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무너지기 쉬운 번역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재영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지젝의 많은 책들이 그간에 오역으로 훼손돼 있다는 건 더이상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닌데, 이 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된 개정본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류의 책이 대학교재로 지정돼 있다고 하니까 당혹스럽다. 역자서문에는 "여러 가지로 쉽게 생각했다가 번역의 어려움을 경험한 책"이라고 돼 있는데, 그 '어려움'을 왜 애꿎은 독자들까지 나눠가져야 하는지? "이번 번역을 통해서 개인적으로는 지젝의 종교에 대한 논의를 좀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고 하는데, 적어도 이 번역본으로는 그 '앎'에 동참할 수 없으니 유감이다. 

복사해둔 영역본이 눈에 띄지 않아 예전에 몇 자 써둔 걸 바탕으로 당장은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시작부터 나오는 코미디 같은 오역이 '뉴 에이지(New Age)'를 '뉴 에이즈'(13쪽)로 옮긴 것이다(색인에 있는 '뉴 에이지' 항에 이 쪽수가 빠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알랭 바두'로 옮겼다. 다 그럴 수 있지만, 무지가 아니라면 역자가 최소한 부주의하거나 불성실하다는 걸 암시해준다.

그냥 넘어갈 만한 페이지가 거의 없지만, 두어 대목만 보도록 한다(원서를 찾는 대로 마저 지적하겠다). 71쪽에서, “전이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깡은 외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은 익살스럽게 꼬여 있는 끌로델Claudel의 쿠폰텐Coufontaine의 3부작을 언급하고 있다.” 원문은 "In his seminar on transference, Lacan refers to Claudel"s Coufontaine trilogy, in which Oedipal parricide is given a comical twist."(43)이다.

이 대목에서의 클로델은 아마도 작가인 폴 클로델일 것이다(조각가 카미유 크로델의 동생). 먼저, ‘라깡’이나 ‘끌로델’로 표기하고 있는 이 국역본이 ‘꾸퐁뗀’이라고 하지 않고 ‘쿠폰텐’이라 표기한 것부터가 서툴다. 그런데 결정적인 건, ‘Oedipal parricide’를 ‘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으로 번역한 것. 우리말에 ‘어버이’는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를 뜻한다. ‘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이라니? 그렇다면, 오이디푸스가 부모를 다 죽였단 말인가? 그럼 그는 누구와 동침을 했단 말인가?!

아주 사소한 사례인 듯싶지만, 역자가 정신분석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드러내준다. 하긴 이 문장에서 꼬여 있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문장 자체가 비문이다(‘오이디푸스적인 어버이 살해범’을 받는 ‘술어’가 없다).  다시 옮기면, “전이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캉은 클로델의 <쿠퐁텐> 3부작을 언급하는바, 이 3부작에서 오이디푸스의 부친살해는 희극적으로 변형돼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스스로 예술작품의 숭고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기성의 콜라 병들의 줄 이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65쪽) 원문은 “No wonder, then, that in the work of Andy Warhol, the ready-made everyday object that found itself occupying the sublime Place of a work of art was none other than a row of Coke bottles.”(40)이다.

정말 의아하면서 신기한 것은 우리말 문장이 안 된다는 점이다!(그러니까 오역의 대부분은 대상언어에 대한 무지에서가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한다.) 여기서는 ‘아니었다’가 받는 주어가 빠져 있다. 그 주어가 “the ready-made everyday object”이고, “was none other than a row of Coke bottles”가 술어이다.

컴퓨터 작업 중 엉겨서 문장의 일부가 누락되지 않은 거라면, 이런 식의 비문은 (비록 흔하다 할지라도) 몰상식/몰염치의 산물이다. 성의 없는 번역서가 독자에 대한 무슨 ‘시혜’라도 되는 양 착각하면 안된다. 다시 옮기면, “그렇다면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예술작품의 숭고한 자리를 점유하고 있는 일상적인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다름 아닌 일렬로 늘어놓은 콜라병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번역은 놀랍다. 북한의 '김정일'을 지젝의 오기(아마도 'Kim Yong-il'로 표기한 듯)에 따라 '김영일'(59쪽)로 옮긴 것도 웃지 못할 코미디이다(색인에도 '김영일'이다). 김정일의 영어 표기는 'Kim Jong-il'(혹은 'Kim Jung-il')인데, 알다시피 'j'가 연자음일 경우 'y'와 호환된다. 지젝의 오기는 그래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리고 역자는 그걸 '충실하게' 옮긴 것이고. 역자가 지젝의 논의를 얼마나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더불어 역자의 다른 역서들에 대한 신뢰마저 다 무너뜨린다).

