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에로이카 > 알튀세르와 그로스만의 해후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이론신서 26
윤소영 지음 / 공감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주요개념: [자본] 난점과 공백 (67),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67),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 (68, 91, 142-143), 현실의 대상(Gegenstand) 사고의 대상(Objeckt) / concept notion (106-108), individuality (개인성) singularity (특이성) (128, 277), 자본주의적 기술진보의 편향성 (134-5, 220),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 (143,), 자본주의적 축적의 엔트로피법칙과 네겐트로피 (149-150), 에포크 (164-5, 185, 188,) 경향적 불안정성 (191), 전방효과와 후방효과 (242), 아포리아(277), 인권의 정치 (278, 282-3), 주체화와 예속 (281, 296), 상징의 가상화 (283), R-S-I 셰마의 전도 (285),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143, 153, 287-289), 과잉결정과 과소결정 (288), 봉기와 구성 (296-8), 공산주의의 가지 역사적 형태 (302-4), 지적 차이와 성적 차이 (309-18), 네가지 차이 (318).

 

책에는 다섯 개의 강의가 본문 격으로 실려져 있고, 부록으로 뒤메닐과 레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현재성] 실려 있으며, 책의 끝에는 정운영 선생에 대한 추도사가 실려져 있다. 뒤메닐과 레비의 부록글은 윤소영 교수의 입장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좌파 경제학 비판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정독이 필요한 글이며, 책에서 가장 마음에 부분이었다. 그러나 부록과 추도사는 서평에서 제외하고 다섯 개의 강의를 통해 지은이 윤소영 교수가 펼치는 논의를 살펴보겠다. 워낙에 이말 저말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개요를 정리하고, 다음에 평을 하기로 한다. 개요는 다섯 부분으로 나눴다: 1. 역사동역학, 2. 역사적 자본주의론, 3. 이데올로기 비판, 4. 윤소영의 역사, 현실 인식, 5. 윤소영의 정치적 판단. 앞의 개요 부분, 특히 중에서도 1, 2, 3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다소 지루할 것이다.

 

 

개요

 

지은이 윤소영 교수가 책에서 포괄하는 대상의 범위는 알튀세르가 [자본] 난점(논리와 역사의 관계) 공백(이데올로기 비판)이라고 칭한 것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란 이러한 두 가지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칭하는 것이다 (67). 따라서 지은이가 스스로 설정한 과제는 난점을 어떻게 해결하며, 공백을 어떻게 메꿀 것인가 이다. 전자는 2강과 3강에서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론을 통해 다루어지며, 후자는 4강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구성된다. 또 지은이는 알튀세르적인 경제학 비판은 곧 그로스만의 경제학 비판을 현대화시키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69, 105).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알튀세르 초기의 개념을 차용해 본다면, 이중의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이 도식화될 있다.

 

1.

                            일반성I                                                               일반성II                                          일반성III

난점    발리바르, 브뤼노프, 뒤메닐, 아리기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유물변증법       혁신된 그로스만적 계보

공백    스피노자, 게루, 마트롱, 바디우, 이리가레, etc.                 상동                                              인권의 정치

 

[약간의 caveats 추가되어야 한다. 여기서 일반성 III 현재 주어진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목표의 상이다. 이데올로기(일반성I) 과학(일반성 III) 대한 초기 알튀세르의 엄격한 구분은 무시한다. 윤소영은 구분이 비판사회학(일반성I) 경제학 비판(일반성 III), 소외론(일반성I) 이데올로기 비판(일반성 III) 간의 대조에는 적용될 있고, 이것은 알튀세르에 의해 완료된 것으로 ( 싶어하), 비판사회학과 소외론은 흘러간 옛노래 정도로 취급한다.]

 

1. 역사동역학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은 뉴턴의 동역학과 마찬가지로 운동의 법칙과 힘의 법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은 가속도법칙과 같은 운동의 법칙이며,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은 중력법칙과 같은 힘의 법칙이다. 그리고 양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해할 있는 행성운동법칙에 해당하는 것이 이윤율 하락의 법칙이다 (133). 뒤메닐과 폴리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가치법칙과 잉여가치법칙은 경험법칙이 아니라 가속도 법칙과 같은 정의법칙이며, 이윤율 하락의 법칙은 행성운동법칙과 같은 경험법칙이다 (133, 138, 141). 

