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dohyosae > 에로스- 필리에 - 아가페
사랑의 역사 대우학술총서 구간 - 문학/인문(번역) 73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음, 김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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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로쯔는 '사랑의 세 단계'라는 책에서 사랑을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의 단계로 나누고 육체에서 정신을 거쳐 신적 사랑으로 향하는 인간의 과정을 철학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에로스가  감각적이며 본능적인 사랑이라면 필리아는 정신적이며 인격적인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의 최종단계인 아가페는 신적이며 은총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는 각각 독립적이지만 각 단계는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각 단계의 사랑이 고양될 때 다음 단계로의 상승이 있게 되는 것이다. 로쯔는 여기서 우리 인간이 신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랑 역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이 본래의 인간성을 찾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로쯔가 사랑을 신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하였다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는 심리학적인 고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책을 읽다보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자와 정신이란 말이 있다. 문자가 외적인 것이라면 정신은 내적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신 혹은 문자가 아니다. 문자가 실천을 통해 정신적인 상태로 고조될 때 문자는 정신의 표현이 되는 것이고 정신은 문자의 내면화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 두 과정이 결합되지 못할 때 문자와 정신은 서로 분리되어 따로 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신학이 윤리학으로 심리학이 신학으로 전도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랑의 역사는 점점 다면화되고 있다. 사랑이 정형화된 시대에서 점점 무정형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사랑이란 단어 자체가 '낡은 잡지의 겉표지 처럼 통속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의미 자체가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관점이 변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변해가는 사랑의 심리학적 변화를 제대로 보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사랑의 이해가 아닐까.


** 정말로 읽어도 읽어도 그 박학함의 세계는 정말.... 철학, 시, 종교, 소설을 종횡으로 무진하게 이동해가는 저자의 글솜씨를 감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뿌듯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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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42)

하여간에 책들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마치 책사태처럼. 그런 사태는 지긋이 한번 무시하게 되면 계속 속편하지만, 괜히 한번 눈길을 주게 되면 속절없이 당하게 된다. 남의 돈 세는 일 같아 남세스럽지만, 대개는 사두지 못할 책들을 또 몇 권 나열해 본다(물론 가끔 한두 권씩을 사게 되고 읽게 된다. 나도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처음에 꼽을 책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처녀작' <세미오티케>(동문선). 아마도 '모스크바통신'을 하릴없이 유심하게 읽은 분이라면 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 <크리스테바 선집>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기억할지 모르겠다(모스크바에 온 보람을 안겨주었던 그 책이 내가 작년에 꼽은 '올해의 책'이다). 그 러시아어본에는 바흐친론인 <시학의 파괴>와 함께 <세미오티케>와 <소설 텍스트>가 합본돼 있었다(이 책들은 영어본이 아직 안 나와 있다).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세미오티케>(원서 제목은 희랍어로 돼 있다)는 박사학위논문인 <시적 언어의 혁명>과 함께 당시 프랑스 지식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 불가리아 출신의 젊은 여성 '사무라이'가 얼마나 '센지'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아직 영어본도 나오지 않은 까닭에 우리말 번역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떡하니 서점에 깔려 있어서 '경악'했다.    

그 경악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론 놀랍고 반갑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극히 걱정스러웠던 것. 거의 동문선 전속이라고 할 만한 역자는 이미 10여 권의 번역서를 낸바 있고, 그 중에는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과 그녀가 편집한 <미친 진실>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수준은 좀 미심쩍은데,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라는 생각없는 번역서를 보노라면 기본적인 자질까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미 사건은 터져 버린 것을. 게다가 크레스테바 전공자란 분들의 번역도 대개 기대 이하이기 때문에 이 경우만 유난스러울 건 없으리라는 계산까지 하게 되면, 결론은 '울며 겨자먹기'이다(이 책에 대한 자세한 읽기는 이번 여름에 시도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감스러운 건, 12편의 논문 가운데, 4편이 빠진 채 8편만 번역돼 나왔다는 사실. 역자가 후기에 밝혀놓은 사실인데,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놓지 않고 있다. 분량 때문에?(도스의 <폴 리쾨르>도 890쪽짜리로 번역돼 나온 걸로 봐서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빠진 논문들을 보니까 대개 기호학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다(데리다의 <입장들>에 실린 대담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에서도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60년대 후반 크리스테바는 프랑스에서 기호학의 선두주자였다). 해서, 우리말 <세미오티케>는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책이 돼 버렸다. 거듭 유감스럽다. 번역의 질이 그 유감을 상쇄해줄 수 있을는지?

