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노마디즘 대 노마디즘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 2006)에 대한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서평을 비판하는 홍윤기 교수의 글이 게재됨에 따라 '노마디즘(유목주의)을 둘러싼 싸움'이 재점화되고 있다(<황해문화>에 실린 글은 읽어보지 못했다). 이정우 대표가 비판에 답하고 있고, 홍윤기 교수가 재반박하고 하는 식이다. 이를 테면, '난타전'이다.

 

 

 

 

노마디즘에 관하여 몇 마디 적어야 했던 필요 때문에 한동안 노마디즘에 관한 자료 페이퍼들을 여러 차례 올려놓은 바 있는데(나의 의견은 '노마디즘에 대하여'에 정리돼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 '연장 논전'을 옮겨놓는다. 두 글 모두 교수신문(06. 06. 05)에 게재된 것이다(대부분의 강조는 나의 것이지만, 몇몇 단어들의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이정우, "홍윤기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천규석의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다>를 읽으면서 황우석을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연한 문제들이 얽혀 난맥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윤기가 몹시 거친 글을 다시 얹음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홍윤기의 글에 대해 직접적 대응을 하기보다는(그럴 경우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질 수 있기에) 천규석, 홍윤기,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한다. 수많은 오류들이 얽혀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매우 중요한 하나의 오류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이정우가 <천 개의 고원> 대신에 <천의 고원>이라고 줄곧 적는 것은 국역본 <천 개의 고원>에 대해서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전면 재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탐독>(아고라, 2006) 참고. 나는 다소 편파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오역의 실례들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지도 않기에 현재로선 더욱 그렇다.) 

-가령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보자. 홈 패인 공간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 홈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반면 매끄러운 공간은 이런 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다른 종류의 운동이 가능하다. 대부분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A라는 공간은 홈 패인 공간이다.” 이런 식의 명제는 들뢰즈/가타리에게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것은 마치 “10kg은 무거운 무게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한 명제이다. 무겁다/가볍다는 것은 대립의 관계도 아니고(‘대립’이라는 두 실재/실체가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인 정도(degree)의 관계이다. 10kg은 11kg보다 가벼우며 동시에 9kg보다 무겁다. 어린아이에게는 무겁지만 트럭에게는 가볍다. 이 관계를 마치 가벼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고 무거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어 그 둘이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요컨대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이는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이건 노마디즘에 대한 이정우의 반복적인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그에 따르면, '노마디즘'은 어떤 '존재'가 아니다. 이는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한 공간이 시간성을 얼마나 내포하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지표(index)일 뿐인 것이다. 무거움, 가벼움은 어떤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존재에 붙는 성격들이다. 마찬가지로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도 존재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이다.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말이다.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樹木型)은 나쁜 것이라는 식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모든 오해들의 절반 이상이 바로 이 오해에서 유래하는 듯싶다.(*이러한 오해는 사실 국내 들뢰지안들이 양산한 것 아닌가?) 리좀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암(癌)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 아닌가? 초국적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바이러스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암, 초국적 기업들, 바이러스 등을 좋은 것들로 간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리좀/수목형, 홈 패인/매끄러운 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좋은/나쁜”이라는 가치들이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리좀이 좋은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다. 홈 패인 공간, 수목형 등은 현실적인 질서들이다. 리좀, 매끄러운 공간 등은 이 현실적인 질서를 극복하려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리좀, 매끄러운 공간으로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다 나은 현실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리좀적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리좀적 운동으로 갔다고 해서 우리 현실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파괴적이고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천의 고원>을 조금이라도 성실하게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가 이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더불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떤 들뢰즈라는 걸 덧붙여야 할 것이다).

-홍윤기는 그의 글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이동성과 정주성을 근본적 차이를 가진 대립 범주로 설정”했다고 말하면서, 천규석과 더불어 “이동성과 정주성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실존 ‘범주’의 규명과 관련된 근본적 차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그리고 “유목주의”는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 침략주의이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바로 이런 침략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모든 점들은 접어두자. 우리는 여기에서 천규석-홍윤기가 방금 말한 오류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을 실재적 대립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두 일반적인 오류 위에 다시 이들의 특수한 하나의 오류, 정말이지 심각하고 어이가 없는 오류를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투영해 엉뚱하게 오해한 후, 다시 이들에게 그 이분법 중에서 나쁜 경우를 귀속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리좀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수목형 현실이다. 변화와 창조는 리좀적 사유를 요청한다. 그러나 리좀의 사유를 도입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리좀이냐가 중요하다.(*말을 이어받자면, 침략주의 차제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침략주의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전혀 반대로 나쁜 리좀들을 이들의 주장으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목적인 것”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물론 이 때 좋음과 나쁜의 기준을 -긋기가 쉽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들뢰즈/가타리가 나쁜 유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들의 생각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장치의 “외부”를 두 가지로 본다.(여기에서 “외부”를 즉물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하나는 국가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거대한 세계적 기계들로서 그 예로서 “초국적 기업들, 산업 콤비나트, 기독교 · 이슬람교를 비롯한 거대 종교들 및 종교 단체들”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것들과 대조적으로 국소적인(“로칼”한)  “무리들, 주변부 사람들, 소수자들”을 들고 있다.(<천의 고원>, 445/689쪽. 이 대목은 천규석이 그나마 “읽었다”고 한 바로 그 대목임에 주목하자)

-이 두 경우는 모두 국가장치의 “외부”를 형성하지만, 그러나 서로 대조된다. 하나는 국가/법조차도 우습게 보는 거대한 자본권력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이다.(들뢰즈/가타리는 후자에 대해 “신원시주의=neoprimitivisme”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태공동체가 이 신원시주의의 한 형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바로 후자의 “외부” 즉 소수자들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은 바로 거대 자본권력들의 “유목주의”을 비판하는 철학, 소수자 윤리학과 소수자 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는 철학이다.(*해서, 들뢰즈의 유목주의는 '좋은 유목주의'이다?)

-그런데 보라. 천규석과 홍윤기는 이들의 철학을 완벽하게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을 바로 이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적인 “시장제국주의 철학”으로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상에 대해 좀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있다. 어떤 점들에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플라톤에 대해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는 퇴폐주의자”라고, 헤겔에 대해 “역사를 무시하는 추상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맑스에 대해 “노동자들의 현실을 모르는 부르주아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그야말로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홍윤기, "이정우 대표의 반론을 읽고 다시 답함"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대표의 악성 서평(교수신문 제 396호)만 보면 지금도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 혐오감이 되살아난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서 같은 책을 서평하기로 했던 나의 글은 결국 들뢰즈/가타리의 원본 유목주의에 대한 이해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철학하는 것’의 정체성과 ‘철학하는 인간’의 사회적 위상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긴 반성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정우 대표가 인신비방이 가득 찬 그 서평에서 자신이 전문 철학자임을 내세워 천 선생이 제기한 쟁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당신 들뢰즈 책을 불어로 읽었느냐 안 읽었냐, 2천5백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서양 철학 공부나 하고 그 글을 썼냐 안 썼냐, 대학원생의 엉터리 번역을 엉터리로 읽었냐 아니냐고 넋두리하는 태도를 보고 경악했다. 사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 책에 대한 서평 자체를 거부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정우 씨도 이번 글에서 자인했듯이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진” 그의 글을 서평이라고 실어준 ‘교수신문’이 사실 더 한심했다. 내가 아니라 이정우 씨와 독자들, 또 천 선생에게 뒤늦게나마 사과할 일이다.

-흔히 철학은 철학전공자나 하는 난해한 학문 분야라고 생각된다. 분명히 철학에는 철학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학문적인 지식, 역사, 그리고 전문서적이 있다. 그러나 문명 수준이 일정 정도 도달해 인간의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하는 시대나 생활권에는 이런 전문소양과는 전혀 독립적으로 ‘철학함’의 능력이 분출된다. 이 때 ‘철학함’은 자신과 동료 인간의 생각, 말, 행위, 나아가 삶의 방식과 세계의 존립이 왜 정당한지를 그 근거(ground)에서 물으면서 그 근본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고도의 사고활동 또는 담화활동이 된다. 문제현장에서 이뤄지는 바로 이런 고도의 인간 활동이 사실 전공으로서의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탐사영역이다.