 

 

2.

                                운동의 법칙                                    힘의 법칙                         행성운동법칙

정의법칙         가치법칙, 잉여가치법칙            

경험법칙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         이윤율 하락의 법칙

 

 

발리바르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이라는 개념을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데, 자본의 추상화는 가치증식과정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가리키며, 노동의 구체성은 노동과정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가리키며, 논리와 역사 양자의 결합은 역사동역학 역사적 자본주의론으로 구체화된다. 이윤율 하락의 법칙은 동역학 모델에서의 궁극적인 설명대상인 동시에, 동역학 모델 외부의 상쇄 경향과의 경계 지점이다. 따라서 역사적 자본주의론은 역사동역학 바깥에 위치해 있다. 반면, 열역학 모델은 이윤율 하락 법칙과 이에 대한 반작용 요인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150). 열역학 모델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는 엔트로피(비가역성) 증가의 법칙인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이에 반작용하는 제도적 요인의 네겐트로피(가역성) 상호작용을 통해서 설명된다. 뒤메닐은 이러한 역사동역학에 개의 동역학(부문간 경쟁, 경기순환) 추가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개념적 패러미터들을 정립한 , 뒤메닐과 아리기를 따라, 이윤율의 이론궤도와 현실궤도를 추적한다 (161-165, 219).

 

2. 역사적 자본주의

지은이는 1차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기술혁신의 역사를 대략 다음과 같이 본다 (242).

(1) 1차 산업혁명              1780년대-   : 면직물 산업,

(2) 1차 교통, 통신혁명      1850-60년대: 철도, 전신            1880-90년대: 전화

(3) 2차 산업혁명              1910-20년대: 자동차 산업

(4) 2차 교통, 통신혁명      1950-60년대: 항공, 우주산업      1980-90년대: 컴퓨터, 인터넷산업

 

위의 1에서도 나와 있듯이 윤소영은 발리바르, 브뤼노프, 뒤메닐, 아리기 등에 주로 의지하여 이윤율 하락의 법칙과 이에 반작용하는 제도라는 관점에서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고 있다. 역사동역학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금융화에 의해서 추동되는 에포크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제도의 측면에서 보았을 , 20세기 자본주의의 중요한 변화는 법인자본주의의 형성이다. 여기에서는 단계가 관찰된다 (196, 202-220): (1) 1890-1900년대의 법인혁명, (2) 1910-20년대 관리자혁명, (3) 1930-40년대 케인즈혁명.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형성된 법인자본의 다양한 제도가 해체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2차 교통, 통신혁명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리고 금융화와 법인자본주의 제도의 해체라는 측면에서 이해 되어야 하며, 여기에 9.11 이후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의 평행적 발전 (251)이라는 측면이 고려되어야 한다.

 

3. 인권의 정치

발리바르에 의해 스피노자가 주목받는 이유는 마르크스에게는 공백으로 남아있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보충할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인간학에는 자체만으로는 해결할 없는 논리적 궁지, 아포리아가 존재하는데, 이는 특이성이 아닌 개인성에 기반한 인권의 정치에 의해 보충됨으로써 비로소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기능하게 된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를 대중의 공포에서 찾으며, “스피노자의 철학을 현재화하기 위해서 대중의 공포라는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를 인권의 정치라는 비철학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283). [cf. 여기서 철학과 비철학의 결합은 난점으로부터 야기된 논리와 역사의 결합에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며, 이진경이 말하는 내부와 외부 같은 것처럼 읽힌다.]

