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의 인문학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국어교육과 교수님이 쓰신 책인데, 좋더라.

마흔이 넘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걸까?

 

 

 

 

<모든 순간의 인문학>

01. 사랑이 사유로 반짝이는 순간

02. 나에게서 낯선 행복을 발견하는 순간

03. 고독이 명랑해지는 순간

04. 상처가 이야기로 피어나는 순간

05. 우리가 기꺼이 환대할 순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인문학을 앓는다

.... 그러므로 인문학은 '앓는' 것이 될 수 있다. 앓고 나면 우리는 한층 더 성숙해진다.

앓는다는 건 단지 고통의 차원이 아니다. 그 앓는 시간을 지나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더 깊고 투명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지혜와 지식이 있는 것은 항상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맹자의 말씀도,

"'아름다움'의 원래 표기는 '앓음다움'이었다"는 소설가 박상륭의 설명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p.6 - 왜 인문학을 앓는다고 할까)

 

지적이면서 감성적인 남녀가 만나 대화를 나눌 때 생기는 인문학적 감성의 시너지 효과는 실로 대단하다.

둘 사이에는 지적, 감성적 긴장 뿐만 아니라 오묘한 성적 긴장까지 가세되어 더욱 매혹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 풍경은 당사자들의 내면의 풍경이다. 제삼자들은 그들의 모습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만약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기라고 한다면

그 지적, 감상적 과잉에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요한 것은 내면풍경.

둘이 연인이면 더 좋겠지만 그런 행운을 가진 이는 퍽 드물다.

간헐적이라도, 일회적이라도, 그런 만남과 대화를 가져본 경험이 있다면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후유증에 대해서 잘 알 것이다.

그것은 마치 흠뻑 사랑해보지도 못하고 헤어진 연인을 생각할 때와 비슷해서, 꼭 물을 들이킬 필요가 없을 정도의 애매한 갈증을 남긴다.

그 애매한 갈증이 인문학에 더 가까이 가게 함은 물론이다. (.p.8 - 인문학 딜레탕트가 되자)





 

남자들이 깜짝 놀랄만한 시

... 바람난 여자가 진실하기까지 하다면 그녀는 정말 팜 파탈이 될 수 밖에 없다.

바람난 여자가, 자신은 바람이 나지 않았다고 오직 너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추한가?

가장 추한 것은 사악한 것도 아니고 포악하거나 잔인하거나 잔학한 것도 아니고 비열한 것이다.

바람난 여자가 비열할 때 가장 추하고, 바람난 여자가 진실할 때 가장 위험하다. (p.91)







착한 여자, 존재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자

... 착한 여자와 착한 남자만이 진짜의 것을 느끼고 향유한다.

바디우의 말대로 '진리'를 만들 수 있고, 크리스테바의 말대로 '실물'을 느낄 수 있고, 라캉이 말한 욕망 이상의 욕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결국 착한 사람이란 상징이나 기호, 이미지가 아닌 실재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물과 실재를 수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할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고 할 때 너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의 환각이 아니라 실감으로 만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p.113)

 

 

 

 

 

헤어진 애인에게 이메일이 온다면

... 헤어진 애인은 안 만나는 것이 낫다.

만약 지금 다른 사람과 연애 중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랑은 신뢰 위에서만 강하게 지탱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신뢰,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기 사랑에 대한 신뢰, 그것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자신의 사랑을 고귀하고 일생일대의 절대적인 사건으로 맺음 짓고 싶다면 헤어진 애인과의 가벼운 촌극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또한 헤어진 애인에 대한 예의이기도 할 것이다. (p.172)

 

 

 

 

 

외롭고 선량한 사람들

나 말곤 다 남이다. 간혹 나 자신도 남처럼 느껴진다.

내가 나를 어찌 할 수 없다. 그것이 '타자'다.

남도 타자고, 내가 모르는 나 자신의 일부도 타자다.

이 중에서도 정말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떤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에게 유언, 무언으로 명령을 내리면 그/그녀를 '대타자'라고 한다.

신은 대타자다. 그리고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아버지도 대타자다.

그리고 나와 어떻게 해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내가 결코 동일시할 수 없는 존재를 ' 절대적 타자'라고 한다.

절대적 타자는 신비하고 비유적이다.

연인이 절대적 타자가 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연인은 그렇지 않은가. 신비하고 모호하고 언제나 나를 햇갈리게 한다.

타자들이 모인 세상은 삭막하거나 외롭거나 난해하거나 두려울 것 같지만, 또 그 때문에 재밌고 모험심도 생기고 예상치도 않은 황홀한 사건도 일어난다. (p.161)

 

'타자' 하면 떠오르는 철학자가 들뢰즈와 레비나스다.

둘은 타자에 대한 응대 혹은 환대라는 윤리적 철학을 정립했다.

들뢰즈는 타자란 각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조건이자 환경이라고 했고,

레비나스는 타자와 진정으로 만나는 일을 '얼굴의 현현'이라고 하면서 인간은 그 타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들뢰즈나 레비나스는 '타자는 지옥이다'고 선언한 샤르트르와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것이다.

타자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며, 살아감의 매혹이다. (p.165)

 

 

 

 

 

엄마, 나를 부탁해

 가족에게도 공동의 트라우마란 게 있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를 서로 치유해주고 쓰다듬어주는 가족은 좋은 가족이다.

모든 가족이 다 그렇지 않냐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우리 주변의 많은 가족들이 그 공동의 트라우마를 모른척한다.

아예 그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가족도 있다.

문제는 가족 중 한 사람은 트라우마를 치유해주고 치유하고 싶어 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트라우마를 모른척하려 하거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상대를 거부함으로써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경우다.

트라우마를 모른척 하는 것,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은 '헹복한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행복한 가족 이데올로기가 행복을 막는 것이다. (p.209)

 

 

 

 

 

건강함이란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

'말들'은 죽음하고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중에게 노출된 정치인, 연예인, 사업가 등을 쉽게 비난하고 평가한다.

언론이나 저널리스트, 대학교수, 비평가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현자나 판관인 양 행세한다.

그것이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논리가 '사실'은 아니며,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들의 결합은 왜곡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그것이 소위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진실을 밝히는 태도나 행동이 윤리적이지 않을 경우 그 진실은 진실의 가중치를 가질 수 없다. (p.227)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니체의 명언 중 명언은 '결혼은 위대한 대화'라는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런 말이 나온다.

"결혼은 긴 대화다. 결혼하기 전에 자문해보라, 나는 이 여자/남자와 늙어서도 여전히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까?"

늘 같은 대화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화는 새로워야 하고, 새로운 대화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관계에서 나온다.

부부, 그것은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할 관계이다.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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