-<황해문화>에서 나는 무분별한 유목주의 추종에 단지 분개할 뿐만 아니라 그 근원까지 비판하려고 한 농사꾼 천규석 선생을 바로 이런 가장 원초적 의미에서의 철학하는 인간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철학함은 철학전공자 이전에 시민의 권리이며, 철학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이 시대 한국의 철학을 융성하게 할 가장 기본적인 활동조건이다. 이정우 대표는 철학의 바로 이런 조건을 말살하고 철학활동을 그 싹에서부터 뭉개는 일종의 학문적 焚書(분서)를 자행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전공자로서의 지적 권력을 한껏 내세운 이 대표의 노마디즘 이해가 과연 농사꾼 철학자를 있는 대로 경멸할 만큼 정확한가. 결론부터 말해, 잔뜩 기대를 갖고 이번 글을 본 나는 이 대표가 과연 들뢰즈/가타리의 원서를 그 쪽마다 제대로 독해했는지를 크게 의심하게 됐다. 무엇보다 이 대표는 들뢰즈/가타리가 ‘철학했던’ 현장의 그 생생한 맥락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아주 어처구니없는 오독을 자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됐다. 

-그가 거론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씨는 노마디즘을 본격적으로 사고실험한 이 책 제12장에 나오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개념들을 예로 들고 있다. 이 대표에 따르면,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그런 식의 이해는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에게 바로 물어보자. 들뢰즈/가타리는 “홈 패인 공간”(espace strie’.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줄줄 홈패인 공간”이다)과 “매끄러운 공간”(espace lisse. 더 실감나에 번역하면 “매끈매끈한 공간”이다)을 ‘개념적으로’ 왜 굳이 구분하였는가. 아마 원전에 더 충실하자면 이 구분에 “숭숭 구멍난 공간”(espace troue’)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개념이 ‘실체’(substance)는 아니더라도 ‘실재'(reality)와는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거나 갖지 않아야 한다면 공간에 관해 이렇게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노마디즘과 관련해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적으로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 씨는 ‘줄줄 홈이 패였다’든지, ‘매끈매끈하다’든지, ‘숭숭 구멍났다’라고 표현된 공간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며,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단지 “성격 서술”을 위해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상태에 있는 것을 서로 달리 묘사하기 위해 ‘다른 표현어를 썼다’고 해야지 ‘서로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정우 씨는 그저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철학적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핵심적 사안을 포착하기 위해 서로 구분되는 ‘개념’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일을 전혀 혼동하고 있다.(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공간의 성질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각기 다른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을 記標(기표)로 하여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記意(기의)를 선명하게 개념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사실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이 대표는 이 공간 구분과 연관시켜 ‘유목적 전쟁기계’를 가장 특정적으로 정식화시킨 <천 개의 고원> 제12장의 공리III에 딸린 다음의 도식을 기억할 것이다.(원전 518쪽; 국역본 797쪽)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 매끈매끈한 공간을 실체와 연관되지 않은, 단지 “성격 서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정우 대표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을 오해한다는 사람에 대해 자해성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이 대표가 그렇게 숭모하는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을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개념 구분을 실체적 구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면 먼저 들뢰즈/가타리부터 비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절대 원전을 읽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을 상대로 ‘원전 사기극’을 연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정우 씨가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라고 하여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를 거론하면서 역시 이 공간 구분을 예로 들어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그리고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라는 식”의 이해를 비난하고 드는 것도 정말 의심스러운 지적이다.

-문제가 되는 제12장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국가 모델” 또는 “국가 장치”에 포획되지 않은 탈억압적 삶이 어떤 형태로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다. 다시 말헤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에 관한 생각에서 단순히 ‘바람직한 국가’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면서 삶은 여전히 가능해지고 활력에 찰 수 있는 그 한계선을 추적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들뢰즈/가타리는 적어도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국가의 궁극적 소멸’을 전망한 맑스/엥겔스의 후계자다. 그들은 바로 이런 문제구도에서 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모든 것이 실은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문명을 소급해가면서 입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국가가 기반이었다고 생각되었던 전쟁, 야금술 등등 모든 문명적인 것이 원래는 국가의 영토를 무력화시킨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천규석 선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방향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이 거기에 종속되어 있던”, “스텝의 매끈매끈한 공간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억압적인 국가장치 외부에 있는, 더 권할 만한 좋은 삶의 터전이었다. 다시 말해 들뢰즈/가타리는 결코 존재세계에 대한 무위자연적 관조를 행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억압의 구조적 응집이라고 생각되는 국가라는 정주체에 대해 유사혁명적, 또는 그들의 용어를 따르자면. 탈영토화하는 도주선을 개척한 것이다. 그래서 숭숭 구멍난 공간은 줄줄 홈패인 공간의 지하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통하는 도주로로 잠복한다고 상정되는 것이다.

-‘유목민’ 개념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탈국가기획을 구체화시키는 실천적 구상으로서 결코 가치중립적인 서술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인 혁명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규석 선생의 의혹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실천적으로 포괄적인’ 전략가들은 못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천규석 선생은 소위 원전을 읽었다는 이정우 씨보다 훨씬 정확하게 쟁점을 파악했다.

-리좀이나 수목형에 대한 세간의 이해를 이정우 씨가 오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실망했다.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리좀과 유목민의 개념은 그 문제층위가 다르다. 이정우 씨의 반론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책을 그들의 문제수준에 따라 ‘개념’ 수준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유유자적하는 태도로 쓰는 고급 독후감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붙잡고 지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분투하는 철학적 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볼 때 학문적 자폐성에 침몰된 원전 팟쇼보다는 자기 문제의 전정성을 호소하는 농사꾼 철학자가 아무래도 나아보이는 것 같아 철학 전공자로서는 몹시 씁쓸하고 미안할 뿐이다.(*아마도 이정우 대표의 보다 본격적인 반론이 제시되어야 할 듯하다.) 

06. 06. 06 -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지젝과 들뢰즈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 관한 '본격적인' 언론 리뷰는 의외로 늦춰지고 있는데, 서울신문에 도서출판b의 기획위원이자 역자이기도 한 이성민씨와의 인터뷰가 게재되었길래 옮겨온다(인터뷰어는 조태성 기자). 지젝의 들뢰즈론 입구에 있는 독자들에겐 참고가 될 만하다. 기사의 검색 타이틀에 오타가 있는 듯하여 그냥 '지젝과 들뢰즈'를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는다.  

서울신문(06. 06. 29)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 아니라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노마디즘을 비판(서울신문 6월1일자 보도)한 뒤, 들뢰즈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커지고 있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와의 논쟁을 통해 홍 교수는 들뢰즈를 ‘마르크스·엥겔스의 후계자’로 규정한 뒤 그럼에도 ‘탈 영토화’로 상징되는 들뢰즈의 변혁전략이 현실적으로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멋들어진 아나키즘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제 폐기돼야 하는가. 이때 <신체없는 기관>이 번역·출간된 것은 적절한 시점으로 보인다.

 

 

 



-저자는 영화판에서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상당한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동유럽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그는 들뢰즈 사상의 핵심은 초기의 단독 저술에 담겨 있다면서, 가타리와 함께 쓴 후기 저술(<앙티-외디푸스>, <천개의 고원>)이나 미국식 정치적 번역이 담긴 <제국>(네그리·하트)을 통해 알려진 들뢰즈의 모습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아예 가장 대척점에서 서 있는 헤겔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철학자가 들뢰즈라고 규정한다. 번역을 맡은 이성민 도서출판b 기획위원에게 이번 책의 의미에 대해 들었다.

▶최근 노마디즘 논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그 정치적 번역은 다르다.‘유목주의’나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는 본연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홍윤기·이정우 논쟁에서 주목해볼 점은 이정우 대표가 시중의 해석 대신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지젝도 후기 들뢰즈적 경향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 폄하한다.