 

인권 개념은 주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양산한다. 이제 주체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시민, 시민-주체를 뜻한다. 인권의 정치, 시민권의 정치의 메커니즘이 봉기(주체화) 구성(주권적 주체로서 시민 자신에 대한 예속)이다. 인권의 정치는 바로 인간=시민이라는 등식에 더하여 자유=평등이라는 등식을 더한 것이다. 그리고 가지 등식을 선언하는 , 그것이 바로 봉기이다. 봉기적 명제를 실현하기 위한 구성(constitution, 헌법)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전개된 헌법의 토대가 소유인가 공동체인가라는 쟁점은 현대정치를 결정하는 첫번째 모순[소유-공동체 모순]이며,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두는 모순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순은 지양되고 가지 새로운 모순이 등장한다. 소유 내부에서는 소유권-노동권 모순이, 공동체 내부에서는 민족공동체-계급공동체(노동자연합) 모순이 등장한다. 새로운 전개를 통해서 소유권과 민족공동체가 결합하고, 노동권과 노동자연합이 결합하면서 현대정치의 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서 인권의 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301). 결합 간의 대결, 공화주의적,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이 현대정치를 특징짓는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가지 역사적 형태를 갖고 있다: (1) 기독교적 공산주의, (2) 시민적 공산주의, (3) 마르크스주의, (4) 페미니즘.

 

4. 윤소영의 역사현실인식

책의 도입 부분인 1강에서 윤소영은 1979-80년의 경제위기와 87년의 3저호황, 97년의 경제위기 등과 정권의 성격, 운동권의 흐름들을 일별하고 있다. 가장 특이한 것은 남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박정희 정부의 1979 4 경제안정화종합시책으로까지 소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책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Volcker Recession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이에 따라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은 남한 최초의 반신자유주의 투쟁들이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따라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해석에 대한 가치판단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일단은 무척 새로운 해석이다.

 

97 경제위기, 외환위기의 본질은 이윤율의 급속한 하락, 원인은 금융화와 재벌이다.

 

윤소영은 1981년경 시작된 미국경제의 에포크가 2012-13 정도에 종료될 것으로 파악한다 (58, 153, 158, 163-4, 185-186). 그는 1929 대공황을 전후로 해서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도 집권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어쩌면 민주노동당이 2012 대선에서 집권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단다. 윤소영이 보기에, 위기에 집권한 좌파당들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고 공산주의적 이행을 저지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만약 2012 민주노동당이 집권한다면, 그건 축하할 일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이행을 뜻하므로 역사의 반동. 그러나 윤소영이 보기에 2010년대의 최종적 위기는 영국자본주의에서 미국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해결되었던 지난 위기와 달리, 그러한 자본주의적 이행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해후한 공산주의적 이행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순간 노동자는 대중에서 계급으로 떨쳐일어난다.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뀐다. 이거 뭔가? 이게 윤소영이 복원하고자 하는 그로스만의 붕괴론인가?]

 