 

 

 

 

두번째 책은 작년에 방한하기도 했던 페터 슬로토다이크의 대표작 <냉소적 이성비판1>(에코리브르)이다(이번에 1권이 나왔는데, 2권도 곧 나오는 건지?). 작년에 나온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를 도서관에서 대출해 놓은지 제법 오래 됐는데(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다), 읽을 거리가 그새 또 추가됐다. 책은 이미 '냉소주의'를 우리시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지목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 틈틈이 참조하고 있는 책으로 낯설지 않은데(<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에서도 이 점은 언급되고 있다) 소개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냉소주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 그것이 철학적 전통인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탐색하는 책이다. 책은 냉소주의가 우리의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냉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를 알아본다."

이 신간에 대해서는 동아일보의 리뷰가 요긴한데, 잠깐 옮겨오면, "<냉소적 이성비판>은 철학계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고 부를 만하다. 매우 선정적 방식으로 계몽주의 이후 현대철학의 총체적 파국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일약 독일 철학계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한 이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지 200주년을 맞은 1981년부터 집필됐다. 이 때문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 3대 이성비판의 뒤를 잇는 '4대 이성비판'이라는 반응을 낳았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칸트보다는 니체의 후계자다.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자기과시적인 '길거리 철학'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3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우리 시대는 냉소적이 됐다. 우리는 계몽됐지만 무감각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어디 써먹기 전에 우리는 이 책을 좀 읽어봐야 한다.

 

 

 

 

세번째 책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들뢰즈 영화론 연구서 <들뢰즈의 시간기계>(그린비)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물론 들뢰즈의 <시네마>를 친절하게 소개/해설해 준다는 데 있을 터이고, 그런 종류로는 좀 얄팍하지만 <들뢰즈: 철학과 영화>(열화당, 2004)란 책도 이미 소개돼 있다. 그리고 논문집 <뇌는 스크린이다: 들뢰즈와 영화철학>(이소출판사, 2003)도 이 주제로 참조할 만한 책이다. 한데, 신간은 저자가 이미 <현대영화이론의 궤적>(원제는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믿을 만한 영화학자이고,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에 '참고서'로서 유용할 듯싶다. 문제는 정작 들뢰즈의 <시네마>가 아직 완간되지 않은 것. 애꿎게도 1권 운동-이미지만이 두 차례 번역되었을 뿐이다. 무얼 갖다놓아야 해설을 할 게 아닌가? 그러한 순서개념이 좀 부족한 것은 우리 학계/출판계의 '관행'이므로 크게 흠잡을 건 없지만, 조만간 바로잡히기를 바란다.

 

 

 

 

해설서로서 로도윅의 책에 견줄 만한 것이 철학분야의 신간,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이제이북스)이다. 이미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이제이북스 2004)를 소개한 역자의 '신작'인데, 발리바르와 마슈레는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들이고 조만간 소개될 듯한 자크 랑시에르까지 포함해서 알튀세르 사단의 3총사를 이룬다. 신간은 이들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해줄 듯. 앞에서처럼, 이 경우에도 순서는 좀 뒤바뀌었다. 정작 스피노자의 주저들이 번역/소개되기 이전에 대표적인 연구서들이 먼저 책장에 꽂히게 된 것. 역자의 계획대로 제대로 된 스피노자 번역본들이 조만간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신간들이 여러 권 나왔다.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책세상), 터키의 '대표작가' 오르한 파묵의 <눈>(민음사), 그리고 한국의 '유령작가' 김연수의 작품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등이 그것이다. 모두가 손꼽을 만하기에 그냥 내버려두고, 나는 좀 삐딱한 마음으로 러시아작품을 고르도록 하겠다. 보리스 필냑(삘냐끄)의 <마호가니>(열린책들)이 그것이다. 잠시 소개문을 인용하면, "보리스 삘냐끄의 '마호가니(Krasnoe Derevo)'는 1929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작품으로, 트로츠키 공산주의자의 시점에서 혁명 후 10년의 사회와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작품으로 인해 당국의 격렬한 비판을 받은 삘냐끄는, 작가 동맹에서 추방당하고 1937년 대숙청기에 체포된 뒤 사살되었다."