이 책의 표지에는 "종교의 본질은 우상과 같은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벗겨내는 데 있다."고 적혀 있다. 번역이라는 우상도 마찬가지겠다. 번역 비판의 본질은 이런 우상과 같은 번역을 끊임없이 걸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벗겨내는 데 있다(그런 점에서 번역 비판은 '종교적'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우리 주위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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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범성욕주의자의 근대철학사

 

 

 

 

"대개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pansexualism)라고 말해지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말을 하든 간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항상 그것에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의미의 궁극적인 지평은 성행위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진짜 눈물의 공포>, 304쪽)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서 지젝이 (각주에서) 도입하고 있는 것은 한술 더 떠서 그러한 범성욕주의적 관점으로 근대철학사를 재기술하는 것이다: "성관계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궁극적인 준거점으로 받아들이면 근대철학사 전체를 그런 용어들로 다시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지젝의 각주16)은 국역본 319-320쪽, 원서 204-5쪽에 나온다). 

이럴 경우 만우절 행사를 겸하여 지젝의 '진지한' 농담을 옮겨놓고 잠시 음미하고픈 유혹을 나는 느끼게 된다. 번역은 필요할 경우 약간씩 수정하기로 한다(국역본에서 점잖게 '성교'라고 옮겨진 'fuck'를 나는 비속어에 걸맞게 '빠구리'라고 옮기려다가 체면을 생각해 참아두었다. 읽으시는 분들이 알아서 요령껏 읽으시길 바란다).

  

-데카르트: "나는 성교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강렬한 성행위 속에서만 내 존재의 충만함을 경험한다는 말씀이며, 이것을 라캉식으로 탈중심화하면,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성교하며, 내가 성교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즉, 성교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것이 성교한다'는 것.

-스피노자: 성교로서의 절대자(coitus sive natura) 안에서 우리는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 간의 구별에 따라, 능동적으로 성교하는 삽입과 성교를 당하고 있는 대상을 구별해야만 한다. 세상에는 성교를 하는 자와 성교를 당하는 자가 있다.

-의 경험론적 회의: 우리는 하나의 관계로서 성교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오직 그 움직임들이 서로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대상들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적 위기에 대한 칸트의 대답: "성교의 가능조건이란 동시에 성교 대상의 가능조건이다." 

-피히테는 이러한 칸트의 혁명을 급진화한다: 성교는 스스로를 성교하는 자와 성교를 당하는 대상으로 나누는 자기-정립적인 무조건적 행위이다. 그 대상, 즉 성교를 당하는 자를 정립시키는 것은 바로 성교하기 그 자체이다.

-헤겔: 성교를 단지 실체(우리를 압도하는 실체론적인 충동)로서만이 아니라 주체(정신적 의미의 맥락에 포함돼 있는 반성행위)로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크스: 관념론의 자위행위적 철학하기에 맞서 우리는 진짜 성교행위로 회귀해야만 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 쓴 것처럼, 진짜 실제 삶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계는 진짜 성교가 자위행위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

-니체: 의지란 그 가장 근본에 있어서 성교에의 의지(Will to Fuck)로, 그것은 '나는 좀더 원한다'라는, 즉 영원히 계속되는 성교라는 영원회귀에서 정점에 달한다.

-하이데거: 기술의 본질이 결코 '기술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성교의 본질은 단순히 존재적 행위로서의 성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성교의 본질은 본질 그 자체의 성교이다.' 즉, 우리의 존재이해를 성교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만이 아니다. 본질 그 자체가 이미 교접하고 있다.(*'fuck'에는 망가뜨리다란 뜻도 있으며 국역본은 그렇게 옮겼다.)

-끝으로, 본질 자체가 어떻게 이미 교접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라캉의 "성관계 같은 것은 없다"라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진부한 이해에 반대하여, 프로이트적인 혁명은 바로 그와는 정반대의 제스처에 놓여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전체 우주를 '성화'하여 우주의 기본구조를 남성적인 원리와 여성적 원리, 곧 음과 양간의 긴장으로 보고, 그러한 긴장이 심지어 다른 더 높은 수준(빛과 어둠, 하늘과 땅)에서 반복되기 때문에 현실 자체가 이러한 두 원리의 우주적 성교의 결과로 등장한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전-근대적인 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이기 때문이다"(304쪽)

-"프로이트가 이룩한 것은 바로 세계의 근본적인 탈성화(desexualization)이다. 정신분석학은 세계의 근대적인 '탈주술화'로부터 궁극적인 결론을 끌어내는데, 그 결론이란 이 세계는 의미없고 우연적인 다수(the universe as a meaningless, contingent multitude)라는 관념을 말한다... 문제는 우리가 다른 일상적인 일들을 하고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무엇을 생각하는가이다."

-"'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개념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는 동안, 즉 우리가 성행위에 참여하는 동안 어떤 환상적 보충을 필요로 하며 다른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해야(환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305쪽) 다르게 말하면, 두 사람이 성교할 때 각자의 환상적 보충물까지 거기에 끼여들기 때문에 언제나 넷(적어도 셋)이 성교하는 게 된다. 그게 '성관계는 없다'의 의미이다! 

만약에 그런 환상적 보충물이 결여된다면, 차이밍량의 <흔들리는 구름>에서와 같은 '삭막한' 성교, 곧 'fucking as the real'이 될 것이다. 영화를 곧 보기는 해야 할 텐데...

