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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ㅣ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평점 :
"비가 오고 있다. 대기 중엔 습기. 젖은 풀 냄새.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빗소리. 시든 장미 꽃송이들을 잘라주었더니 핑크색과 크림색의 작은 꽃봉오리들이 다시 맺혔다. 밤사이 큰 비가 내리고 나면 새로운 날엔 새로운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 있겠지. 그건 또 얼마나 놀라운 아름다움일지.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크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담기에 내 글을 언제나 형편없이 느리다. 나는 매번 가까스로 헐떡이며 그 뒤를 쫓아갈 뿐." (50쪽).
☁️
코로나19에 감염되었던 지난 초봄. 반나절 만에 고열에서 벗어나고 입맛도 좋았지만, 기운은 없던 그 일주일. 내 방과 이어지는 베란다 창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는 일이 습관처럼 몸에 붙었었다.
그날도 고양이들과 다정스레 인사를 나누고 다소간 처진 몸을 창가에 데려다놓았다. 종일 구름 낀 하늘은 맑아질 기미가 없었고, 냉랭한 습기를 머금은 대기는 자꾸만 찬 바람을 몰고왔다. 난 고요히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버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노인처럼 자연의 움직임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나는 자연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오히려 내가 자연의 상위개념인 것처럼.
파도처럼 규칙적으로 밀려오던 바람이 돌연 멈추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단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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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종종 자연을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물건 쯤으로 여기지만, 실은 자연은 우리를 싣고 나르는 파도에 가깝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도 드넓은 바다라는 배경이 존재해야만 유의미한 것이니까.
체온이 떨어졌다는 걸 한참 뒤 깨달은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자연을 관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을 목격하는 존재일 뿐이라고.
인간은 우주의 작은 먼지.
이 비유는 이제 식상하지만, 이러한 관용적 표현이 있다는 건 그만큼 인간이 그 사실을 잘 잊기 때문이라 믿고 있다.
지구상의 인간을 다 모아도 저 거대한 자연 너머에선 보이지 않겠지만, 마지막까지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었다던 어느 철학자처럼 나도 먼지로서 이 자연에서 할 일을 해보기로 했다.
내게 그 일은 숭고함과는 거리가 먼 것들. 차가워진 몸으로 창 밖의 도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규칙적으로 바뀌는 신호등, 계절마다 변하는 나뭇잎의 모양, 꽃과 열매를 품은 나무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그건 너무나 일상적이고, 세상의 변화를 일으키기엔 작은 움직임처럼 보이지만, 이 무의미한 우주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기억하는 일만큼 삶의 의미를 건져올릴 수 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