지젝도 들뢰즈적 실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아닌가.
-지젝도 평가하듯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립적이다. 예컨대 지젝은 “‘제국’에서 다수성(다중·multitude)은 저항의 힘이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근본적으로 애매하다.”고 말한다. 저항도 야만적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유목주의자 혹은 자율주의자는 좀 더 ‘따분한’ 이론적 작업을 해야 한다. 동시에 ‘구좌파’,‘독단주의자’,‘원칙주의자’가 들뢰즈를 받아들였으면 한다.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만났을 때,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켰다는 것인데, 이게 들뢰즈의 의도인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다면,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 지젝은 헤겔이,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깝다고 한다. 그는 둘이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는다. 물론 여기에는 헤겔을 재해석하는 지젝의 작업이 깔려 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해설서를 낸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이미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느끼기에 지젝은 동유럽 지식인임에도 ‘유럽주의자’다. 지젝은 유럽을 사랑하고 유럽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를 받아들일 때 한국적 현실을 고민하는 것은 패배적인 관점이다. 들뢰즈의 보편성을 껴안아야 한다.‘손쉬운 정치적 번역’ 대신 ‘본연의 철학’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안아야 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라고 한다. 역시나 전문이 요약보다는 더 흥미로우며 계발적이다.

최근 들뢰즈의 노마디즘 개념에 대한 혼돈이 많습니다. 대개 철학하시는 분들은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해하시는 반면,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듯 합니다.즉 무조건 대규모의 이동이 일어나야 노마디즘 현상으로 파악한다는 겁니다.단적인 예가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겠지요.천규석의 문제의식만이 아닌 것이 노마디즘 관련된 토론장에 들렀더니 모든 분들이 천규석의 문제의식과 비슷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대체,철학적인 개념을 넘어섰을 때 유목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종 한 철학자의 위대함은,진정으로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선물한 사실에 있습니다.그 점에서 들뢰즈는 위대한 철학자입니다.들뢰즈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하나는 들뢰즈 본연의 철학입니다.그리고 다른 하나는 들뢰즈 철학의 정치적 번역들입니다.제 생각에,“유목주의”나 “자율주의” 등은 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는 데 스스로 협조한 적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가타리와 협력한 들뢰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즉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에서 보는 것은 들뢰즈 철학 본연과는,들뢰즈의 독창적인 철학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습니다.그것들은 그러한 성취가 정치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가리킵니다.그것도 매우 손쉬운 길을 말입니다.

-유목주의와 관련된 최근의 논쟁에서 이정우 씨는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관점으로,예컨대 <의미의 논리>의 들뢰즈의 관점으로 환원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이정우 씨가, 비록 들뢰즈 철학의 또 다른 정치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러한 길을 열기 위한 작은 이론적 틈새를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틈새가 보일 수도 있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천규석 씨를 정념적으로 비판하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최근에 유행하는 들뢰즈적 개념들의 해석적 경향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본연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지점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천규석 씨와 이정우 씨가 둘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협력적 작업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이 최근에 한국에서 쟁점이 된 “유목주의”나 아니면 네그리-하트 식의 “다중”과 관련해 내용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지젝은 이와 같은 후기의 들뢰즈적 경향을 비판합니다.그것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고 폄하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에 대해 홍윤기는 들뢰즈는 영락없이 맑스와 엥겔스의 후계자이지만, 그 문제의식은 높게 평가해도 구체적인 실천의 효과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젝이 하고 있는 작업이 홍윤기의 주장과 비슷해 보이는데,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차이가 있다면 어디서 차이가 날까요.

-들뢰즈 사상의 핵심적 측면은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현대적인 것으로 재해석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의 사회를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이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지젝은 들뢰즈의 그러한 공헌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존재의 일의성이나 정서적 강도 같은 개념들은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개념들입니다. 지젝은 우리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조차 그러한 개념들을 매번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추상적 개념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지성적 분위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러한 개념들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젝의 말처럼 그것들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입니다. 예컨대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 76쪽에서 “‘제국’에서 다수성(다중)은 저항의 힘으로 찬양되는 반면, 스피노자에게서 군중으로서의 다수성 개념은 근본적으로 애매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적실한 통찰들입니다. 다수성이랑 권력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야만적이고 비합리적인 폭력의 폭발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중들의 이와 같은 “유목적” 특성을 곧바로 정치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우선은 그 지점에서 멈추어서,좀더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유목주의자들이나 자율주의자들은 제 생각에 바로 그렇게 사색을 위해서, “따분하고” 순수한 이론적 작업을 좀더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사유의 근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의 성취는 우선은 “철학적으로” 흡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아쉬워해야 하는 것은 들뢰즈 사상의 정치적 해석이 다양한 논쟁들과 더불어 풍요로운 가운데,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측면이, 다시 말해서 “현대성 그 자체”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들뢰즈는 현대의 바로 그 철학자입니다. 따라서 저는 맑스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구좌파적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라도 들뢰즈를 이론적으로 읽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오늘날도 역시 간단한 세미나나 포럼을 마치고 그 유명한 뒤풀이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공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피해갈 수도, 간단히 정치적으로 번역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저 유명한 “포스트모던적” 주체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구좌파적인 사람들이,“독단주의자들”이,“원칙주의자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그때 진정한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헤겔의 부활을 꿈꾸는 또 다른 헤겔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까.들뢰즈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헤겔을 죽이겠다는데 있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죽이는 액션을 취함으로써 헤겔을 부활시키는 것이었습니까.그렇다면 진정한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고려하지 못한 역풍이라고 봐야 할까요.



-흥미로운 물음입니다. 들뢰즈가 결국 그러한 일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헤겔을 부활시킨 것이 지젝이 아니라 들뢰즈일지도 모른다는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변증법을 성찰하게 만드는군요. 시간의 경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어떤 “운명”이나 어떤 “필연성” 같은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 데 성공한다면, 그로써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지젝의 말처럼 헤겔은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들뢰즈에게 너무 가까운 철학자였습니다. 지젝은 바로 그 지점에서, 그 둘이 가장 가까운, 혹은 거의 차이가 없어지는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지젝의 독자적인 공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키기 전에 헤겔 그 자신이 재해석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지젝의 몫이었습니다. 라캉도 그것을 해내지는 못했지요.오늘날 라캉주의가 철학과 그 자체를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대학인 류블랴나 대학에서 그들은 그것을 해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설한 책을 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슬로베니아어로는 이미 출간된 걸로 안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지젝의 작업을 통해서도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맛볼 수 있습니다(*아래는 류블랴나 대학).



감히 추론입니다만은, 들뢰즈를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은 지젝이 동유럽 지식인이라는 점도 작용하고 있는 걸까요. 하트가 들뢰즈를 미국식으로 독해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지젝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측면,즉 맥락의 차이를 간과해버린 것이 한국에서의 들뢰즈 열풍이 놓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인상”만을 가지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경우는 그래야 하겠군요. 그러니 제 말이 그 이상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인상이 “독서”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제가 받은 인상으로,지젝은 “유럽주의자”입니다. 오늘날 진정한 유럽주의자가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여하간 지젝은 유럽의 유산을, 유럽의 문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신분석도 유럽에서 탄생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철학을, 라캉과는 달리, 비판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껴안는 것은 그가 유럽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조 기자 님의 말씀처럼, 그는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가 하는 일은 역으로 바로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는 “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바로 그 유럽적 방식으로 재창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를 창안했듯이 말입니다. 그는 지성적 영역에서 스스로 그 과제를 떠맡고 있습니다.

-들뢰즈를 우리가 수용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한국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패배적인 관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들뢰즈 사상의 가장 보편적인 측면을 껴안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들뢰즈 사상의 “철학적” 논의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좀 역설적이게 들리겠지만,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적용”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지젝은 들뢰즈를 해석하는데 있어 알랭 바디우를 지속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지젝이 알랭 바디우에서 벗어나는 지점은 어디 입니까.아 니면 전적으로 바디우적 해석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합니까.