06.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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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과 키에슬롭스키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를 읽고 있다. 작년에 1부 1장까지 읽고 덮어두었던 책인데(주로 영화이론을 다루는 1부는 정색하고 읽어야 한다. 특히 '봉합'이론 같은 건 다른 일들을 봉합하고 읽어야 한다. 한데, 그럴 만한 여유를 갖기가 힘들다), 이번에 키에슬롭스키(1941-1996) 서거 10주기를 맞이하여(내주에는 영화제도 개최된다) 한번쯤 그의 영화세계를 돌이켜보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건 지젝을 경유하는 것인데, 최선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국내 키에슬로프스키 관련서는 그밖에 <데칼로그> 정도가 유일하므로).

아마 이 책을 처음 접하고 어려움을 느낀 독자들이 더러 있을 법한데, 조금더 읽기 편한, 그리고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를 막바로 다루고 있는 제2부부터 읽는 게 나을 듯하다. 내가 그렇게 읽고 있는데, 훨씬 진도가 빨리 나간다. 우리말 번역본은 대충 무난하지만 섬세하지는 않다. 읽어나가면서 동의하지 않는 대목에 대해서는 지적하기로 한다. 먼저, 이 글에서는 4장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소!"를 읽어보고 싶은데, 영화감독으로서 키에슬롭스키의 변신/이행 과정에 대해 지젝이 자신의 '논리'를  부여하고 있는 장이기에 키에슬롭스키에 대한 '개관'으로서 적절해 보인다.

지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키에슬롭스키가 다큐멘터리 리얼리즘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실재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었다 - 어느 지점에서인가 우리는 현실 자체보다 더 실재 같은 어떤 것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125쪽) "It was precisely a fidelity to the Real that compelled Kieslowski to abandon documentary realism - at some point, one encounters something more Real than reality itself."(71쪽)

여기서 실재(the Real)와 현실(reality)은 모두 라캉-지젝의 용어이므로 이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만 전제된다면 내용은 간명하다. 그 '내용'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잠시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오래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키에슬롭스키에 대해 언급했던 대목을 참고삼아 일부 인용해본다. 우리에겐 다소 낯선 '다큐멘터리 감독' 키에슬롭스키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대목이다(이 방송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정성일: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릴 감독은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입니다. 아마도 제 생각으로 지금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 중에서는 이만큼 독창적이고 그리고 깊이 있는 영화를 만들어 내는 감독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 선풍이 다가온 것은 그러나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은 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실 키에슬로프스키의 이름은 폴란드의 영화 감독 중에 그저 낯설은 새로운 이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고 그에게 주목하고 있는 영화 평론가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꾸준히 그의 작품이 깐느에 출품되기는 했었지만은 그러나 번번이 공식 경쟁 부분에 끼여들거나 아니면 'Un Certain Regard' 그러니까 '주목할 만한 시선'에 그 그의 영화를 찾아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됐었습니다. 하지만 88년도에 10편의 영화가 동시에 개봉되면서 그야말로 사정은 모두 바뀌었습니다. 그 영화가 그 유명한 십계입니다. 그 88년 십계를 발표하면서 그 영화 평론가들은 이 감독이 어쩌면 우리의 세기말에 다가온 우리 시대를 다음 시대에로 이어줄 유일한 이름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성일: "만약에 여기 그 이 프로의 청취자 분들께서 만약 유럽에 영화를 공부하러 가신다면은 4개의 학교 중에 하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이 4개의 학교를 보통 최고의 학교라고 부르는데요, 영국의 그 BF'라는 학교가 있습니다. 이곳은 '런던 UNIVERSITY'와 같이 그 관계를 맺고 계속 세미나를 하는 학교이구요, 또 프랑스에는 이데끄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름을 페미스로 바꿨는데요 입학 시험 1주일을 봐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학교가 있습니다. 벤더스가 떨어진 바로 그 학교입니다. 마지막으로 폴란드의 로쯔 스쿨이 있습니다."

정성일: "어....이 4개의 학교 출신들....학생들이 1년에 한 번씩 뮌헨 학생 영화 페스티벌을 벌리는데요, 우연히 한 번 이 페스티벌에서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4 학교 중에서 가장 영화를 새롭게 찍는 학교의 학생들은 프랑스 이데끄 출신이었습니다. 보면은 뭐 거의 눈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테크닉이 뛰어난 영화를 찍고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입을 벌리게 합니다. 또 BFI의 학생들의 영화를 보면 테크닉이 거의 완벽합니다. 마치 이것이 학생 영화가 아니라 헐리우드에서 와서 온갖 일류의 스텝 진을 갖고 만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베를린 영화학교 작품들을 보면은 거의 정치적인 이슈, 아주 민감한 소재들을 다루어서 충격적으로 묘사하는데는 일가견들이 있습니다. 제일 따분한 것은 바로 로쯔 학교 출신들입니다. 이 학생들의 영화를 보면 스타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영화는 다 로쯔 학교 출신들 영화입니다.(...) 이들이 영화를 찍을 때는 스타일보다도 주제에 대해 아주 끈질긴 연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인데요, 바로 키에슬로브스키가 나온 학교가 이 학교입니다."(*요즘의 표기는 '키에슬로브스키'가 아니라 '키에슬롭스키'이지만, 수정하지는 않았다.)

