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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벽 - 상 ㅣ 민들레 왕조 연대기
켄 리우 지음, 황성연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12월
평점 :
민들레 왕조 연대기 2부 <폭풍의
벽>은 갓 만들어진 신생 민들레 왕조의 운명을 그린 책입니다. 1부
<제왕의 위엄>이 초한지를 따라갔다면, 이번 작품은 사기 고조 본기 후반과 여태후 본기를 모티브로 쓴 것 같습니다.
전작에서 주인공 쿠니 가루는 혼란스럽던 자나 제국을 허물어뜨리고 민들레 왕조를 세웠습니다. 황제가
된 쿠니 가루는 자신이 죽은 후 민들레 왕조가 자나 제국처럼 무너질까 걱정합니다.
켄 리우의 민들레 왕조 연대기는 이상합니다. 고유명사만 바꾸었지 중국
한나라의 역사를 빼다 박았습니다. 특히 1편 <제왕의 위엄>의 원전은 영원한 베스트셀러 초한지입니다. <종이 호랑이> 같은 작품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켄 리우는 맨바닥에서 서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있는 역사를 토대로 평행한 이야기를 써내려갈까요?
중국인으로서 중국 역사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민들레
왕조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주로 다루는 진나라
말에서 한나라 초기 시대를 본땄습니다. 사기는 2천년을 내려온
중국 최고의 역사서입니다. 기원전 100년, 한반도에 삼국이 생기기도 전에 쓰인 책이 지금까지 내려오니 대단하지요. 그럼에도
사기는 고고학적 증거로 정확성을 인정받았고,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민들레 왕조 연대기는 영어로 쓰인 책입니다. 작가는 아시아인보다는
서양 독자를 염두하고 썼을 것 같습니다. 고대의 역사는 로마밖에 모를 서양인이라면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고 부러울만큼 재미있게 읽겠지요.
그러나 실제 역사만으로는 책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중국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도 민들레 왕조에 나오는 수많은 고유명사에 아찔해집니다. 여기에 켄 리우 스스로 명령한
‘실크펑크’ 배경이 덧입혀져 다라 제도는 한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됩니다. 면류관을 쓴 황제 위로 비행선이 오가는 곳입니다.
이런 장치는 중국 역사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역사를 낯설게 보게 합니다. 보통의
한국인은 유방을 사람 운이 좋아 황제가 된 한량이라 생각합니다. 초한지를 다시 읽는다고 달라지지 않을
인상이 다라 제국의 쿠니 가루를 보고서는 바뀔 수 있습니다. 쿠니 가루는 유방이 아니지만 (민들레 왕조는 역사를 그대로 쓰지 않았습니다) 쿠니 가루가 처한 위기와
그의 선택은 유방의 처지와 비슷하니까요.
낯설게 보기 효과는 2부 <폭풍의
벽>에 와서 극대화합니다. 작가는 유가나 도가, 법가 같은 제자백가의 학풍을 도덕주의나 유형주의처럼 바꾸어 소개합니다. 주인공
조미는 제자백가(의 탈을 쓴 소피스트같긴 합니다)의 토론을
듣고 스스로 판단합니다. 동양 사상에 익숙한 독자는 조미의 사고를 따라가다가 한참 지나고서야 스스로
알던 역사적 상식에 비추어 이야기를 지켜보게 됩니다.
<폭풍의 벽>은
<제왕의 위엄>에 비해 결과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제왕의 위엄의 주인공은 쿠니 가루와 마타진두, 우리가 모두 아는
유방과 항우였지만, <폭풍의 벽>은 저자가 창작한
인물 조미 키도수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습니다. 역사에 없던 인물을 주연으로 가져오며 마침내 민들레 왕조가
한의 역사에서 벗어날지, 조미 또한 거대한 흐름의 일부로 남을지 궁금해집니다. 하권을 아직 읽지 않은 상황에서 후자의 결말을 예상합니다. 여후는
중국 역사에서 악녀의 대명사로 유방을 도와 한을 세운 공신들을 대거 숙청했습니다. 조미의 눈을 통해
한이 맺힌 채 죽는 영웅과 수천 년을 살아남을 민들레 왕조의 역사를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쓴 서평입니다.