-바디우는 라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몇 안 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와 지젝 사이에 공통점이 생기는 것이지요.하지만 지젝의 해석은 바디우에 토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캉과 헤겔에 토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젝과 바디우의 차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답변을 드리기 곤란합니다. 저는 바디우의 철학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관통하고 있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해,이 경우라면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라도 어떤 인상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바디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진지한 철학자인 반면, 지젝은 진지하지 않은 것에서도 내기를 걸 줄 압니다(*아래 사진은 지젝과 바디우).



도서출판b와 자신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저는 현재 도서출판b에서 기획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직함은 “기획위원”입니다. 제 관심사는 한국에서 진정한 지적인 전통이 “부활”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이와 관련하여 지적인 담론의 장을 심화시키기 위해 번역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기고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대학(서울대 영어교육과)에서 언어학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촘스키의 언어학이 유행이었지요.덕분에 저는 언어학과 분석철학에 입문하게 되었고, 당시의 맑스주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졸업을 하면서 맑스주의와 유럽의 철학에 몰두하게 되었지요. 분석철학의 장점은 그것에 매료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데 있습니다. 제가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에 대한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일정정도 자율주의자인 조정환 씨와 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는 라캉에게 귀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진학하면서,라캉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궁극적인 학문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한 지적인 전통의 부활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선생들을 길러내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라캉이 말하는 “주인담론”의 시대에, 혹은 권위주의의 시대에, 권위자들은 선생을, 즉 가르칠 사람을 키우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더욱 혹독한 도제 시절을 겪게 했지요. 오늘날 이러한 연결고리는 무너졌습니다. 저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다시 소생시키는 일이라면 바로 그곳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산”이 아닌 “재생산”을 강조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생산은 생산물을 만들어냅니다. 잘 교육받은 교양 있는 학생들을 말입니다. 하지만 재생산은 선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선생들입니다(*역자가 사범대학 출신이란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앞으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대철학자를 꿈꾸면서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을 운명인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도서출판b는 출판사를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세미나 공간이 생겼지요. 그곳은 신림동 혹은 난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저는 그곳을 “난곡연구소”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합니다. 저는 거기서 학생들을 데리고 세미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선생들을 키우는 작업에 헌신할 생각입니다. 라캉주의의 교조적인 모습이 저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오래된 진리를 새롭게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06. 07. 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지젝과 들뢰즈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 관한 '본격적인' 언론 리뷰는 의외로 늦춰지고 있는데, 서울신문에 도서출판b의 기획위원이자 역자이기도 한 이성민씨와의 인터뷰가 게재되었길래 옮겨온다(인터뷰어는 조태성 기자). 지젝의 들뢰즈론 입구에 있는 독자들에겐 참고가 될 만하다. 기사의 검색 타이틀에 오타가 있는 듯하여 그냥 '지젝과 들뢰즈'를 페이퍼의 제목으로 삼는다.  

서울신문(06. 06. 29)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 아니라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노마디즘을 비판(서울신문 6월1일자 보도)한 뒤, 들뢰즈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커지고 있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와의 논쟁을 통해 홍 교수는 들뢰즈를 ‘마르크스·엥겔스의 후계자’로 규정한 뒤 그럼에도 ‘탈 영토화’로 상징되는 들뢰즈의 변혁전략이 현실적으로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멋들어진 아나키즘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제 폐기돼야 하는가. 이때 <신체없는 기관>이 번역·출간된 것은 적절한 시점으로 보인다.

 

 

 



-저자는 영화판에서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 상당한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동유럽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그는 들뢰즈 사상의 핵심은 초기의 단독 저술에 담겨 있다면서, 가타리와 함께 쓴 후기 저술(<앙티-외디푸스>, <천개의 고원>)이나 미국식 정치적 번역이 담긴 <제국>(네그리·하트)을 통해 알려진 들뢰즈의 모습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아예 가장 대척점에서 서 있는 헤겔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철학자가 들뢰즈라고 규정한다. 번역을 맡은 이성민 도서출판b 기획위원에게 이번 책의 의미에 대해 들었다.

▶최근 노마디즘 논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그 정치적 번역은 다르다.‘유목주의’나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는 본연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홍윤기·이정우 논쟁에서 주목해볼 점은 이정우 대표가 시중의 해석 대신 들뢰즈 본연의 철학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지젝도 후기 들뢰즈적 경향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 폄하한다.

지젝도 들뢰즈적 실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아닌가.
-지젝도 평가하듯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중립적이다. 예컨대 지젝은 “‘제국’에서 다수성(다중·multitude)은 저항의 힘이지만, 스피노자에게는 근본적으로 애매하다.”고 말한다. 저항도 야만적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 유목주의자 혹은 자율주의자는 좀 더 ‘따분한’ 이론적 작업을 해야 한다. 동시에 ‘구좌파’,‘독단주의자’,‘원칙주의자’가 들뢰즈를 받아들였으면 한다.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만났을 때,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이다.

결국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켰다는 것인데, 이게 들뢰즈의 의도인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다면,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 지젝은 헤겔이,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깝다고 한다. 그는 둘이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는다. 물론 여기에는 헤겔을 재해석하는 지젝의 작업이 깔려 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해설서를 낸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 이미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내가 느끼기에 지젝은 동유럽 지식인임에도 ‘유럽주의자’다. 지젝은 유럽을 사랑하고 유럽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들뢰즈를 받아들일 때 한국적 현실을 고민하는 것은 패배적인 관점이다. 들뢰즈의 보편성을 껴안아야 한다.‘손쉬운 정치적 번역’ 대신 ‘본연의 철학’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안아야 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라고 한다. 역시나 전문이 요약보다는 더 흥미로우며 계발적이다.

최근 들뢰즈의 노마디즘 개념에 대한 혼돈이 많습니다. 대개 철학하시는 분들은 어떤 추상적인 관념으로 이해하시는 반면,다른 분야에 계신 분들은 실제적인 측면에 주목하는 듯 합니다.즉 무조건 대규모의 이동이 일어나야 노마디즘 현상으로 파악한다는 겁니다.단적인 예가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겠지요.천규석의 문제의식만이 아닌 것이 노마디즘 관련된 토론장에 들렀더니 모든 분들이 천규석의 문제의식과 비슷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대체,철학적인 개념을 넘어섰을 때 유목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종종 한 철학자의 위대함은,진정으로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선물한 사실에 있습니다.그 점에서 들뢰즈는 위대한 철학자입니다.들뢰즈와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하나는 들뢰즈 본연의 철학입니다.그리고 다른 하나는 들뢰즈 철학의 정치적 번역들입니다.제 생각에,“유목주의”나 “자율주의” 등은 후자에 속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이 정치적으로 번역되는 데 스스로 협조한 적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가타리와 협력한 들뢰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가 그곳에서, 즉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에서 보는 것은 들뢰즈 철학 본연과는,들뢰즈의 독창적인 철학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습니다.그것들은 그러한 성취가 정치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가리킵니다.그것도 매우 손쉬운 길을 말입니다.

-유목주의와 관련된 최근의 논쟁에서 이정우 씨는 분명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관점으로,예컨대 <의미의 논리>의 들뢰즈의 관점으로 환원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이정우 씨가, 비록 들뢰즈 철학의 또 다른 정치적 번역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러한 길을 열기 위한 작은 이론적 틈새를 열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틈새가 보일 수도 있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가 천규석 씨를 정념적으로 비판하는 곳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최근에 유행하는 들뢰즈적 개념들의 해석적 경향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본연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지점에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천규석 씨와 이정우 씨가 둘다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협력적 작업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안티-오이디푸스>나 <천개의 고원>이 최근에 한국에서 쟁점이 된 “유목주의”나 아니면 네그리-하트 식의 “다중”과 관련해 내용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지젝은 이와 같은 후기의 들뢰즈적 경향을 비판합니다.그것을 손쉬운 정치적 번역이라고 폄하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이에 대해 홍윤기는 들뢰즈는 영락없이 맑스와 엥겔스의 후계자이지만, 그 문제의식은 높게 평가해도 구체적인 실천의 효과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지젝이 하고 있는 작업이 홍윤기의 주장과 비슷해 보이는데,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차이가 있다면 어디서 차이가 날까요.