정성일: "아, 크지쉬토프 키에슬로브스키는 1941년생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나이가 꽤 되는 셈인데요, 키에슬로브스키는 원래 영화를 전공할 생각이 아니었었고 신부님이 되는 것이 자기의 인생 목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25살이 되면서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고 이제 영화를 하기로 결심하고 로쯔 필름 스쿨에 들어갔는데요, 이 학교에서 원래 전공한 것은 그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영화 공부를 하면서 존경했었던 영화 감독은 그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찍었었던 지가 베르토프 그리고 독일 영화 감독인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또 북극의 나누크라는 그 무성 영화 시대 때의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낸 로버트 플레어티 그리고 프랑스의 장세니스트라고까지 불리우는 엄격한 촬영감독, 타르콥스키도 그렇도록 존경했었던 영화 감독 로베르 브레송이였었습니다."

정성일: "어..이 키에슬로브스키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꾸준히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었는데요...사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키에슬로브스키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근 그 영화광을 자칭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졌었는 많아지고 있는데요 그 그런데 문제는 게으른 영화광들의 아주 그럴듯한 변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그 영화 소년들이 또는 후배들이 영화를 이리저리 토론하고 분석하고 제단하고 해부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로 보고 있다 딱 한마디 근사한 표정을 지으며 던집니다. '영화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거야.'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게으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사실 영화는 제 생각에는 머리와 가슴 모두를 따듯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입니다."



정성일: "가슴만이 따듯해진다면 그거야말로 그것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것이지 그것이 영화의 본연의 자세라고 얘기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다큐멘터리 정신입니다. 키에슬롭스키는 자기의 인터뷰 책인 최근에 그 BFI 에서 발행한 <키에슬로브스키 & 키에슬로브스키>란 책을 보고 있으면(*잘못 필사돼 있는데, '&'가 아니라 'on'이다)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머리와 가슴 그 모두를 따뜻하게 만들어야할 것이다." 동구 다큐멘터리는 그 유럽 다큐나 미국 다큐 또는 라틴 아메리카나 소련, 일본 다큐멘터리들과는 다소 그 다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동구 다큐멘터리의 특징은 인간을 다루는 것입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놓는 사회주의가 왔는데 왜 자본으로부터의 해방된 사회주의에서 인간은 그 중심에 있지 않은가 라는 것이 사회주의 다큐멘터리, 그 중에서도 특히 동구권 다큐멘터리들이 자신들이 서 있는 조건에 대해서 던지는 아주 비판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정성일: "이러한 입장에서 키에슬로브스키는 약 10년간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는 지금도 영화를 찍으면서 이 시기에 찍었었던 그 자기의 작업 방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는 작업을 할 때 항상 하는 방법은...하얀 종이를 한 장 올려놓고 그리고 지금부터 찍어야될 영화의 스토리를 그 한 장에 요약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이제 5페이지 정도 늘립니다. 5페이지로 늘린 것을 다시 10페이지로 늘립니다. 그리고 10페이지로 늘린 것을 이제 시나리오 작가를 대동해서 20페이지에서 30페이지로 늘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늘려 논 다음엔 촬영 감독을 데려와서 100페이지로 늘려 논다고 합니다. 그리고 100페이지가 되어진 다음에는 배우를 불러서 거기서 그것을 낭독하게 하면서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그 배우의 엑센트를 들어가며 대사를 써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독이 그 대사를 만들어 놓고 배우보고 그것을 아무리 주문해봐야 그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키에슬로브스키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 배우의 음색 그리고 그가 놓치고 있는 발음 같은 것들도 그가 필요 이상으로 격앙하는 대목들을 일일이 체크하여 그 배우에 맞는 대사를 만들어 줄 때, 그러니까 그의 작업 방법은 배우 그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합니다."(강조는 나의 것. 지젝도 비슷한 내용은 얘기를 한다.)



그렇게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키에슬롭스키는 폴란드 사회현실(=리얼리티)에 대한 재현을 의도했지만(그는 1966년부터 1988년까지 25편 가량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다), 어느 지점에서는 부득불 리얼리티 너머의 '실재'와 조우할 수밖에 없었고, 혹은 '실재'에로 침입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로서는 어떤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실재에 대한 충실성' 혹은 예의 때문에.

