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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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온통 백색의 숲 속 연못이 놓여 있었다. 차를 세우고시동을 껐다. 도착했다.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그 연못이었다. 55년이 지난 뒤, 나는 다시 돌아왔다.
흰 수건처럼 펼쳐진 눈이 우리를 환영했다. 섬에 있는 나를발견한 하리에트에게 일종의 경외심이 느껴졌다. 하리에트는사신使臣이었다. 누구의 명령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오긴 했지만, 혹시 내가 하리에트를 부른 걸까? 오랜 세월 내내 나는 그녀가 어느 날엔가 돌아오리라고 기대한 걸까?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도착했다.

"오지 않은 게 아니랍니다. 딸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남자는 자기에게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언제나 알고 있지요. 어쨌든 당신은 돌아왔어요. 루이제가 기뻐하는군요. 내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사실뿐이라오. 루이제는 당신이 숲을 지나서 와주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어쩌면당신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동안 내내 이곳으로 오는 중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숲의 오솔길이나 도시에서와마찬가지로, 자기 안에서도 길을 잃기 쉬운 법이라오."

"말하지 마세요. 지금도 말고, 나중에도 말고, 아버지에게 뭔가 알릴 말이 있으면 내가 할 거예요. 물론 살면서 남자들도 만났지요. 하지만 그건 아버지 사람들이 아니라 내 사람들이에요.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을 너무 깊이 파고 들어가면 우정을 잃을 위험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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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고전의 세계 리커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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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들을 향해 밀은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용납될 수없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비판과 회의를 두려워하면 어떤진리라도 ‘헛된 독단적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 이것이《자유론》의 출발점이자 결론이다.


(다행히 옛날처럼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의 근거를 조금도 알지못하고, 극히 피상적으로 제기되는 비판에도 전혀 대응하지못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높은권력자가 어떤 생각을 한번 심어주고 나면,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무런 득이 되지 않고 해가 될 뿐이라고 여길 개연성이 높다. 이들은 자신의 영향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현명하고 사려 깊다 해도 기존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것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신교도 Protestant도 부인하지 못하듯이, 자신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자기 의견을 갖는 것만큼지성과 판단력 개발에 도움이 되고 따라서 인류의 지성과 판단력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 또 있을까? 지성을 단련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를 꼽으라면 단연 자기가 옳다고생각하는 것의 근거를 학습하는 것이다.

관점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충분히 연구하지 않고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지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도 잘 모를 수 있다. 자신의 주장 가운데 일부가 사실은 상대방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모른다. 그래서 서로 모순 관계에 있는것처럼 보이는 어떤 측면이 알고 보면 같은 내용을 담고 있고, 따라서 팽팽하게 대립하는 두 주장 가운데 왜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되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긴다.
저울의 추를 움직이듯 어떤 문제를 놓고 망설이는 사람의 생각을 확정해주는 진리, 정통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특정 판단을 내릴 때 따르게 되는 그런 진리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두 주 똑같이 귀를 기울이고, 각각의 가장 강력한 논거를 편견 없이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그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독창성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이를 당연하게생각한다. 사실 독창적이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독창성이 왜중요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독창성이 자기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이 그것을 안다면 독창성이 문제 되지도 않을 것이다. 독창성이 그들을 위해 하는 일 가운데 첫 번째로 중요한것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그도 독창성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누군가가 처음 시작하지않았으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은 모두 독창성이 뛰어난 사람들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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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이라는 책
알렉산다르 헤몬 지음, 이동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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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다 한들, 이제 우리는 여기(예로, 캐나다의) 우리와 거기(예로, 보스니아의) 우리로 분열한다. 여기 우리가여전히 현재의 우리를 보스니아에 머물러 있는 과거의 우리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거기 우리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먼저 어머니는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발견한 귀금속 상점에 들어가 한참을 에누리한 끝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금목걸이를 팔았다.
그러고 나서 돈을 나눠주셨는데, 당연히 아버지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동생과 나는 곧바로 일전에 둘러본 음반 가게로 가서 서로의돈을 모아 데이비드 보위의 〈로우Low) 앨범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샀다. 새로 산 보물과 함께 돌아온 우리에게 어머니는 가족끼리의저녁 산책에 동참하라고 했다. 마치 휴가를 즐기는 것처럼 온 가족이오스티아의 해안가를 따라 한가로이 거닐던 그날 저녁의 기억을 나는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부모님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손을 잡고, 아이들은 집안의 금붙이와 맞바꾼 젤라토를 핥아먹던 그 순간의 냄새와 소리와 영상이 고스란히 담긴 그날 저녁의 기억을, 하늘이 무너진 와중에도 헤몬 가족은 잠깐이나마 행복을 찾아 누리고 있었다.

