠 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비록 사고의 차원이라고 해도, 무정부주의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게 박 교수의 판단.
-신인섭 교수가 '메를로-퐁티와 시뮬라크르의 현상학'('철학' 제77집, 2003)에서 지적했듯 "현대철학은 많은 부분 언어적 인플레 속에서 전통 사유 체계의 전환을 시도하기 때문에 철학 내에서 이미 '지시적 지식'이 실종의 위기를 맞고 있고, 시뮬라크르 게임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있다." 어찌 이것이 철학만의 일일까. 역사학과 사회학은 모르겠지만, 그 언어와 화법이 철학을 철저히 빼닮은 문학 분야는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여진다(*들뢰즈 비판보다는 개인적으로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기자의 이 마지막 코멘트이다. 따로 특집으로 다루어지길 기대해본다).
06. 06. 28.
P.S. 교수신문(05. 12. 04) 해외동향: 佛, 들뢰즈 10주기 맞아 논쟁 활발
-들뢰즈가 1995년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한지 10년이 지났다. 그에 대한 추모 혹은 기억은 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을 도구상자 삼아 끊임없이 개념들, 기능들, 지각들을 발명해내는 일일 것이다. 비록 들뢰즈 자신은 토론에 대한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철학이 빚어낸 사건 그리고 효과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프랑스에서 진행 중인 들뢰즈 관련 논쟁들 중 두 가지를 간략히 조망해보고자 한다.

들뢰즈와 정신분석학
-지난 9월 출간된 모니크 다비드-메나르드의 <들뢰즈와 정신분석학 : 말다툼>은 철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의 미묘한 "트집 관계"를 들뢰즈의 철학 속에서 살펴보고, 철학에서 정신분석학의 자리 문제를 다룬다. 그녀가 지적하듯이, 실천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 뭔가 작동되지 않는 것('부정적인 것'), 즉 증상이나 징후에서 출발하는 반면, 사유로서의 들뢰즈의 '철학'이 ‘긍정적인 것’에만 주목하는 한, 이 둘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특히 "슬픈 정념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그녀의 질문은 정신분석학과 스피노자-들뢰즈 사이의 쟁점을 직접적으로 제기한다. 이는 부정적인 것에 주목하는 정신분석학과 긍정적인 것에 주목하는 철학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을 환기시키며, 헤겔 변증법과 들뢰즈의 반변증법 논쟁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이 큰 문제를 모두 다루기보다는 '슬픈 정념'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본 논쟁의 관건은 정신분석학이 제기하는 "슬픈 정념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스피노자-들뢰즈의 입장에서는 잘못 제기된 문제라는 데 있다.
-첫째, 스피노자-들뢰즈에게 정념은 신체들이나 물체들의 마주침의 효과 및 그에 대한 적합한 혹은 부적합한 인식에 해당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실천 철학’에서, 우리 신체와 부합하지 않는 신체와 마주치는 가운데 나오는 슬픈 정념 - 그것은 우리를 파괴하거나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대한 부적합한 관념에 불과하다 - 에서는 공통 개념이 나올 수 없으며, 후자는 오로지 기쁜 정념 - 그것은 우리가 행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증가시킨다 - 으로부터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처방은 좋은 마주침을 선별, 조직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
-둘째, 정념은 마치 사건과도 같아서 (다른 개체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 혹은 (우리의 신체에 나타나는) 표면-효과이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슬프다 혹은 기쁘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것들이 우리의 얼굴 혹은 몸을 가로질러 표현될 뿐이다. 그러므로 슬픈 정념 자체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 되는 신체들과 그들간의 마주침을 어떻게 새로이 조직하느냐가 문제다. 더불어, 정신분석학이 가정하는 인간주의는 정서(affect)를 사물, 개체의 차원에서 고려하는 스피노자주의에는 낯선 것이다. 스피노자-들뢰즈에게는 오히려 동물 행동학, 나아가 개체 행동학이 중요하다.
-결국,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 자체에 정신분석학이 참고 대상이었느냐의 여부를 떠나, 그의 철학 자체와 정신분석학을 화해시키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들뢰즈와 정치
-2003년에 5월 출간된 <들뢰즈와 민주주의의 문제>에서 필립 멍그는 들뢰즈의 철학 자체에 고유한 의미로서의 '정치'는 부재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은 올해 초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그리고 정치’ 콜로키움에서 다시 한 번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열기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논점을 두 가지만 간략히 언급해보자.