가령, "<첫사랑>(1974)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메라는 결혼전에 임신한 젊은 커플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새로 태어난 아기를 손에 안고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키에슬롭스키가 '진짜 눈물의 공포'를 언급하는 것은, 타인의 내밀한 부분에 그렇게 허락도 없이 파고 들어가는 외설성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가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넘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따라서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윤리적인 결심이었던 것이다."(126-7쪽, 강조는 나의 것)

키에슬롭스키가 육성으로 말하는 바는 이렇다: "모든 것을 기술할 수는 없다.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큰 문제이다. 다큐멘터리를 자기 덫에 걸린다...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치자. 만약 실제 인물들이 거기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침실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한 개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수록 내 관심을 자아냈던 대상들은 스스로를 닫아버린다는 것이었다. 내가 극영화로 전환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극영화는 뭐가 다른가: "극영화는 아무 문제도 없다. 침대에서 사랑을 나눌 커플이 필요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물론 기꺼이 브라를 벗을 여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이내 그런 사람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글리세린을 약간 살 수도 있다. 그것을 여배우의 눈에 몇 방울 떨어뜨리면 그녀는 울 것이다. 나는 몇 번이간 애써 진짜 눈물을 가까스로 찍은 적이 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겐 글리세린이 있다. 진짜 눈물은 두렵다. 사실 내게 그 눈물을 찍을 권리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겠다.(...) 그것이 내가 다큐멘터리로부터 도망친 주된 이유이다."(127-8쪽, 강조는 나의 것)

이렇듯 다큐멘터리에서 극영화로 이행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지제은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카메라광>(1979)라고 본다. "이 영화는 카메라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아내와 아이, 일자리를 잃어버린 남자를 그린, 다뷰멘터리 영화감독에 관한 극영화이다(a fiction film about a documentary film-maker). 따라서 그 영화에는 '침범하지 마시오' 표시가 붙어 있는, 그래서 포르노그라피적인 외설을 피하려 한다면 오직 허구를 통해서만 접근해야 하는 환상적인 내밀함의 영역이 존재한다."(128쪽)

이러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또다른 형상으로 지젝은 <베로니크의 두 개의 삶>(<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인형조종사와 <레드>의 판사를 든다: "어떤 점에서는 판사는 키에슬롭스키의 상당히 명백한 자화상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그는 키에슬롭스키 자신의 유혹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유혹이란 외설적인 실재에의 유혹이다. 아래는 <레드>(1994)에서 이웃들의 사적인 전화통화를 은밀히 엿듣는 퇴직 판사역 장 루이  트랭티낭(1930- )의 모습(내게는 아누크 에미와 공연했던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영화 <남과 여>(1966)의 주연으로 각인된 배우이다).

'진짜 눈물'을 찍는 건 포르노그라피적 외설과 다름없다(그런 의미에서 '몰래카메라'는 포르노그라피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오직 허구(극영화)를 경유해야 한다. '진짜 눈물' 대신에 '글리세린 눈물'. 다시 반복하자면, "인간에 대한 모든 알량한 휴머니즘적 찬사는 그저 '침범하지 마시오'라는 표시에 대한 외설적 위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적절한 일은 내밀하고 특이한 환상 영역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성을 입증하는 이 깨지기 쉬운 요소들을 에둘러 넌지시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129쪽) 마지막 문장은 "one can only circumscribe, hint at, these fragile elements that bear witness to a human personality."(73쪽)의 번역이다. 여기서 'a human personality'는 '인간성 일반'이 아니라 어떤 한 인간의 고유한 '개인성'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지젝이 진짜 눈물에 대한 키에슬롭스키의 금지를 구약에서 '이미지들'에 대한 금지와 열결짓는다는 점이다. 시간상/분량상 그 얘기는 다른 자리에서 마저 다루기로 한다.

06. 03. 08 -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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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라캉 읽기에 관하여

2002년 가을에 라캉 읽기에 대해서 몇 자 적어둔 글을 옮겨놓는다. '라캉 읽기의 몇 가지 방식'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말투로 보아 라캉 입문서를 묻는 질의에 대한 응답이었던 듯하다. 그 사이에 변화된 사정에 대해서 얼마간 보충하도록 하겠다.

 

 

 

 

현재 라캉 읽기에 있어서 대표적인 선두 주자들이라면, 슬라보예 지젝과 브루스 핑크를 들 수 있을 겁니다. 국내 출판계에서도 프로이트 전집 발간 이후 차츰 라캉 읽기쪽으로 독서층의 관심을 이동시키고자 하는 경향이 뚜렷합니다. 물론 그 독서층이라는 것이 몇 줌이나 되랴 싶지만, 푸코나 들뢰즈의 대한 열광적인 반응을 재연할 수만 있다면(그래봐야 1만부 미만일 거라는 제 짐작이지만) 그리 손해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그것이 출판계의 요구/관심일 테고, 다른 한쪽에는 서구의 첨단 이론이나 철학을 수입/소개하는 데에 어떤 소명의식을 느끼는 일련의 지식인(지식분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플라톤이나 프로이트 등과 같은 '거장'의 반열에 들어가 있는 라캉은 20세기가 산출한 가장 난해한 저작(들 중의 하나)의 생산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치 문학에서 제임스 조이스가 대학이란 제도 안에서 박사/교수들이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었듯이 라캉 또한 알 듯 모를 듯한 이론과 도식(수학소)들을 통해서 (라캉을 아는)지식인들과 (라캉을 모르는) 일반인들을 가르는 준거 역할을 충실히 해나갈 것입니다.

