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종말은 투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위래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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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 같은 노인네들은 노스트라다무스, Y2K, 마야 달력 등 각종 지구 종말에 대한 공포스러운 예언을 들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사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예측들이어서 그 때마다 사람들은 "그거 들었어? x x일에 지구가 멸망한대" 라고 하면서도 속으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는 생각은 떨쳐버리지 못 했다. 지구의 종말이 오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흥미 위주의 토론은 있어도 실제로 종말을 대비하기 위해 그 동안 못했던 것을 한다거나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더 보내려고 한다거나 하는 실질적인 대비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종말이 확정되면 그 때의 우리 사화의 풍경은 어떨까?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우리 동네, 서로아는 친구와 이웃이 같이 숨 쉬는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공기는 어떻게 바뀔까? 이 호기심에 대한 해답으로 여섯 명의 작가가 모여 '종말 앤솔러지'를 집필한 결과물이 [인류의 종말은 투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다. 어떤 단편은 종말의 원인을 깊이 설명하는데 주력하고 어떤 편은 한없이 장면을 확대하여 종말을 앞둔 지구상의 단 몇 명의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마지막 며칠을 조명하기도 한다. 신기하게 각 작가가 전경, 혹은 최소한 배경으로라도 묘사하는 종말 직전의 사회상이 전부 다르다. 순순히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도 있고, 온 힘을 다해 불쾌감을 표현하는 사회도 있었고, 또는 종말 직전에는 너무나 아수라장이 되어 종말에 대해 생각 할 겨를도 없는 사회도 보였다.

 

📖 죽이는 것이 더 낫다 :: 위래

가장 상상력이 돋보이는 단편이면서 가장 읽으며, 읽고 난 후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편이었다. 내용 때문이 아니다. 인류의 종말을 야기시키는 '책 한 권' 형태의 '신비'에 대한 연구 보고서 형식을 띄고 있는데, 수상할 만큼 SCP 세계관의 보고서 형식과 닮아 있었다. 물론 '기이한 물건, 혹은 대상', 그리고 그에 대해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내용은 상상력이 있는 작가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지만 전 세계의 작가들이 모여 구축한 방대한 SCP 세계관의 입지가 너무 견고해 자꾸 이 단편에 대한 비교와 부정적인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객관적으로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읽기만 해도 살육 기계가 되어버리는 책과 그 책이 확산되며 전 인류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얼마 전 수도권 각지의 '묻지마 칼부림' 사건들을 떠올리니 이 단편의 내용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아 진지하게 이 단편에 묘사된 종류의 종말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 침착한 종말 :: 유권조

AI가 인류를 지배하는 수준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UN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의회를 구성하는 안드로이드의 집단적 연산으로 인위적으로 세계를 멸망시키는 것이 옳다는 결론이 나와 종말이 확정된다는 이야기다. 사실 지구와 자연을 위해서 인구수는 줄어야 하는게 맞지만 이를 오만한 인간에게 자기들의 운명을 다른 존재가 결정했다는 식으로 통보하니 전 세계적으로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 캐시 - 이아람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주제와 목적지와 과정이 명백한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순문학과 예술적 글쓰기는 아직 내겐 어려웠다. 미래를 예견할 있는 주인공과 그녀의 표준에서 한참 벗어난 가족의 가족관계라는 속박에서 그녀가 벗어나는 이야기다. 단편 중간에 갑자기 시점이 '2인칭' 시점으로 전환되는데 상대방이 명확하지 않다. '친구' 라고는 하지만 이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고 흐릿한 안개 너머로만 보이는 '친구' 행동 묘사만 있는 것으로 보아 간신히 시야의 초점을 붙들고 종말 이후의 세계를 힘겹게 죽지 못해 살아가는 주인공의 시점을 두서없이 보여주는 의미가 아니었나 싶었다.

 

📖 시네필()의 마지막 하루 :: 김도연

지구가 한 달 후에 멸망하면 넌 마지막에 뭘 할거야?” 에 대해 작가는 이 단편을 답으로 내놓았다. 영화광을 뜻하는 cinephile 들은 종말을 어떻게 맞을까? 외계인들로 인해 종말이 예견된 어느 시점에서 한국 사회는 차분히 순차적으로 종말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미리 안락사나 자살을 조용히 하는 사람이 있는 한 편, 기업은 곳간을 열어 마지막 순간까지 인류가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것을 원 없이 하도록 해 준다. 종말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순간, 영화광 주인공 세 명은 모여서 그 중 한 명이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었던 영화를 찾아 그 영화를 봐야만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뒤지고 다닌다. 나는 종말이 몇 시간 앞으로 다가온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발견된 노부부의 유골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쥐고 그의 존재를 오롯이 느끼는데 집중하고 있을까 아니면 캡사이신 가루에 밥을 비벼 먹고 차라리 종말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빌고 있을까?

 

📖 멸망을 향하여

단편은 흥미롭게도 '외부의 힘에 의해 우리가 아는 세계가 멸망' 하는 것이 아닌 '우리 인류의 힘으로 우리에게 의존하는 세계가 멸망하는' 이야기다. 게임 속의 세계에서 게임 캐릭터들과 '주인공' 이라 불리는 플레이어의 상호작용을 그리는 것과 동시에 '서버 종료'라는 형태의 세계 멸망을 맞이하는 그들의 태도도 보여준다. 서버 종료때까지 게임을 적도 없거니와 인기가 떨어진 게임이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것에 대해 별로 생각을 적이 없는데 사고 능력이 있는 고도화된 AI 등장하는 세계에서는 그들도 '서버종료' 인류의 멸망처럼 받아들이고, 그런 서버 종료를 행하는 인간측의 플레이어들은 단편에서처럼 캐릭터들을 보며 아쉬움을 느낄까?

 

📖 가위바위보 세이브 어스

단편의 주인공은 초능력이 있다. , 그게 '가위바위보에서 절대 지지 않는' 어쩌면 하찮아 보이는 초능력이라는 것이 반전이다. 그런데 이런 아닌 같은 능력이 세계에서 가장 값진 능력이 되는 순간이 온다.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에게 가위바위보 승부를 걸어왔고 대결에서 진다는 것은 멸망을 의미한다. 어처구니 없이 유머러스 단편은 앤솔러지를 마무리하기 없이 완벽하고 깔끔한 디저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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