-들뢰즈 사상의 핵심적 측면은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사상을 현대적인 것으로 재해석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의 사회를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이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지젝은 들뢰즈의 그러한 공헌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존재의 일의성이나 정서적 강도 같은 개념들은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개념들입니다. 지젝은 우리가 오늘날 일상생활에서조차 그러한 개념들을 매번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실은 추상적 개념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반지성적 분위기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러한 개념들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젝의 말처럼 그것들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입니다. 예컨대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 76쪽에서 “‘제국’에서 다수성(다중)은 저항의 힘으로 찬양되는 반면, 스피노자에게서 군중으로서의 다수성 개념은 근본적으로 애매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적실한 통찰들입니다. 다수성이랑 권력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야만적이고 비합리적인 폭력의 폭발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대중들의 이와 같은 “유목적” 특성을 곧바로 정치적으로 긍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우선은 그 지점에서 멈추어서,좀더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유목주의자들이나 자율주의자들은 제 생각에 바로 그렇게 사색을 위해서, “따분하고” 순수한 이론적 작업을 좀더 밀고 나아가기 위해서, 사유의 근본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의 성취는 우선은 “철학적으로” 흡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아쉬워해야 하는 것은 들뢰즈 사상의 정치적 해석이 다양한 논쟁들과 더불어 풍요로운 가운데, 들뢰즈 본연의 철학적 측면이, 다시 말해서 “현대성 그 자체”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들뢰즈는 현대의 바로 그 철학자입니다. 따라서 저는 맑스주의자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구좌파적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이제라도 들뢰즈를 이론적으로 읽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오늘날도 역시 간단한 세미나나 포럼을 마치고 그 유명한 뒤풀이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들은 공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피해갈 수도, 간단히 정치적으로 번역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저 유명한 “포스트모던적” 주체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구좌파적인 사람들이,“독단주의자들”이,“원칙주의자들”이 들뢰즈를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사회의 거시적 변화를 아직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인간 주체가 여전히 집단적으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들뢰즈와 진정으로 조우할 때, 그때 진정한 변화를 위한 작은 공간이 열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들뢰즈는 헤겔의 부활을 꿈꾸는 또 다른 헤겔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까.들뢰즈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헤겔을 죽이겠다는데 있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죽이는 액션을 취함으로써 헤겔을 부활시키는 것이었습니까.그렇다면 진정한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고려하지 못한 역풍이라고 봐야 할까요.



-흥미로운 물음입니다. 들뢰즈가 결국 그러한 일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헤겔을 부활시킨 것이 지젝이 아니라 들뢰즈일지도 모른다는 물음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변증법을 성찰하게 만드는군요. 시간의 경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어떤 “운명”이나 어떤 “필연성” 같은 것을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다르게” 읽는 데 성공한다면, 그로써 헤겔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지젝의 말처럼 헤겔은 들뢰즈가 견디기에는 들뢰즈에게 너무 가까운 철학자였습니다. 지젝은 바로 그 지점에서, 그 둘이 가장 가까운, 혹은 거의 차이가 없어지는 지점에서, 들뢰즈를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지젝의 독자적인 공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들뢰즈가 헤겔을 부활시키기 전에 헤겔 그 자신이 재해석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지젝의 몫이었습니다. 라캉도 그것을 해내지는 못했지요.오늘날 라캉주의가 철학과 그 자체를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대학인 류블랴나 대학에서 그들은 그것을 해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지젝의 동료 돌라르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해설한 책을 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슬로베니아어로는 이미 출간된 걸로 안다). 하지만 이미 이루어진 지젝의 작업을 통해서도 우리는 “새로운” 헤겔을 맛볼 수 있습니다(*아래는 류블랴나 대학).



감히 추론입니다만은, 들뢰즈를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은 지젝이 동유럽 지식인이라는 점도 작용하고 있는 걸까요. 하트가 들뢰즈를 미국식으로 독해해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지젝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측면,즉 맥락의 차이를 간과해버린 것이 한국에서의 들뢰즈 열풍이 놓치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인상”만을 가지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경우는 그래야 하겠군요. 그러니 제 말이 그 이상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인상이 “독서”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제가 받은 인상으로,지젝은 “유럽주의자”입니다. 오늘날 진정한 유럽주의자가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여하간 지젝은 유럽의 유산을, 유럽의 문명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정신분석도 유럽에서 탄생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철학을, 라캉과는 달리, 비판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껴안는 것은 그가 유럽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조 기자 님의 말씀처럼, 그는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가 하는 일은 역으로 바로 그것의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는 “낡은 유럽”이 스스로의 가치를 바로 그 유럽적 방식으로 재창안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민주주의를 창안했듯이 말입니다. 그는 지성적 영역에서 스스로 그 과제를 떠맡고 있습니다.

-들뢰즈를 우리가 수용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한국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패배적인 관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들뢰즈 사상의 가장 보편적인 측면을 껴안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들뢰즈 사상의 “철학적” 논의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좀 역설적이게 들리겠지만, 서구 선진국의 잣대를 함부로 끌어들이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가장 근본적으로, 가장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적용”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지젝은 들뢰즈를 해석하는데 있어 알랭 바디우를 지속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지젝이 알랭 바디우에서 벗어나는 지점은 어디 입니까.아 니면 전적으로 바디우적 해석 위에 서 있다고 봐야 합니까.

-바디우는 라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몇 안 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와 지젝 사이에 공통점이 생기는 것이지요.하지만 지젝의 해석은 바디우에 토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캉과 헤겔에 토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젝과 바디우의 차이에 대해서는 제가 아직 답변을 드리기 곤란합니다. 저는 바디우의 철학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관통하고 있지 못한 그 무엇에 대해,이 경우라면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라도 어떤 인상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바디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진지한 철학자인 반면, 지젝은 진지하지 않은 것에서도 내기를 걸 줄 압니다(*아래 사진은 지젝과 바디우).



도서출판b와 자신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

-저는 현재 도서출판b에서 기획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직함은 “기획위원”입니다. 제 관심사는 한국에서 진정한 지적인 전통이 “부활”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이와 관련하여 지적인 담론의 장을 심화시키기 위해 번역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기고를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대학(서울대 영어교육과)에서 언어학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촘스키의 언어학이 유행이었지요.덕분에 저는 언어학과 분석철학에 입문하게 되었고, 당시의 맑스주의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졸업을 하면서 맑스주의와 유럽의 철학에 몰두하게 되었지요. 분석철학의 장점은 그것에 매료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해주는 데 있습니다. 제가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에 대한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일정정도 자율주의자인 조정환 씨와 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는 라캉에게 귀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을 진학하면서,라캉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궁극적인 학문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서 말한 지적인 전통의 부활을 위해 가장 시급한 일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선생들을 길러내는 데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라캉이 말하는 “주인담론”의 시대에, 혹은 권위주의의 시대에, 권위자들은 선생을, 즉 가르칠 사람을 키우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더욱 혹독한 도제 시절을 겪게 했지요. 오늘날 이러한 연결고리는 무너졌습니다. 저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다시 소생시키는 일이라면 바로 그곳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산”이 아닌 “재생산”을 강조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생산은 생산물을 만들어냅니다. 잘 교육받은 교양 있는 학생들을 말입니다. 하지만 재생산은 선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능한 선생들입니다(*역자가 사범대학 출신이란 걸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앞으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제가 번역한 책들이 대철학자를 꿈꾸면서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을 운명인 사람들에게 읽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도서출판b는 출판사를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세미나 공간이 생겼지요. 그곳은 신림동 혹은 난곡에 위치하고 있는데, 저는 그곳을 “난곡연구소”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합니다. 저는 거기서 학생들을 데리고 세미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선생들을 키우는 작업에 헌신할 생각입니다. 라캉주의의 교조적인 모습이 저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오래된 진리를 새롭게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06. 07. 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노마디즘 논쟁 일지