물론 현재로선 라캉에 대한 앎이 우리 사회에서 대단한 상징적 권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의 이론이 대중화될수록, 그래서 대중에게 라캉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중요한 사상가로 각인될수록, 즉 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수록 라캉에 대한 지식은 곧 권력화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겠지요. 아시다시피 이미 프랑스 정신분석학과 라캉에 대해서는 셰리 터클의 <정신분석적 정치>(<라캉과 정신분석혁명>(민음사, 1995)으로 번역됨) 같은 책이 나와 있습니다.

 

 

 



다시 지젝과 핑크로 돌아옵시다. 혹자는 지젝에게서 임상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데, 사실 그것이 지젝의 라캉 읽기/해석에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모든 라캉 읽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임상입니다. 임상은 임상에 관한 책을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또 프랑스에서 라캉식 정신분석의 자격증을 따온다는 되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에서 법적으로 그러한 정신분석이 공인되어 있지 않는 한 말입니다. 국내의 일부 정신분석의들이 라캉식 치료법을 어깨너머로 응용/적용한다고 해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 해야 '흉내'이고 대개는 '사이비'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지젝은 라캉을 임상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갔고, 그의 생산성이 보여주듯이 그러한 접근은 꽤나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향락의 전이>에서 지젝 자신이 고백하듯이 그가 대중문화 텍스트를 읽는 데 라캉을 이용한 것은 일차적으론 그 자신이 라캉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론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사례를 찾듯이, 아니 사례를 통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되듯이, 지젝은 (자신이 읽기에도) 난해한 라캉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나 대중소설들을 동원한 것인데, 뜻밖에도 성공을 거둔 것이고, 그것은 라캉 이론을 더 풍부하게 확장시켜 나가는 데 기여합니다.



보다 정통적인 의미에서 라캉의 '주석가' 역할을 하는 핑크는 이러한 지젝의 작업을 상당 부분 보완해 주는 듯합니다(이들은 알렝 밀레르가 모는 라캉 정신분석학이란 쌍두마차의 두 마리 말과는 같아 보입니다). 핑크는 이미 국내에 번역된 <라캉과 정신의학>(원제는 <라캉식 정신분석에 대한 임상적 입문>)과 <라캉의 주체>를 통해서(*국역본이 근간예정이다), 그리고 세미나에 대한 주석서들의 편찬을 통해서 새로운 라캉 읽기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곧 그가 새로 번역한 영역판 <에크리>도 다시 나온다고 하지요(*핑크의 완역본 <에크리>는 올해 출간됐다).

이 두 마리 말, 지젝과 핑크는 꽤 절친한 사이로 보이는데, 그것은 아마도 똑같이 밀레르의 세미나를 통해서, 즉 후기 라캉을 통해서 라캉에 접근해 나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라캉에 대해 다시 흥미를 갖게 된 것도 순전히 이들의 작업 때문이고, 이들에 의해서 소개받은 후기(70년대의) 라캉 이론이 갖는 파워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라캉 이론은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수십년간 몇 차례의 탈바꿈, 혹은 이론적 방점의 이동에 따라 진화해 온 것입니다. 단순화시키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 순으로 그 방점이 이동해 왔고, 밀레르 사단은 실재에 대한 라캉의 이론을 중심에 놓고 그 이전의 작업들은 재해석 혹은 '번역'(핑크 자신이 쓴 용어입니다)합니다. 그리고 이 후기의 라캉은 사실 <에크리>(1966) 이후의 라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 <에크리>가 국역된다고 해서 라캉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이해(구조주의자 라캉!)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고, 후기의 세미나들이 마저 번역돼야 할 듯합니다. 물론 그 세미나들에 대한 주석서들과 참고서들도 함께 소개돼야 하겠지요.

 

 

 


지젝과 핑크, 그리고 다리언 리더의 만화책(<라캉>)을 제외하면, 국내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라캉 연구서들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중심으로 라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해서 라캉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진행합니다(<철학의 외부>에서 이진경도 그렇게 한정된 라캉의 상을 소개하고 그의 '구조주의'를 비판하더군요). 조금 과장되게 얘기하면, 우리가 접하고 있는 것은 어떤 동일한 라캉이 아니라 라캉'들'입니다(*지젝은 '라캉 대(對) 라캉' 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라캉 이해에 가장 시급한 것은 그 라캉'들'을 윤곽지어줄 수 있는 교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왜냐하면 라캉 자신은 그러한 차이들에 대해서 친절하게 해명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부분적인 라캉에 대한 소개로 이해를 대신하려는 시도들은 그간의 것으로 충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젝과 핑크의 책들이 보다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번역되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에서 비춰지는 라캉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유용할 거 같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그러한 유용성에 비추어 볼 때, 몇몇 라캉 연구자들의 젠체하는 태도도 충분히 용인해줄 수 있을 겁니다. 그마저 없다면, 무슨 보람으로 그 머리아픈(!) 일들을 해나간단 말입니까?...