필냑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30년대에 나름대로 아부도 하고 분투도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한 불운한 작가였는바, 그의 대표작 <벌거벗은 해>(1921)은 이미 소개돼 있다. 내가 더 좋아하는 작가/작품은 <마호가니>에 같이 묶인 유리 올레샤의 <질투>(이들 작품들은 모두 이전에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던 것이 단행본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올레샤는 <기병대>의 작가 이삭 바벨과 함께 오뎃사 출신의 대표적인 '동반자작가'인바, 개인적인 생각으론 새로운 이념에 헌신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걸 무시하지도 못하는 '동반자' 문학의 핵심이 <질투>에는 잘 그려져 있다. 게다가 아주 코믹하다(하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코믹이다). 그리고 그 코믹은 '감정의 음모'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작년에는 올레샤의 동화 <세 명의 배불뚝이>(기탄출판)도 출간되었다. 그의 '음모'가 얼마나 코믹한지 한번 구경들 해보시길.  

 

 

 

 

 

여러 분야에서 읽어볼 만한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자리에서 다 헤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끝으로 한 권만 꼽자면, 문학평론가 정과리의 새 비평집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문학평론집으로서는 최근에 서영채의 <문학의 윤리>에 이어서 꼽아보게 되는 책이다.

 

 

 

 

책은 '존재의 변증법4'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데, 그건 이 책이 그의 네번째 비평집이란 뜻도 된다. <문학, 존재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1985)을 시작으로, <존재의 변증법2>(청하, 1986), <스밈과 짜임>(문학과지성사, 1988),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 등이 그가 이전에 낸 비평집들인데, 기억에 아마 시비평들만을 묶은 마지막 책을 제외하고 '존재의 변증법'이란 문구를 제목이나 부제로 갖고 있었던 듯하다. 실상 '존재의 변증법'이란 모호한 문구가 문학의 술어로서 얼마나 생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굉장히 선호하는 문구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신의 비평행위를 그 문구에 집약하고자 하므로.  

정과리는 '문지' 4인방의 뒤를 이은 '문사' 세대의 대표적인 비평가로 활동했었지만(작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이번 비평집도 문지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평론가 김현 사후에 그를 계승할 만한 가장 유력한 비평가로 지목됐었지만(적어도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생전에 그의 일부 비평에 대해서 '관념의 체조 같다'는 평을 '스승'인 김현은 내린바 있지만) 비평가로서의 그의 궤적은 그러한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문학의 지형변화, 혹은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변화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다(그 두 가지는 맞물리는 것이지만). 태도의 변화? 가령 이번 비평집에도 수록돼 있지만, "옛날 옛적에 문학이 있었지"라는 식의 태도. 해서, 그의 비평은 문학 이후, 문학의 죽음 이후, 문학의 무덤을 앞에 둔 비평이다. 그러니 애도는 있을지언정 열정은 더이상 자리하지 않는다. 대신에 부각되는 건 <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1998). 비평이 '디지털화'하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를 내게 암시해준 책이고, 한 젊은 비평가의 '패배주의'를 확인하게 해준 책이다. 이후에 그는 알다시피,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도 합류하면서 '최연소' 원로 비평가로 자리하게 된다. 그에게 어떤 영광이 더 남아 있는 것인지?

책머리에 실려 있으면서 아마도 표제를 빌려주었을 '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욕망'이란 평문은 1988년에 씌어진 것이고 나는 그 글을 읽던 때를 기억한다. 대학가의 그 골목과 지금은 없어진 그 서점에서 신간으로 나온 <문학과사회>를 들춰보던 때가 그 때였지 싶다. 욕망은 그때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원로 비평가'의 욕망도 그때 거기서 들끓지 않았을까? 나는 '쿨한' 욕망을 믿지 않는다...  