교수신문(06. 06. 12)에 홍윤기 교수의 반론('노마디즘 대 노마디즘' 참조)에 대한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교수의 재반론이 실렸다. 반론문의 말미에 '노마디즘 논쟁 일지'가 정리돼 있기에 같이 옮겨온다. 이 정도면 생산적인 결론을 이끌며 마무리되었으면 싶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은 듯하다. 나로선 방학때나 '노마돌로지'를 읽어보고 몇 마디 거들 계획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충돌과 갈등을 통해 창조 또한 가능하다. 논쟁이란 이성과 이성의 길항(dia-logos)을 통해서 진리/진실에 한발자국씩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거나 상대방을 이기려는 아집에 사로잡혀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핵심적인 문제는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가 침략주의인가, 천규석의 주장이 과연 근거 있는가, 아니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이라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유목주의/노마디즘’이라는 표현으로 들뢰즈/가타리 사유를 지칭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논증된 문제가 아니다. 이 표현은 이들의 것이 아니라 이진경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말을 사용하기로 하자)

-‘노마디즘’은 이중적으로 패러디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유목민들의 삶을 그리워하는 낭만적 회귀라는 패러디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기자본주의적 상품논리로서의 ‘유비쿼터스’ 전략이라는 패러디이다. 둘 다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한참 떨어진 패러디들이다. 그러나 후자의 패러디가 훨씬 심각하다. 국민국가들을 매개 고리로 하는 후기자본주의적 ‘공리계’(화폐 회로들의 장)에 저항하고자 하는 소수자 윤리학/정치학을 완전히 거꾸로 ‘침략주의’, ‘시장제국주의’로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규석의 책은 ‘천의 고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이 그것을 항간에 유행하는 천박한 “유목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침략주의”라는 극단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 사유를 1)개념/이론이 아니라 인상/이미지로 받아들이고 2)그것을 상상/억측한 후 3)그것에 대해 전혀 빗나간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전쟁기계”라는 말을 듣고서 거기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피 냄새가 난다’, ‘칭기즈칸의 정복주의’를 찬양하는 것이다 같은 식의 ‘비판’을 가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유목’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여기저기 이동하는 것이라고 상상하고, ‘욕망’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퇴폐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둥, 우스꽝스러운 상상/억측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떤 개념을 듣고서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한 이해도 없이, 그 언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인상을 근거로 상상/억측한 후 다시 그것을 엉뚱하게 비판하는 것, 이것이 천규석/홍윤기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유’이다.

-전쟁기계는 전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정말 그런가?). 그것은 1968년(‘68혁명’) 이래 도래한 소수자 운동(여성운동, 학생운동, 새로운 노동운동, 문화운동, 생태운동 등등)을 염두에 둔 개념이며, 국가장치/자본주의로부터 탈주하면서 투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참으로 얄궂은 것은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체공동체야말로 다름 아니라 들뢰즈/가타리가 추구하는 전쟁기계의 좋은 예라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상상/억측할 때 천규석도 침략주의자이다. 천규석은 ‘농사꾼 철학자’이고 따라서 농사와 철학을 가로지르면서 유목하고 있지 않은가(*이전에 지적한 바 있지만, 이것이 이정우에게서의 '유목'이다. '가로지르기'로서의 유목. 그리고 그의 유목은 사실 들뢰즈의 유목과도 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천규석은 침략주의자가 된다. 이 무슨 기묘한 결과인가. 이런 식의 “연상 고리들”을 끊고서,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서 누군가를 언급하고 평가하고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여 말한다면, 홍윤기는 홈 패인/매끄러운, 유목/정주, 리좀/수목형을 비롯해 들뢰즈/가타리의 구분이 개념적 구분일 뿐 실체적/실재적 구분이 아니라는 내 지적을 논박하기 위해서 내용/표현, 실체/형식을 도식한 그림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봐라, 들뢰즈/가타리가 실체의 내용과 표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는 요지의 반론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게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은 있어도 ‘실체의 내용과 표현’, ‘형식의 내용과 표현’ 같은 것은 없다.

-첫째,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들뢰즈/가타리의 ‘표현’을 어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상식적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돌과 조각가가 있을 때 돌이 내용이고 조각가가 표현이다. 일상적 ‘표현’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이다.

 -둘째, 이들에게 ‘실체’란 어떤 것,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의 질료/물질을 뜻한다.(chemical substance를 ‘화학물질’로 번역하는 것을 상기하면 되겠다) ‘형식’은 어떤 것의 구조를 뜻한다. 그러니까 홍윤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철수의 키와 성격’, ‘영희의 키와 성격’이라 해야 할 것을 ‘키의 철수와 영희’, ‘성격의 철수와 영희’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천의 고원’ 58-60쪽, 한글본 92~95쪽을 숙독할 것을 권한다) 요컨대 홍윤기는 그림의 가로를 먼저 읽고 세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읽고 있는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실소를 자아내는 “근거”를 제시한 후에, 그는 오히려 내가 “원전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강변한다는 사실이다. 설사 내가 틀렸다 해도 “사기극”이 무슨 말인가. 논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06. 06. 13.

P.S. 참고로, 북매거진 <텍스트>(2006년 5월호)에 게재됐던 인터뷰에서 이정우 교수가 말하는 '유목'의 뜻을 옮겨온다. 비생산적인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강조는 나의 것이다.

-'유목'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맥락이 좀 이질적인데요, 사실 그런 맥락들이 아무런 구분없이 '유목을 하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목이라는 말이 공허하고 티비 선전문구처럼 사용되죠. 유목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최소한 네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봐야 됩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의 유목이 있죠. 이건 중아시아의 유목민들을 일컬을 때의 유목민들을 말하는 경우 같은 거죠.

-그런 맥락과는 다르게 일반적이고 철학적인, 가령 들뢰즈나 가타리가 말하는 유목이 있죠. 문자 그대로의 유목과 관련은 되지만, 그것으로 이해하면 아주 희한한 이야기가 되죠. 문자 그대로의 유목과 철학적 사유의 방식으로의 유목은 완전히 다른 거예요. 들뢰즈 같은 경우는 유목적 사유를 이야기하지만 유럽의 다른 나라도 잘 안 갔다 오거든요. 디지털 유목이라는 말도 좀 이상한 개념이죠. 왜냐하면 인터넷 세계를 막 돌아다니는 사람은 자기 몸은 가만이 방안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노마디즘인지, 인터넷 공간에서는 노마디즘이지만 자신은 완전히 폐쇄적인 것이거든요.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는 유목은 이런 것과는 관계가 없고 공부를 담론세계에서 문학, 철학, 과학 등으로 전공을 정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데 돈, 이권, 권력 등과 얽혀서 하는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의식, 자신의 체험을 가지고 기존의 섹션화된 학문에 얽매이지 말고 폭넓게 사유하자는 의미입니다(*요컨대, '폭넓게 사유하자'가 이정우의 '유목을 하자'이다. 그리고 이건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과도 전혀 별개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들뢰즈여! 안녕"

아침신문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학술기사가 있어서 옮겨온다. 교수신문에 실린 강성민 기자의 학술동향 기사이며 타이틀은 "적과의 동침 혹은 속임수... '들뢰즈여! 안녕'"이다. 국내 철학자의 들뢰즈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의 출간과 함께 다시금 들뢰즈에 대한 재조명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인지라 한번쯤 참고해볼 만하다.

교수신문(06. 06. 28) 국내 철학자가 들뢰즈에게 거의 '사망선고'에 가까운 判官의 언어를 가해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주인공은 프랑스에서 베르그송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계속 '문제적' 논문을 발표해온 박치완 한국외대 교수(철학)이다. 그는 최근 <철학연구> 제31집에 실린 '들뢰즈의 플라톤 비판과 시뮬라크르의 반란 또는 복수-'플라톤과 시뮬라크르'를 중심으로'에서 들뢰즈를 플라톤의 '도플갱어'라고 결론지었다(*강조는 기자의 것. 이하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먼저 박 교수의 비판 이전에 들뢰즈에 대한 비판들은 간혹 제기돼 왔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들뢰즈 10주기를 맞아 들뢰즈의 철학이 '긍정적인 것'을 이리저리 조직하는 일에만 골몰해 정신분석학 같이 병리현상(부정적)에서 출발하는 학문과 조우할 수 없다는 비판, 토론을 싫어하는 독불장군적 기질이 민주주의적 문제를 외면하게 만들고 윤리적 문제로 환원하게 했다는 비판이 가해진 바 있다.(교수신문 인터넷판 2005년 12월 4일자, "해외동향: 佛, 들뢰즈 10주기 맞아 논쟁 활발" 참조. *우연찮게도 어제 옮겨놓으려다 만 기사이다. 기사말미에 옮겨놓는다.)