02. 09. 30/ 06. 08. 22.

P.S. 다리언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에 기대어 국내에서 라캉 읽기의 지름길(?)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다리언 리더는 라캉의 법적 상속자인 자크 알랭 밀레르(밀러) 사단의 일원으로 보이는데, 런던에서 개업하고 있는 정신분석가라고 한다. 책의 말미에 더 읽기(Further Reading)로 라캉의 1차 문헌과 그에 관한 2차 문헌 해제를 싣고 있다.

라캉의 <에크리>(1966)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인데, 영어권에는 셰리단의 발췌 번역(1977)으로 소개돼 있고, 이 책은 국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리더에 의하면 그 번역이 썩 좋지는 않은 편이고 또 내용도 난삽하다(*지금은 핑크의 완역본이 나왔으니 셰리단의 영역에 의존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래서 권하는 것이 세미나인데, 밀레르에 의해 20권 가량(?)으로 편집되고 있는 불어본 세미나는 대학 도서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불어를 못 읽는 독자는(그의 책은 웬만큼 불어를 하는 사람들도 읽어내지 못한다) 영어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데, 1,2,3,7,11,20권까지 5-6권 정도가 영역돼 있고, 브루스 핑크가 주석서가 2-3권 나와 있다(1,2권, 11권). 참고로 러시아어로는 <에크리>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상태이며 세미나만 5권 정도가 번역/소개돼 있다.

 

한국어본에만 의존하려고 할 경우 사정은 더 안 좋은데, <욕망이론>(문예출판사, 1994)이라고 발췌 번역된 라캉의 책은 셰리단의 책을 중심으로 번역한 것으로(그러니가 중역이다), 50년대 라캉의 중요한 글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부분적으로 지나치게 의역하고 있다).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문예출판사, 1994)은 구조주의 시절의 라캉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이 책엔 라캉의 서문이 실려 있다), 이 역시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소쉬르 이후의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리더가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라캉의 초기 논문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 라쿠-라바르트와 낭시의 'The Title of the letter: a reading of Lacan'이 있다. 국내 도서관들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라캉이 칭찬했다는 책이다). 하지만 전문적이다. 일반 독자들로선 핑크의 'Lacan to the Letter'가 가장 요긴하겠다.  

다리언 리더가 적극 추천하고 있는 책은 벤베뉴토의 <자크 라캉의 저작>인데(하나의학사에서 김종주에 의해 <라깡의 정신분석 입문>으로 번역돼 나왔다), 이 역시 우리말 번역본을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거의 절판된 책이다. 그리고 필수적인 참고서라 할 사전. 딜런 에반스의 <라캉 정신분석 사전>(인간사랑)이 번역돼 있는데, 국내 라캉학자들이나 호사가들이 번역진으로 망라돼 있지만, 편차가 심하고 용어도 아직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가급적이면 원서와 같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요컨대 라캉에 대한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거의 없는 셈이다. 리스크가 필수적인 것.

 

 

 



그래도 라캉을 읽으려고 한다면, 그래도 번역이 괜찮은 지젝이나 핑크의 책을 권할 수밖에 없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부분적인 오역과 불성실한 교정에도 불구하고(인간사랑에서 나온 모든 책에 공통적이다) 읽을 만하다. 하지만, 역시나 쉬운 책은 아니며, <삐딱하게 보기>나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같은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향락의 전이>인데, 아쉽게도 이 책은 지젝의 번역본 가운데 최악이다. <라캉과 정신의학>이라 번역된 브루스 핑크의 책은 다 읽지 못했지만, 좋은 평을 얻고 있는 책이고, 다이언 리더도 적극 추천하고 있다. 그 책과 짝이 되는 것이 <라캉의 주체The Lacanian Subject>인데, 도서관 등에서 구해볼 수 있으며 두껍지 않은 분량이기 때문에 도전해 볼 만하다.

라캉의 전기서로는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이 가장 자세하다. 하지만, 다소 근거없는 사실들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나마 라캉 읽기에서 다행인 것은 적극 추천할 만한 2차 문헌이 많지 않다는 것. 때문에 한줌의(?) 책만 열심히 읽으면 된다.

02. 10.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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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1)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었다는 것이 어제오늘의 톱뉴스이다(*이 글은 2003년 12월 중순에 씌어졌다). 부시가 재선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어제 문득 들었지만(*예감은 언제나 실현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체포되는니(우리의 KAL기 사건처럼 타이밍을 맞춰서), 미리 체포되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차피 곧 연말이니까 두주쯤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아니다! 그에 대한 재판이 남아있다!...

 

 

 



연말연시는 비교적 좋은 책들이 나오는 계절이다. 주머니가 좀 넉넉해지는 시기인 만큼 (실제적인 통계는 갖고 있지 않지만) 책에 대한 소비도 다소 헤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눈길이 가는 책들이 많이 나왔고, 책 소개의 주기도 빨라졌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건(가장 먼저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케밀 파야의 <성의 페르소나>(예경)이다. 지난주 한겨레 서평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책이다.

