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육식동물이 존재할까? 육식동물이착할 수 있을까?  

두 책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육식이란 무엇인가. 남의 생명을 빼앗아 그 살을 먹는 것 아닌가. 사냥이라 하건 살육이라 하건 남을 죽여 자신을 살리는 행위는 마찬가지다. 그런 육식동물에게 착함이란, 선이란 무엇일까.

 

두 책의 주인공은 각각 티라노사우르스와 늑대다. 티라노사우르스는 알에서 갓 깨어난 초식공룡인 안킬로사우르스와 조우하며 뜻하지 않게 아비노릇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매력은 아마도 이런 역발상에 있을 것이다. 육식공룡인 티라노사우르스가 자신의 먹이가 되어야 마땅한 어린 공룡의 아비 노릇을 하다니. 이 점은 늑대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늑대는 자신이 잡아먹어도 되는 먹이 목록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사정을 듣고는 잡아먹지 않는다. 그러다 그가 잡아먹은 것은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괴물)이다. 착하고 약한 동물은 잡아먹지 않고 나쁜 악당만 잡아먹는 이 선함이라니! 이렇듯 두 책의 주제는 약간 다르지만 상당한 유사성을 띠고 있다. 공룡 이야기에선 유아에 대한 보편적인 보호본능과 가족애를 다룬다면 늑대 이야기에선 공격성을 어디로 표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를 다룬다.

이런 주제가 육식이라는 주인공의 타고난 성격과  만나면서 작품은 활기와 흥미와 긴장을 일으킨다. 두 작품 다 역발상의 아이디어가 빛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새로운 공룡 이야기, 새로운 눅대 이야기가 탄생했다. 둘 다 재미있다.

 

그런데 두 책은 재미 이상의 것이 배면에 깔려 있다.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육식의 윤리 문제다. 육식동물에게 육식이란 옳고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타고난 숙명이고 생존의 문제이다. 그런 그들에게 육식의 조절, 선택, 억제가 가능할까. 아니, 왜 그래야 할까. 본능에 충실한 것이 윤리 판단 대상이 될 수 있나.

 

늑대에게 육식은 내면의 공격성처럼 보인다. 그 공격성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그 윤리를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알레고리 성격이 강하다. 사람들아, 공격성을 정의롭게 써라!

그러나 실은 육식이란 단지 공격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공격성은 육식동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초식동물에게도 있고, 심지어 식물에게도 있다. 그러므로 공격성이란 육식동물만의 내면의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공격성이란 공격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의 문제다. 다시 말해 권력의 문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늑대 이야기는 권력자에게 충고 또는 건의하는 것 같다.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그 힘으로 악당을 물리치라고. 그런데 악당을 물리친 뒤에 늑대는 누구를 공격해야 할까. 누구를 잡아먹어야 할까. 필요악으로 악당이 계속 등장해줘야 하나. 바로 이 지점이 이 작품이 드러내는 육식성 문제의 한계다. 육식성이란 개인의 윤리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자본을 보라. 윤리는 부차적인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자, 자본이건 정치권력이건, 그에게 약자를 보호하라는 명제는 나쁘지 않지만 문제 해결의 방편은 아니다. 권력자의 선의로 세계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므로,.

 

공룡 이야기는 육식의 공격성을 보편적인 사랑으로 순화시킨다. 비록 친부와 친자 사이는 아니지만 부자관계를 맺고 가족이 되면서 생겨난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무리 포악한 자라고 해도 보편적인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환기하고 그런 관계를 통해 육식의 폭력성을 지워버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데올로기적 허구다. 진실은 정반대다. 실제의 부모자식 간의 폭력성, 공격성도 허다하다. 그런데 억지 부자관게를 형성시켜 보편적인 사람에 호소를 한다? 가당치도 않은 그야말로 동화같은 이야기다. 다만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이 누구에게나 있고, 따라서 지금 보이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다는 아니라는 것, 그도 또한 사랑할 수 잇는 존재라는 점을 환기하는 것은 나쁘다 할 수 없겠다. 단지 그것의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묻자. 육식동물에게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육식동물은 착할 수 있을까.

다르게 묻자.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누구나 지극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모두가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아무도 누구도 잡아먹지 않는 세상은 가능한가. 적대 없는 세상이.

적어도 지금 이 세계는 그렇지 않다. 그럴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다. 나로서는 그렇다. 그래서 착한 육식동물 이야기는 동화다. 부분적 진실에 지나지 않는 것이 마치 보편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점에선 그 이데올로기를 경계할 필요도 있다. 

   

 여러가지 한계를 보면서도 나는 이 이야기들이 반갑다. 빛나는 아이디어는 물론이고 착한 육식에 대한 사유의 기회를 제공헤 줘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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