-독일에서도 레만이라는 학자가 "변증법을 비판하는 들뢰즈가 변증법에 못지않는 사변적인 차이의 철학"을 늘어놓았다고 비판했다. 들뢰즈 이론이 워낙 추상적 사유에 바탕하는 지라 "현실 속에서는 대립관계에 놓인 것들을 차이들로 설명"한다며 허점을 짚어낸 바 있다.(교수신문 인터넷판 2006년 3월 8일자, "들뢰즈와 푸코는 니체를 어떻게 오해했나" 참조. *이기사는 같은 제목으로 옮겨놓은 바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들은 이번 박치완 교수의 비판에 비하면 점잖은 수준이다. 이런 비판들을 통해 들뢰즈에 대한 판에 박힌 인식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들뢰즈적 체계를 눈덩이처럼 불릴 뿐인 것이다. 어쨋든 들뢰즈는 현대철학의 주요한 사유의 수원지로서 기능하고, 노마디즘 같은 현대인의 존재조건과 결부되어 긴밀하게 참조되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주의로 전화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이런 주장을 낳는다. "들뢰즈는 자신이 그토록 비판한 플라톤 이래의 동일성의 철학과 가장 깊은 곳에서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식의 동조이다.

 

 

 

 

-그렇다면 박 교수의 비판으로 넘어와 보자. 그는 "모든 음모의 신화는 반드시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는 다름 아닌 우리의 세계를 그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그의 말의 수사나 '언어의 인플레'에 관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어째서 이런 들뢰즈와의 전격적인 작별을 권유하게 된 것일까. 들뢰즈의 정체성은 플라톤과의 대자 관계에서 성립되는 측면이 강하다. 플라톤 타파를 외친 들뢰즈였던 것이다. 박 교수는 두가지를 묻는다. 과연 그의 타파는 성공했는가, 그리고 타파 이후는 무엇인가. 그리고 답한다. 타파는 실패했고 타파 이후는 아무 것도 계획된 게 없다는 것.

-왜 실패인가. 들뢰즈는 플라톤에 대한 비판적 독서에서 "차이를 동일자나 유사성에 근거하지 않는 차이 자체로서 드러내주지 못한다"라고 1차적으로 비판한다. 플라톤이 실재와 이데아, 실재와 실재의 모방물을 구분할 때 어떤 하나(비순수 혈통)를 다른 하나(순수 혈통)와 비교하여 전자를 후자에 '종속'시키는 데 목적이 있어 "모순의, 대립의 변증법도 아닌 경쟁관계의 변증법"이라는 것. 차이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게 이 부분에서 들뢰즈의 불만이었다.

-박 교수는 그러나 들뢰즈가 불만을 넘어 "플라톤이 시뮬라크르의 존재(?)에 도덕적 의미의 '악마적 속성'을 부여한 것에 격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로써 그는  도덕적 사유가 발동하는 유사성의 모델 자체를 벗어나 비유사성이 모든 사유의 원천이 되는 타자의 모델을 개발함으로써 마침내 구조를 부수고 그 표면으로 무수한 차이들을 기어나오게 만들게 됐다.

-그런데 "시뮬라크르가 동일성의 논리·구조에 대해 反구조적으로 기능하며, 구제 해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임무까지 떠맡아야 한다면 우리에게 너무 이질적인 것"이라고 박 교수는 질문을 시작한다. 원본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우주의 건설이 들뢰즈의 결론이라면 이런 들뢰즈의 작업은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도 정작 그 행위를 통해 아무 것도 지향하는 바가 없다"는 게 박 교수의 독해다. 전적으로 우리의 인식과 지각 대상 밖에 존재하며, 마치 모든 철학적 범주, 개념들 밖에서 유령처럼 떠돌면서 역설적으로 모든 철학적 범주, 개념들에 간섭하는 걸 어떻게 봐줘야 할까. 과연 이런 방식으로 플라톤주의의 타파가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

-박 교수는 들뢰즈가 "오직 실재의 상에 대한 이미지의 위상을 자신의 상상의 공간, 즉 비장소 안에서 극대화시키고 있을 뿐"이라고 정리한다. 결국 실재의 인식이나 이에 대한 의미 부여는 전혀 안중에도 없고 오직 플라톤 식의 재현시스템의 전복에만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라고 계속 이어나가는데, 이런 집착은 "자신의 '차이' 개념을 새로운 철학의 중심에 위치시키려는 다분히 의도된 공격"이라는 게 박 교수의 견해.

 

 

 

 

-모더니즘의 붕괴기운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그걸 철학운동으로 연결시키고자 했던 것, 지나친 재현의 논리와 이걸 사유에 강요하는 것에 대한 분격 등이 좀더 내재적인 이유였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종국에 박 교수는 미셸 메이에르를 인용하면서 "차이의 보편적 권리가 이미 그리고 충분히 이념적으로 또는 현실적으로 확보된 마당에 여전히 절대 권리를 차이에 부여하려는 태도는 철지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내보인다. 혹은 윤성우의 저작 <들뢰즈: 재현의 문제와 다른 철학자들>이란 저작에서 주지되었듯 "재현이 갖는 다양한 층위를 고려하지 못하고 곧장 비표상적 결말과 파국으로 치달은 것"으로 평가된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자신의 작업을 일컬어 "우리 자신을 좀 흩뜨리는 것으로, 표면에 존재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우리의 피부를 북으로 사용하고 그래서 '위대한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과연 위대한 정치는 어떻게 구체화되었는가. 헤겔적 변증법을 넘어선 차이의 변증법이 있었던가. 혹시 박 교수의 표현처럼 "모든 사회,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금욕을 요구하는 플라톤 식의 유토피아가, 각자 절제하기 힘든 개인적 욕망을 자유방사하는 그런 무정부주의적인 디스토피아로 전락"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론은 이미 나왔지만, 박 교수는 들뢰즈가 반플라톤주의를 완성했다기보다 플라톤주의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으며, 시뮬라크르, 차이, 생성 등을 통해 동일성의 논리를 보충하기 위해 고심했다기보다, 철저히 對로 부각시키고 나아가서는 '위(上)'에 위치시키려 했기 때문에 결국은 플라톤 전복이 아니라 그와의 이념적 공모이며, 심하게 말하면 '시뮬라크르적 속임수'에 다름 아니라고 가혹하게 말한다.

-왜 이런 점증되는 표현의 반복을 통해 들뢰즈의 철학적 원리가 갖는 모순들이 강조되는 것일까. 왜냐하면 지금은 시뮬라크르들이 "요구하는 '권리'보다 순전히 이념지향적인 허구성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이기 때문이다. 들뢰즈 시대에는 시뮬라크르와의 유희가 건설적이고 유쾌한 사건으로 비칠 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비록 사고의 차원이라고 해도, 무정부주의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게 박 교수의 판단.

-신인섭 교수가 '메를로-퐁티와 시뮬라크르의 현상학'('철학' 제77집, 2003)에서 지적했듯 "현대철학은 많은 부분 언어적 인플레 속에서 전통 사유 체계의 전환을 시도하기 때문에 철학 내에서 이미 '지시적 지식'이 실종의 위기를 맞고 있고, 시뮬라크르 게임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있다." 어찌 이것이 철학만의 일일까. 역사학과 사회학은 모르겠지만, 그 언어와 화법이 철학을 철저히 빼닮은 문학 분야는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여진다(*들뢰즈 비판보다는 개인적으로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기자의 이 마지막 코멘트이다. 따로 특집으로 다루어지길 기대해본다).

06. 06. 28.