5. 윤소영의 정치적 판단

윤소영은 여기저기서 난삽하게 자신의 정치적 판단들을 밝히고 있다.  생각나는대로 몇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산별노조 대신 일반노조, 지역노조로 가야 한다. (2) 성매매금지법은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이나 주장하는 것이다. 성노동자성을 인정해 한다. (3) 학교는 확대되어야 하고, 가족은 축소되어야 한다. 결혼이 아니라 자유결합이 좋은거다. (4) 참여연대가 하고 있는 것은 뻘짓인데, 소액주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초민족자본의 지배를 공고히 해주자는 것이다 (233-234, 236). (5) 스크린쿼터문화연대는 웃기는 거다 (297-8). (6)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주목받는 구조조정에 대한 투쟁은 금융세계화의 결과에 대한 투쟁이다. 중요한 것은 원인에 대한 투쟁, 금융세계화 자체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윤소영의 아포리아를 드러내는 식으로 엄밀한 서평을 써볼까 생각하다가, 경제수학도 젬병이고, 불어도 못하며, 마르크스의 가치법칙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내가, 베토벤과 PD 음악에 대한 윤소영의 말들을 뻘소리라고 생각하는 내가, 그걸 하려다 보면 너무 피곤하고 헛물만 가능성도 있고 해서, 그렇게 거창하게 나가기로 했다. [ 사실 윤소영의 절대지에 대한 추구는 나름대로(!) 존경하지만, 절대미에의 탐닉과, 절대지와 절대미를 결합시키고, 그것을 어떤 진짜 마르크스주의자의 자격 같은 것으로 특권화하려는 것은 미안하지만 뻘짓이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1강에서 나온 남한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1979년으로 소급하는 논의는 새로웠다. 일리 있다. 그런데 논의를 지배블럭으로부터 확장시켜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을 반신자유주의투쟁이라고 주장하려면 세밀한 역사서술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것은 윤소영이 그럴 마음도 없을 것이고, 그럴 능력도 될거라고 본다. 주장이 약빨이 먹히려면, 항쟁참여자들이 자신의 적을 뭐라고 규정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해서 신자유주의가 현실화된 것인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윤소영은 '협상된 이행'으로서의 문민화 과정을 이야기하지만, 신군부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본질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본다. 민주화라는 말은 나온다. 민주화에 대한 경시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으로 주류화되기 이전 전노협 시절의 남한 노동운동이 브라질이나 남아공 같은 사회운동노조주의라고 있다는 주장과도 닿아있. 그런데 브라질과 남아공의 사회운동노조주의에 대한 Gay Seidman 연구, Manufacturing Militance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지역운동과의 결합이라는 미시적 측면 뿐만 아니라, 전체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노동계급운동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것이었다. 남아공과 브라질의 경우는 노동운동이 민주화를 추동했던 반면, 87 7, 8, 9 투쟁은 6 민주항쟁이 갖고 권력 공백이라는 정치적 기회에서 터져나왔다는 점에서 남한의 노동운동은 민주화 운동의 추동자였다기 보다는 수혜자였다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 참조). 또 90년대 중반까지 전국연합의 존재는 바로 노동운동이 운동 내부에서 헤게모니를 확립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바로 사회운동노조주의를 (정치적 방향이 아니라, 서술개념으로서) 쉽게 8-90년대 남한에 적용할 없다는 이야기이다.

 

책을 통해서 역사동역학과 역사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인권의 정치 , 그동안은 말로만 듣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있었다. 구조주의적 사유에 취향이 없다. 그렇다. 이걸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구조와 주체의 양분(266-8)을 설정함으로써, 개인성과 특이성, 필연성과 우발성 끊임없는 사변적 이항대립의 늪에서 헤매다 정작 현실적 설명대상으로 돌아와서 현실적 관계들의 변화와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별로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설득하려면, 자체가 아니라 현실을 틀을 통해서 설명했을 , 얼마나 설명이 되는 지가 보여져야 한다. 윤소영이 후배들에게 기여하려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치법칙을 받아들여야 하고, 영어만 갖고는 되니까 불어도 하고, 경제수학도 잘해야 된다고 얘기하는 갖고는 안된다. ? 우리가 윤소영에게 기대하는 것은 불어 잘하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안의 부분으로서 남한 경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 비판을 원하는 것이다. 말미(330-335) 이전에 자신이 제시했던 종속심화-독점강화 명제에 대한 현재 생각을 밝히고 있는데, 자기비판과 종속심화를 설명하는 데에 존재하는 난점이 피력된다. 그가 문제들을 딛고 신자유주의의 전개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 이론적 문제를 해명하며 화려하게 복귀할 것을 기대해본다. [이왕이면 2012년 이전에...]  

 