05.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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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성은 진짜 현실이다
성은 환상이다
기시다 슈 지음, 박규태 옮김 / 이학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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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일상의 이면에서 표면으로 떠올랐고, 말초적인 성(sex)으로부터 학문적인 접근 방식의 성에 이르기 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담론들이 있다. 그럼에도 성담론은 여전히 일반인의 접근을 가로막는 형태(말초적인 차원부터 고급한 차원까지)로 왜곡되어 있다. 가령, 성의 매매춘 문제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그것이 남근주의 사회, 자본주의 체제, 가부장적 질서 속에 여성에게 강제된 것이라고 항변한다. 맞는 말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도 반론들은 늘상 존재해 왔다. 여성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매매춘에 임하는 경우는 어찌 보아야 하는가? 경제적 궁핍의 정도, 사회적 지위, 문화적인 레벨과 상관없이 자발적인 매매춘에 임하는, 점차 교묘해지는 탓에 매매춘으로 비추지 않는 여성의 상황을 페미니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답할 것이 없을리 없다. 그런데 어쩐지 가부장적 질서, 자본주의 체제, 남근주의 사회의 주장 보다 힘없이 들린다. 일반 대중들이 그 의견에 쉽사리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단지 무지한 탓만은 아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매우 논쟁적이며, 심리학과 페미니즘 사이에 감정적이 아닌 학문적으로 뒷받침되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물론 이책에서도 매매춘은 지탄의 대상이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 금욕적이거나, 성차별적이거나, 혹은 자유분방한 성 관념을 체득하게 되는 것일까? 라는 질문, 인류(여성)에게 있어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라는 매매춘은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시스템의 문제일까, 아니면 여성의 본능 중 하나일까? 와 같은 질문에 대해 이제껏 답해준 책은 그리 흔치 않았다.

이 책은 이렇듯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와 같이 얽히고 섥힌 성 담론에 대해 그야말로 일반인의 수준의 궁금증을 품고 성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 책이다. 앞서 매독의 이야기처럼 근대의 발명품들 - 사랑, 연애, 결혼의 신화 - 에 대해 기시다 슈는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질문은 평범하고 일반적이지만 답변은 평범하고 상식적이면서도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성 담론의 여러 측면에서 공세적 입장에 있는 페미니즘을 먼저 접한 이들에게 기시다 슈의 견해는 일견 남근주의적인 환상을 북돋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의 입장을 십분 고려한다 할지라도 남성의 성의식에 대해 이제껏 '기시다 슈'만큼 정직하게 답한 학자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 '성은 환상이다'는 다른 말로 하자면 '성은 현실이다'가 될 수 있다.

그는 일반인들이 가질 만한 평범한 의문들로부터 출발해서 성의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우리의 본능에서 이성적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다루고 있다. 자칫 방만해지고 논점을 벗어날 수 있는 대목에서도 그는 일관된 입장에서 이 논의들을 끌어나가고 있다. 기시다 슈의 주장이 마음에 안 들 수는 있지만 섣부르게 반박하기 어려운 까닭도 거기에 있다. 만약 이 책을 반박하고자 한다면 감정적인 비평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영역에서 접근하여 반박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의미에서 기시다 슈는 어떤 페미니즘적인 입장보다도 단호하게 성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성은 환상이다'라고 말하면서 성이 무의미하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의 전세계적 도래가 불러온 변화가 성의 본질을 왜곡하고, 훼손하고 있음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을 가한다.

이 책은 혼란스러운 기존 성담론과 통념들에 대해 프로이트 학파의 심리학자 기시다 슈가 응수하는 성의있는 답변이다. 그는 심리학적 접근을 통해 성욕의 기원, 남녀 관계의 양상, 성차별, 강간, 매춘 등의 지독히도 인간적인(인간에게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현상들을 밝혀나가고 있다. 일례로 강간은 인간의 본성이라기 보다는 사회의 성격과 문화가 규정한다는 것이나, 남성의 성욕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 참을 수 없다는 통념이 거짓이라는 그의 질타는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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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hallonin > 사드를 논할 준비
사드의 규방철학 바리에테 4
D.A.F. 사드 지음, 이충훈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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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끝에 실려있는 가라타니 고진이 쓴 작품 해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는 사드를 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이것은 접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사드의 저작이라곤 거의 이 한 권만을 꼽을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그토록 흔하게 인용하곤 있지만 정작 온전하게 접하진 못하고 있는 사드라는 인간과 그의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해야할 것인지, 다시 묻는 것은 썩 온당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너무 자주 행해져 왔기 때문이다. 