원제는 'Sexual Personae'(1990)이고, 번역서의 분량이 916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원서도 718쪽에 이른다). 지난주 구내서점에 포장된 채로 들어왔길래 무슨 책인가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보던, 다소 싸구려틱한(!) 표지의 책이었다. 인터넷교보에 자세히 소개가 되어 있고, 몇 군데에서 신간리뷰로 다루기도 했으니까 찾아보시면 될 듯하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에 의하면 "서구 문화의 역사를 바로 이 3중의 이분법으로,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자연=여성 대 아폴론=문명=남성의 대립으로 이해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논란만 불러일으켰다면, 그저 호사가적 관심거리만 될 터이지만, 내가 제임슨의 신간과 함께 이 책을 주문한 것은(내일쯤 책을 받아봐야 내용을 알 수 있을 거 같다), 해롤드 블룸의 추천사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이 말의 좋은 의미에서 '센세이션Sensation'이며, 이에 비견할 만한 책이 없다는 호평을 하고 있다. 나는 거물들의 그런 말에 잘 넘어간다.

 

 

 



두번째 책은 민음사에서 나오는 '일본의 현대지성' 시리즈의 7번째 책인 나카무라 유지로의 <공통감각론>이다(*<문화의 두 얼굴>, <근대초극론> 등도 이 시리즈의 책들이다). 어제 영풍문고에 들렀을 때에도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이 시리즈의 책은 모두 읽을 만하다는 경험적 판단에 근거하여 추천할 수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이 책은 커먼 센스 commom senses, 상식, 공통감각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의 화가 에스헤르, 초현실주의자 마그리리트 등의 회화론, 지각 심리학의 역전 시야에 대한 지각 문제, 그리고 데카르트파 언어학과 촘스키의 생성문법의 이론까지, 심지어 베르그송의 기억의 문제까지 논의를 확대시키고 있다." 저자는 바슐라르, 푸코 등을 일어로 번역한 바 있는 일본의 중진학자이고, 역자는 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를 번역했던 고동호 교수이다.

 

 

 

 

세번째 책은 박홍규 교수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이다. 이쯤되면 박교수의 놀랄 만한 생산력에 경탄을 금할 수 없는데, <오리엔탈리즘>의 역자이기도 한 그가 올 한해 (번역서를 제외하고) 낸 책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 모두 7권이다. 이전에도 그런 얘기를 한 듯하지만, 이에 견줄 만한 글쓰기의 생산성이라면, 강준만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두 사람의 글은 스피디하게 읽힌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어쨌든 지난번에 타계한 에드워드 사이드를 추모하는 저작 한권 정도는 서가에 꽂아둘 만하다(*다른 입문서로는 2005년에 나온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가 있다). 굳이, 박교수의 흠을 덧붙여 지적하자면, 교정이 섬세하지 않다는 것. 하긴 우리 출판계에서 교정이 잘 돼 있는 책을 손에 꼽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네번째 책은 남미문학의 거장인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Llosa)의 <세상종말전쟁>(새물결)이다. 나는 그의 책 가운데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문학동네, 초역판은 다른 제목이었다)를 부분적으로 읽고, '대단한 구라'라는 생각을 한 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신간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한다. 당연히 한번쯤 읽어봄 직하지 않은가. 아마도 올해 번역돼 나온 남미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 않나 싶다.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들 가운데는 가브리엘 마르케스나 카를로스 푸엔테스 정도가 그와 견줄만한 생존작가들이다.

 

 

 


다섯번째 책은 프란스 드 왈의 <보노보>(새물결)이다. 보노보에 대한 화보들이 실려 있는(그래서 책값이 256쪽에 35,000원이다) 이 생태 연구서는 제인 구달의 말을 빌면 "이 4번째 거대 유인원의 진가를 세상에 알려줄 책"이다. 4대 유인원이란,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그리고 덩치가 작아서 '피그미침팬지'라고도 불리는 이 보노보를 말한다.

내가 보노보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인류학자 리처드 랭햄(하버드대 교수)과 과학저술가 데일 피터슨의 <악마 같은 남성>(사이언스북스, 1998)에서였다. 거기서 야만적인 폭력성을 드러내는 다른 가부장적 영장류들과 달리 보노보는 온화한 가모장적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요컨대,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거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보노보에 대한 드문 연구소개서인 만큼 관심을 둘 만하다.

참고로, 보노보는 동성애도 즐기는 프리섹스주의자들이라고. 저자인 영장류 학자 드 왈은 <정치하는 원숭이: 침팬지의 정치와 성>(동풍, 1995)의 저자이기도 하다(*이 책은 <침팬지 폴리틱스>로 다시 나왔다. 드 왈(드 발)의 최신간은 작년 12월에 나온 <내 안의 유인원>이다).

이 책들을 언제 다 읽을 것인가?!...

200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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