윤소영 선생에 대해 거는 나의 기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책 곳곳에서 발리바르와 브뤼노프 등이 전개했던 노동에 대한 자본의 포섭에 대한 이론이 개진되며, 이것이 트론티나 네그리의 사회에 대한 자본의 포섭과 대비된다 (92, 201). [이 점에서 이는 이진경이 주장한 바 있는 '기계적 포섭'과도 대비될 수 있다.] 이 틀에 따르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라는 맑스주의적 가치론의 기본을 유지하면서도, 농민이나 (덤프트럭 운전사와 같은) 자영업자를 "자기착취 당하는 프롤레타리아"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은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점이다. [농민의 노동자성에 대한 이 주장은 내가 알기로는 한국에서 오래전 김준보 선생이 한 적이 있다고 얼핏 들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한 글인데, 며칠전 번역되어 나온 [이윤에 굶주린 자들](울력, 2006)에 실려 있는 르원틴의 "자본주의적 농업의 성숙: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농민"도 참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는 이론적, 현실적 파급력이 매우 큰 주제이다. 달리 말해, 광범위하면서도 심도있게 논쟁될 수 있고, 이론 영역을 넘어 정치 영역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질 수 있는 주제다. 제대로 한 번 파고들 필요가 있으며, 윤소영 선생의 진가가 발휘될 수 있는 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구조주의적 사유에서 구조와 주체의 양분은 피치못할 추상의 폭력이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의 폭력은 윤소영의 현실 이해에 그대로 재현된다.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사르트르가 옳고,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알튀세르가 옳다는 이러한분법적 현실 인식은 사르트르와 알튀세르의 모습 사이에서 열심히 투쟁하고, 나름 공부도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공부나 투쟁, 중에 하나 골라서 그것만 열심히 해라라는 말과 다름 없이 들린다. [그나저나 사르트르는 현장활동가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공부만 열심히 하는 자기 처지에 대한 정당화 의도가 엿보인. 사람들이 윤소영에게 이론외적으로 불만인 것은 그가 공부만 열심히 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인권의 정치 얘기하면서도 지극히 반정치적인 냉소만을 보이기 때문이다. 윤소영 선생이 그렇게 좋아하는 혁명의 비극적 숭고성은 베토벤 들으면서 눈물 흘리는 순간이나, 자유결합을 실천하는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봉기의 순간,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카이로스적 순간에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의 조직을 위해 노력하는 크로노스의 일상적 순간에 존재할 것이다. 거기에는 냉소가 아니라 열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민주의에 대한 거부가 정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운영 선생은 윤소영이 過識하다고 했단다. 윤소영 선생의 냉소는 어쩌면 자신의 과식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자기방어기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윤소영은 지적 차이를 결국에는 소멸되어야 것이라는 의미에서 노동과 자본 간의 대립과 같은 적대적 모순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설정해놓은 일반성 III, 그로스만적 전통(붕괴론) 복원과 관계되어 있다. 동시에 알튀세르적 의미에서의 이론적 실천의 특권화, 자기정당화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윤소영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리의 순간이라는 카이로스적 관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153, 344). 자본주의적 이행과 공산주의적 이행 간의 충돌이라는 이 세계관은 좀 다르긴 해도 월러스틴의 것과 유사하다. 어디 2012년을 한 번 지켜보자. 그리고 그 이후 윤소영 선생이 뭐라고 하는지도...

 

 

사족

 

  책은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책이다. 그런데 강의를 녹음한 것을 다시 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치고는 중구난방이라는 느낌이다. 지은이의 잘난척과 뒷談話는 재미없는 강의 들으면서 졸고 있는 학생들 분위기 환기 차원에서는 약빨이 먹혔을 몰라도, 그것을 활자로 접해야 하는 독자에게는 흐름을 끊는 것이다.부르디외와 라뒤리가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나, 박현채 선생이나 문익환 목사 같은 고인들도 PD 옳다고 생각했다는 등의 야부리를 듣자고 독자들이 윤소영의 책을 사보는 아니다.  강의 도중 번번히 나오는 과천연구실에서 나온 책광고들도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차라리 참고문헌들을 각주처리해서 쪽수까지 알려주는 지은이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강의녹취록이 아니라 다음번에는 좀더 제대로 , 이두가 아니라 한글로 쓰여진 제대로 책을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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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 92 밑에서 7 : 트론트 -> 트론티

 

 

궁금한

1.        자본생산성 하락의 법칙은 경험법칙인가, 정의법칙인가, 혹은 양자를 매개하는 어떤 것인가?

2.        일반성II (유물변증법) 원칙상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일반성 I III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논리와 역사의 결합을 위해 구사되는 유물변증법과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해 구사되는 유물변증법은 동일한 것인가? 만약 동일한 것이라면, 스피노자의 아포리아(대중의 공포) 상응할만한 마르크스의 아포리아도 동일한 방법으로 주목되는가? 혹시 난점과 공백이 마르크스의 아포리아인가?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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