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일은 무언가 새롭고 획기적인 일을 하는 것이 이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시던 곳을 뒤이어 찾아가고, 예수님이나시던 가난한 자들을 뒤이어 만나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바로 그 말씀을 뒤이어 선포하고, 예수님이 행하시던 바로 그 일을 뒤이어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직분이다. 주님이 누군가에게 절반만 은혜를 베풀고 남겨 두신 나머지 일들을 마저 감당하며 마무리 짓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시지 않은 일에 과도한 충성과 관심을 기울이면, 그것은 자기 교만이 되거나 자기 자랑으로 쉽게 전락하고, 심지어 종교적 열심으로 교회를 망치기도 한다. 우리는 주님보다 영광스럽지 않고, 주님보다 연약하고, 주님보다 무지하다. 하지만 주님보다 무능력했던 베드로가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처럼 살아야 한다. 주님의 삶을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주님이 한 번도 가지 않으셨던 곳들을 찾아다니며 주님을 전했던 사도 바울처럼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과 부활은 완성하셨지만, 주님이 지상에서 행하시던 대부분의 일들은 미완성인 채 남겨 두셨다. 예수님이 얼마든지 혼자서 다 하실 수 있는데도 굳이 남겨 두신 일들을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아나니아가 받은 명령의 본질이다.
주님에게는 아나니아의 순종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전혀 없다. 주님은 사전에 양해를 구하거나, 아나니아의 경제, 문화, 사회, 심리적 상황과 형편이 어떤지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아나니아에게만 기대신 채 배수의 진을 치신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실 때,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냐고 그들의 상황과 형편을 먼저 물어보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이다. 주님을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는 온 세상과 자기 백성을 위해,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막무가내로 쏟아부어 주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는 폭군처럼 폭력적인 권세를 휘두르시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확신하신 모습이다. 이는 아나니아의 팔과 다리를 꺾어서라도 바울에게 끌고 가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의 주님 되심‘을 오직 아나니아에게 맡겨 버리시는 모습이다. 주님은 능히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심에도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셨던 것처럼, 주님으로서의 권위를 아나니아에게 맡겨 버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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