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의 집 1
매슈 토머스 지음, 박찬원 옮김 / 시공사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의 어린 에일린은

가난한 아버지와 알코올중독 어머니와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자신이 꿈꾸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가난으로 대학대신 간호사가 된 에일린은 친구의 소개로 과학도인 에드와 결혼한다.

뉴욕 변두리에 자리를 잡고 남편은 대학교수가 되고 아이도 낳았다.

세 들어 살던 다세대건물을 매입해서 자기집이 생겼지만

여기는 에일린이 생각하는 진정한 자신의 집이 아니다.

에일린의 미래의 집은 이 변두리 이민자 동네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나 꿈꾸는 멋진 동네의 누구나 보면 부러워할만한 멋진 집을 꿈꾼다.

그러나 그녀의 재정현실은 너무 멀다.

그런 때에 남편에게 학장직 제안이 들어오고 에일린은 더 많은 월급을 원하지만

이전에 제약회사 연구직도 거절했던 에드는

이번에도 연구와 학생들 직접 가르치는 일의 중요성을 이유로 거절한다.

그녀는 자신의 꿈에 동참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 남편에게 실망한다.

이후 남편은 점점 자기만의 강박세계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사에 대해서도 격렬하게 반대하며 저항한다.

그러나 에일린은 홀로 집을 보러 다닌다.

집을 둘러볼수록 자신이 꿈꾸던 집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만

그녀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드디어 예산은 초과되지만 다소 무리하면 살 수 있는 집을 찾았다.

그 집은 크고 멋졌지만 침수피해를 입은 집으로

보수할 곳이 많은 집이었지만 그녀는 이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새로운 집에 적응할 새도 없이

멋진 집에 대한 집착을 불태우던 욕망아줌마 에일린의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남편 에드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것이다.

물에 잠겼던 그 집은 방치될 것이다.

그동안 남편의 이상행동과 그녀를 실망하게 했던 일들이

모두 질병에 의한 자기방어적인 행동들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남편은 신경전문이니 본인의 질병에 대해 일찍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숨기고 부정하고 아무도 몰래 오래토록 버티려했지만

에드는 진단 후 급속하게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에일린은 홀로 남편을 돌보는 한편 간호사일도 계속해나간다.

그러다 곧 힘에 부치는 일이 발생하고 아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철부지 아들은 아버지의 발병 후 대학으로 도망쳤는데

집에 돌아온 후에도 아들은 아버지를 방치해

아버지가 쓰러져 이가 부러졌음에도 제대로 돌볼 생각이 없다.

에일린은 쓸모없는 아들대신 도우미를 고용해서

오래도록 남편을 곁에서 돌보려고 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곁에서 남편을 데려갈까 그토록 두려워했던 요양원에 에드를 보내게 된다.

 

p.353:23 그녀는 면회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하는 일은 퇴근 후 남편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냥 그녀 하루의 일과였다. 그녀는 에드가 있어야 할 자리인 집 대신 그곳에 그들과 있지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음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이 그의 방을 미로 한가운데 놓아도 그녀는 매일 밤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녀는 그 결혼에서 떠나가는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그 결혼은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병원 사람들이 그를 그저 바보 늙은이로 보더라도 그녀가 생각하는 남편은 쇠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들에게 굴러떨어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지만 그녀는 굳이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들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가 횡설수설한다고, 장애인이라고, 멍청이라고 생각해도 그냥 내버려둘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늘 그들보다 잘 알테니까.

 

이 이야기는 1950년대부터 2000년에 이르는

한 여성의 가족사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몇 십 년에 걸친 그녀의 일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에드에게 놓여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줄은 놓았지만 에일린이 자신의 것임을 주장하던 에드의 무의식과

욕망아줌마 에일린의 집착도 내려놓게 만든 남편에 대한 이해의 모습은

위대한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매일같이 남편이 있던 요양원에 가는 에일린의 모습이 낯설지 않아

옆자리 환자가 전하던 이제 그만이라는 말이 부러웠다.

 

그에 비해 늦둥이 아들은 공부는 잘하지만

그것만 빼면 그야말로 찐따의 표본으로

감동도 깨달음도 없는 이도저도 아닌 짐짝 같은 캐릭터인데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작가가 30대의 젊은 남성이라는 것을 알고

소설을 읽으며 제일 이해하기 힘들었던 인물에 대해 다소 수긍이 갔다.

어린시절 존경했지만 아픈 아버지는 싫었던 이 아들은

아버지가 떠난 후 끊임없이 발병의 공포 속에 살게 되는데

어느 날 미래의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며 모든 회한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자식들이여, 버스 떠난 뒤에 손 흔들지 말자_-

 

p.487:24 그는 아버지가 그를 사랑했던 방식으로 아이를 사랑함으로써 아버지를 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 앞에서 약해져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무방비 상태가 되고 쓸모없어지고 측은해진다면, 기억을 잃고, 소변을 못 가리고, 집으로 오는 길을 잃게 된다면, 그럼 그렇게 되라고 하자. 아이가 그 상황을 잘 대응하지 못한다 해도 글쎄, 아이들이란 그런 것 아닐까. 아이들은 너무 자주 외출했고, 너무 늦게까지 밖에 있었고, 상처 주는 말을 했고, 해야 할 일을 잊었고,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세월이 오래 흐른 후에야 아이들은 그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