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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 예수 복음의 심장부를 찾아서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6년 7월
평점 :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The Prodigal God by Timothy Keller)
예수 복음의 심장부를 찾아서
흔히 ‘탕자 이야기’로 알고 있는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의 말씀을 풀어낸 책이다. 제목에서도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듯이 이 비유의 주인공은 ‘탕부 하나님’이시다.
먼저 prodigal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픈, 남김없이 다 써 버리는’의 뜻을 가진 단어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그야말로 ’탕부‘(蕩父),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무모한 은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요,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며, 이 책의 주제이다.
책은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죄’, ‘잃어버림’, ‘대속’, ‘희망’, ‘구원’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구성되어 있다.
<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 >
비유 속의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둘 다 아버지의 권위를 못마땅해 하며 벗어나려 했다. 둘 다 아버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려 했다. 둘 다 자신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줄 게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재물이라 믿는다.
나는 과연 맏아들(형)인가, 둘째 아들(동생)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끝임 없이 생각하게 되돌아보게 되었다. 먼저 둘째 아들이었던 나를 맞아주신 탕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 아버지의 사랑 안에 살아가면서 복음을 왜곡하며 살아가는 맏아들, 바래새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일생 살아가면서 형과 동생의 부류에서 오가면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약한 존재임을 자각하며 오늘도 매시간 살아가기를...
6년 전 읽었던 헨리 나우엔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생각났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통하여 작은 아들, 큰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시각으로 살펴본 기억이 있어 탕자의 시각과 생각에 머무는 것을 벗어나려고 했는데 이 책을 통해 좀더 바른 시각을 갖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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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에서 내가 만난 글들 >
그와 아버지를 갈라놓은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이력에 대한 교만이다. 그를 아버지의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게 막는 건 그의 악이 아니라 의다. (66쪽)
사실 경쟁적 비교야말로 형들이 자신의 비중을 확인하는 주된 방식이다. 인종차별과 계급주의는 형들이 벌이는 자력 구원 사업이 다르게 표현된 예에 불과하다 (89쪽)
수많은 교회가 험담과 싸움에 시달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수많은 사람이 외관상 착실하고 반듯하게 살다가 갑자가 심히 추악한 죄에 빠지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겉으로 사심이 없어 보이지만 그 밑에 엄청난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99쪽)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다시 교만, 정죄, 염려, 정서 불안, 기쁨 없음, 분노 등에 쉽게 지배당하게 될 것이다. (108쪽)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지 않으시는 한 우리는 절대로 그분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를 찾으시는 방식이 각기 판이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14쪽)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 (117쪽)
어떤 사람이 당신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역시 당신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명예 회복의 일환으로 사람들 앞에서 상대를 욕해 그의 평판을 짓밟으면 된다. 또 하나는 용서하는 것이다. 이는 상대를 비방하지 않으면서 누명을 풀어야 하는 더 어려운 길이다. 용서란 가해자에게는 값없고 무조건적이지만 당신 쪽에서는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 (123-124쪽)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둘째 아들과 같다. 다 유랑자로서 늘 집을 그리워한다. 늘 떠돌이일 뿐 결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실제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건물은 도중에 묵어가는 여인숙일 뿐 집은 아니다. 집은 자꾸만 저만치 멀어져 간다. (139쪽)
우리 대부분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려는 열의가 너무 과하거나 또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아버지의 임재에 들어가게 해 주시는 것만은 분명하다. (157쪽)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은 이 물질세계의 고난과 압제를 심히 미워하셔서 기꺼이 그 속에 들어가 그것과 싸우셨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기독교는 결코 인민의 아편이 아니라 오히려 저신이 들게 하는 명약이다. (162쪽)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그것이 우리의 생활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해결책은 지금부터 힘써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믿지 못했다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174쪽)
잔치는 본질상 공동체적이다. (중략)
‘나는 영적이지만 종교는 싫다’라든가 ‘나는 예수님은 좋은데 기독교는 싫다’라는 흔한 항변의 배후에 대개 그런 의미가 깔려 있다. 많은 구도자가 교회에 대한 나쁜 경험 때문에 교회를 더 상대할 마음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이 있으나 자신이 조직의 일원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 (176쪽)
일단의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반드시 신자들의 가족에 속해야만 한다. (176쪽)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을 더 잘 알아 가고’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여 사랑과 책임의 견고한 관계를 이루어야만 한다. 예수님을 본받고 섬기고 사랑하려 애쓰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속할 때에만 당신은 그분을 알아 가고, 닮아 갈 수 있다. (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