[규방철학]은 역자의 말과 [규방철학] 본편, 그리고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방철학] 본편 안에는 '프랑스인이여, 공화국의 시민이 되기 위해 조금만 더 노력을'이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실려있다. 밀고 당김과 역전되는 역할극에 대한 예술적인 경지의 가학-피가학적 광경 보다는 선생들의 교육을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행동들을 본능적으로 수행하는 으제니의 고분고분한 모습이 사디즘의 순진했던 고전시대를 느끼게 만드는데 사드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당시 문학양식 특유의 장식적이고도 장황한 설명으로 이뤄져 있는 소책자가 들어가 있다는 것으로도 짐작 가능하거니와 끼울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접합을 연구하며 묘사되는 난교의 풍경들이 양념 치듯 간간이 나오는 반면 상대적으로 도덕과 이성에 대한 사드 자신의 이론들이 현란한 수사의 장광설로 펼쳐지는 이 책의 흐름은 다분히 정치적인 사드 자신의 사상에 대한 개인적 욕구가 반영되어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의 글이 보여주는 자유는 현학적이고도 거침없는 상상의 영역과 동의어다.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혐오할 수밖에 없는 영역의 행위에 쾌락의 왕관을 씌워서 온갖 수사를 동원해가며 호들갑스럽게 찬사를 퍼붓는다. 그 방법론이 되려 과장과 망상으로 이뤄진 일종의 독임을 알아챈 이들은 과장스럽게 구축된 혼돈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쾌락을 통해 찾아내려 하는 사드가 일종의 골방혁명가였음을 간파해냈다. 그의 혼돈은 실로 혼돈 그 자체이며 그 도발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이론적인 설명의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은 예리하다. 과연 지고의 가치인 '쾌락'을 어떻게 해야 이론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쾌락은 플라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로 설명되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충분히 천박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노골적이며 끈적이는 타액과 타액의 교환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하는 세계다. 개구리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뭐가 다른지 어떻게 구분해야 하겠는가. 그렇게 끈적거리고 금기투성이며 궁극적으론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루는 작업이었기에 그는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구속된 상태에서 보내야 했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의 글들은 지하를 통해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까지 광기에 절은 풍경에 천착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실상 현실은 이미 사드의 상상을 넘어서는 세계였기 때문이리라. 혁명으로 인해 구체계가 부숴지고 로베스피에르의 압제가 날뛰던 세계. 로코코풍의 부패한 일탈들과 권력에 의한 민중의 도륙, 그리고 민중에 의한 권력의 도륙이 마구 뒤엉켰던 시대. 그의 글이 아직도 우리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폭력의 광경들이 말그대로 혼돈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경험들의 댓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나온 이 번역판은 말그대로 완역본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사드의 원저작을 삭제 없이 그대로 뽑아냈다. 특히 18세기 프랑스 문학 전공자인 역자의 꼼꼼한 태도는 이 소설을 하나의 두툼한 풍속 및 문학사전으로 보이게 만들어놓을 정도로 풍부한 주석과 해설로 채워놓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의 현상 그 자체인 사드의 저작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리라. 그래서 별이 하나가 부족한 까닭은 사드라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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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IshaGreen > 문학적 사디스트
사드의 규방철학 바리에테 4
D.A.F. 사드 지음, 이충훈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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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마디로 진정으로 또라이같은 책. 사드 후작의 명성은 괜히 드높은 것이 아니었다.

집단 섹스에, 변태적 성행위에, 온갖 종류의 근친상간에, 비역질까지…, 인간의 상상의 끝은 어디인가 싶을 정도의 범주에서의 온갖 음탕한 행위가 다 나온다(글쎄, 포르노 자주 보시는 분들은 보셨을 지도 모르겠네, 피식). 아, 짐승이랑 교접하는 수간(獸姦)만 빼고.