나는 콜제비치 교수에 점점 집착하게 되었다. 그의 살상 기질을눈치챌 수도 있었을 최초의 순간이 언제인지 밝혀내기 위해 무진장애를 썼다.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 나의 서가가 타버린 자리에 남은 잿더미를 파헤치듯 그의 수업과 그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에밀리 디킨슨부터 다닐로 키슈까지, 프로스트부터 톨스토이까지, 즐겨읽었던 책들과 시집들을 안 읽은 상태로, 교수가 가르쳐준 독서법 또한 안 배운 상태로 되돌렸다. 나는 눈치챘어야 했고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꼼꼼히 읽기에 경도되어 어리석었던 나는 가장 존경하는 은사가 엄청난 범죄 모의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지못했다. 그러나 한번 일어난 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내가 누구라는 감각, 자아의 가장 심오한 정체성은 인간관계망에서의 내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고, 그 인간관계망의 물리적 필연의결과가 도시라는 구조물이었다. 반면, 시카고는 사람들을 한데 모으기 위함이 아니라 서로 안전거리를 두고 떨어져 살기 위해 만든 도시였다. 규모와 힘과 사생활 보호라는 욕구를 주요 치수로 하여 건축한 도시처럼 보였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도시는 자유와 고립의,
자립과 이기의, 프라이버시와 고독의 구분을 외면했다. 시카고 안에는 내 자아가 위치할 인간관계망이 없었다. 내 안에 존재하던 나의도시 사라예보는 포위와 파멸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나는 물리적실향과 형이상적 실향을 동시에 겪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데도 살지 않을 순 없었다. 나는 그저 시카고에서도 갖게 되길 바랐다. 사라예보에서 가졌던 내 영혼의 지형도를.

나는 희망을 빌어주는 사람들과 말하는 게 힘들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더더욱 힘이 들었다. 친절하게도 사람들은 도움이 되려 했고, 아내와 나는 그들의 이러니저러니 하는 소리를 싫은내색 없이 견뎠다. 그들은 그저 그런 얘기 말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고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 안에 들어가, 공허하고 거추장스러운 말들로 담을 쌓았다. 아내와 나로서는 말로 도울 방도를 찾지 않는 현명한 이들을 대할 때가 훨씬 더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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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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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 같은 것들이지. 개인의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데 이어찌 속된 무리들의 의견에 신경을 쓴단 말이오?」「우리가 다 합리적인 존재는 아니지요」 나는 웃었다.
「명성은 누가 만드오? 비평가, 문인, 주식 중개인, 여자들아니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을 보고감동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미묘하면서도 격렬한 감동을 말예요. 기분이 썩 좋지 않겠어요? 누구나 힘을 행사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의 혼을 움직여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일으킨다면, 그보다 더 멋진 힘의 행사가 어디 있겠습니까?」「멜로드라마 같은 소리」「그럼, 왜 그림이 잘 됐나 못 됐나 신경을 쓰시죠?」「난 신경 안 써요. 보이는 대로 그리고 싶을 뿐이지」
「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무인도에서도 글을 쓸 수 있을까하고요. 제가 쓴 글을 저밖에는 읽을 사람이 없는 게 확실하다면 말입니다.」

그의 영혼이 마치 뭔가를 보고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나도 때로 생각해 보았소.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외로운 섬, 그 섬의 아무도 모르는 골짜기에서 신비스러운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살아볼 수 없을까 하고, 거기에서는 내가 바라던 것을 찾을 수가 있을 것만 같아서

「난 과거를 생각지 않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지」

 나는 마부에게 행선지를 말해 주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시 묵묵히 길을 달렸다. 더크는 블란치가 병원에 실려갔던 그비극적인 날의 아침 이후로 스튜디오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그가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아서 나는 마음이 놓였다. 문간에서그와 헤어진 다음 홀가분한 기분으로 거리로 나왔다. 파리의 거디가 새삼 유쾌하게 느껴졌다.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을 바라보프라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날씨는 맑고 햇빛은 밝다. 한결 짜나는 스트로브와 그의즐기고 싶었다.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트로브와 그의 슬픔을 내 마음에서 털어내 버렸다. 삶을 즐기고 싶었다.

「갑판 청소를 하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누가 〈야, 저것 좀봐〉 하지 않겠소. 그래 고개를 들고 보니까 섬이 어렴풋이 보이더란 말이오. 그 순간 내가 평생 찾아다녔던 곳이 바로 이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소. 섬이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처음 오는 곳이 아닌 것 같았소. 지금도 어떨 때 이곳을 걷고 있으면죄다 눈에 익은 것 같아요. 틀림없이 내가 전에 여기에서 살았 던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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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사랑합니다 - 진리가 우리를 더 사랑하게 하고 더 하나 되게 한다
조영민 지음 / 좋은씨앗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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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존귀함은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언가에 기인합니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좋은 설교를 듣고 싶은 거라면 인터넷에 수천 수만 개의 설교가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싶은 거라면 검증된 NGO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거라면 취미와 수준이비슷한 동아리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왜 교회 안에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는 순간 우리의 영적 본능이 우리에게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가 우리에게 교회공동체에 들어가 사랑받고 사랑하기를 권면하며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진리 자체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관계로 나타나야합니다. 교회는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장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소유한 후에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게되었는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일이 더 많아졌는지 꼭 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 진리는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우리 가운데 혹시 공연을 관람하듯 예배드리는 분이 인습니까? 교회에서 입은 이런저런 상처 때문에 공동체에 기숙이 들어가고 못하고 예배만 드리는 분이 있습니까? 주일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나서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마지막 축도 시간에 얼른 예배당을 빠져나오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분이 있습니까?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건 예배도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만드신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

회의 표지 중 하나인 교제, 즉 사랑의 나눔이 빠진 곳에서드리는 예배로는 절대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없습니다. 교회는 말씀에 반응하여 내게 있는 것으로 사랑하는 곳입니다. 그 사랑의 일차 대상은 주님 안에 있는 다른 성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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