-첫째, ‘대담’에 등장하는 "생성과 역사의 구분"은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가 스토아학파를 따라 발전시킨 순수 사건과 사물의 상태 사이의 구분과 유사하다. 이는 현재의 어떤 역사적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고, 항상-이미 지나갔거나 도래할 것으로서의 혁명, 순수 사건으로서의 혁명[아이온의 평면]과 신체 안에 이 혁명을 등록, 체화해야할 필요성[크로노스의 평면] 사이의 아포리아로 이어진다. 과연 이 두 평면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둘째, 들뢰즈가 강조하는 소수, 미시 정치에 대한 파악이 특정한 지식인의 전유물인 듯 보이는 ‘지성’의 질서에 속하는 한, 그의 정치는 엘리트주의적이자 아방가르드적이다. 덧붙여 토론에 대한 들뢰즈의 혐오는 곧 바로 '토론'을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연결된다. 그리고 들뢰즈는 민주주의 혹은 정치에 대한 고민을 윤리에 대한 논의로 환원한다.
-궁극적으로 멍그는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생성'에 대한 예찬과 노마디즘에 대한 피상적 이해가 낭만주의적인 치기로 흐르고 있으며, 오히려 연대와 합의에 기초한 정치적인 내재성의 평면, 즉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가 제기한 생성과 역사의 구분 문제는 슬라보이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들>이나 <지젝과의 대화> 등에서 들뢰즈의 이론 자체 내의 아포리아로 취급된 바 있다. 신체가 먼저인가, 비인격적이고 잠재적인 사건들, 흐름들, 생성들이 먼저인가. 사건은 신체들의 비물질적 효과인가[‘의미의 논리’의 유물론] 아니면 신체야말로 생성 혹은 사건의 순수 흐름의 생산물[‘안티-오이디푸스’의 관념론]에 불과한 것인가. 또한 들뢰즈(철학)의 반민주주의 성향에 대한 혐의 제기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토론인 이종영 교수의 ‘들뢰즈-가타리의 파시즘’론 혹은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역시 이런 문제들은 들뢰즈 연구가들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마놀라 안토니올리가 최근 <들뢰즈, 철학적 유산>에 기고한 글인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적 기계화’에서 말하듯이, 리비도적인 에너지 혹은 생성들로부터 '순수' 정치 영역을 분리해내려는 시도는 환상에 불과하며, 새로운 정치적 기획은 오히려 생산 양식, 행동 형식, 감수성, 삶의 양식, 기술, 환경, 제도, 사회에 대한 관계의 변화를 가정한다.
-물론 이것은 들뢰즈를 ‘반복하는’ 답변이기는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들뢰즈가 ‘대담’에서 말한 "자본주의 및 그것의 발전 과정에 주목하는 정치철학" 연구야말로 그를 읽는 자들에게 남겨진 과제 중 하나이며, 네그리와 하트의 작업을 비롯한 자율주의의 자본주의 분석 및 삶정치론은 그러한 실천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후자는 또한 멍그가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다중이 공유하고 있는 일반지성, 언어 능력, 이동성 등에 기초하여, 공통적인 것 - 그것은 동일성이나 보편성, 더군다나 파시즘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부합하는 신체들 간의 즐거운 마주침의 조직화에 가깝다 - 의 구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성'이 소수 전위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기존 민족-국가들 사이의 경계의 와해 및 이주 노동자들의 통제 불가능한 흐름에 대한 착목은 포획이나 제도에 대한 탈주, 생성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는 고유하게 들뢰즈적인 관념을 계승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고유하게 정치적인 공간이 부재하는 현 상황에서, 정치적 문제는 존재 방식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라는 윤리적인 기획의 차원에 접속되어야 한다. 그런 한에서 삶권력에 대한 분석 및 삶정치에 대한 모색은 그것이 들뢰즈-가타리 정치철학의 적자(嫡子)이냐 아니냐의 여부와 무관하게 구체적이고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위 두 논쟁에서 공통되게 발견되는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언급한 내재성의 평면의 구성 요소인 철학(개념), 과학(기능), 예술(지각)에 왜 정신분석학이나 정치는 추가되어서는 안 되느냐 혹은 왜 이 마지막 둘은 철학에 사유 거리를 제공하지 못하느냐라는 정당한 문제제기다. 그러나 그 둘을 덧붙인다면 우리는 바디우의 철학의 조건들 - 정치, 과학(수학), 사랑, 예술(시) - 이나 그 밖의 전혀 다른 철학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더 이상 들뢰즈의 철학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데 들뢰즈의 개념들이 도구 상자로 쓰였다면 그것도 또한 기쁜 일이 아닐까.(양창렬 프랑스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