P.S. 교수신문(05. 12. 04) 해외동향: 佛, 들뢰즈 10주기 맞아 논쟁 활발

-들뢰즈가 1995년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한지 10년이 지났다. 그에 대한 추모 혹은 기억은 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을 도구상자 삼아 끊임없이 개념들, 기능들, 지각들을 발명해내는 일일 것이다. 비록 들뢰즈 자신은 토론에 대한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철학이 빚어낸 사건 그리고 효과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프랑스에서 진행 중인 들뢰즈 관련 논쟁들 중 두 가지를 간략히 조망해보고자 한다.

들뢰즈와 정신분석학

-지난 9월 출간된 모니크 다비드-메나르드의 <들뢰즈와 정신분석학 : 말다툼>은 철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의 미묘한 "트집 관계"를 들뢰즈의 철학 속에서 살펴보고, 철학에서 정신분석학의 자리 문제를 다룬다. 그녀가 지적하듯이, 실천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 뭔가 작동되지 않는 것('부정적인 것'), 즉 증상이나 징후에서 출발하는 반면, 사유로서의 들뢰즈의 '철학'이 ‘긍정적인 것’에만 주목하는 한, 이 둘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특히 "슬픈 정념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그녀의 질문은 정신분석학과 스피노자-들뢰즈 사이의 쟁점을 직접적으로 제기한다. 이는 부정적인 것에 주목하는 정신분석학과 긍정적인 것에 주목하는 철학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을 환기시키며, 헤겔 변증법과 들뢰즈의 반변증법 논쟁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이 큰 문제를 모두 다루기보다는 '슬픈 정념'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본 논쟁의 관건은 정신분석학이 제기하는 "슬픈 정념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스피노자-들뢰즈의 입장에서는 잘못 제기된 문제라는 데 있다.

-첫째, 스피노자-들뢰즈에게 정념은 신체들이나 물체들의 마주침의 효과 및 그에 대한 적합한 혹은 부적합한 인식에 해당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실천 철학’에서, 우리 신체와 부합하지 않는 신체와 마주치는 가운데 나오는 슬픈 정념 - 그것은 우리를 파괴하거나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대한 부적합한 관념에 불과하다 - 에서는 공통 개념이 나올 수 없으며, 후자는 오로지 기쁜 정념 - 그것은 우리가 행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증가시킨다 - 으로부터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처방은 좋은 마주침을 선별, 조직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

-둘째, 정념은 마치 사건과도 같아서 (다른 개체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 혹은 (우리의 신체에 나타나는) 표면-효과이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슬프다 혹은 기쁘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것들이 우리의 얼굴 혹은 몸을 가로질러 표현될 뿐이다. 그러므로 슬픈 정념 자체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 되는 신체들과 그들간의 마주침을 어떻게 새로이 조직하느냐가 문제다. 더불어, 정신분석학이 가정하는 인간주의는 정서(affect)를 사물, 개체의 차원에서 고려하는 스피노자주의에는 낯선 것이다. 스피노자-들뢰즈에게는 오히려 동물 행동학, 나아가 개체 행동학이 중요하다.

-결국,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 자체에 정신분석학이 참고 대상이었느냐의 여부를 떠나, 그의 철학 자체와 정신분석학을 화해시키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들뢰즈와 정치

-2003년에 5월 출간된 <들뢰즈와 민주주의의 문제>에서 필립 멍그는 들뢰즈의 철학 자체에 고유한 의미로서의 '정치'는 부재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은 올해 초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그리고 정치’ 콜로키움에서 다시 한 번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열기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논점을 두 가지만 간략히 언급해보자.

-첫째, ‘대담’에 등장하는 "생성과 역사의 구분"은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가 스토아학파를 따라 발전시킨 순수 사건과 사물의 상태 사이의 구분과 유사하다. 이는 현재의 어떤 역사적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고, 항상-이미 지나갔거나 도래할 것으로서의 혁명, 순수 사건으로서의 혁명[아이온의 평면]과 신체 안에 이 혁명을 등록, 체화해야할 필요성[크로노스의 평면] 사이의 아포리아로 이어진다. 과연 이 두 평면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둘째, 들뢰즈가 강조하는 소수, 미시 정치에 대한 파악이 특정한 지식인의 전유물인 듯 보이는 ‘지성’의 질서에 속하는 한, 그의 정치는 엘리트주의적이자 아방가르드적이다. 덧붙여 토론에 대한 들뢰즈의 혐오는 곧 바로 '토론'을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연결된다. 그리고 들뢰즈는 민주주의 혹은 정치에 대한 고민을 윤리에 대한 논의로 환원한다.

-궁극적으로 멍그는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생성'에 대한 예찬과 노마디즘에 대한 피상적 이해가 낭만주의적인 치기로 흐르고 있으며, 오히려 연대와 합의에 기초한 정치적인 내재성의 평면, 즉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가 제기한 생성과 역사의 구분 문제는 슬라보이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들>이나 <지젝과의 대화> 등에서 들뢰즈의 이론 자체 내의 아포리아로 취급된 바 있다. 신체가 먼저인가, 비인격적이고 잠재적인 사건들, 흐름들, 생성들이 먼저인가. 사건은 신체들의 비물질적 효과인가[‘의미의 논리’의 유물론] 아니면 신체야말로 생성 혹은 사건의 순수 흐름의 생산물[‘안티-오이디푸스’의 관념론]에 불과한 것인가. 또한 들뢰즈(철학)의 반민주주의 성향에 대한 혐의 제기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토론인 이종영 교수의 ‘들뢰즈-가타리의 파시즘’론 혹은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역시 이런 문제들은 들뢰즈 연구가들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마놀라 안토니올리가 최근 <들뢰즈, 철학적 유산>에 기고한 글인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적 기계화’에서 말하듯이, 리비도적인 에너지 혹은 생성들로부터 '순수' 정치 영역을 분리해내려는 시도는 환상에 불과하며, 새로운 정치적 기획은 오히려 생산 양식, 행동 형식, 감수성, 삶의 양식, 기술, 환경, 제도, 사회에 대한 관계의 변화를 가정한다.

-물론 이것은 들뢰즈를 ‘반복하는’ 답변이기는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들뢰즈가 ‘대담’에서 말한 "자본주의 및 그것의 발전 과정에 주목하는 정치철학" 연구야말로 그를 읽는 자들에게 남겨진 과제 중 하나이며, 네그리와 하트의 작업을 비롯한 자율주의의 자본주의 분석 및 삶정치론은 그러한 실천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후자는 또한 멍그가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다중이 공유하고 있는 일반지성, 언어 능력, 이동성 등에 기초하여, 공통적인 것 - 그것은 동일성이나 보편성, 더군다나 파시즘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부합하는 신체들 간의 즐거운 마주침의 조직화에 가깝다 - 의 구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성'이 소수 전위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기존 민족-국가들 사이의 경계의 와해 및 이주 노동자들의 통제 불가능한 흐름에 대한 착목은 포획이나 제도에 대한 탈주, 생성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는 고유하게 들뢰즈적인 관념을 계승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고유하게 정치적인 공간이 부재하는 현 상황에서, 정치적 문제는 존재 방식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라는 윤리적인 기획의 차원에 접속되어야 한다. 그런 한에서 삶권력에 대한 분석 및 삶정치에 대한 모색은 그것이 들뢰즈-가타리 정치철학의 적자(嫡子)이냐 아니냐의 여부와 무관하게 구체적이고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위 두 논쟁에서 공통되게 발견되는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언급한 내재성의 평면의 구성 요소인 철학(개념), 과학(기능), 예술(지각)에 왜 정신분석학이나 정치는 추가되어서는 안 되느냐 혹은 왜 이 마지막 둘은 철학에 사유 거리를 제공하지 못하느냐라는 정당한 문제제기다. 그러나 그 둘을 덧붙인다면 우리는 바디우의 철학의 조건들 - 정치, 과학(수학), 사랑, 예술(시) - 이나 그 밖의 전혀 다른 철학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더 이상 들뢰즈의 철학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데 들뢰즈의 개념들이 도구 상자로 쓰였다면 그것도 또한 기쁜 일이 아닐까.(양창렬 프랑스통신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