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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ㅣ 창비시선 477
이설야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평점 :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설야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집은 폭력의 순간을 기록하여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그 순간을 엿보거나, 당사자가 되는 체험을 제공한다. <공중>에서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전화를 걸며 오열하는 여자를 바라보고 <심지음악감상실>에서는 상점의 좁은 계단 아래에서 폭력의 순간을 엿보고 있는 상황으로 이동한다. <도마뱀의 고백>에서는 피해자 모임의 일원이 된듯한 기분이 든다. 이들과 비밀 하나씩을 엿듣고 있는 체험과 더불어 나 또한 말하고 싶은 욕망을 준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비밀을 고백하면 폭력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심지음악감상실>은 이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였다. '입속으로만 미친 개자식아! 그만해! 외치며 덜덜덜 떨고' 있는 화자는 나와 동일시하게 된다. 음악감상실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은 음악으로 비유된다. '세상의 모든 음을 다 삼켜버리고 있었다 음이 음을 버리고 있었다' 폭력에 멜로디와 리듬감이 부여되는 상상을 하게 되어 더욱 참혹하고 끔찍하게 다가온다. '달력을 너무 많이 삼킨 여자들'은 시간이 흘러도 참는, 폭력에 익숙해진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심지음악감상실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폭력에서 시작하여 지금도 폭력을 당하고 있는 무수한 여자아이들을 환기시키며 시는 마무리된다.
<심지음악감상실>에서 음악이 간접적으로 등장한다면 <가족 모임>에서는 음악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은 가족처럼 보인다. 그러다 언성이 높아지고 삿대질을 하며 소음이 발생한다. 너덜너덜한 말을 '크레셴도! 크레셴도!' 주고받고 나는 '데크레셴도, 데크레션도' 상태로 이 상황을 숨죽여 지켜본다. 이들이 흩어지는 모습은 '스타카토! 스타카토!'로 표현된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시는 음악을 활용하여 다툼과 폭력의 순간이 유쾌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 그들은 등을 보이며 나갔다 가족처럼'이라는 마지막 연은 씁쓸하게 다가온다. 가족이라면 상처를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싶다.
<감열지>에서 생각을 분리배출한다는 발상과 <증상들>에서 '공중은 한숨을 걸어놓기 좋은 장소', '한 숨이 한 숨에게 전염된다'며 코로나 시대에 전염되는 우울감을 표현한 부분들이 독특하고 신선했다. <상자>에서 나를 상자 안에 구겨 넣어 상자만큼만 기쁘고 슬프기로 하는 모습은 정량만큼 감정을 느낀다면 힘들지 않을 텐데, 기복이 없을 텐데. 감정의 과잉이 인간을 괴롭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라스틱 아일랜드>를 읽을 땐 환경에 관한 시는 처음 접해 새로웠다. 후반부 행갈이를 하는 부분은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에는 숨, 눈송이처럼 가볍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오브제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비유는 이설야 시인이 주목하고자 하는 폭력과 착취가 우리 사회 곳곳에 공기처럼 만연하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