특히 충격적인 결말 부분, 책장을 넘기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올 정도였다. 다섯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서로를 물리적으로 학대하며 변태적 성행위를 벌이는 동시에, 끝 부분에 등장하는 한 가련한 여인을 인간의 잔인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보여주려는 듯 물리적으로 그리고 성(性)적으로 온갖가지의 방법으로 학대하는데, …그녀는 여주인공 급 소녀의 어머니였다…. 게다가 그녀의 딸이 가장 앞장서서 자신의 어머니를 학대하는데, 이 부분에서 구역질과 심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인간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느끼지 않았다면 인간이 아니지.

그럼 왜 읽었냐? 라고 묻겠지들. 우습게도 내가 사드에 접근한 이유는 지적 호기심이었다. 인간 내면의 본성, 쾌락에 대한 열정과 잔혹성을 최초로 끄집어낸 천재라고, 굳이 '사디즘'이나 '사디스트'를 들지 않더라도, 수많은 문학가와 철학가,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사드를 언급하니깐, 도대체 어떤 작품을 쓴 사람일까, 하고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사드 자신을 투영한 듯한 작중 주요 인물인 돌망세 씨는 자신의 쾌락주의와 무신론관을 제법 조리있게 설명하면서 자신의 제자(?) 으제니 양을 교육시키는데, 15세의 소녀 으제니는 별 비판도 없이 "당신의말이 옳아요"라고 하면서 감탄하며 그의 충실한 제자가 되어간다. 기독교에 대한 강렬한 비판과 여성의 성적(性的) 해방을 주창하는 부분은 상당히 설득력있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도 있다. 물론 살인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충격적인 부분은 당연히 동의할 수 없었고, 여성의 성적 해방을 주장할 것이면 여성 주체적으로 그렇게 되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여성의 아름다운 몸은 남성들에게 사랑을 받으라고 있는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성적 해방의 근거를 드는 것에서는 한계가 느껴지기도 했다ㅡ그가 남자였으니 당연한 거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인가?-ㅁ-;ㅋ

아무튼 논할 것도 많고 상당히 충격적이고 민감한 내용들도 많아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흘러갔으면 훨씬 흥미진진하고 완성도가 높았을 텐데, 별 비판없이 돌망세의 충실한 사도가 되어가는 으제니의 모습을 보면서 작품에 많이 실망했다. 그나마 생땅유 부인의친동생인 미르벨 기사가, 주인공들의 항문 성교 예찬이나 마지막에 생모를 온 세상의 호로자식 저리가라 할 정도로 학대하는 으제니의 모습에 조금은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돌망세가 빈민 구제는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 "그러는 당신은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 따뜻한 이불에서 잠들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지내지 않느냐"고 조금은 설득력 있게 반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논의가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워낙 강렬한 돌망세의 카리스마에 묻혀버려 정상적인 인간의 주장일 미르벨의 주장이 완전히 조롱당하는 느낌이고, 미르벨은 조심스럽게 (그것도 아주 가끔) 반대를 하거나 조금 불평을 할 뿐, 등장인물이 벌이는 온갖 엽기 행각에 자신도 동참을 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사의 의견이 더욱 우습게 여겨진다. 음, 처음에는 이런 논의의 부실함에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사드는 이런 구조를 통해 오히려 기성 사회를 더욱 조롱하고비꼬는 효과를 극대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그의 생애 자체가 엽기적인 변태적 성행위를 추구한 삶이었기 때문에 '새디스트'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하지만, 나는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그는 진정한 사디스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불편하다. 괴롭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말이다. 나같은 독자들을 상상하며 그는 쾌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는 진정한 문학적 새디스트인 것이다!!!

 

보태기. 역주는 당시 프랑스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에 대해 연관지어 더욱 심층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돕긴 하지만, 많은 내용들이 각주로 붙어있어 독서의 흐름을 끊는다. 미주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하나만 더 보태자면, 이 작품 별점 주는데 무지 애먹었다;;;;) 지금 준 점수도 잘 준 건지 못 준건지 조차 잘 모르겠다. (실은 잘 몰라서 중도의 점수를;;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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